정욱은 호텔 창문의 커튼을 모두 젖힌 뒤 그 창턱에 밤새도록 만든 진흙 작품 일곱을 한 줄로 늘어놓고서 소파에 앉아 바라보았다. 처음에 만든 셋은 앞면만 있는 것이고, 그 다음 셋은 뒷면만 있는 것. 그래서 모두 제대로 된 방향이 보이도록 늘어놓았다. 반면에 마지막 것은 앞뒤 다 만든 것이기에 비스듬히 올려놓았다. 옆면을 통해 뒷면까지 상상할 수 있도록.
새벽 5시가 다 되었다. 어젯밤 늦게부터 오늘 새벽까지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작품만 만들었다.
그러나 졸리지는 않았다.
정욱은 그렇게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면 새벽빛이 창 너머에서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벌써 여명은 비치고 있는 듯했다.
정욱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신기했다. 밤새도록 진흙 덩이로 일곱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엽서에 그려넣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성취감이라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성취감은커녕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상실감 같은 것이 가슴 저 밑바닥에 흐르는 것 같았다. 정욱 자신의 마음과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게다가 밤새도록 피까지 많이 쏟았다. 지금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밤을 새워서가 아니라 피를 쏟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가슴속도 울렁거리고 아프다. 아마도 곧 또다시 피를 쏟게 될 것 같았다.
창밖으로 희미하지만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날은 갑자기 밝아올 것이다.
정욱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입은 옷 위에 더는 걸치지 않은 채 엽서 일곱 장만 손에 들고서 호텔 방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정욱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오르려 한다. 참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프런트 카운터로 막 한 직원이 나와서 선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다가 정욱을 돌아보더니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짓는다.
“안녕하세요.”
한국말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역시 한국말.
대한민국 참 대단한 나라다. 이 먼 나라에서까지 알아주니까.
정욱은 프런트 직원에게 엽서 일곱 장을 내밀었다. 10달러 지폐와 함께.
직원이 다시 말을 한다.
“감사합니다.”
발음이 정확하다. 얼굴만 안 보았으면 한국의 어느 관광지로 알았을 것이다.
정욱은 입을 열면 무엇인가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입을 꼭 다문 채 미소만 짓고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현관문을 나섰다. 바로 앞은 모래밭이다. 약간의 황톳빛이 도는 모래밭은 새벽빛에 좀더 진해진 듯했다.
정욱은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모래밭으로 들어섰다. 신고 나온 운동화를 벗었다. 운동화를 그대로 놔둔 채 앞으로 걸어갔다. 발바닥과 발가락에 닿는 모래의 감촉이 좋았다. 시원하고 폭신한 느낌.
갑자기 가슴 속이 폭발하려 한다.
참았다. 그 대신 걸음을 빨리했다. 숨이 가쁘다. 아까부터 그랬다. 그러나 더 가빠진 것이다.
정욱은 달리듯 했다.
빨리 가자. 어서!
바닷물이 밀려왔다 밀려갔다 한다.
조금만 더!
숨이 더욱 가빠졌다.
참자. 조금 더!
드디어 바닷물. 한 발 담갔다. 서늘했다. 또 한 발. 역시 서늘했다. 그러나 머뭇거릴 수 없다.
첨벙첨벙. 바다에 뛰어들 듯 마구 뛰어갔다.
바닷물이 무릎까지 올라온다.
더는 참지 못하고 정욱은 허리를 굽히고 입을 벌렸다. 마구 쏟아진다. 검붉은 피가. 마치 끈적이는 붉은 물감 같았다. 정욱은 피를 계속 쏟아냈다.
잠시 뒤 피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곧 물결 따라 퍼져가리라.
정욱은 허리를 펴서 앞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명확하게 보인다. 사위는 이미 훤하게 밝아 있었다. 그런데 해는 보이지 않는다. 바다 밑에서 올라오는 붉은 태양이.
아, 그렇지. 여기는 서쪽이다, 어제 저녁에 지는 해의 크고 둥그런 태양을 실컷 즐겼었다. 그러니 새벽에 또다시 그 장엄함을 볼 권리는 없지. 오늘 저녁 이 바다는 어제처럼 또다시 붉게 물들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면 좋다.
내가 붉게 물들여 주마. 일출과 같이 대서양 바다를 붉게 물들이리라. 도희가 그리려 한 대서양을 붉디붉게. 가능하면 시뻘겋게.
정욱은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바닷물이 배 위쪽까지 올라온다. 거기에 너울이 쳐서 가슴께까지 물방울이 튀는 것이다.
정욱은 또다시 토했다. 일출과 같은 뜨겁고 검붉은 피를 또다시 쏟았다. 피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가슴속이 아팠다. 어지러웠다. 그래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
정욱은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또다시 한 발.
입에서는 계속 피가 나오고 있었다.
눈을 살짝 들고 앞쪽으로 향하니 저 멀리에서 도희가 보이는 듯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