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화장실 연애편지 대소동 (3)

Argumentum ad Populum

by Rudolf

Argumentum ad Populum | 남들도 다 그래



황 영감은 기분이 좋았다. 며칠이 지나자 화장실 칸마다 낙서가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지정된 낙서공간 말고 다른 데 끼적거리는 것도 있어서 신경이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흡족했다. 무슨 일에서든 호사다마니까.

게다가 화장실마다 다양한 요구를 써놓기도 했다. 마분지에 또는 포스트잇에.

즉, 먹과 붓을 준비해 달라, 잉크와 펜도 갖다달라, 파스텔과 그림물감도 갖다달라, 립스틱도 갖다놓아라, 기왕이면 화장품 세트도……, 등등.

아이고, 그런 것들은 니들이 알아서 해라. 물에 빠진 자식 건져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네. 아니, 그게 아니고 오리를 동행해 주었더니 십리를 같이 가자는 거였던가……. 아무튼 나는 더는 못 한다. 자급자족.

어떻든 열렬한 성원에 감사…….

이렇게 한 주간 지났더니 화장실 세 칸의 네 벽과 천장의 종이에 낙서와 그림이 꽉 찼다. 그래서 그 종이를 떼어내고 새로운 종이를 붙여놓았다.

황 영감은 그중에서 열 개를 골랐다. 심사숙고해서. 그리고는 그것들을 잘라내서 역시 또 다른 코르크 게시판에 붙여놓은 다음 화장실 한가운데 칸 문 바깥에 걸어놓았다. 나머지는 박박 찢어서 쓰레기통에 갖다버렸다. 그러고 나서 게시판 아래에 조그만 하트 스티커를 잔뜩 갖다놓았다. 그랬더니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사람들이 열 개의 낙서 아래쪽에 하나씩 갖다붙이는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서로 통하게 되어 있어. 이심전심.

일주일 뒤, 하트가 가장 많은 것을 제외한 나머지 역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최우수작은 클리어 파일에 집어넣고서 왼쪽 화장실 칸 문에 테이프로 붙여놓았다. ‘이주의 공중화장실 낙서’라고 써놓고서. 그런 다음 1만 원짜리 상품권을 봉투에 넣어, 겉에다 ‘상금 1만 원’이라고 써서는 셀로판테이프로 붙여놓았다.

그러자 이틀 뒤 그 봉투가 없어졌다.

황 노인은 사람들이 양심껏 행동해 줄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으리라 확신했다.

이와 동시에 또 한 주가 지나자 그 한 주간 동안 또다시 모은 것 중에서 베스트 낙서 후보 10개를 이번에도 역시 가운데 화장실 칸 문의 코르크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그럼 지난 첫 번째 한 주간 동안 최고의 공중화장실 베스트 낙서는 어떤 것이었을까?


미친놈!



황 노인은 자존심이 좀 상하긴 했지만, 대중의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게다가 그것을 후보에 올려놓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으니까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그 ‘미친놈’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사실 애매했다. 그러니 황 노인이 지레 자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고 나니까 공장 마당에 갑자기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젊은 애들은 물론이고 노인들도 있었고,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보였다. 게다가 여자들도 많이 왔다. 할머니들도 여럿 있었고. 물론 열심히 운동하기 위해서겠지. 체력은 국력이니까.

그런데 요즈음 황 노인은 왠지 모르게 힘이 드는 느낌이었다.

왜 이러지? 별로 힘든 일도 없었는데. 아마 다른 노인들보다 저녁에 좀 늦게 자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거 보충하느라 낮잠을 실컷 자기 때문에 그동안 잠이 모자란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가? 뭐 다른 때도 늘 그렇게 살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할 일이 없어 맘 편히 두 발 뻗고 있었던 것보다는 오히려 할 일이 없었을 때 조바심을 낸 경우가 더 많았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많으니까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겠지. 게다가 사실 화장실에 게시판을 설치한다 뭐 한다 하면서 법석을 떨었으니까 다른 때보다는 신경을 많이 쓰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까짓 것 했다고 이렇게 힘이 달린다는 것은 좀 억울했다. 또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 한 2주간 괜히 흥분감에 젖어 잠을 조금 설친 면도 있다.

그래서 잠시 공중화장실 생각은 잊어버리고 머리를 식히자고 생각하고서 서울에 사는 막내 여동생네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막내 여동생과 황 영감은 나이 차가 스물이나 난다. 옛날로 치면 자식뻘이다. 그 사이에 일곱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민을 갔고, 셋은 아주 어렸을 때 몹쓸 병과 끔찍한 사고로 모두 죽었고, 둘은 10여 년 전에 황 영감보다 먼저 차례로 저세상에 갔으며, 이제 막내 여동생과 황 영감 둘만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다.

할멈은 왜 조용히 살고 있는 시누이에게 가서 힘들게 하느냐고 핀잔을 준다. 하긴 황 영감 형제는 모두 힘들게 살아왔다. 그 고생한 이야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풀어놓으련다.

어떻든 여덟 남매 중 막내 여동생이 제일 잘 나갔다. 한때는 국회의원 하겠다고 이 정당 저 정당에 기웃거리기도 했었는데 그런 거 다 헛일이 되고 말았다. 머리도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시집도 잘 가서 한 재산 모았는데 정치판 근처에서 어물거리다가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말았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재산은 많이 없앴어도 사는 데는 큰 불편이 없다. 자식들이 속을 많이 썩여서 탈이지만.

그런데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거지? 요즘은 그리 많이 먹지 않는 것 같다만 아무튼 생선 자체는 일미라고 한다. 준치는 잔가시가 많은 생선이어서, 가시를 바르는 동안 식욕이 동한 탓에 진미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황 영감은 해본다. 어떻든 준치는 한자로 시어(鰣魚)라고도 하고 진어(眞魚)라고도 하는데, 물고기 중의 물고기라는 뜻에서 진어라고 했다고 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시어, 즉 준치를 중국 4대 미인 중 하나인 서시에 비유하기도 했다. 참고로, 중국 4대 미인은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기원전 한나라 시대의 왕소군(王昭君), 조조, 손권, 유비의 위오촉 삼국시대의 초선(貂嬋), 그리고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를 뽑고 있다. 이 중에서 특이하게도 초선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래서 초선 대신 항우의 애첩 우희(虞姬)를 넣기도 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썩어도 준치라고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썩어도 도미라고 하는 것을 보면 나라마다 입맛도 달라지는 것 같다.

어떻든 할멈 말을 듣고 보니 서울까지 간다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전처럼 차를 운전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버스에 전철에 또다시 택시나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이미 경험한 바가 있어서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괜히 길에서 시간 낭비하고 힘 쏟고 하다가 고생만 실컷 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여동생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만 나누고 말았다.

어떻든 좀 쉬자고 한 김에 황 영감은 공중화장실에는 이틀 동안 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이 쑤셔 안 나가고는 못 배길 것 같았는데, 막상 마음을 그렇게 먹고 나니 버틸 만했다.



그러나 사흘째가 되자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을 찾아 공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화장실 한 칸 안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왕성하게 생산해 낸 각종 낙서를 쳐다보면서. 거기에는 별의별 내용이 다 있었다.

게다가 마침 선거철이어서 한 표 달라는 말, 저쪽 편 험담하는 글, 어느 정당에서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있다느니 하는 내용. 어느 후보의 뒤를 캐보니 어떻다든가 하는, 소문인지 괴담인지 아니면 누명인지 모를 수상쩍은 것들. 하여튼 정치판이란…….

그러고 보니 베스트 낙서에 투표할 때도 혹시 부정이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또는 낙서를 한 그 장본인이 아무도 몰래 자기 낙서에 하트를 잔뜩 갖다붙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무도 없는 으슥한 때에 어느 누군가가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더니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모자도 푹 눌러쓴 채 검은 선글라스까지 끼고서, 물론 시커먼 옷을 입고서는 주변을 흘끔거리면서 화장실 건물 뒤편으로 스르르 숨어들었다가, 잠시 뒤 고개만 살짝 내민 채 여기저기 둘러보고는 얼른 화장실 안으로 소리도 내지 않고 들어선다. 그리고는 하트 스티커를 한 움큼 집어들고서 마구마구 붙이는 것이다. 거의 빛의 3분의 1 속도로. 자기와 관련되었거나 자신이 점 찍어둔 낙서 아래에. 또는 자기 낙서 아래에.

안 되지!

황 영감은 두 손의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섰다. 화장실 안에서. 그리고는 아차, 아직 아래를 닦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라 얼른 다시 앉았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지. 다른 나라에서는 혹 그런 일이 있을지 몰라도 내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황 영감은 대한민국 국민의 성숙한 선진 민도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일인일표!

정정당당!

선비정신!

다른 나라에서야 설사 그런 일을 저지른다 해도 대한민국 안에서는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에 휘말릴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비록 공중화장실 낙서 투표에서라도.


Ψ Argumentum ad Populum | 대중심리를 이용한 논증의 오류. 즉 ‘남들도 그러니까’에 해당한다. 토론 중 논리가 빈약할 때 많이 사용되는 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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