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2 | 단팥빵
운한이 레스토랑 일을 끝내고 밤 11시경에 골목길을 걸어갈 때는 늘 왠지 모를 낭만감에 젖는다. 오른쪽 높은 담 뒤로는 고등학교다. 그 담 위쪽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수은 색 보안등과 골목길 연립주택 쪽의 노란색 가로등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영화 장면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특히 겨울에 눈이 내리면 두 종류 가로등의 각각 다른 색으로 비치며 폴폴 떨어지는 눈송이들의 모습이 글자 그대로 환상이다.
하지만 겨울이 되려면 천 년은 남은 것 같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운한은 동해 남해 서해 어느 해상에서 군함 타고 떠돌겠지. 혹 저 먼 대양의 어느 곳에 나가 있으려나.
운한은 두 달 뒤면 해군에 입대한다. 초여름이지만 뙤약볕에서 고생 좀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겨울 바다에 들어가서 오들오들 떠는 것보다는 낫겠지. 여름에는 훈련받고, 겨울에는 이 골목의 눈송이들 대신 겨울 바다 한가운데서 눈 폭풍에 시달리려나.
운한은 약간은 으스스한 느낌을 받으며 따뜻한 늦봄의 밤 골목길을 길게 걸어갔다. 봄에 걸을 때, 여름에 걸을 때, 가을과 겨울에 이 길을 걸을 때 느낌이 많이 다르다. 가을이 되면 학교 담 옆으로 심겨져 있는 나무들에서 이파리들이 한없이 떨어지고, 여름날 비가 오는데 혹 우산이 없을 때면 나뭇잎들이 조금이라도 빗방울을 막아주기를 바라며 학교의 높은 축대 쪽에 바짝 붙어서 걷는다. 그러나 겨울철이면 축대의 그늘로 인해 골목길이 오랫동안 얼어 있기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 같은 따스한 봄날 밤이면 이 골목길은 무언가 모를 기다림 아니면 기대감 같은 것이 몰려와서 어딘지 외로움이 느껴지게 하는 것이었다. 가을도 아닌데. 특히 입대 한 달 반 남겨두고 있어서 그런지 봄의 골목길이 아니라 가을의 그 쓸쓸한 길을 걷는 무드.
골목 저쪽에서 한 여자가 다가온다. 봄날 밤인데도 두툼하게 옷을 입고 있다.
운한은 첫눈에 그 여학생인 것을 알아보았다.
보통은 오전에 운한이 저쪽에서 이쪽 방향으로 걸어올 때 같은 쪽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 밤에 오히려 그녀는 오전에 오던 방향으로, 운한은 그 반대방향으로 가다가 만난 것이다.
이 밤에 어디를 가는 걸까?
그러나 어딘지 반가웠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전혀 아는 척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니 기분이 좀 묘해진다. 아는 척이라도 할까……? 아니지.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그래도 어쩐지 운한은 걸음이 어색해지는 느낌이었다.
혹 상대방도 학교에서 나를 알아보았을까?
그리고 이 늦은 밤에 어디를……?
의식적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하고 지나칠 때보다 운한은 좀더 옆으로 비켜서 지나갔다. 상대방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밤중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여자가 모르는 남자와 마주친다면 결코 편한 마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이다. 괜히 운한만 어색해한 것 같아 멋쩍었다.
그런데 막상 지나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 다음부터 운한은 성큼성큼 걸어서 골목길을 지나갔다.
그 제과점이 문 닫기 전에 가서 단팥빵 사야 하는데…….
운한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그곳은 꽤 늦게까지 문을 여니까.
밤늦게 오는 운한을 기다리지 않고 할머니가 그냥 먼저 주무시면 좋겠는데, 운한이 문 여는 소리에 꼭 일어나서 나와 보신다. 그때 할머니 손에 단팥빵 봉지를 쥐어드리는 것이 운한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 운한이 군대에 가면 할머니는 더 이상 주무시다 깨지는 않겠지.
운한은 할머니를 생각하다가 지방에 내려가 있는 형이 잘 지내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운한 자신이 군대에 가면 형이라도 할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해드리려나.
형은 ROTC 출신 육군 대위다. 요즘엔 차라리 군인이 낫겠다 싶었다. 잘 생각했어. 운한은 자신도 ROTC에 들어갈 걸 그랬나 하고 갑자기 후회가 된다. 어차피 군대 갈 거 차라리……. 하지만 이젠 늦었다.
빨리 가서 할머니 웃는 얼굴 뵈어야겠다.
운한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다음날, 역시 밤 11시경에 운한은 그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좀 전까지만 해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 어젯밤의 그 장면.
혹 오늘 밤에도 만날까?
골목 저 끝에서 한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나 첫눈에도 그녀가 아닌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오는 느낌. 그러나 뒤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녀라면 저렇게 빨리 오는 걸음은 아닐 것이다.
어제 말을 붙여볼 걸 그랬나. 저 혹시 대한대학에 다니시나요? 생활관 매점에서 한번 봤습니다. 집이 이 근처인가 봅니다…….
하지만 미적거리다 늘 버스 놓치는 자기 자신.
운한은 피식 웃었다.
미적거림의 미학. 느림의 미학이겠지.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시티(Slow City) 운동. 공식 명칭은 치타슬로(Cittaslow)라고 한다. 치타(citta)는 이탈리아어로 도시(city)를 말한단다. 그러나 이것은 미적거리는 것과는 다르다. 전통을 중시하고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
하긴 운한도 슬로족에 속한다. 매사가 느릿하며 세상 걱정 없는 것처럼 살아가니까. 적어도 남들이 보기엔. 그러나 운한은 자신이 매우 조급한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항상 걱정을 안고 살아가니까.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늘 시간에 쫓긴다. 그래서 나중에 밀려서 고생하지 않으려고 일이 생기면 얼른 해치운다. 그런데도 막상 중요한 일에는 미적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었는데도 질질 끌다 놓쳐버리곤 했다. 여러 날 망설이다 큰맘 먹고 말 붙이려 했는데 하필 그날 어느 녀석 옆에 바짝 붙어서 재잘거리며 다가오는 것이다. 운한보다 키도 크고 잘생긴 놈하고. 그러면 운한은 잔뜩 주눅이 들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거나 외면하고 지나치는 것이다. 못난 놈.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어제 마주쳤을 때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걸었어야 했다. 휴학하기 전에 학교에서 보았을 때는 그럴 계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냥 넘어가기는 했어도.
어? 그렇다면 마음에 든다는 건가?
운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뭐냐, 이건? 그냥 심심해서 말 붙여보려는 거야? 조금 있으면 군대 가는데, 훈련받다가 편지 보낼 사람 하나 만들어놓으려는 거야? 겨우 그것 때문에?
아니, 뭐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눈에 확 띄는 건 아닌데, 생긴 것도 얌전하고 괜찮잖아, 그 정도면. 아니, 내 주제에.
운한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구시렁구시렁하고 걸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이 탁 트인다.
앗, 그 여자다.
운한이 골목에서 막 벗어나 오른쪽 제과점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그녀가 제과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어제와 비슷한 옷차림으로.
운한은 마치 들킨 마음처럼 가슴이 움찔했다.
운한은 멈춰서서 유리창으로 불 환한 제과점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자가 빵 소쿠리에서 이것저것 고르는 모습이 보인다. 아, 단팥빵이다.
운한은 멍한 눈으로 제과점 안을 들여다보다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무턱대고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계산대 쪽으로 돌아선다. 운한은 진열대 쪽으로 갔다. 단팥빵 소쿠리를 슬쩍 쳐다보니 아직 몇 개가 남아 있다.
단팥빵 어제도 샀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운한은 쟁반에 단팥빵 봉지를 하나하나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돌아섰다.
여자도 돌아선다. 그리고는 운한의 쟁반으로 눈길을 준다. 운한이 아니라.
하지만 여자는 무표정한 채 그냥 나간다.
운한도 무심한 척하고 계산대로 갔다.
아주머니가 웃으며 맞는다.
“어제 사가지 않았어요?”
“네……. 너무 맛있어서요.”
운한이 계산을 끝내고 돌아서서 창밖을 내다보니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또 한 박자 늦었다. 아니, 반 박자.
이 단팥빵은 내가 다 먹어야겠군. 운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