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악장 | 애인의 입술에 입맞추는 마음으로
제8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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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이야기의 제일 첫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12월의 바다로. 그의 곡을 새롭게 만드는 일은 진작에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연주자이지 작곡가가 아니라는 패배자적인 위안을 앞세우고서.
그러나 그 일을 하면서 나는 큰 소득을 얻었다. 그를 살려내지 못한 대신 나를 살려낸 것이다. 음악에서는 패배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음악이 나를 살렸다.
게다가 이와 같은 또 하나의 모순을 나는 지금 또다시 음모하고 있다.
즉, 나는 내 불행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것을 피해 왔다. 그래서 그것을 잊으려고 나를 망가뜨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험적 실험을 통해 실패가 증명되었다. 만일 앞으로도 계속 피해 다닌다면 나는 끊임없이 패배할 것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할 수는 없다.
그와 만나라라.
정면에서 마주 보고 서리라.
그리고 말해야겠다. 잘 가라고. 더 이상 우리는 마주칠 일이 없는 남남이다. 우리에게 과거는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도 짧은 꿈이었다. 현실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미래 역시 아니고.
내가 너를 잊듯이, 너도 그곳에서 나를 잊어야 한다.
앞으로 나는 네가 생각 날 일이 없을 텐데, 혹여 네가 먼저 내가 생각나거든 나한테 그 곡이 생각나게 해다오. 음악으로만 너를 기억할 테니.
그래서 너는 바이올린으로, 나는 플루트로…….
아니지. 그렇게라도 우리는 만나면 안 된다.
네가 준 곡도 내 머릿속에 지워버려야겠다.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바닷가 하늘에서는 이제 막 아주 작은 솜털 같은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눈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늘도 아주 흐리지 않았고, 바다 저 먼 쪽에는 구름은 없이 푸른색만 멀리 퍼져 있었다. 또한 좀 전에 강하게 불던 바람도 거의 잦아든 상태였다. 단지 해안 쪽 하늘에만 옅게 구름이 끼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4월초 제철이 되기 전에 흩날리는 벚꽃 잎처럼 하늘하늘 눈송이가 가련하게 흩어져 내린다. 점점이.
나는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리고 크레파스도. 그리고 종이 한복판에 가로로 가늘게 선을 길게 그었다. 연푸른색으로. 빛과 그림자를 강조하던 이가 도화지를 가로든 세로든 반으로 가르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나는 또 반역을 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아래쪽 반을 감청색으로 설렁설렁 채워넣었다. 그 다음 그 위쪽 반은 옅은 노란색으로 엉성하게 칠했다.
그러고 나서 두 손에 도화지를 올려놓고서 앞으로 내밀고는 천천히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받았다.
옛 솜이불에서 터져나와 흩날려 떨어지는 듯한 작은 솜뭉치들이 도화지 위에 내려서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물자국은 남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도화지에, 시퍼런 바다에, 아리아리한 하늘에 닿자마자 그 속으로 녹아 사라지는 것이었다. 존재도 흔적도 의미도 없이.
신기했다. 눈송이는 물방울이 언 것이라고 우리는 다 배우지 않았던가. 각종 형태의 육각형 무늬로 변형된 신비로운 물리학으로. 그런데 내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로는 눈송이는 물리학이 아니라 화학이었다. 연금술이었다. 마술이었다. 그리고 사기였다. 내 그림 위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는 속임수.
인류는 지금까지 속았다. 현대과학에게 사기 당했다.
눈송이는 사실은 환상이었던 것이다. 신기루.
그와 동시에 환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환각이 내 스케치북 위에서 점점 깊어져 갔다.
나는 어느덧 루체른 호숫가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어머, 웬일이야? 물속에 비친 크리스마스 불빛들을 가져다준다고 내려가더니 벌써 돌아왔네.
나는 그가 호수 비탈로 내려갈 때 눈을 돌려 저 멀리 퍼져 있는 빛의 잔치들을 음미하기 위해 잠깐 바라보았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눈을 돌려보았더니 그가 바로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럼 그렇지. 죽었을 리가 없지.
현실은 영화나 소설하고는 달라.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그런 엉뚱한 상상이나 하고 말야.
나는 그의 팔 틈에 손을 밀어넣었다.
그가 웃는다.
나도 웃었다.
그가 눈물을 흘린다.
나도 눈물을 흘렸다.
도화지가 주글주글해진다.
눈송이들이 너무 많이 도화지 속으로 사라져서 그런 모양이다.
아니지. 나하고 그 사람이 흘린 눈물이 도화지 속으로 들어가서 그렇게 된 것이겠지.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스케치북을 다시 펼쳐보았다. 약간 쭈글거리긴 했지만 거의 반듯했다.
그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다시 색을 덧입혔다. 진하게. 아주 진하게. 그런 다음 한쪽 귀퉁이에 나를 그려넣었다. 뒷모습을. 그리고 바로 그 옆에 그를 그려넣었다. 역시 뒷모습을.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나인 줄, 또 그것이 그인 줄은 모를 것이다. 얼굴이 없으니까.
그런 다음 흰색 크레파스를 들고 여기저기 마구 점을 찍었다. 꼭꼭 눌러서. 그러나 가장자리는 살짝 퍼지도록.
나는 이 그림을 가지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루체른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잠든 곳, 아니 잠긴 곳, 바로 그곳에 가서 던져주리라.
그리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속삭일 것이다.
안녕. 안녕. 안녕.
잘 가…….
그러다가 울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끝]
[다음 화 '종시'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