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화장실 연애편지 대소동 (2)

Secundum Quid

by Rudolf

Secundum Quid |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황 영감은 화장실 인류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하나의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금을 들여야 하지만 그 정도는 기꺼이 자신이 감당키로 했다.

우선 계속되는 화장실 낙서를 깨끗이 지웠다. 밤 9시부터 한밤중까지 잠도 안 자고 지운 것이다. 불량배들 몇몇이 화장실에 들어와 담배 피우고 있는 것을 다 쫓아내고서. 그 사람들은 황 영감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욕을 하면서도 다 물러갔다. 폐건물 뒤쪽이나 산비탈 어딘가로 또 숨어들었겠지만.

그런 뒤 황 영감은 자신이 미리 준비해 온 것을 화장실 세 칸에 모두 설치했다. 즉, 낙서판.

황 영감은 문구점과 인터넷을 다 뒤져서 큼직한 코르크 게시판을 15개 샀다. 그것을 화장실 한 칸마다 문을 포함해서 사방에 하나씩, 그리고 천장에 하나, 이렇게 한 칸에 다섯 개씩, 세 칸 모두 합해서 15개를 부착해 놓았다. 그런 다음 그곳에 큼직한 마분지를 한 장씩 붙여놓은 것이다. 게다가 화장실 한 칸마다 색색의 사인펜 한 세트와 크레파스 한 통, 색연필 한 통, 거기에 데생용 연필과 지우개, 연필 깎기 등을 비치해 놓았다. 일부러 나무통을 하나씩 벽에 부착해 놓고서. 그리고 또 하나, 접이식 사다리를 하나씩 갖다놓아서 굳이 변기나 물통을 밟고 올라서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었다. 천장에다 낙서할 때 편하라고. 기왕에 인심 쓰는 거 화끈하게 해주자고 마음먹고서 말이다.

황 영감은 이 작업을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혼자서 다 했다. 그렇지만 이런 작업은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청소하기 위해서. 물론 이번처럼 게시판을 설치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작업한 적은 없었다. 대개는 밤 9시부터 낙서 지우는 작업을 하면 두 시간 정도면 다 끝난다. 아주 완벽하게 지워지지는 않더라도. 그러나 이번에는 게시판에만 낙서하도록 나머지 공간은 아주 깨끗하게 닦고, 변색이 되거나 흠집이 난 것을 모두 칠하거나 때우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다. 그런 다음에 게시판이 떨어지지 않도록 못과 접착제로 단단히 고정시켜 놓았다.

이렇게 해서 황 영감은 한밤중 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음이 뿌듯한 채. 이제부터는 사람들이 마음껏 낙서하고 그림 그리고 해도 일일이 지우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황 영감은 아침 10시가 다 되어서 일어났다. 할멈은 황 영감한테 아주 질린 상태라 무슨 일을 하든 상관도 하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하든지 말든지. 오히려 그놈의 화장실에 미쳐서 푹 빠져 있는 덕에 자신을 들볶지 않아서 편한 면도 있다. 평소에 구두쇠로 소문난 영감이 화장실에 돈을 퍼붓는 것이 어처구니없기는 했지만, 그깟 거 남들 술 마시고 노름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라도 해서 소일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어서 못마땅하면서도 일언반구 타박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그날 황 영감은 한밤중에 들어와서 곧바로 잠에 떨어져 느지막이 일어났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게다가 어떤 기대감까지 드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낙서가 마분지에 가득 차면 그 종이를 떼어내고 새로 붙여주면 된다. 게다가 황 영감은 또 하나 획기적인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황 영감은 늦게 일어난 탓에 오늘 아침에는 공장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아침에 집에서 화장실 가는 것이 좀 어색했다. 비나 눈이 억수로 쏟아지고,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한겨울에도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에 항상 공장 화장실에 갔었기 때문이다. 아, 감기에 몹시 걸려 며칠 앓아누웠을 때와 할멈 역시 감기로 누웠을 때도 가지 않았었다. 아무튼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갔으니까. 게다가 밤에 그곳에 가서 낙서 지우고 지저분한 것들 청소하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제법 늦은 시각이 되어 다른 노인들처럼 꼭두새벽에 깨는 것이 아니라 보통 6~7시 넘어서까지는 자게 된다.

어떻든 그동안 이런 식으로 지내오다 보니 특별히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아침 10시 넘어서 공장으로 향하니 기분이 좀 묘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황 노인의 빌라에서 공장까지는 10분도 채 안 걸린다는 사실이다.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그러나 이날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공장 화장실로 가지 않고 자신의 집 화장실로 간 것이 무척 어색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흡족했다.



정오가 다 되어 황 영감은 무엇인지 모를 기대감을 가지고 공장의 공중화장실로 갔다. 공장 마당에는 몇몇 사람이 와서 트랙처럼 담장 가장자리를 뛰기도 하고 줄넘기도 하고 있었다. 공장 담장은 원래부터 낮게 나무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놓고 그 사이를 그보다 더 낮은 좁다란 나무막대를 듬성듬성 박고서 가로대를 위아래에 하나씩 대놓고 못을 박은 것으로서, 흔히 초등학교 꽃밭 울타리보다 조금 높은 형태였으나 지금은 여기저기 많이 무너지고 망가지고 부러지고 한 상태였다. 황 영감은 그 울타리도 진작부터 자신이 모두 고쳐놓고 싶었지만 엄두도 나지 않았을뿐더러, 특히 요즘에는 화장실에 골몰하느라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날은 황 영감의 눈길이 갑자기 그 무너진 나무 담장으로 향했다. 시청에서 화장실뿐만 아니라 기왕이면 저런 것들도 모두 고쳐주면 좀 좋노. 돈 쓸 데가 없어서 잘 단장해 놓은 다른 공원들 또다시 파헤치고 요상한 조각상을 세워놓질 않나, 그 밖에도 눈에 거슬리는 별짓들을 많이 하던데. 요 얼마 전에는 어린이놀이터 입구에 아이들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보라색이나 자주색, 검은색의 보기에도 흉측한 철제 조각품을 하나 떡하니 세워놓아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것을 보았다. 예술가들 지원정책의 일환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주변환경과 어울리는 작품을 갖다놓아야지 뭐 하는 짓들인지. 그런 데다 마구 퍼넣을 돈이 있다면 차라리 산비탈 주민들 휴식터인 공장의 울타리나 고쳐주는 게 어떻겠냔 말이다. 비용도 얼마 안 들겠구먼. 동네 주민인 나는 사비 들여서 화장실을 관리해 주고 있는데. 어디 돈뿐인가. 시간 들이지, 정성 들이지, 게다가 신경은 좀 많이 쓰냔 말야. 쯧쯧…….

황 영감은 기분 좋게 집에서 나왔는데 괜한 것이 눈에 들어와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그 담장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담장 이 끝에서 눈에 보이는 저 끝까지 주욱 훑어보았다.

그런 다음 이럴까 저럴까 잠시 망설이다가 담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30대로 보이는 부인 둘이 깔깔 웃으며 마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황 영감은 그들을 슬쩍 쳐다본 뒤에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까지 담장 가장자리를 따라 뛰던 남자가 천천히 걸으며 두 팔을 위쪽으로 들어올리며 허리를 양옆으로 비튼다.

황 영감은 그런 모습들이 흐뭇했다. 보기 좋았던 것이다. 건전하잖아.

다른 동네들처럼 이 근처에도 적당한 공원 하나 들어서면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황 영감은 망가진 담장 울타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상태를 살펴보았다. 자신이 고칠 수 있는 정도인가 가늠하면서. 흠……, 어디에 가서 나무판을 좀 구해 오면 좋겠구먼, 그런 게 있으려나 모르겠네. 돈 주고 사려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누가 그런 돈을 대주겠어? 어디에서 돈이 나온다면야 내 주머니겠지. 얼마나 할까……?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머리가 꼭 찬 채 황 영감은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고약한 괴물처럼 서 있는 공장 건물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러자 공장 창고로 쓰였던 허름한 목조건물 옆으로 난 좁은 길 위쪽 나무 그늘 속에 서너 명 되는 아이들이 보인다. 고등학생 나이쯤 되지만 사복을 입고서 담배를 입에 문 채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황 영감을 알아보고 돌아다보았으나 담배를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연기를 후욱 뿜어낸다. 황 영감 쪽으로. 일부러.

황 영감은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으나 꾹 눌러버리고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는 창고 앞쪽으로 걸어갔다.

못된 놈들. 그런데 그런 놈들한테 야단이라도 쳤다간 오히려 봉변당하기에 십상이다. 그런 경험이 두어 번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불량배들일지라도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모른 척하는 것이 상책이다.

황 영감은 속이 씁쓰름하긴 했지만 담장 상태나 더 둘러보자 하고서 계속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차, 저런 놈들이 바로 낙서 주인공들 아닐까? 그것도 아주 지저분한 것들을 휘갈겨 쓰거나 그리는 놈들. 맞아, 그럴 거야.

그래, 좋다. 마음껏 써대라. 네놈들이야말로 대환영이다. 아주아주 진하게 써놔라. 그래야 화장실 낙서답지.

짜식들, 좋은 때다…….

황 영감은 갑자기 걸음이 빨라졌다. 경쾌해진 것이다. 그리고 서둘러서 화장실로 갔다.

마침 한 남자가 화장실 건물 이쪽 문으로 나온다. 어딘지 건달 같은 느낌. 남자는 황 영감을 슬쩍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마당 저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흠, 저런 친구들도 가능성이 많지. 그래, 많이들 와라. 어중이떠중이 모두들. 그리고 잔치를 벌이는 거야. 공중화장실 낙서 대잔치.

황 경감은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화장실 안에 들어갔더니 맞은편 문으로 어떤 남자가 막 나가고 있었다. 어쩐지 낙서하기에 딱 알맞은 인간 같았다.

좋아, 좋아. 누구든 다 와라. 모옹땅 와라. 한판 벌이자…….



황 영감은 주변을 한번 슬쩍 돌아본 뒤에 첫 번째 화장실 칸 문을 열었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서.

……?

그런데 깨끗했다.

어라? 어떻게 된 거지?

화장실 문 뒤, 왼쪽 벽, 뒤쪽 벽, 오른쪽 벽, 그리고 천장…….

게시판 종이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림도 없었고.

혹 썼다가 지웠나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니, 지울 수는 없지. 종이니까. 게다가 지우개 같은 것으로 지웠다고 해도 흔적은 남을 것이다. 그래도 혹 무슨 자국이나 흔적이라도 있나 하고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없었다.

황 영감은 그림 도구함을 들여다보았다. 그대로 있었다. 아무것에도 손댄 느낌이 없었다.

이럴 수가…….

황 영감은 얼른 나와서 다음 칸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깨끗했다. 흰 눈처럼 새하얀 도화지.

황 영감은 혼이 나간 느낌으로 마지막 세 번째 칸으로 들어갔다. 일말의 희망을 걸고서.

그런데……, 그곳도 깨끗했다. 순결했다. 그림 도구들도 모두 그대로 있었다.

손댄 흔적 하나도 없이.

황 영감은 망연자실했다. 정신이 멍했다.

모두들 성인군자, 성인군녀만 모인겨? 저 밖에서 담배 피우던 고등학생 놈들까지 모두 싹 모범생들이었단 말이야? 그럼 그동안 써놓았던 낙서는 다 어떻게 된 거야?

황 영감은 멍하니 서 있다가 스스로를 위안했다.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사람이 별로 오지도 않았을 거야. 내일이면 달라지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배은망덕한 놈들……. 멍석을 깔아줬으면 뭔 짓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네 놈들한테 베풀어 줬으면 갚아야 하는 거잖아. 이렇게 정성 들여 분위기 만들어 주었으면 코딱지라도 갖다붙여야지, 내 성의도 무시하고 말야…….

내 말 틀려?

왜 아무 짓도 안 하는겨? 고얀 것들. 하다못해 그 큼직한 것 하나라도 떡하니 그려놓고 가야 하는 거 아냐? 그런 것들 꼭 내가 내 손으로 직접 그려야겠느냔 말야, 이놈들아…….

그래서 정말로 이날은 황 영감이 두 번째인 한가운데 칸에 들어가 문 뒤쪽의 마분지 한가운데에 직접 이따만한 것 하나를 떡하니 그려놓고 나왔다. 총천연색으로 컬러풀하게. 빤짝이까지 뿌려 가면서. 첫 낙서로. 이 거창한(?) 행사를 개시하는 의미도 갖고서.

(그럼 뭐를 그렸나고? 큼직하고 넓적한 늙은 서양호박 하나 그렸다, 왜? 눈과 코하고, 이빨 드러낸 입을 판 그림. 뭔 이상한 서양 풍습 하나 들어와서 난리들을 치기에 흉내 한번 내봤어.)

그런 뒤 황 영감은 화장실 바깥으로 나갈 때 혹 누가 보지 않았나 지레 눈치를 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Ψ Secundum Quid | 성급하게 일반화시킨다는 뜻. 한두 가지 사례를 가지고 자신의 선입견을 개입시켜서 마치 전체가 그런 듯이 생각하는 경우에 해당하며, 논리학의 한 오류에 속한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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