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풍경화 (10)

장면 10 | 11월의 일그러진 풍경화

by Rudolf


장면 10 | 11월의 일그러진 풍경화


다음날 아침 휘영은 늦잠을 잤다. 그 바람에 소연이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소연은 어젯밤 늦게 들어와서 얼굴을 굳힌 채 이것저것 하더니 씻고 나서 금방 잠자러 갔다. 무척 피곤하다나. 그러던 사람이 오늘 새벽같이 나간 것이다. 휘영을 깨우지도 않고서. 그 바람에 오늘 놀리려던 계획이 다 날아갔다. 휘영은 갑자기 시시해졌다.

피이이…….

휘영은 아침에 별로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도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한 뒤 침대에 가서 힘없이 걸터앉았다. 모든 일이 다 시들해진 것이다. 재미가 없다. 누구는 새벽부터 님 보러 가는데 오갈 데 없어서 방구석에 앉아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일부러 꺼내어 시간 때우는 자신이 한심하고도 답답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가서 ‘연애 한번 하실까요?’ 이럴 수도 없고. 하긴 휘영의 미모라면 어느 남자가 마다하겠느냐마는 요즘 시절이 하수상해서 꽃뱀으로 몰리기 십상이겠지.

휘영은 한숨을 길게, 아주 길게 내쉬었다.

이렇게 방구석에만 앉아 있으면 뭐가 나오냐? 님이 나오겠냐, 뽕이 나오겠냐? 한숨만 나올 뿐이지.

휘영은 일어났다. 가을의 막바지라서 바깥은 좀 서늘하다. 한낮에 햇볕 좋으면 모를까, 오늘같이 흐린 날 괜히 감기 들지 말고 옷 잘 챙겨입고 나가자고 생각하고서 두툼한 것, 그러나 좀 화사한 것을 꺼내어 입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서 이리저리 맵시를 보니, 인물이 받쳐줘서 그런지 무슨 옷을 입어도 화보였다.

좋아.

나가자.

화보나 찍으러.

하긴 화보면 뭐하냐? 항상 혼자인데. 기껏 남들 눈 호강시켜 주는 노릇밖에 더해?

이렇게 생각하면 약이 좀 오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나가자고 생각했다.


밖에 나왔다. 그럼 이제부터 어쩔 거냐? 뭘 할래? 어디 갈 거야?

휘영은 터벅터벅 걸었다. 남들이 훔쳐보거나 말거나. 이제는 그런 것에도 시들해졌다. 겉보기에 좋으면 뭐해? 실속은 하나도 없는데.

이 정도 미모에 2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도 남자하고 데이트 한번 제대로 못 해봤다면 남들이 믿어줄까? 하 참, 그리고 그 꿈, 왜 하필 결혼식 꿈이야? 게다가 그 자식 윤대환이 왜 거기서 나와? 내 꿈에서.

휘영은 속으로는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길 가는 사람들에겐 부드러운, 적어도 무표정한 얼굴을 보이려 애를 썼다. 그러면서 터덜터덜 걸어갔는데, 발걸음을 멈추고 나서 보니 결국 어제 왔었던 그 산 입구였다.

갈 데가 없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거기나 가자. 그 ‘숲속의 빈터’. 아무도 모르는 그곳. 영어로는 아마 ‘glade’라고 할 것이다. 영어로 말하나 우리 말로 하나 모두 듣기에 괜찮았다.

휘영은 가을 옷으로 잘 차려입은 채 산에 올랐다. 집에서 나올 때와 달리 갑자기 날씨도 화창해졌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높고 높은 하늘.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러세요. 맘대로 보세요. 산에 안 어울린다고 쳐다보는 것이겠지만, 그런 거 나는 상관 안 한답니다. 이제부터는 나도 내 삶을 살 거예요.

휘영은 시냇물 옆길을 따라 올라갔다. 아는 길이라도 쉽지 않았다. 작은 바위도 넘고, 덤불도 치우고 하면서 올라갔다. 드디어 저쪽에서 그 숲속의 빈터 입구가 보인다. 겉에서는 모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무에게도 들킬 리 없는 비밀의 공간. 가을 낙엽 가득해서 더 운치가 있는 그곳.

휘영은 오늘따라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혹 차분하지 못한 이런 마음으로 발이라도 잘못 짚으면 큰일이 나겠다 싶어 아주 조심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가을은 소리 내지 않는 휘영의 발걸음을 따라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가을하늘도 휘영의 설레는 마음을 따라 더욱 높아가기만 하고.

휘영은 글레이드, glade, 그 숲속의 빈터 입구에 섰다. 고요한 가을하늘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휘영이 그곳에서 본 것.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가을하늘은 그 광경을 어쩌면 저 혼자만 보려고 몰래 감추어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비밀의 공간 숲속의 빈터에. 그래서 하늘에서는 바람 소리도 지워버렸고, 땅에서는 휘영의 발소리도 감춰주었던 것이리라.

그곳에선 두 사람이 선 채로 딱 붙어 있었다. 아주 진한 모습으로. 포개질 것은 다 포개진 상태로.

그 두 연놈이.

윤대환과 문소연.


휘영은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묵음의 세계로 들어가서 슬로비디오로 내려갔다. 한 발자국 띄는 데 하나의 영겁이 흐른 것 같을 정도로 극조심하며 발을 내디뎠다. 행여 간신히 잠재운 아기 깨울라, 청명한 하늘에 금이라도 갈까, 무아지경으로 빠져든 사랑에 티라도 묻힐까 조심조심하면서.

시냇물 입구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내려간 휘영은 마지막 발을 그 입구 바깥에 내딛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하마터면 숨 막혀 죽을 뻔한 것이다.

아이고, 이제야 살겠다……. 후우―.

그 뒤로도 휘영은 숨을 몰아쉬고 내쉬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우선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다른 데 돌아다니지도 못하겠다.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게다가 소연의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것이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달리 어디 갈 곳도 없었다. 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데 그 인간이 어떻게 소연 언니를 알았대? 서로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만난 적도 없어요. 잘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 그런데 어떻게 만났냐고?

게다가 또 그 장소는 어떻게 알아냈냐고?

한마디로 신비다, 신비.

아, 생각해 보니 집은 아는구나. 보약 배달된 날 죽과 과일 들고 찾아왔었으니까. 그러니까 만난 적은 딱 한 번 있었던 거네. 그리고……, 휘영이 아는 선배 언니랑 같이 산다는 것은 회사에서도 다 아니까. 그런데 단지 그것만 가지고 두 사람이 만났다고? 아이고……, 세상 참, 기기묘묘하기도 하구나.

그리고 두 사람의 그 모습. 정말 보기 좋았다. 경치 좋았어. 완전 영화야, 영화. 11월 청명한 하늘 아래의 영화. 혼자 보기 아까웠어.

아니, 그래도 붙어먹을 데가 아무리 없었어도 그렇지. 하나는 나 휘영의 룸메이트고, 또 하나는 회사 동료이자 상사인 걸 뻔히 알면서.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는 전혀 눈치도 주지 않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거야?

그것은 그렇고 저 인간, 소연이 이혼녀인 것 알기나 하는 거야? 시골에 숨겨놓은 아들도 하나 있는데.

하긴 저 소연이라는 인간도 그렇지, 정말로 그런 여시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교 교사입네 하며 요조숙녀인 체하고 다니더니만.

그래, 기왕 그렇게 됐으니까 차마 악담은 할 수 없고, 아예 둘이서 딱 달라붙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말고 아들딸 각각 천 명씩 낳고 천년만년 살아랏!

헤어지기만 해봐라. 가만 안 놔둘 테니까.

게다가 둘 다 그렇게 감쪽같이 붙어버린 것을 보니 이것은 완전히 첩보원 수준이다. 스파이. 그래, 니네 둘 다 스파이나 되라. 시커먼 안경 착 쓰고 하나는 모자 푹 눌러쓰고서, 또 하나는 머리에 스카프 칭칭 둘러매고서 골목길 같은 그늘 속에서만 사사사삭 다니란 말야! 둘 다 그렇게 짝으로 붙어다니면 볼 만하겠다, 흥!

휘영이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순간 제일 먼저 보약상자가 눈에 띄었다. 휘영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덥썩 들어올려서 확 집어던지려 했다. 그러나 순간 멈칫했다.

보약이잖아, 보약.

휘영은 마음을 달랬다. 그래, 보약이 무슨 죄냐? 기왕 이렇게 된 거 보약이나 잘 먹고 몸이나 챙기자. 그리고서 저 연놈들 보란 듯이 멋지게 사는 거야. 그러면 복수가 되는 거지 뭐.

휘영은 보약상자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행여 잘못해서 떨어뜨릴까 봐 조심하면서.

바로 그 순간 생각났다. 꿈속에서 휘영이 던진 꽃다발을 받은 사람이. 그는 바로 소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소연이냐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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