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엽서

by Rudolf

제3막 | 정욱이 도희에게




열 번째 엽서


정욱은 다시 진흙 한 덩이를 떼어냈다.

기침이 나왔다. 손등으로 가렸는데 기침을 하고서 보니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정욱은 화장실에 가서 세면대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피는 나오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더 이상 피는 나오지 않았다.

정욱은 물로 입을 헹구고 손을 씻은 다음 다시 방으로 나왔다.

그리고 진흙을 손에 잡고 또다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또다시 생각은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도희와 함께 갔었던 태안반도 아래의 꽃지해수욕장.

밤늦게 돌아오기로 하고 렌터카로 아침 일찍 떠났는데도 안면도로 들어가는 입구는 몹시 붐볐다. 1차선 도로에서 서다 가다를 반복하며 기다시피 간신히 안면대교를 지나 섬으로 들어갔다. 섬이라고 해서 육지에서 좀 떨어진 줄 알았더니, 썰물 때면 좀 과장해서 말하면 발에 물 하나 안 묻히고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육지와 섬이 가까이 붙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한번 와봤었는데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또 그동안 대한민국 어느 곳이든 많이 변했기 때문에 그 기억이란 것 자체가 이제는 별 의미가 없다.

섬 안에 들어가서 지도 앱을 보며 운전했는데도 꽃지해수욕장을 찾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여러 번 이 골목 저 골목 들어갔다 나왔다 하다 보니 어쩌다 주차장이라는 곳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다른 차들이 모두 점령한 탓에 그 옆을 주욱 지나 올라갔다. 해송이 뒤덮고 있는 사잇길 양쪽으로 캠핑장이 있었는데, 그 위로 한옆으로 차들을 주욱 세워놓은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서야 겨우 차 한 대 댈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기계 쪽에는 서툰 탓에 주차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기계는 물론이고 공간지각력도 좀 모자라는 것 같았다. 그런 머리로 조각을 전공하겠다고 나섰으니 고생에 고생을 할 수밖에.

아무튼 도희의 핀잔을 잔뜩 들은 끝에 차를 세우긴 했다.

“신기해. 공간능력이 그렇게 없으면서 어떻게 조각을 하겠다는 거야?”

“그래서 고생만 하잖아. 아무래도 전공 잘못 선택한 것 같다. 회화로 바꿔볼까?”

“회화는 쉬운 줄 알아? 그런 머리로는 그림도 제대로 못 그려. 어떻게 미대 들어왔대?”

“뒷문으로 들어왔다, 왜?”

“자랑이다.”

아무튼 정욱은 도희에게 늘 핀잔만 들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떻게 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도희가 하는 일이나 말은 죄다 옳았고 정욱은 늘 틀렸던 것이다.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길을 달릴 때도 그렇다. 지도 앱을 보고 가는데도 도희가 다른 길로 가자고 그러면 그 길이 뚫려 있고, 정욱 고집대로 가면 틀림없이 고생하는 것이다. 처음 가는 음식점에서도 정욱이 시키면 꽝이고, 도희가 고르면 광이 된단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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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정욱은 차를 세워놓고도 투덜거렸다. 유명한 해수욕장이라고 해서 왔는데 해송만 잔뜩 있고, 나무들 사이로 바다만 조금 내다보일 뿐이었다.

“뭐 유명하다고 해서 왔는데, 입구에서부터 고생하더니 별 것 아니잖아. 해송 숲이나 좋다고 하지 무슨 해수욕장을 그렇게 요란하게 선전해 놨어. 그냥 삼림욕 같은 거나 하라고 하지.”

“투덜 그만. 일단 저리로 넘어가 봐. 그러면 달라질 거야. 뭔가가 있으니까 유명하겠지.”

정욱은 도희에게 이끌려 비스듬한 둔덕을 너머 해송 숲을 벗어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우와―!”

그곳은 완전 별천지였던 것이다. 마치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신천지를 발견한 것처럼.

양쪽으로 저 멀리까지 퍼져 있는 드넓은 백사장과 눈앞에 푸르게 펼쳐진 시퍼런 바다. 오른쪽으로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작은 섬들 몇몇이 줄지어 떠 있고, 왼쪽으로는 육지가 마치 방파제처럼 저 멀리까지 길게 뻗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양쪽 한가운데로 한없이 멀리까지 이어져 있는 바다. 마치 홍길동이 도착한 율도국(栗島國), 밤섬나라 해안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속세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 이상향. 홍길동의 고향이 충청도이고, 그가 배를 타고 중국 남경으로 가다가 율도국을 발견했으니 혹 풍향이 바뀌어 잘못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그 꽃지해수욕장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럴 때는 사진보다도 저 광경을 옆으로 길쭉한 화폭에 멋들어지게 그림으로 잡아놓는 것이 훨씬 운치가 있을 텐데.

이런 생각으로 도희를 돌아다보았더니 그녀는 벌써 손으로 허공에다 옆으로 기다란 네모를 그리고 오른손 둘째손가락을 들고서 구도와 비례를 재는 것이었다.

그 뒤 정욱이 가져온 텐트를 치고 햇빛 가림막과 파라솔을 설치하는 사이에 도희는 근처를 돌아다니며 조가비들을 주워왔다. 마치 소꿉장난 놀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러나 도희는 정욱이 친 텐트를 돌아보더니 마땅치 않은 듯이 여기저기 줄을 팽팽하게 당기고 팩을 다시 박고 플라이도 다시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정욱에게 눈을 흘기고서 텐트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는 동안 정욱은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정욱은 그때 처음으로 텐트를 쳐본 것이다. 식구들이나 친구들하고 야영 갔을 때 정욱이 거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핀잔받기 일쑤였고, 괜히 남이 다 한 것 건드렸다가 오히려 망쳐놓거나 또 힘써서 해봤자 다른 이가 와서 훑어보고는 다시 작업하곤 했었기 때문이다 .

“그게 다 공간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니까.”

도희는 말끝마다 이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변명할 수도 없었다. 하는 일마다 그러니까.

텐트 정리가 다 끝나자 정욱은 안으로 들어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나 도희는 파라솔 밑에 앉아 아이스박스만 정리하고 있었다.

“들어가서 수영복 갈아입어.”

도희는 대꾸도 하지 않고 하던 일만 한다.

“얼른 갈아입어. 바다에 들어가야지.”

도희는 아이스박스 정리가 끝났는지 돌아앉아서 챙 넓은 밀짚모자를 고쳐 쓰고서 한쪽 무릎을 세우고서 입고 온 여름용 면 롱스커트로 발가락까지 잘 덮고서 바다를 바라본다.

“수영복 안 입어?”

그러나 도희는 대꾸도 하지 않고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더니 리시버를 연결해서 귀에 꽂는다.

“뭐야? 얼른 갈아입어.”

그러자 이번에는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어 쓴다.

몸매가 자신 없어서 그런가……? 그렇지도 않은데.

도희는 나올 데 잘 나오고 들어갈 데 잘 들어가 있어서 그런 것에 신경 쓸 것 같지 않았는데 이상했다. 그래서 정욱이 몸매 감정하듯이 윗몸을 뒤로 젖히고서 도희의 위아래를 쓰윽 훑어보았다.

그래도 도희는 무반응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욱이 한 발 뒤로 물러가서 두 손으로 호리병 모양을 그리며 도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도희가 한 손을 옆으로 뻗더니 모래를 파서 끼얹는다.

그날 하루 종일 정욱과 도희는 함께 바다 속에 들어가느니 마느니 승강이를 하면서 보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정욱 혼자 뻔질나게 바닷물에 들어가 잘 하지도 못하는 수영 한답시고 첨벙거리며 도희를 소리쳐 부르곤 했다.

이것저것 다 시들해지자 두 사람이 오후 느지막이에는 모래밭에 낙서도 하고 모래성도 쌓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조각을 전공한다는 정욱은 그림을 그리고, 회화가 전공인 도희는 기막히게 멋들어진 성을 높다랗게 쌓은 것이다. 제 딴에는 남자라고 옆 텐트 근처까지 가도록 커다랗게 백사장에 낙서해 놓은 정욱의 그림은 그러나 도무지 못 봐줄 지경이었다. 사람이나 건물이나 죄다 비례도 안 맞고 생김새도 엉망인 데다 도무지 무슨 뜻으로 그렸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미대생 맞아?

“추상화라니까.”

“됐네요.”

“조각할 사람이 그림은 잘 그려서 뭣해?”

“됐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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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밤늦게 돌아가다가 운전하는 정욱이 하도 졸아대서 도희가 길옆에 차를 대라고 하고서 자신이 운전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스태미나도 없어요, 무슨 남자가.”

“아침에는 내가 운전했잖아.”

“장하기도 하셔라.”

아무렴, 장하지. 그러니까 네 엽서를 보고 여기까지 왔지.

또다시 정욱은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음이 아픈 건지 가슴이 아픈 것이지 분간이 잘 안 되었다. 하긴 그거나 그거나…….

어떻든 정욱은 진흙 작품을 완성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을 모두 세심히 만들었다. 게다가 앞과 뒤 전체 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갖추어졌다. 청춘의 두 남녀. 어깨를 맞대고 다정히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둘만의 세계를 향해 꿈을 날려보내고 있는 듯한 눈.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보 둘이 앉아서 꿈을 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맞다. 바로 그럴 거야. 두 바보. 꿈을 꾸는 바보 커플.

정욱은 소리나지 않게 살짝 박수를 쳤다. 이 경우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은 안 어울릴 테니까.

정욱은 엽서를 한 장 꺼내왔다. 그리고 진흙 두 사람을 비스듬히 놓고 그렸다. 세심히. 꼼꼼히. 그러나 색을 입힐 수 없어서 좀 아쉬웠다.

아냐, 원래 흑백이 더 고급인 거야…….

정욱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소를 쓸 차례였다.

정욱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발신인과 수신인을 바꾸어 썼다.

수신인의 주소는 포르투갈의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했다. 핸드폰으로 주소를 찾아본 것이다.


발신인 ― 이정욱

수신인 ― 현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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