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3 | 은하수
그 뒤 열흘 정도 지났지만 운한은 더 이상 그녀를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무덤덤한 듯했지만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입대하기 전에 어떤 썸싱이라도 만들어놔야 아쉽지 않을 것 같은데…….
운한은 학교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사실 학교는 이제 정이 떨어졌다. 같은 과 친구들과도 연락하지 않고 카톡 단톡방도 거의 들여다보지 않는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제대한 뒤 편입시험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복학한다고 해도 그 불편한 사람들은 그대로 있을 가능성이 많으니 학교생활이 그리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 째지지 않는 거겠지. ㅎㅎㅎ.
운한은 갑자기 웃고 싶어졌다.
다산 정약용(1762~1836, 21대 영조38~정조~순조~헌종2)의 ‘불역쾌재행’은 원래 중국 원나라 말과 청나라 초에 활동했었던 중국 최초의 문예비평가 김성탄(金聖嘆, 1610(?)~1661)이 《서상기(西廂記)》라는 희곡을 비평하면서 쓴 ‘불역쾌재33칙(不亦快哉33則)’을 모방한 작품이라고 한다. 김성탄은 청 황제의 폭정을 비판하다 처형당했고, 정약용은 조정의 미움을 받아 유배 당한 것을 보면 두 사람 모두 삶이 평탄하지 않았음에도 그 마음만은 넉넉해서 고난 중에도 ‘째지는’ 글을 쓴 것 같다. 중국의 문호 임어당(1895~1976)은 《생활의 발견》이라는 명저에서 ‘불역쾌재33칙’의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여 ‘Thirty-three Happy Moments’라는 제목으로 소개했고, 그 내용은 책으로 만들어져 지금도 미국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판매되고 있다.
운한은 ‘불역쾌재행’ 마지막 구절 불역쾌재(不亦快哉)의 그 ‘째지는’ 것이 마음에 들어 이 시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그 20수 중 첫 번째 수와 12번째 수를 외우고 있었는데, 마침 다행히 그날 시험에서 그것이 생각나서 인용했었던 것이다.
다행이라고?
그날 그 시를 쓰지 않았다면 일이 평탄하게 되어 혼자서만 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약한 말까지 듣고 휴학하지도 않았을 테니, 오히려 독이 된 셈인데. 이런 경우에 적절한 속담이나 격언이 있을 텐데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운한이 외우고 있는 ‘불역쾌재행’ 첫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跨月蒸淋積穢氛(과월증림적예분)
달포 넘는 장마 끝 곳곳 눅눅하고
四肢無力度朝曛(사지무력도조훈)
사지 늘어지고 아침저녁 노곤터니
新秋碧落澄寥廓(신추벽락징요곽)
초가을 맑은하늘 가이없이 펼쳐져
端軒都無一點雲(단헌도무일점운)
처마 위 하늘은 구름 한점 없으니
不亦快哉(불역쾌재)
이 또한 째지지 아니한가
청명한 가을 하늘을 노래한 이 시 역시 정약용의 배포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몸은 유배되어 옥죄어 있지만 마음은 청명한 가을 하늘 따라 가이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정말로 째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 좋다. 그녀가 몰라주어도, 학교 좀팽이들이 무어라 해도 나 혼자 째지면 그만이다. 할머니 웃음 짓고 단팥빵 맛 나면 더 이상 무어가 부러우리.
신난다.
운한은 씁쓸하고 쓸쓸한 유쾌함을 혼자서 탐욕하며 골목길을 걸었다. 그녀 생각은 외면한 채. 일부러 다른 생각을, 추억을, 기억을 뒤지고 찾으면서.
골목 끝까지 가서 제과점으로 향할 때도, 그리고 제과점 문을 밀고 들어가기 전에도 운한은 일부러 창문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괜히 어떤 영상을 떠올리려 하지도, 또한 막연한 기대감도 갖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마음만 먹은 거지……. 젠장.
아니, 우리 한번 솔직히 얘기해 보자.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예술, 문학, 연극 등등에서 남녀 간의 그 묘한 관계나 감정을 묘사하고 표현한 것 죄다 빼버리고 나면 뭐가 남냐? 이 세상은 남자 반, 여자 반. 그러니 남자 얘기 아니면 여자 얘기 아니냔 말이다. 하늘 얘기, 땅 얘기만 하면 좀 고상해지려나. 그러나 그런 이야기 쓴 사람도 남자 아니면 여자다. 그밖에 나무가 쓰겠냐, 지렁이가 쓰겠냐?
그러니 운한이 그녀를 외면하겠다고 다짐했다가도 또다시 마음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해도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하루에 스물네 번 약속하고 스물네 번 다 깨뜨려도, 또 30분에 한 번씩 마음이 바뀌어도 타박하거나 욕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늘도 운한은 그 골목길을 걸으면서 생각을 열심히 다른 쪽으로 돌렸어도 마음은 오직 하나, 그녀가 나타나 주길 기다리는 데로 가 있었던 것이다. 매일같이 단팥빵 사도 좋으니까 하다못해 제과점에서라도 볼 수 있었으면…….
그러나 길에서는 다 지고 나서 지저분하게 뒹구는 벚꽃잎 몇 장만 흐트러져 있을 뿐이고, 가로등 불빛에 반복적으로 변하는 운한 자신의 그림자만 운한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따라오고 따라갈 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운한은 그 골목길 걸으며 달이 밝으면 달 속에서 달그림자로 그녀를 그려보고, 날이 흐리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 장막에 그녀의 뒷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이제 드디어 그 단계까지 가고 만 것이다.
어느 날 운한은 참지 못하고 학교로 갔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색이 연한 선글라스도 하나 구해다 쓰고서. 혹 아는 이를 만나면 행정처에 볼 일 있어서 왔노라고 할 생각으로. 그녀를 볼 때만 빼놓고. 하긴 그녀가 와서 물어볼 리도 없지만. 그래서 그녀를 보게 되면 이번에는 무조건 먼저 다가가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반가워하는 척하며. 같은 동네 사시네요, 어쩌고 하면서 말이다.
운한은 스파이처럼 몸은 사람들 속에 묻고 눈은 매처럼 번뜩이면서 주변을 살폈다. 인문대 쪽으로 가기는 싫었지만 그곳을 지나가야지만 학생관이 나오니 어쩔 수 없이 그리로 가야 한다. 후문으로 올 걸 하고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사실 늦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한 20분 빙 돌아가면 되기는 한다. 그런데 뭐 죄지었냐, 그런 짓까지 하게.
사람들을 만나면 유쾌하게, 째지게 어이 하고 손 들어주고, 혹 그 아재 만나면 관대함을 베풀어 주고, 그리고 아무도 안 만나면 좀 서운해 해주고 그러면 된다.
“어이, 김 군!”
운한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김 군이 어디 한둘이냐.
운한은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비스듬한 언덕을 걸어올라갔다.
“김 군!”
운한은 저도 모르게 돌아다보았다.
아!
“오랜만이네.”
노교수가 다가온다. 그 한시 시험을 낸 교수.
“아, 예, 교수님…….”
운한은 어정쩡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찔리고 무엇인가 들킨 듯한 느낌이었다.
“휴학했다며?”
노교수가 바로 앞까지 와서 인자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한다.
“군대에 가려고요.”
“오, 그래? 언제?”
“한 달 뒤에 들어갑니다.”
“저런. 아니, 왜 학기는 마치지 않고?”
“예, 저……. 그렇게 됐습니다.”
“한시 공부 별도로 하나?”
“아닙니다. 별로…….”
“지난봄에 그거 아주 잘 썼어. 그게……, 정약용이었지?”
“네, 불역쾌재.”
“아, 맞아. 번역도 잘 했고. 그때 꽤 재미있게 읽었네만.”
“부끄럽습니다.”
“아냐, 아냐.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해.”
노교수는 운한 너머로 눈길을 주며 말한다.
“아, 저기 정 선생이 오네. 음, 그리고…….”
운한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정민환 조교가 노교수한테 인사를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교수님…….”
정 조교와 한 여자가 나란히 붙은 채 걸어오는 것이다. 바로 그녀가.
“아빠…….”
“어, 그래……. 점심은 먹었니?”
무엇인가 어색했다.
정 조교는 운한을 보고 약간 표정이 일그러진다.
“너 왔냐? 오랜만이다.”
“예, 선생님…….”
운한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첫째는 정 조교가 조금 부담스러웠고, 둘째는 노교수에게 왠지는 모르지만 약간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고, 셋째는 바로 그녀에게 무엇인가 모를 배신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뒤죽박죽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뒤이어 노교수가 한 말 때문에 운한은 더욱 난처해지고 말았다.
“저기 민 군도 오는군.”
민 군, 즉 민현국, 그 복학생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동서남북에서 자기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동시에 등장해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마치 연극의 한 무대 같았다. 무대 앞뒤와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주연, 조연, 엑스트라까지 한꺼번에 나와 모두가 한 자리에서 마주치는 것이다.
“교수님…….”
현국은 노교수에게 인사를 하고는 정 조교와 여자 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 중간에 있는 운한은 패스.
운한은 이쯤에서 퇴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교수에게 목례를 한 다음 몸을 돌려서 인문대 쪽 언덕으로 향했다.
“아냐, 아냐. 김 군, 바쁘지 않으면 잠깐 같이 얘기 좀 하지.”
“아, 저는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그럼, 나중에 정 선생이 전화 좀 해줘. 김 군에게. 내가 김 군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
운한은 정 조교에게도 목례를 한 뒤 돌아섰다. 그리고 노교수에게 한 번 더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언덕을 올라갔다.
운한은 갑자기 시시해졌다. 모든 게 다. 그러면서도 운명이라는 것이 참 웃기는 존재라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소소한 일에까지도 관여하는 것을 보니.
운명아, 좀더 거창한 일을 하면 안 되겠니? 꼭 이렇게 웃기는 장면까지 만들어내야 하는 거야? 나는 거기 있는 인물들 다 관심 없거든. 한 사람만 빼놓고. 누군지는 잘 알지? 그런데 꼭 이렇게 어색한 무대 만들어놓고서 내 환상 한 방에 깨뜨려 놔야 속이 시원하겠냐? 이런 식으로 나한테 그런 화면 보여주어서 어쩌자는 거야?
그 화면이란……, 노교수가 정 선생이라고 말했을 때 운한이 돌아다보는 순간 정민환 조교와 노교수의 딸, 그러니까 그녀가 서로 맞잡고 있었던 손을 얼른 놓는 장면을 말한다. 운한의 머릿속에서는 그 장면이 슬로비디오처럼 자꾸만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젓번 골목에서 봤을 때는 머리를 뒤로 묶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커트를 했는지 머리가 짧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해사하고 참 보기 좋았다. 이제는 그림의 떡이지만.
학교에 괜히 왔어.
그런데 노교수님이 우리 동네에 사나? 그 구질구질한 곳에. 하긴 그 골목 위쪽으로 올라가면 얼마 전에 지은 대단지 아파트가 나온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는 그곳. 서울 인근에서 가장 싸게 분양하면서도 미래 전망이 가장 좋다는 곳. 하지만 그 아파트에 가려면 그 골목보다는 고등학교 앞을 돌아서 큰 도로로 가는 게 훨씬 빠르다. 그 큰길이 아파트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굳이 침침한 골목길을 통해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로 다니는 걸까? 하긴 지하철까지 걸어가려면 그 골목길이 약간 빠르긴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에이, 관둬라. 남의 집 사정 내가 왜 걱정하냐? 다 끝난 헛 로맨스인데.
로맨스? 뭐 그런 게 있었기나 한 거냐? 나 참…….
운한은 레스토랑 일을 마치고 밤 11시경에 또다시 그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그 길이 왜 그렇게 허전한 것인지.
운한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면서 골목길 양쪽의 보안등 위로 펼쳐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안등 불빛으로 인해 별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운한은 보안등 불빛이 서로 겹치지 않는 곳으로 가서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던 은하수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다.
운한은 자기 한자 이름 운한(雲漢)이 은하수를 나타낸다는 말을 듣고 한문과 한시에 흥미를 느꼈었다. 그리고 결국 그와 관련된 학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시경(詩經)》의 〈대아역박편(大雅棫樸篇)〉에 ‘탁피운한위장우천(倬彼雲漢爲章于天)’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찬란한 저 은하수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는구나’라는 뜻이다. 이는 은하수를 노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은하수가 밝으면 날이 맑아 비가 오지 않아서 걱정하는 마음을 담은 시이다. 당시 가뭄이 극에 달해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임금이 한탄한 시이다.
그러고 보니 ‘불역쾌재행’에서 운전(雲牋)이라는 단어는 다른 이가 보내온 편지를 뜻하는데, 이는 운한(雲翰)이라고도 한다. 은하수를 나타내는 운한(雲漢)과 한글 발음이 똑같다. 운한의 이름하고도.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그렇게 그렇게 해서 그 운전이 결국 운한 자신에게까지 이어져 그 사달이 벌어진 모양이라고 운한은 엉뚱하게 비약한다.
한편, 은하수는 은한(銀漢) 또는 천황(天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백제 때부터 한강을 한수(漢水)라고 했는데, 이는 중국의 한수(漢水)에서 따온 게 아니라 은하수를 빗댄 것이다. 밤하늘에 도도히 흐르는 은하수를 지상에 내려놓은 것이지. 오늘 밤 당장 한강으로 달려가 보라. 그 너른 강이 온갖 조명과 자동차 불빛으로 인해 은하수가 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은하수의 제주도 방언 미리내는 제주도 말로 하늘의 용을 나타내는 ‘미르’에 강을 나타내는 ‘내’가 합쳐져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영양가도 없고 위로도 안 되는 이러한 생각들을 하면서 오늘 낮의 그 허망한 마음을 희미하게 보이는 밤하늘의 은하수로 위로받으려 하는 헛발 도사 김운한.
그래도 운한은 봄의 밤하늘 가로등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은하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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