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itio Principii
두 번째 주 공중화장실 베스트 낙서는 이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좋았어. 성찰의 시간. 그런데 왜 자기 집은 놔두고 이 먼 공중화장실까지 와서 성찰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래도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 모양이다. 자기 집 화장실에 들어가서 성찰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핸드폰을 들여다보겠지. 옛날 같으면야 신문이겠지만.
그것이야 어떻든 자베르 형사에게 쫓기던 장발장이 도둑인 자기 자신의 장발장과 또 하나의 자신인 마들렌 시장 사이에서 고뇌하며 중얼거린 말 ‘나는 누구인가?’ 또한 자기 자신과 인간을 철학적으로 돌아다본 데카르트의 저서 《제1철학에 관한 성찰》. 둘 다 모두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폐허가 된 이 공장의 공중화장실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떻든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택했다. 거창하게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철학을 한다. 화장실에서까지. 그렇다고 이것을 개똥철학이라고 비하하지는 말자. 인간은 고귀한 존재이니까. 개똥보다는 철학이, 철학보다는 인간이 소중하지 아니한가.
어떻든 이 선택은 아주 중요하다.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철학의 수준이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을 나타낸다는 말도 있다. 따라서 화장실 철학이야말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하지 아니한가.
황 영감은 봉투에 1만 원짜리 상품권을 넣을 때 마음이 뿌듯했다. 인류의, 특히 대한민국의 철학정신에 보답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고 나서 사흘째 새벽 볼일을 보러 화장실 칸에 들어간 황 노인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마분지가 꽉 찬 것이다. 앞뒤옆위가 모두. 그래서 서둘러 볼일을 마치고 다른 두 칸으로 가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이거 그냥 놔뒀다간 벽면에다가 새카맣게 낙서할 판이다. 아니, 총천연색으로.
안 돼!
그래서 황 영감은 서둘러 낙서로 꽉 찬 종이를 떼어내고 새것을 붙여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황 노인은 흐뭇했다. 이제야 슬슬 불이 붙었군. 그래, 맘껏 낙서해라. 내가 매일이라도 새 종이 붙여줄 테니까.
게다가 황 영감의 마음을 더욱 흡족하게 해주는 것은 공장 마당으로 운동하러 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동네에까지 소문이 났는지 처음 보는 사람도 많았다. 사실 황 영감은 이 동네 터줏대감이다 보니 서로 말도 안 하고 인사가 없어도 얼굴은 대강 안다. 가끔 이사 오는 사람이 있어서 낯선 사람이 나타나도 며칠 지나면 곧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모두 동네 인물은 아니다. 황 영감이 저 먼 동네에 갔다가 본 사람들까지 오는 것이다.
이거 앞으로는 입장료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성인 100원, 경로우대 50원. 미성년자는……, 출입금지.
은행에 가서 미리 동전을 바꿔놔야겠는데.
황 노인은 실현 가능성 없는 공상을 하면서도 입가에는 슬그머니 미소가 감돈다.
그러나저러나 사람들이 많아지니 황 노인은 더욱 바빠졌다. 우선 화장실 청소가 급한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가서 쓸고 닦고 했다. 그런 중에도 사람들이 비교적 깨끗이 사용하는 것이 고마웠다. 어떤 보답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곰곰 생각하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책. 그렇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서 볼일 보고 낙서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무런 할 일이 없어서 무료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책을 비치해 두는 것이다. 설마 화장실 책을 가져갈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도가 낮지는 않을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그럼 어떤 책? 성경이나 불경? 택도 없다. 아니, 아니다. 화장실 낙서판에 교회 스티커도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정말로 성경, 불경, 뭐 또 다른 종교들의 서적을 갖다놓자는 것은 아니고,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만화책이었다. 짧은 소설이나 시집도 괜찮을 것 같고. 그렇지만 너무 재미있는 것은 안 된다. 그렇잖아도 사람들이 슬슬 몰리기 시작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화장실을 점령하고서 책 다 읽을 때까지 앉아 있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일단 시험적으로 세 칸에 각각 다른 종류의 책을 갖다놓기로 했다. 표지를 비닐 커버로 잘 감싼 다음, 화장실 비치용이니 반출금지니 하는 말은 전혀 써놓지 않았다. 일부러. 민도를 알아보려고. 첫 번째 칸에는 《세계명시선》, 두 번째 칸에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세 번째 칸에는 만화책.
그랬더니 역시 예상대로 책은 한 권도 분실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과가 의외였다. 《세계명시선》에는 누군가가 화장실 안에 비치된 색연필로 시에 걸맞게 책 여백에다 그림을 예쁘게 그려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칸트의 책에는 포스트잇을 붙여서 주석을 달아놓았다. 마지막으로 만화책에는 다른 작품들을 더 갖다달라는 요청을 써놓았다. 낙서가 벽에서 책으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화장실 낙서는 낙서대로 날로 풍성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화장실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줄을 서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 문제가 된다. 이렇게 되면 낙서가 줄어들 수 있고, 화장실이 독서실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을 치우고 ‘화장실 독서금지’ 팻말을 달아놓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생각 같아서는 화장실을 더 지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꿈이고. 하지만 황 영감은 옆에 있는 보기 흉한 3층짜리 폐공장을 모두 화장실 아파트로 만들고서 그 정면 벽에 큼직한 게시판을 걸어놓고 ‘이주의 베스트 낙서’, ‘이달의 베스트 낙서’, ‘올해의 베스트 낙서’ 후보작을 내세우는 공상에 젖어 본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서 어떻든 낙서 화장실에 걸맞게 책은 모두 치우고, 그 대신 화장실 바깥벽에 선반을 달아매고 그곳에 갖다놓았다. 손세정제와 함께. 비 맞지 않게 짧은 처마까지 만들어 달아서.
“참 정성이다, 나도…….”
황 영감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핸드폰 충전기도 설치해 달라, 물티슈나 거울, 생리대도 비치해 달라, 기왕이면 작은 TV 모니터도 설치해 달라 하는 등등의 ‘민원’ 글이 더 많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시청 등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예 캔 커피도 갖다놓으라고 하지. 아마 나중에는 화장실 칸 안에 접이식 침대까지 놔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성숙한 민도를 넘는 게 된다.
하지만 황 영감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 어느 한 지점이 떠올랐다.
“내 기필코 성사시킬 테다.”
한 10년 됐나, 그때 황 영감은 이렇게 마음 다잡아먹고 시청과 미래창조시민당 지역구사무실에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자신의 땅에 3층짜리 건물을 짓는 데 조금이라도 유리하도록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니, 지역구민 민원도 하나 처리해 주지 못하면서 재선을 바랄 수 있는 거요?”
“내가 한 표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입이 얼마나 큰지 알아, 당신들?”
당시 미래창조시민당은 전국의 다른 모든 지역구에서는 참패했는데, 황 영감이 사는 시에서만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 따라서 그 당에서는 지역구민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황 영감은 온 동네 사방팔방으로 다니며 미래창조시민당을 험담하고 다니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니 저들이 발 벗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3개월 동안 사람들 지겹게 만들고서 결국 따낸 것이 겨우 건평을 한 평 늘리는 것이었다. 3층 건물이기에 합해서 3평 늘린 것이었지만, 그 탓에 그 다음 국회의원이 바뀌고 나서 세금을 얼마나 많이 얻어맞았는지 모른다. 세금뿐만이 아니었다. 행정명령이 수시로 내려와 이것 고쳐라 저것 고쳐라……. 미운털이 잔뜩 박혔던 것이다. 법적으로 안 되는 것을 억지 부려 손톱만 한 이익을 얻으려 했다가 그 몇십 배 손해를 보고 말았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하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였다.
황 영감은 가끔 이 생각만 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해진다. 그 일 이후에 황 영감은 동네 돌아다니며 청소도 하고 시청의 여러 행사에 지원도 해주고 하는 바람에 관계가 다소 회복될 수 있었다. 그 덕에 시청에서 공장 화장실 수리 지원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억 때문에 황 영감은 화장실에 여러 요구가 써 있는 것을 보고 씁쓰름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요구를 하는 이들이 바로 황 영감 자신이라 생각하고는 그 사람들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황 영감은 그저 낙서꾼들이 불편함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Ψ Petitio Principii | 개인의 욕구를 전체의 요구처럼 위장하는 일. 논리학에서는 ‘미증명의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입론(立論)하는 오류’라고 한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