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 Quoque
황 영감은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느라 전날 저녁부터 뱃속을 다 비워낸 데다 수면마취를 한 탓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다음날 오후 늦도록 누워 있다가 느지막하게 그 화장실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들이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 약간의 흥분감이 느껴진 것이다.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발생한 것처럼.
황 영감은 서둘러 화장실 칸 안에 들어서자마자 경악했다. 누군가가 뒷면 벽 위쪽에 색색의 풍선을 잔뜩 달아놓은 것이다. 세 칸 모두. 마치 축제와도 같이.
그리고 그 뒷벽의 게시판 종이에는 긴 글이 쓰여 있었다. 자잘한 글씨로. 세 칸 모두에 삼부작처럼.
그 내용은……, 편지였다.
사랑하는 미래 씨에게
이렇게 시작되는 길고 긴 그 글은 연서, 즉 연애편지였다. 짝사랑을 고백하는 절절한 글. 게다가 그 글은 어떠한 문학작품 못지않게 문장이 좋았다. 약간은 예스러운 신파조였지만. 그런 덕분에 가슴이 저릴 정도로 더욱 애절하게 느껴지는 짝사랑의 고통.
그리고 그 편지의 글투를 보니 젊은 사람이 쓴 것이다. 피가 펄펄 끓는 새파란 청년.
또한 그 연애편지 아래에는 숱한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응원하는 글, 문장 자체를 분석한 글, 게다가 비방하는 글까지. 황 영감은 댓글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다 읽어보았다.
그중 하나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미래 씨가 누군지 나는 안다.
아니, 그 정체 모를 사람만 미래 씨를 아는 것이 아니다. 황 영감 역시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떻든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 ‘미래 씨’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된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화장실 낙서판에 붙어 있다고 한다면 기분 좋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붙어 있는데.
황 영감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화장실 칸 안에서도 웃었고, 칸에서 나와서도 웃었으며, 화장실 건물 밖에 나가서도 웃었다. 그뿐 아니라 화장실 옆 폐건물 뒤로 돌아가서도 한바탕 웃었다. 배를 붙잡고 웃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웃었다.
그것이야 어떻든 공장 마당에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모두들 싱글벙글이다. 서로들 터놓고 말은 안 하지만 황 영감은 그 속들을 다 알 것 같았다. 어디 가서 속 한번 시원히 터놓지 못할 글과 그림들을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서 실컷 배설해 놓고 10년 묵은 변비 해결한 것처럼 통쾌해하는 사람, 저 혼자서만 음습한 상상의 공간 속에 갇혀 있다가 만인 앞에 익명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터뜨리는 사람, 이번 기회에 그동안 억눌러 놓았던 상상과 공상의 나래를 활짝 펼쳐서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던 사연들을 만천하에 고소고발폭로하듯이 써 젖뜨린 사람, 다른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재능과 실력과 상상력을 담을 곳 없어 방황하다가 신천지를 발견하고 달려온 사람들 등등이 공장 마당에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자신은 낙서와는 무관하다는 듯한 결백의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한 한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연애편지의 주인공인 ‘미래’를 찾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때아니게 ‘미래’가 바쁘게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미래는 미래요, 현재도 과거도 아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밝혀질지 몰라도 지금은 현재이니 아직 미래가 밝혀질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혹 ‘미래’가 익명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자신들의 동네에서 가상의 ‘미래’를 찾느라 눈들이 이리저리 돌아가고 있었다.
미래여, 그대는 누구신가?
그는 누구이기에 공중화장실에서 히로인이 되어 뭇 사람들의 가슴을 애태우게 하는가?
사람들은 이 구석에 가서도 미래를 찾았고, 저 거리에 나가서도 미래를 찾았다.
아,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 미래여!
그리고 그 미래는 과거의 미래인가, 현재의 미래인가, 미래의 미래인가?
공중화장실 사람들은 오직 미래에만 매달렸다. 미래, 미래, 미래, 우리의 미래…….
낮에도 미래, 밤에도 미래, 생시에도 미래, 꿈에서도 미래…….
우리의 소원은 미래…….
그러나 미래는 여기에도 없었고, 저기에서 찾을 수도 없었고,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거리에서도 방 안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없었다. 나중에는 자신들의 마음속까지 뒤졌으나 그곳에서도 미래는 발견할 수 없었다. 혹 자신들의 기억 속에 있는지도 찾아보았지만, 과거의 기억에도 현재의 기억에도 미래는 없었다. 이렇듯 온갖 곳을 다 뒤져도 미래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이 허해서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미래를 찾아서 헤매는 공중화장실 낙서꾼과 그것을 즐기는 은밀한 탐미자들의 방황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미래는 완전히 실종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다음 수순이 되어 갑자기 미래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는.
그런 중에도 황 영감은 마음을 흩뜨리지 않고 자신이 천업이라 여기는 공중화장실 낙서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자신도 남들처럼 허황된 미래를 좇다가 남은 인생 망칠까 봐 본업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주의 공중화장실 베스트 낙서’ 후보작을 세심히 고르기 시작했다. 작품이 많으니 선정하기도 쉽지 않았다. 황 영감의 선정기준은 이러했다. 우선 전체 낙서를 이 작품 앞부분에 분류한 다섯 유형으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 제일 위와 아래에 속하는 것은 제외했다. 그런 것들은 건전한 낙서문화 풍토를 만드는 데 저해요소일 뿐만 아니라 황 영감의 취향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도층 민심을 잡아야 해.”
황 영감이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크게 실수한 몇몇을 돌아보면 역시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거나 균형감각을 잃고 지나치게 몰두할 때였다. 그것은 집중과는 다르다. 감각적 또는 감정적 편향인 것이다. 그래서 황 영감 개인보다는 약간의 공적인 요소를 감안하여 중간의 세 부류 중에서 고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잡고 있어도 한 주에 네 번이나 종이를 갈아줄 정도로 열렬한 호응을 보인 덕에 후보작 고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는 연애편지가 세 장에 도배되어 있었던 덕에 더 많은 낙서가 남겨진 것이다. 포스트잇 말고도 연애편지에 대한 댓글 형태로 수많은 낙서가 더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다른 때보다 두 배나 많은 20개의 낙서와 만화를 후보로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하나의 고민도 있었다. 즉, 그 연애편지를 올리느냐 마느냐였다. 그 편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서 공적(?)이라 볼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외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다른 어느 낙서에 비해 댓글이 많은 것을 넘어서 좀 과장하면 빗발치듯했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의 문화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그 연애편지도 후보작에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그 전문을 모두 올리기는 어려워 그 역시 고심 끝에 전체가 아니라 조그만 종이에 별도로 ‘연애편지’라는 제목만 써서 다른 후보작들 옆에 붙여놓았다.
“이렇게 되면 공평하지 않을 텐데……. 다른 후보작들은 눈에 보이지만, 연애편지만은 머릿속으로만 봐야 하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그 편지는 공중화장실 낙서에는 어울리지 않을 테니 선정될 리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억울할 일도 없을 테니까.
한 주가 지났다. 그러나 결과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 우수한 낙서들을 모두 젖히고 연애편지가 당당히 1위로 선정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아주 압도적인 표 차이로. 그 연애편지가 어떻게 보면 ‘낙서’라는 취지에는 맞는 않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선택했다. 공중화장실 안에서 신선함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이질적인 것에 대한 맹목적인 호기심에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그 애절했던 편지의 내용에 마음이 끌린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열렬히 호응한 작품이 후보작에 오르지 못할 뻔했던 것이 마지막 선택으로 구제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떻든 그 연애편지가 3주차 ‘이주의 공중화장실 베스트 낙서’에 선정이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상을 주어야 한다. 따라서 황 영감은 그 연애편지에 1만 원짜리 상품권이 들어 있는 봉투를 부착시켜 놓았다.
그러고 나서 이튿날 새벽 황 영감은 평소대로 일찌감치 일어나 공장 화장실로 향했다. 그 시간에는 그곳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황 영감은 볼일을 본 다음 늘 하던 대로 화장실 안을 돌아다니면 깨끗이 청소를 했다. 그러면서 혹시 연애편지의 상품권 봉투를 누군가가 와서 떼어가지는 않나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혹 그래도 누군가가 오지 않을까 잠시 기다리다가 더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황 영감은 게시판으로 향했다. 그리고 ‘연애편지’라고 써붙인 종이 위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봉투 앞으로 갔다.
황 영감은 그 봉투를 떼었다. 그리고는 회심을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바탕 크게 웃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으면서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1만 원짜리 상품권.
이것으로 무엇을 사지?
지금은 죄다 쭈글쭈글해졌지만 그 옛날 황 청년의 편지를 받고 얼굴이 새빨개진 그 고운 처녀, 즉 지금의 할멈 이름은 이러했다.
진미래
할멈이 좋아하는 게 뭐가 있더라……?
그러나 무엇을 산다 해도 옛날에 꽃다운 시절 어여쁘기 그지없었던, 그러나 너무 새침해서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던 그 처녀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얼른 편지를 주고 도망쳐 온 자신이 옛 편지의 내용을 공개한 것 때문에 상을 탔다고 고백하면 안 된다. 그랬다간 할멈에게 죽는 수가 있다.
그것도 공중화장실 낙서판에 옮겨서 써놓은 덕이라고 했다간 확실한 사망이다. 게다가 포스트잇에 미래 씨가 누군지 안다는 댓글까지 황 영감 자신이 써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황 영감은 두 번째 사망을 넘어 부관참시까지 될 것이다. 이런 경우에 필요한 말이 곧 ‘침묵은 금’이다. 말은 적게, 선물은 크게.
황 영감은 상품권 봉투에 기분 좋게 5만 원짜리 지폐 열 장을 집어넣었다.
어이, 싸나이들, 우리 모두 연애편지 한 번쯤은 다 써본 거 아뇨? 마음속으로라도.
그런 거 안 써본 사람들은 인생 잘 모를 거요. 헛산 거라고.
그리고 공중화장실 낙서에 묘한 호기심으로 기웃거리신 신사숙녀 여러분, 우리들 모두 마음은 다 똑같지 않소? 안 그런 분들만 빼놓고. [끝]
Ψ Tu Quoque | tu(=you) quoque(=too). 자네들도 똑같네 그려. 피장파장.
[다음 화 '고독한 자의 시'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