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사랑 (5)

골목길 사랑 5 | 초라함

by Rudolf

골목길 5 | 초라함



여자는 운한이 수작을 거는 것으로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자기 아버지 앞에서 남자의 손까지 잡고 있었던 여자에게 수작을 걸 사람이 어디 있을까? 혹 운한을 몰라본 것인가? 학교에서 만난 것은 잊어버린 채 단지 고등학교 뒷골목 길에서 몇 번 마주친 남자로만 안 것일까?

어떻든 운한으로선 황당하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다시 이 골목길을 다닐 수 있을까?

혹시 여자는 이 골목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서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잖아도 조교한테 찍혔는데, 앞으로는 치한으로, 남의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뻔뻔한 인간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현국과 조교의 승리로 돌아가고 만다. 학교에서 소문도 쫘악 날 거고.

말도 안 돼.

운한은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순식간에.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운한은 혼란스러웠다.

운한은 레스토랑에서 자잘한 실수를 여러 번 했다. 주임이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한다. 운한도 자신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주임의 말대로 일찍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그러나 운한은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골목이 무서웠던 것이다. 여자는 낮에 그 골목을 지나갔으니 오늘 밤에는 또다시 그 골목길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다시는 그리로 다니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평생 서로 마주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운한은 그 골목길이 갑자기 두려워진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리로 다니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일부러 새로 생긴 아파트 앞으로 해서 돌아서 갈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쩌면 그녀도 그 길로 돌아서 가다가 서로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운한은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로 난감해진다.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사를 가지 않는 한 그 골목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운한은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날 밤에도 그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잔뜩 겁에 질려 주눅이 든 채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뒤로 다가와서 어깨를 탁 치기라도 하면 심장이 툭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누구라도 어느 날 갑자기 치한으로 몰리게 되면 비슷한 마음이 들게 되지 않을지……. 그런데 운한에게는 노교수와 조교와 현국까지 개입될 수 있어서, 잘못하면 학교에서 매장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학교로 옮긴다 해도. 그리고 그 뒤로는 두고두고 안 좋은 소문이 퍼지겠지.

이거 죄다 그 ‘째지지 아니한가’에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겸손치 못하고 자중하지도 못했던 대가를 받는 것이다.

혹 이 일도 세월이 지나면 다 잊혀져 버릴 수 있을까? 잠시 망신스러워도 숨죽이고 있으면 지나가 버리려나. 그래서 운한으로서는 마침맞게 군대에 가게 만들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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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덧 운한은 골목길 한가운데쯤까지 왔다.

운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시간은 9시도 안 되었는데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다. 이 골목은 그래도 사람들이 꽤 지나다니는 길이다. 동네는 허름하지만, 그 대신 사는 사람은 많아 이 길도 붐빌 때는 아주 비좁아 사람들하고 부딪치며 다닐 때도 있다. 그러나 이 밤 운한의 심정을 알아주듯 골목은 한적하고 우울한 감마저 도는 것이었다. 보안등들도 어딘지 침울한 것 같았고. 봄바람이 가끔 불어와 쓰레기 종잇조각이 날릴 때는 마치 늦가을 황량함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골목 저쪽에서 누군가가 막 들어선다. 운한은 가슴이 철렁했다. 여자였다. 그러나 어느 아주머니. 터덜터덜 지친 걸음. 등에는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있고 손에는 두툼한 가방이 들려 있다. 힘겨운 모습. 아주머니는 운한에게는 관심도 없는 듯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고 운한 옆을 지나간다.

하지만 운한은 그 아주머니에게도 죄인인 듯한 마음이 든다. 혹 운한이 오늘 낮에 한 짓이 알려진다면 저 아주머니도 운한에게 사나운 눈길을 보낼 것이다. 아주머니뿐이겠는가. 세상 모든 여자들, 아니 남자들까지도 노려보거나 비웃거나 뒤에서 침 뱉겠지.

갑자기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운한은 화들짝 놀랐다. 무엇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핸드폰을 꺼내보니 형이었다. 그러나 지금 형의 전화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언제나 바른 마음 청년. 대한민국 육군 대위. 키 180cm. 훤칠한 미남. 효자. 모범생. 요즘 세상에 이메일이나 카톡이 아닌 편지를 동생에게 가끔 보내는 고풍스러운 사람.

운한은 형이 지금 자신의 소문에 대해 들으면 어떤 얼굴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도 괜히 형에게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운한은 전화를 받지 않고 그냥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형에 대한 반란.

마음이 씁쓰름했다.

그런데 형은 왜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을까? 그 잘생기고 성격 좋은 총각한테 여자가 없는 걸까? 그러고 보니 형의 사생활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를 잡을 수 없다. 1년에 몇 번 집에 오기는 하는데, 그때마다 할머니 이상으로 집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고치고 수리하고 새로 바꾸어 놓고 칠하고 청소한다. 운한 눈에는 안 띄는 것들이 이상하게도 형의 눈에는 잘 보이는 모양이다. 할머니 눈에도.

아무튼 형이 집에 다녀가기만 하면 완전히 새 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한 번도 운한을 나무란 적이 없다. 운한이 못질 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TV 수신기 위치도 제대로 잡지 못해도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손수 고치고 직접 바로잡는다. 그런 면에서는 할머니와 형은 아주 닮았다. 반면에 운한은 약간 이질적이다. 몽상가적인 기질이 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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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한은 거의 발작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부재중 전화인 형의 번호를 눌렀다.

“어, 운한아.”

“형…….”

운한은 갑자기 말이 막혔다. 그리고 무엇인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컥하는 것이 올라온다.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할머니가 편찮으셔?”

“…….”

운한은 코끝이 매워지는 것을 참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운한아, 무슨 일이야?”

“응, 아무것도 아냐.”

“너 요즘 힘들구나?”

다시 코끝이 매워지려고 한다.

“아냐. 괜찮아.”

“나한테 다 말해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아니, 아주 큰 것이라도.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어.”

“…….”

“운한아…….”

“아냐, 아무 일도 없어. 그냥 감기 걸린 것 같아서…….”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그렇다니까.”

“너 입대하기 전에 내가 한번 올라갈 거니까, 그때 얘기 많이 나누자. 할머니는 괜찮으시니?”

“응, 괜찮아. 늘 똑같아.”

“다행이다.”

“왜 전화했어?”

“왜 전화하긴.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지. 너 요즘 힘든 거 아니지?”

“아냐. 괜찮아.”

“입대하기 전까지 몸 잘 만들어놔야 한다. 몸이 약해서 가면 훈련 때 고생해.”

“알았어.”

형은 항상 세 몫을 한다. 형, 아버지, 어머니. 거기에 할머니 몫까지.

형하고 전화를 끝낸 뒤 운한은 더 침울해졌다. 모범생 형과 문제아 동생. 형하고는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갑자기 형이 부러워지고, 그것을 넘어서 야속해지기도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운한은 여름으로 들어서는 첫 달의 온화한 밤 날씨인데도 어딘지 어깨 위로 한기가 스쳐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 보름달. 둥근 달.

그런데……, 무엇인가 빠뜨린 듯한 느낌.

운한은 발걸음을 멈췄다. 언덕 중간쯤이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저만치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가게.

아차, 단팥빵.

침울해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미소 짓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운한은 성큼성큼 내려갔다. 제과점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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