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2 | 흔들리는 마음
다음날 출근한 휘영은 윤 대리를 보기가 좀 어색했다. 그래도 모르는 척하고 자신이 맡은 일만 했다. 윤 대리 역시 휘영을 외면하고 평소 그렇게 자주 시키던 귀찮은 일도 하나도 맡기지 않는 것이었다. 알아서 처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쌓아두는 것인지……. 그러나 만일 그냥 놔두기만 했다간 나중에 휘영이 밤새우면서 일을 해야 한다.
“그냥 빨리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윤 대리 책상으로 가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없어도 휘영은 늘 서류 더미 속에서 살기 때문에 할 것은 많이 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온다. 휘영은 마음속으로 계속 갈등하고 있었다. 두 가지를.
하나는 어제 일에 대해 고맙다고 한 번 더 인사해야 할 것 같아서. 선물을 두 번이나 주었으니. 그리고 사실 어제 저녁 그 죽과 과일로 저녁을 얼마나 잘 먹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보약은 열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서.
그리고 또 하나. 휘영 자기가 처리해야 하는 일. 그거 빨리 달라고 독촉하고 싶었던 것이다.
낮에 윤 대리 책상 근처를 지나가면서 곁눈으로 슬쩍 보았더니 그 서류가 더미로 쌓인 채 그대로 있었다. 개수로는 얼마 안 되어도 페이지가 많아서 쌓아놓으면 수북해진다. 그 서류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꼼꼼히 들여다보고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데, 저렇게 놔두고만 있으면 어쩌냐고?
차라리 윤 대리가 빨리 퇴근해 버리면 휘영이 그 서류를 통째로 가지고 와서 훑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퇴근준비도 안 하고 이미 검토해서 한옆으로 밀어놓은 서류 다시 끄집어내서 훑어보는 척하며 훌훌 넘기고 있었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도 좀 내면서. 빨리 알아들으라고. 눈치채라고.
그런데도 윤 대리는 일에 몰두한 것인지, 아니면 휘영의 입장을 알고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인지 통 반응이 없다.
휘영도 어젯밤 일로 괜히 어색해져서 먼저 다가가기가 좀 쑥스러워 하루 종일 외면하고 있었던 탓에 윤 대리가 이제는 아예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건 너무하는 것 아냐? 어젯밤 일 때문에 쑥스러운 것은 피차 마찬가지라고. 그런 거 남자가 먼저 다가와서 풀어줘야 하는 거 아냐? 집에까지 찾아온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왜 그렇게 변한 거야. 여자가 먼저 다가가리? 평소에도 쭈뼛거리더니, 하여간 숫기가 없어요, 숫기가. 남자가 그래 가지고 뭔 일을 해? 응, 말야, 때로는 좀 터프하게 탁 나와야지.
아이고, 쫌생이…….
휘영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윤 대리 책상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이켰다. 그 순간 윤 대리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여전히 휘영에게는 눈을 주지 않고 있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하지만 윤 대리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그 다음에는 뭔가 액션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윤 대리는 몸을 돌이켜 그대로 저쪽으로 간다. 윗도리까지 챙겨입은 것을 보니 아예 퇴근해 버리려는 것 같았다. 하긴 이미 퇴근시간이 넘었으니까. 사무실 군데군데가 벌써 많이 비어 있었다. 잔무 있는 사람들이 서둘러 마무리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휘영은 그 자리에 서서 멍한 눈으로 윤 대리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저 사람……, 어젯밤에 우리 집까지 찾아온 그 남자 맞아?
정말 어이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윤대리가 처음으로 휘영 책상으로 다가왔다. 서류더미를 잔뜩 들고서. 은근히 그 시간을 기다린 휘영은 가슴이 갑자기 두 방망이 치듯 쿵쾅거렸다.
“어제 내가 깜빡 잊고 이 서류 넘기지 않았네. 이거 빨리 좀 처리해 줘요.”
‘요?’ 웬일이야? ‘요’자를 다 붙이고.
휘영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네.”
그런데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 했는데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윤 대리가 말 걸어올 것에 대비해서 몇 마디 말을 준비해 두었었는데. 그래서 약간은 쩔쩔매고 있는 중에 윤 대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그 흠 하는 것이 목에 걸려 갑자기 사레가 들린 것이다. 그래서 말도 못 하고 ‘흠’도 못 하고 기침도 못 하고 쩔쩔매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정도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어찌 된 일인지 숨도 쉴 수 없이 목이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캑캑거리다가 급기야는 얼굴까지 새빨개지고, 결국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어 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뛰어가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한마디씩 하는 것이 휘영의 뒤통수로 들려왔다.
“아니, 왜 저래?”
“윤 대리가 뭐 또 힘든 일 시킨 아냐?”
“두 사람 이상한데. 뭔 일이 있는 모양이군.”
“둘이 썸 타는 거 아니지?”
“냅둬. 좋은 때다.”
휘영은 자리로 돌아왔으나 괜히 분했다. 아니, 무지 분했다. 윤 대리가 가져다 놓은 서류를 도로 그 책상에 가져가서 확 내던지고 싶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그러나 말로는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이번의 그 ‘인간’은 그저께까지의 저 ‘인간’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휘영 자신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거 죄다 그 ‘인간’이 만들어놓은 거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른 척을 해?
나쁜 놈!
하, 이제 ‘나쁜 놈’까지 나왔으니 사실 휘영의 마음은 흔들릴 대로 다 흔들린 것이다. 휘영 자신도 자기가 ‘나쁜 놈’이라고 속으로 외쳤을 때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부아가 났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속을 태워? 남자 녀석이.
야, 네가 쑥스러우면 여자인 나는 어떻겠니? 내가 먼저 다가가서 ‘안아줘’ 이래야 알아들을 거야?
또다시 ‘나쁜 놈.’ 그러나 이번에는 느낌표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휘영은 얼른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갔다. 혹여 남들이 눈물을 볼까 봐 고개를 숙이고서.
그러자 또다시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짜 사건이 벌어진 것 같은데?”
“정말 저 자식 일 벌인 거 아냐?”
“좋을 때다. 싸울 때가 좋은 거야.”
“국수 먹을 준비나 해라.”
“생각보다 빠르겠는데.”
“뭐가 빨라?”
“눈치 없기는. 진도가 빠른 거지, 뭐가 빠르겠니?”
“진도?”
“그래, 전라남도 진도!”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