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풍경화 (1)

장면 1 | 그날부터

by Rudolf

[제1막] 11월엔



장면 1 | 그날부터



휘영은 매일 가던 피트니스센터를 그만두었다. 체력이 달리는 것 같아서 시작한 운동인데 오히려 더 피곤해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너무 무리했었던 모양이다. 센터에서 말해 주는 대로 적당히 운동을 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 주말에는 근 두 시간씩 운동을 하니 몸이 배겨날 리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일이 많아 하루 종일 시달리고 늦게 퇴근하는 데다, 잠이 모자라면서도 새벽에 억지로 일어나서 운동을 갔으니 역효과가 날 만도 했다.

“희영 씨, 이것 좀 먼저 처리해 줘요.”

저쪽 책상에서 윤 대리가 소리친다.

내 이름은 휘영인데…….

휘영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희영 씨…….”

휘영은 못 들은 척하고 전화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 휘영 씨…….”

그제야 휘영은 천천히, 아주아주 느릿느릿 일어났다. 고개도 슬로비디오처럼 아주 천천히 들고서. 윤 대리가 전화기를 왼쪽 어깨에 걸친 채 머리를 기울여 귀에 갖다대고서 오른손을 들어서 흔든다. 엄청 급하다는 뜻이다. 왼손은 자판 위에 올려져 있는 듯하다.

남이야…….


점심시간에 혼자서 커피를 사들고 나오는데 윤 대리가 어디선가 나타났다.

“그거 나 주려고 산 거예요?”

신경 꺼 주세요.

“원하시면 드세요.”

휘영은 커피를 내밀었다.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다른 때 같으면 ‘소립니다’ 할 텐데 웬일인지 ‘소리 입 니다’하고 ‘입’에다 강조를 한다.

뭐야? 아부하는 거야? 왜 갑자기 ‘입’을…….

아차, 좀 전에 동료들과 샐러드바에 갔다가 나오면서 화장실에 들렀는데 그때 갑자기 코피가 나왔다. 그래서 휴지로 틀어막고 닦고 한 뒤, 정신 좀 차리자 하고서 커피를 샀다. 그런데 커피점을 나설 때 또 코에서 뭔가가 흐르는 듯해서 얼른 손에 들고 있던 냅킨으로 막 닦고 났는데 그때 윤 대리가 나타난 것이다.

휘영은 슬쩍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러고 나서 살펴보니 피가 약간 묻어 있었다.


휘영은 조퇴했다. 강제로. 윤 대리가 사무실에서 난리를 치며 잘못하면 사람 잡겠다며 휘영에게 빨리 퇴근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는 바람에 사무실 사람 모두가 쳐다보았다.

“그러게 진작에 일 좀 작작 시키지.”

“윤 대리가 책임져.”

“빨리 집에 보내.”

“보기보다 허약하네.”

“윤 대리가 보약 지어줘야겠어.”


며칠 뒤 휘영은 퇴근해서 오피스텔로 곧장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함께 방을 나누어 쓰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 소연이 상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한다.

“배달이 왔네.”

소연은 휘영보다 세 살 위이다.

“배달시킨 거 없는데…….”

“확인해 봐.”

휘영이 주방 옆으로 가서 상자를 보니 받는 사람이 틀림없이 휘영이었다. 그리고 보낸 사람은…….


윤대환


초록속노란꽃-1.jpg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구야? 남자친구?”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핸드폰을 꺼내어 보니 윤 대리였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보약을 보낸 정성을 생각해서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야, 윤 대리.”

“알고 있어요. 이거 뭐예요?”

“어, 벌써 받았어? 빨리 들어갔네.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안 나서…….”

“뭐냐니까요?”

“아, 그거? 응, 그냥 조그만 건데……. 보약이야. 십전대보탕…….”

“이런 걸 왜 보낸 거예요?”

“응, 아니, 그냥 요즘 많이 힘들어하잖아. 그래서…….”

보약 지어주려면 진맥이나 보게 하든지…….

“그거 진맥 안 보고도 그냥 먹을 수 있는 거래.”

“저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왜 그래? 그거 먹고 힘이나 내.”

그 뒤 약간 옥신각신하다가 휘영이 마지못한 듯 말했다.

“알았어요. 잘 먹을게요. 감사해요.”

“아, 그리고……, 저기……. 내가 사실 이 근처에 와 있거든. 잠깐 나와 볼래? 전해 줄 게 있어서……. 이거 주기만 하고 갈게.”

어이가 없었다. 우리 집은 대체 어떻게 알았대? 하긴 입사원서 처음 받은 게 그 인간이니까 알고 있겠지. 그러나 어떻든 집 근처까지 왔다는데 그냥 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가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왜? 누구야? 저거 배달시킨 사람?” 소연은 이렇게 말하고는 소리는 내지 않고 입으로만 말한다. “애인?”

“아녜요.” 휘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들릴락 말락 하게. 그런 뒤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하면서 다시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내가 같이 나가줄까?”

“아뇨. 괜찮아요.”

휘영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피스텔 아래는 쇼핑센터다. 그리고 건물 바로 앞에는 노천카페 같은 것이 주욱 늘어서 있고, 그 바로 뒤에 인공 연못이 있으며, 그 건너는 또다시 노천카페와 오피스텔. 이런 식으로 아주 길게 이어져 있다. 밤이면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그 거리를 꽉 메운다. 차도는 양쪽 오피스텔 바깥쪽으로 나 있어서 이곳은 쇼핑객과 낭만의 천국이다. 밤 12시까지 휘황한 쇼핑 및 청춘의 거리.

휘영은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1층 바깥 쇼핑센터 거리로 나갔다. 그러자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윤 대리가 서 있었다. 손에는 무엇인가 잔뜩 들고 있었다. 그러나 꽃은 들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일 꽃을 가지고 왔으면 그냥 돌아서서 도로 올라가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윤 대리가 휘영을 알아보고 손을 살짝 들어올린다.

휘영은 주위를 한번 슬쩍 둘러보고는 윤 대리 쪽으로 다가갔다.

“미안해. 귀찮게 해서.”

휘영은 뭐라고 대꾸를 해야겠는데 할 말을 못 찾아 머뭇거렸다. 그런데 윤 대리의 시선이 어딘지 휘영 너머로 향해 가 있는 것 같았다.

휘영이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엘리베이터 홀 입구의 문 앞에 소연이 서 있는 것이었다. 두 팔을 들어올려 팔짱을 낀 채.

소연도 휘영이 돌아다본 것을 알고는 멀리에서 고개를 끄덕여 준다.

휘영이 다시 윤 대리에게 돌아섰다. 그제야 윤 대리는 가지고 있던 큼직한 종이봉투 두 개를 내민다.

“여기에 유명한 그 죽집이 있네. 이거는 거기서 산 거고, 이건 과일이야. 이것 먹고 힘내.”

휘영은 안 받을 수도 없어서 받기는 했지만 영 찜찜했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걱정이 되어서.

윤 대리는 봉투를 주고 나서도 약간 미적거리는 것 같았다.

이럴 때 휘영이 ‘차나 한잔하고 가세요’ 또는 ‘라면 먹고 가실래요’라고 말했으면 분위기가 딱 잡히는 건데, 휘영은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그럴 환경도 아니다. 고등학교 선배와 같이 사는데 누구를 데리고 들어간단 말이냐.

그런데 눈치 빠른 윤 대리가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얼른 말한다. 하긴 윤 대리도 휘영이 아는 언니와 함께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윤 대리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는 다 아니까.

“얼른 들어가. 저기에서 기다리시네.”

윤 대리는 이렇게 말하며 또다시 휘영 뒤를 쳐다본다.

결국 휘영은 말 한마디 못하고 고개만 까딱하고 돌아섰다. 그 순간 저만치에서 소연이 팔짱을 얼른 풀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을 보니 윤 대리가 멀리에서 인사를 한 것 같았다.

그제야 휘영은 다시 돌아서서 윤 대리를 쳐다보고 말했다.

“고마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가114.jpg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