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9 | 숲속의 빈터
그 다음 주 토요일 오전, 휘영은 또다시 오피스텔 건너편 산에 올랐다. 소연은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도 새벽같이 나갔다. 아무런 말도 없이. 지난주, 또 지지난주에 나갈 때는 그래도 한마디는 했었다. 한번은 학교 감사 때문에 특근한다고. 그리고 또 한번은 그냥 좀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오늘은 아무 말도, 글자 그대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휘영이 참견할 일은 아니다. 남의 방 얻어쓰는 형편에 뭘 시시콜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휘영은 그저 좋게 말해서 자신이 집을 봐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한 생각이 안 들을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데이트가 있다고 말해도 되잖아. 사실 어젯밤 늦게 누구한테서 전화가 오자 소연은 화장실로 곧바로 들어가서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닫는 순간 한마디가 흘러나온 것을 휘영은 들었다.
― 내가 다 준비해서 갈게요. 걱정 말아요.
와, 그 목소리가 얼마나 나긋나긋했던지. 평소 집에 와서도 선생님처럼 말하는 것이 입에 밴 소연이 그렇게 부드럽게 말하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뭐 뻔할 뻔자다. 시골집에서 온 전화 받을 때도 그런 콧소리는 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새벽에 소연이 나갈 때 휘영은 하마터면 ‘데이트 잘 하고 오세요’하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산에 오르면서 후회가 되었다. ‘형부 될 분에게 안부 전해주세요’하고 말할걸.
그러고 보니 요즘 매일같이 늦게 들어오면서 얼굴 굳힌 것이 다 작전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 특별감사 때문에 야근 특근 했다는 것도 다 뻥 아냐?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다. 여자의 직감, 그거 무서워요. 거의 매일 밤 늦게 들어오시고, 주말에도 각종 핑계 대고 나가신 것, 그러다가 오늘 또다시 이유를 둘러대기가 귀찮아서 그냥 얼굴 굳히고 나가신 것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똥 싼 놈이 화낸다고.
휘영은 피식 웃었다. 사람은 두 가지를 감출 수 없대요. 기침과 사랑. 그거 언젠가는 들통나게 되어 있다고요.
앞으로 얼마 못 갈걸. 당장 내일이라도 들킬지 모르지.
하긴 소연은 휘영보다 세 살 많으니까 몸이 달을 만도 할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맞는 사람 나타나면 물불 안 가리고 붙들겠지.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성하다는 말이 이 경우 꼭 들어맞는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해야 맞는 말인가? 하긴 뭐 그게 그거니까.
흠, 내일은 마음 좀 떠봐야겠는데…….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휘영은 자신이 개척한 시냇가 옆길로 조심조심 올라갔다.
내일 일을 상상하며 얼굴에는 개구쟁이 미소를 머금고서.
아이고, 생각만 해도 재미있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