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풍경화 (3)

장면 3 | 그래도 아직은 가을

by Rudolf

장면 3 | 그래도 아직은 가을



윤 대리가 집에 다녀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에서는 그런대로 일이 정리되어 갔다. 윤 대리는 윤 대리대로, 휘영은 휘영대로 각자 자기 일 알아서들 처리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다만 직원들이 수군거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 전만 같았으면 그런 말에 발끈해서 맞받아주었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맞대거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약간 고소하기까지 했다. 소문이 그렇게까지 났으니 그 인간이 이젠 어쩌지도 못할 것이다. 저도 다 들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저 인간이 그런 말에 모른 척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다. 그 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그렇게 못 박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말 같지 않아서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그러나 어떻든 휘영 역시 그런 말에 휩쓸렸다간 더욱 놀림감만 될 게 뻔해서 못 들은 척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밖에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은가 말이다. 따라서 이럴 땐 그냥 모른 체하는 것이 상책이다.

“희영 씨, 이것 좀 처리해 줘요.”

휘영은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저 인간……. 이젠 일부러 그러는 거겠지. 내 속 긁어놓으려고. 그래, 알았다. 나도 안 진다.

휘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하던 일만 계속했다.

“희영 씨……!”

목소리가 약간 높아진다.

휘영은 못 들은 체하고 계속 서류에 코를 박고 있었다.

“희영 씨!”

휘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쪽 목소리가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휘영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윤 대리 말고도 사람들이 전부 다 쳐다본다. 마치 수백 개의 눈동자가 휘영 자신한테 쏠린 느낌이다.

얼굴이 화끈했다. 그리고 분했다.

나는 희영이 아니라 휘영이란 말야!

마음속으로 외치고서 벌떡 일어나 걸어갔다. 성큼성큼. 그러나 윤 대리 쪽이 아니라 그 반대편으로. 그곳으로도 멀기는 하지만 사무실 밖 끝으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면 화장실이 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가거나 아니면 아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 버리는 수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그곳에 가서 마구 소리쳐 주고 싶었다.

“야, 이 병신아! 말로 하란 말야! 그렇게 소리만 지르지 말고 직접 와서 고백해! 정식으로! 그럼 되잖아. 이미 소문이 다 났는데 뭘 망설여? 병신아! 찐따야! 곰배팔아!”

휘영은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씩씩거렸다. 너무 분했다. 휘영의 코에서는 김이 푹푹 났다. 아주아주 옛날 만화영화의 용가리처럼.

하루 종일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근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벌떡 일어나서 메가폰이라도 들고, ‘아아, 여러분,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닙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아아, 하나 둘 셋 넷, 잘 들리시나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결코, 절대로, 완벽히, 철저히,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라고요. 아직, 아직은……. 아아, 마이크 테스트…….’ 꼭 이래야겠냐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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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연 언니는 요즘 매일같이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말도 없이. 늦으면 늦는다고 카톡이라도 보내주면 되잖아. 매사에 철저하던 사람이 왜 요즘 그렇게 갑자기 풀어진 거야? 참 나…….

소연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너무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아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어 휘영이 카톡이라도 보낼까 하고 있는데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휘영이 반가운 마음도 들어서 얼른 현관 쪽으로 갔다.

소연이 들어온다. 하지만 무척 피곤한 모습이다.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 연락도 없이.”

“요즘 일이 갑자기 많아졌어. 특별감사가 나온다고 해서. 거기다 학교에서 조그만 사고도 나 가지고…….”

“많이 힘들겠네.”

소연은 더는 말이 없이 손에 든 봉투를 내민다.

“너 좋아하는 거야.”

휘영이 받아 보니 이 근처에서 제일 유명한 제과점에 파는 파운드케이크다. 오븐에 구운 것.

“피곤하다며 왜 이런 거 사온 거야. 밥은 먹었어?”

“대강…….”

소연은 그 이상은 귀찮은지 가방이나 윗도리를 대강 벗어서 침대에 던진다.

“나 씻을게.”

휘영은 그러나 파운드케이크를 혼자서 먹기가 그래서 식탁에 올려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손이 가려고 한다. 사실은 휘영은 요즘 매일같이, 그것도 주말도 없이 매일 나가서 늦게 돌아오는 소연을 놔두고 혼자 저녁 먹기가 그래서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휘영 제 딴에는 의리를 지켜준다고 소연이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휘영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얼른 일어나 물을 끓였다. 피로회복에 좋다는 차를 타주려고.

휘영은 소연이 샤워하고 나올 때까지 잠시 무료한 생각이 들어서 창으로 가서 버티컬을 들어올리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쇼핑몰 쪽이 아닌 그 반대편 찻길, 즉 대로 쪽. 대로 큰길에서는 온갖 종류의 차들이 쌩쌩 지나간다. 이 오피스텔의 단점 중 하나는 바로 그거다. 대로변으로 창문이 난 것. 그래서 하루 종일 차 소리가 나지만, 사실은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아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늘 그러려니 하니까. 그리고 좋은 면은 그 큰길의 대로 건너편이 야트막한 산이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 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지금은 가을. 온갖 단풍이 다 들어 있다. 나뭇잎이 거지반 다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나무들도 많다. 밤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가로등 불빛에 간간이 보이는 단풍들이 신비스러운 느낌을 준다.

아직도 가을이구나.

다음 달이면 겨울인데. 잘 버티거라, 단풍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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