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사랑 (4)

골목길 4 | 와장창

by Rudolf

골목길 4 | 와장창



조교한테서 전화도 오고 카톡과 이메일도 왔다. 노교수가 운한을 만나서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한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을 굳혔다. 그 학교를 떠나기로. 군에 가서도 계속 공부해서 편입하거나 수능을 다시 볼 생각이다. 그 학교에 더 이상은 미련이 없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마음이 시원했다. 그리고 사실 그 지긋지긋한 한문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문은 그저 남들 아는 정도에 그치고, 이제는 사회에 진출하기 쉬운 학과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배운 한문은 앞으로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웃기는 인간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운한이 사람 좋게 살아왔으면 그것으로 됐다. 이제는 내 인생 내가 개척하는 거다.

운한이 이렇게 결정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운한의 장점은 일단 마음을 먹으면 나머지는 쉽게 털어버리는 데에 있다.

밤 11시에 운한은 또다시 그 골목길을 걸었다. 하지만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이 없다면 인간도 아니겠지.

운한은 앞은 바라보지 않고 아래만 내려다본 채 골목길을 다 지나왔다. 그리고 일부러 제과점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남자 둘이 안에서 빵을 고르기도 하고 계산하기도 한다. 여자는 없었다.

운한은 제과점 앞을 지나 아파트 쪽과는 반대편 언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때 제과점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나온다. 그리고 뒤이어 열린 문으로 흘러나오는 노래.

‘골목길’.

이재민 가수의 ‘골목길’.

신촌블루스 그룹의 ‘골목길’.

운한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왔다는 그 노래들.

운한은 걸음을 멈췄다. 사실 그 노래들은 이 제과점 안에 들어가면 늘 나오는 곡이다. 그런데 그동안 아무런 생각이 없이 듣다가 오늘 갑자기 귀에 꽂히는 것이었다. 이 곡 말고도 그 제과점에서 자주 나오는 노래들. 골목길 어귀에 있는 제과점다운 음악.

‘사랑의 골목길’.

‘늦은 밤 너의 집 앞 골목길에서’.

‘골목길 어귀에서’.

운한은 핸드폰을 꺼내어 그 노래들을 찾아서 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을까 봐 무선 리시버 귀에다 꽂고서. 그 노래들을 찾아서 듣고 또 듣고…….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니 11시 반이 넘고 있었다.

아차, 할머니 기다리실 텐데.


알11-1.jpg


운한은 책상 앞에 앉아서 며칠 전에 사온 책을 펼쳤다. 편입시험 대비 서적. 책만 사오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펴보지 않았었는데, 입대하기 전에 어느 정도 공부를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책장이 넘어갔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니 마음이 답답하고 처량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름대로는 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한문. 야무졌던 그 꿈 이렇게 접어야 하는구나.

사람들은 한문이라고 하면 나이 든 이들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전문적인 학자들 밑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젊은 세대가 한문에는 더 능할 수 있다. 요즘 공무원 시험이나, 아니 고등학교 과정에서 나오는 한문만 해도 만만히 볼 게 아니다. 각종 고시나 직장 시험에도 한문을 웬만큼 공부하지 않고서는 제대도 응할 수 없다. 따라서 한문을 소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본어 공부만 해도 한자는 필수니까. 게다가 한국의 고문학이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도 한문은 꼭 필요하기에 한문의 쓰임새는 상당하다.

따라서 운한이 막상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먹었어도 여전히 미련은 남는다. 게다가 편입시험 책을 앞에 펴놓고 앉아 있으니 한숨만 절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운한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동안 정말로 둥글둥글하게 살아왔다. 특별히 모나지도 않고 사람들과 부딪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웬만하면 웃으며 넘어가 주었다. 아주 심한 경우일지라도 별 대꾸 없이 참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현국과 조교 일에서는 왜 이렇게 즉각적이고도 뾰족하게 반응을 한 것이지? 혹 그것을 예상하고, 또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흘러간 것에 마음이 찔렸던 것일까? 게다가 지난번 한시 시험에서 번역을 좀더 진지하게 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이번 일의 원인 제공자는 운한 자신이 아닐까…….

공부는 안 되고, 후회는 꼬리를 물고, 거기에 자책까지 겹쳐지고.

운한은 책을 앞쪽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려 하는데 방문이 열린다.

할머니.

“이거 좀 먹고 천천히 하거라.”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식혜. 할머니는 1년 사시사철 식혜를 담근다. 운한과 형 광한은 어렸을 때부터 그 식혜를 먹고 자랐다. 특히 형은 할머니의 식혜를 아주 좋아해서 할머니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그 식혜를 병에 담아 소포로 형의 관사에 보낸다. 형은 자신이 결혼하고 나서도 할머니의 식혜는 꼭 받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형을 끔찍이도 아낀다. 형 역시 할머니에게는 큰 효자고.

운한은 할머니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안았다.

“아니, 왜 이려?”

“할머니, 고맙습니다.”

“에그…….”

할머니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운한은 할머니 허리를 두 팔로 꼭 껴안았다. 한 줌도 안 되는 허리. 그 몸피로 못 하시는 일이 없다. 두꺼운 돋보기 코끝에 얹어놓고 바느질과 재봉틀로 옷이란 옷은 다 고쳐주고, 집 안도 매일 아주 깔끔하게 청소해 놓는다. 조그만 연립주택이지만 베란다에서부터 화장실까지 망치 들고 다니며 못 박아 선반 만들고, 망가진 것 고치고, 페인트칠하고, 겨울이면 창문마다 두꺼운 비닐로 덮고, 여름이면 모기망 깨끗이 청소해 놓고, 지붕에서 물 내려오는 홈통 막힌 곳 있으면 겉에서 어떻게 아는지 정확하게 막힌 위치를 알아내어 뚫어놓고, 벽에 금 간 곳 있으면 접이식 알루미늄 사다리 타고 올라가 깔끔하게 땜질해 놓는다. 한마디로 천하장사다. 게다가 조그만 공동마당에 고추와 깻잎을 심어서 반찬도 만들고, 담장 안쪽에 땅을 파서 조그만 항아리를 묻고 김장도 집어넣어서 운한네 집은 김치냉장고가 필요 없다.

또한 형이 때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것 인터넷으로 주문해 주어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호강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운한은 자기가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니 자신이야말로 할머니에게 제일 효도한다고 자부한다. 아무리 잘해도 멀리 떨어진 사람보다는 한집에서 사는 자신이 더 효자이니까. 그것도 앞으로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런데 마음이 왜 이렇게 허할까?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걸까? 그런데 어딘지 배신당한 느낌이 드는 것은 또 무슨 이유란 말인가?

공부도 안 되고, 마음은 흐트러지고, 기분은 찝찝하고, 할머니는 불쌍하고, 운한 자신은 괜히 화가 나고…….


파란하트.jpg
ABCDE11-1.jpg


운한은 점심을 먹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레스토랑 알바는 5시까지 가면 된다. 그런데 다른 데 갈 곳이 없다. 만날 사람도 없고. 사람들은 운한에게 사람 좋다고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운한은 친구가 없다. 속 깊은 친구, 마음을 나눌 친구는 없는 것이다. 세상 둥글둥글 살아서 그런지 모두 겉으로만 친할 뿐 서로 고민 털어놓고 울고 웃고 하는 친구는 없는 것이다. 운한에게 와서 고민을 털어놓은 친구는 있지만, 운한이 자기 속마음 다 밝히고 마음 놓고 대화 나눈 친구는 없다.

바로 오늘 같은 날 필요한 친구가 없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운한의 속마음 다 아시는 할머니는 있지만.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연애상담을 하랴?

연애라…….

운한은 핸드폰 꺼내어 전화번호를 검색해 보았다. 헤어졌다고 말하기도 어렵게 잠깐 스쳐간 여자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들 번호는 없었다. 이미 다 지워버린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혹시나 해서 찾아본 것이다. 역시 없었지만.

같은 과 여학생 전화? 있었다. 그중에서 자신에게 웃음을 많이 보냈던 한 학생.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 다음 통화 버튼 누르려다가…….

아서라. 괜히 우스운 꼴만 당한다.

오래 전 고등학교 때 교회에 잠시 나갔다가 본 여자애들. 그들 전화번호도 다 지워버렸다.

제길. 너무 깔끔 떨었군.

고등학교 동창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한번 주욱 훑어본 뒤였다. 그들 중 특별히 마음 터놓고 이야기해 본 친구도 없을뿐더러 특히 연애 문제로 고민 털어놓고 싶은 친구는 없었다. 그랬다간 괜히 소문만 이상하게 난다.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이 운한은 언덕을 내려가서 제과점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한밤중에는 길 양쪽의 보안등으로 인해 그나마 운치가 있었는데, 한낮의 그 골목은 빈티로 가득 차 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답답하고…….

운한은 그 골목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후다닥 걸어서 거의 끄트머리까지 갔다. 대여섯 발자국이면 골목을 벗어날 것이다.

바로 그때 막 연립주택 모퉁이를 돌아서 들어오는 사람.

그녀였다.

그런데 너무 갑자기, 그리고 코앞에서 마주친 바람에 무슨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지나치고 말았다. 그녀도 그렇게 지나쳤다.

운한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냥 앞만 보고 걸어간다. 그전에는 뒤로 묶었던 머리칼이 짧아졌다. 지난번 학교에서 본 모습 그대로.

운한은 망설였다. 저번에 학교에서 한번 본 것으로 아는 척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게다가 노교수의 딸이다. 하지만 그때 노교수가 운한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부탁’할 것. 노교수님이 운한에게.

“저, 잠깐만요.”

운한이 뒤로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며 불렀다.

그녀는 그냥 걸어간다.

“잠깐만…….”

그러나 그녀는 돌아다볼 움직임 없이 점점 더 멀어져 가기만 한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운한의 목소리는 목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입속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바보같이.


알10-1.jpg


운한은 골목 저 끝쪽으로 동일한 보폭으로 멀어져 가는 여자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아무도 없이 둘만 있는 골목길에서.

운한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쫓아갈까? 말까?

운한은 뛰었다.

여자 뒤로 가까이까지.

“잠깐만요…….”

여자가 뒤돌아본다. 깜짝 놀란 모습. 발걸음을 멈춘다.

운한이 가까이에 가서 멈춰섰다.

“저……, 교수님 잘 계시죠?”

여자가 말은 없이 의문의 표정으로 바라본다.

“실은 교수님이…….”

여자는 미소를 짓는다. 너그러운 미소.

“저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셔서…….”

“성함이……?”

“김운한입니다. 3학년. 지금 휴학했는데…….”

“알겠습니다. 말씀드릴게요.”

“저번에 학교에서 만났는데…….”

여자는 계속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약간 끄덕이는 것 같았다.

“교수님 댁이 요 근처인가요?”

여자의 표정에서 약간 의문부호가 뜨는 느낌.

“아, 아닙니다. 제 말만 전해 주십시오. 제 전화번호는…….”

운한은 갑자기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마땅한 종이가 없었다. 그런데 어젯밤 단팥빵을 사고 받은 영수증이 손에 잡힌다. 운한은 그 종이를 꺼내어 뒷면에다 자기 전화번호를 적었다.

“이곳으로 전화 주시면 됩니다.”

운한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러나 여자는 약간 당황해하며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냥 전해 주시기만 하면…….”

여자는 종이를 받지 않고 갑자기 뒤돌아선다. 그리고는 빠르게 걸어가는 것이었다.

운한은 무안해졌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여자가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다음 화로 계속]

이전 09화골목길 사랑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