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6 | 또다시 단팥빵
운한은 편지를 썼다. 그녀에게 주려고. 그러나 연애편지는 아니다. 이미 다른 남자가 있는데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날 밤 전화번호를 준 이유만 적은 것이다. 자신은 절대로 치한도 아니고 다른 불순한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내용을 적었다. 또한 그녀와 정민환 조교의 관계를 잘 알고 있으며, 단지 노교수가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기에 그것을 알고 싶어서 전화번호를 주려고 했을 뿐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 편지를 정말로 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한은 그 편지를 자신의 지갑에 집어넣었다. 혹시라도 그녀를 만나면 건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서.
그러나 문제는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운한은 오전에 집에 있을 때 일부러 그 골목길을 여러 번 지나가 보았다. 그전에는 가끔이라도 마주쳤던 그녀였지만, 지난번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전혀 볼 수 없었다.
학교에 가볼까? 저번에도 그녀를 찾아 학교에 갔다가 그녀를 만나긴 했는데 역설적으로 그녀와의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하긴 그래도 학교에 가면 만날 확률이 높다.
그래, 가자.
이번에도 운한은 모자 눌러쓰고, 연한 선글라스를 끼고서 학교로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 안의 광경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주변 모든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길을 가지만 오직 운한 자신만은 음울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씁쓰름했다. 그리고 혹여나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해서 숨듯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로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그날 레스토랑으로 가기 전까지 학교 구석구석을 다녀보았지만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운한 자신이 밝은 세상에서 소외된 존재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게다가 학교에 오니 조교에 대한 죄책감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는 운한 자신이 피해자였지만, 그 이후 갑자기 자신이 가해자가 된 느낌이다. 어쭙잖은 짓 때문에 입장이 역전된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쯤은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다 났을지도 모른다. 조교가 슬쩍 현국에게 말을 흘리면, 현국은 그렇잖아도 못마땅한 인간인 운한인데 그 얼마나 퍼뜨리기 좋은 이야기냐 하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남의 여자나 건드리는 놈으로.
운한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뱃속이 쓰렸다. 위의 벽세포에서 염산이 마구마구 분비되는 모양이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운한은 레스토랑으로 갔다. 음식이 잔뜩 쌓여 있지만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운한은 저녁으로 토스트 한 조각만 먹고 일을 했다. 뱃속이 허하자 속이 더욱 쓰렸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레스토랑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강 주임이 운한에게 물었다.
“어디 안 좋은 거야? 요즘 축 처져 있네.”
“아닙니다.”
“힘든 일 있으면 말해.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셰프가 되려고 미국의 저명한 요리학교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의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 캠퍼스에 다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중퇴한 강 주임은 자기가 척 보기에 운한은 천생 셰프 체질이니 한번 도전해 보라고 늘 권하는 사람이다. 이 강 주임은 만나는 이마다 자기가 CIA 출신이라고 말해서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을 즐긴다.
“나 CIA 출신이잖아.”
“저는 영어가 안 돼서 못 해요.”
“도전정신이 약하군. 담도 약하고.”
맞다. 운한은 다른 것은 다 좋다고 쳐도 담대함은 없는 것 같다. 손톱만 한 것을 가지고도 끌탕을 하니.
그날 밤 운한은 그 골목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점검해 보았다.
담대함…….
도전정신…….
무엇이 담대함이고, 또 어떤 것이 도전정신인가? 그것이 저절로 가지게 되는 건가? 본능처럼 타고 태어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거 괜히 억지로 흉내 냈다가 잘못하면 역효과 나는 거 아냐?
운한은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달랜다. 사실 어떤 것이 담대함이고 또 무엇이 도전정신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뒤 가릴 것 없이 한번 무턱대고 나서 봐? 그런데 어디를? 또 무엇을?
그날 밤 운한은 꿈을 무척 많이 꾸었다. 평소에는 꿈을 잘 꾸지 않고, 또 꿈꾸었다 해도 생각이 거의 나지 않았는데 이날은 자다 깨다 하면서 꿈을 꾸었는데도 생생하게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대부분 어린 시절에 형하고 여기저기 다니던 내용들이다. 그것이 이리저리 엉켜서 어지러운 꿈이 된 것이다.
아, 형…….
운한은 형에게 생각을 모았다.
늘 듬직한 형. 무슨 일이 생겨도 당황하거나 헤매지 않고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해결해 나가는 형.
만일 내가 형이라면…….
형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그런데 무슨 문제? 문제가 될 만한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운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갑자기 모든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잘 한 것도 못 한 것도 없는 듯했다. 모두 그저 그런 일. 그런데도 그런 하찮은 일에 사람들은 매달려 있다. 의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실제 이상으로 부풀리며 공연히 일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형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설사 큰 문제가 생겼더라도 정면으로 맞설 것이다.
좋아.
운한은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다음날 운한은 제과점에 가서 단팥빵을 한 아름 샀다. 그것을 케이크 상자에 담아서 학교로 가지고 갔다.
이번에는 운한은 선글라스도 끼지 않고, 모자도 일부러 푹 누르지 않고 평범하게 썼다. 그리고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인 채 인문대로 향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피하지 않고 밝은 얼굴로 가볍게, 그러나 마음으로는 다소 주저거리며 비탈길을 올라갔다.
간혹 얼굴 아는 이가 나타나면 가볍게 미소 지어주고. 그리고 언덕에 올라서서는 일부러 모자를 벗고 원형극장과 그 너머 학생관도 슬쩍 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원형극장 위, 지난번 현국과 앉았던 돌 벤치가 눈에 띄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까짓 거!
운한은 일부러 지난번에 자기가 앉았던 돌 벤치로 가서 털퍼덕 앉았다. 그 당시에는 엉덩이가 조금 차가웠던 것 같은데 이날은 따스했다. 초여름 햇볕을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운한은 그대로 잠시 앉아 있다가 엉거주춤 일어나서 현국이 앉았던 옆 돌 벤치로 옮겨 앉았다. 그곳은 더 따뜻한 것 같았다. 돌이 잘 달구어진 모양이다.
음, 현국이 형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인가 보네…….
그렇겠지. 일부러 모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운한은 상자에서 단팥빵 봉지 하나를 꺼내어 현국이 앉았던 돌 벤치에 놓고 일어섰다.
형도 이거 하나 잘 드시고 인생을 따뜻하게……. 알겠수?
운한은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서서 단팥빵을 보았다. 아깝다……. 할머니가 보셨으면 아쉬워할 텐데.
운한은 다시 몸을 돌려 인문대 쪽으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운한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노교수 연구실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갔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신기하게도 아는 사람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누구라도 보았으면 단팥빵 하나씩 나눠주었을 텐데.
운한이 노교수 연구실 앞에서 노크를 하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돌아다보았더니 정민환 조교였다.
“어? 웬일이냐?”
운한은 말없이 단팥빵을 하나 꺼내주었다.
“이거 뭐야?”
운한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고서 문을 살짝 노크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조교가 운한 옆으로 와서 문을 연다.
운한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방 입구에 대기실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각종 상자가 잔뜩 쌓여 있는 공간이 나왔다. 운한이 언젠가 한 번 와봤을 때와 똑같았다. 운한은 입대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이곳에 와서 그 공간을 정리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 안쪽에서 노교수가 일어나서 책상을 돌아 나온다.
운한 뒤에서는 조교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것 같았다.
운한은 노교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어, 그래, 그래. 김 군이군. 그래, 어서 와.”
운한은 안쪽으로 들어가 상자를 교수에게 내밀었다.
“응, 이게 뭐야?”
“간식 좀 사왔습니다.”
“어, 그래? 잘됐네. 그렇잖아도 입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노교수는 어린애처럼 반색을 한다. 운한은 마음이 뿌듯해졌다.
“상자 좀 열어봐. 같이 먹세. 정 선생도 이리 오고.”
운한이 내민 상자를 조교가 받아서 노교수 책상 앞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았다. 책과 논문 등이 잔뜩 쌓여 있는 낡은 탁자 한옆에.
조교가 자신이 받은 빵 봉지는 탁자 한쪽에 올려놓고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는 비닐봉지에 하나씩 들어 있는 단팥빵을 여러 개 꺼낸다.
“오, 그게 뭐야?”
“단팥빵입니다.”
운한이 대답했다.
“단팥빵? 어허, 그거 먹어본 지 정말 오래된 것 같은데……. 맛있겠어. 우리 어렸을 땐 단팥빵이 제일 좋았지. 50년도 더 된 것 같다. 그거 먹어본 게.”
그때 교수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모두들 그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녀였다.
“어서 와라.”
노교수가 반갑게 말을 하자 그녀가 노교수를 보고 미소짓는다. 노교수 옆에 서 있는 조교에게도 미소를 보내는 것 같았고.
그러나 운한도 쳐다보기는 한 것 같은데 별 표정은 없었다.
운한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들 알아차리지 못하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녕하세요?”
운한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목례로 답한다.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그러나 그것은 노교수와 정 조교를 향한 미소였다. 운한은 여전히 이방인이요 우주인인 듯했다. 아니, 치한이겠지.
운한의 가슴은 또 한 번 얼어붙었다.
“잘 왔다. 여기 와봐라. 김 군이 이거 사왔다.”
그녀의 눈이 상자로 향한다.
“이거 단팥빵이다. 너 요즘 이거 먹어봤냐?”
그녀는 밝은 얼굴을 하고 단팥빵을 바라본다.
“아뇨. 안 먹어봤는데…….”
그녀는 탁자로 오더니 단팥빵 하나를 집어든다.
“나갔다가 이따 다시 올게요.”
그녀는 운한을 살짝 쳐다보는 것 같더니 이내 돌아선다. 미소를 지었는지 얼굴을 찡그렸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그녀가 얼른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뒤를 조교가 뒤따른다. 그녀가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다.
운한은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 혹시……. 교수님 댁이 의왕인가요?”
그러자 조교가 고개를 돌려 먼저 대답한다.
“아냐. 일산이야.”
운한은 한번 더 눈을 깜빡였다.
“그럼, 교수님……, 따님이 쌍둥이인가요?”
노교수의 눈이 커진다. 그와 동시에 문가에 서 있던 그녀도 몸을 돌려 운한을 쳐다보았다.
“자네……….”
노교수의 표정이 변한다. 의문으로.
“그것을 어떻게 알았나……?”
그녀도 몸을 돌려 이쪽으로 향한다.
“그거 아무도 모르는 건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을 한 것 같았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아차 싶은지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 가린다.
“어렸을 때 잃어버렸어.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노교수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했다. 그러나 눈은 의문부호로 가득 차 있었다.
“제가……, 제가 그 따님을 봤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