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1 | 시험지
雲牋闊展醉吟遲(운전활전취음지)
草樹陰濃雨滴時(초수음농우적시)
起把如椽盈握筆(기파여연영악필)
沛然揮洒墨淋漓(패연휘쇄묵임리)
不亦快哉(불역쾌재)
운전지 활짝 펴고 시상 취해 즐길 제
초목그늘 짙어지고 빗방울 떨어져서
혓가래 같은 붓 한 손에 불끈 움쥐고
일필로 휘두르자 먹물뚝뚝 떨어지니
이 또한 째지지 아니한가
운한은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서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봄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3주 지났는데 느닷없이 시험을 본 것이다.
마침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는데, 운한은 마치 자신이 해석한 한시의 구절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통쾌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학생들을 별로 괴롭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노교수님이 강의에 들어오자마자 느닷없이 시험지를 나눠주는데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았었다. 그랬더니 역시 예상대로였다.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백지였던 것이다.
교수님이 칠판에 쓴 문제를 요약하면 이렇다.
옛 한시 한 편을 쓰고서 해석하라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것이든. 한시는 오언이건 칠언이건 상관없지만, 다만 한 편으로 마무리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한두 행은 안 되고, 길이는 최소 4행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운한은 어떤 시를 써야 할지 막막했다. 다른 친구들을 둘러보니 다들 운한과 같은 심정인지 그들도 주변을 돌아다보는 것이었다. 모두들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남들 쳐다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운한은 이름과 학번을 써놓고 멍한 눈으로 시험지를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새하얀 백지. 마치 안개 속에 들어간 듯, 외국여행 갈 때 비행기가 구름으로 들어가면 세상이 온통 새하얗던 것과 같은 느낌.
운한은 시험지 가장자리에 연필로 살짝 둥글둥글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아니라 낙서 비슷하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 저도 모르게 하는 운한의 습관.
운한은 문득 낙서를 의식하고 나서 지우개로 살살 지웠다.
그러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구름. 구름 문양.
그래, 구름 문양이 들어간 종이. 운전지(雲牋紙, 雲箋紙). 전(牋)은 종이나 편지를 뜻하며, 전(箋)은 무엇을 적어서 붙여놓는 종이라는 뜻의 ‘찌지’를 의미해서 두 한자의 뜻이 비슷하다. 그리고 또 하나, 운전(雲牋)이라고 하면 남이 보내온 편지를 높여서 이르는 말이지만, 운전지(雲牋紙)라고 하면 옛 선비들이 쓰던, 바탕에 구름 문양이 들어간 한지를 뜻하기도 한다. 잘은 모르지만 그럴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구름처럼 하얀 종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야 어떻든 운한은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운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한시가 생각났다. 다산 정약용의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어떻든 이러한 생각이 떠오른 덕분에 운한은 정약용 선생의 《불역쾌재행》 20수 중 12번째 연을 자신의 번역에 나오는 대목대로 일필(휘지)로 써놓고서 마음 가뿐하게 제일 먼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운한은 자신이 번역한 글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운한은 특히 한시를 번역할 때 몇 행이 되든지 모두 길이를 똑같이 맞춰놓는다. 그러다 보면 약간 억지 같은 단어들도 나오는데, 운한은 그것이 오히려 시구(詩句)의 멋을 살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번역에서도 원래는 ‘움켜쥐고’라고 해야겠지만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움쥐고’라고 한 것이 오히려 시적 멋을 높이는 것이라고 자부하며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까래’라고 해도 될 것을 일부러 옛말인 ‘혓가래’로 썼다.
그러나 나중에 제일 마지막 구절 ‘不亦快哉’를 ‘이 또한 째지지 아니한가’로 번역한 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튀지 않고 그저 ‘유쾌하지 아니한가’ 정도로만 썼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으련만. 점수가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아무튼 운한은 기분 좋게 인문대에서 나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대낮부터 간다고 해서 돈을 더 많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가서 어기적거리다가 저녁 주는 거 먹고 일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음날 운한이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마다 불평이 대단하다. 노교수가 그냥 쪽지시험이라고 하더니 너무 엉뚱하지 않냐고 하면서. 그러면서 대다수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운한에게 어떻게 그렇게 일찍 쓰고 나갔느냐고 묻는다.
운한은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어서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을 했다.
“대강 쓴 거지 뭐.”
이 ‘대강’이라는 말도 문제가 되었다.
아무튼 모두들 징징거리는데 운한은 맞장구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어서 분위기를 살피다가 슬쩍 빠져나가 매점으로 갔다. 특별히 살 것은 없지만 공연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띈 사람. 그녀는 친구들과 어울려 잡담하며 막 매점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여자…….
맞다. 그 골목길. 몇 번 마주쳤었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었지. 우리 학교 다니는구나.
운한은 그녀를 좇아 눈과 머리가 돌아갔다. 그녀는 복사실 쪽으로 가는 모양이다.
여자는 운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려는 순간 여자가 돌아다본다.
운한은 저도 모르게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물건을 집어들었다. 이름을 보니 포스트잇 플래그라고 한다. 남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본 것 같기는 했지만 운한 자신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쩐지 도로 내려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뒤통수가 뜨뜻해지기도 했다.
운한은 억지로 뒤돌아보지 않고 계산대로 향했다.
매점을 나서면서 복사실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학생 둘이 나온다. 남학생이다. 운한은 고개를 돌려 건물 밖으로 향했다. 학생관 휴게실은 항상 복잡하다.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바깥 계단을 나서자 운한은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진다.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럼, 무엇을 잊어버린 것일까? 그런데 무엇을?
알 수가 없다. 이 허전한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운한은 강의시간에 늦게 들어갔다. 일부러. 친구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잠깐 좀 보자.”
뒤에서 누군가가 부른다. 운한이 뒤돌아보자 복학생인 현국이었다.
“아, 형. 무슨 일인데요?”
“하나 얘기할 게 있어서.”
운한은 좀 머쓱했다. 현국과는 거의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현국은 늘 공부에만 매달려 있고 조교 일을 도와 장학금을 받고 있어서 시간도 별로 없는 사람이다.
현국은 운한에게 다가오더니 건물 밖으로 나가자고 말하고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간다. 운한은 성격이 원만한 편이어서 어느 누구와든 불편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별로 대화도 해보지 않은 현국이 갑자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그와 특별히 따로 이야기할 건더기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복학생에다가 조교 아래에서 일을 하니 외면하기도 어렵다.
운한은 께름칙한 마음으로 현국을 따라갔다.
현국은 인문대 밖에 나가서 원형경기장 위에 있는 돌 벤치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곳에는 어떤 학과인지 30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여 군무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한물간 아이돌 가수 음악을 틀어놓고.
운한이 벤치 옆에 가서 멋쩍은 표정으로 섰다.
“앉아.”
“무슨 일이에요?”
“별 거 아냐. 앉아.”
운한이 바로 옆에 떨어져 있는 돌 벤치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너 어제 시험 아주 잘 썼다더라.”
운한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군무 리듬에 발로 장단을 맞추었다.
“너 하나야. 제대로 시 쓴 애가.”
운한은 현국을 돌아다보았다. 아무런 표정 없이.
“그런데 정 선배가 뭐라 하던데.”
정 선배는 정민환 조교를 말한다.
“너보고 다 좋은데 건방지다고 하더라. 시험지에 장난쳤다며?”
운한은 눈을 한번 깜빡였다.
“답안지 너무 잘 쓰는 거 안 좋아.”
현국이 고개를 돌려 아래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너 혼자만 잘하는 것 같잖아. ‘대강’만 써도 그 정도고.”
현국은 벤치에서 일어나 슬쩍 웃고는 돌아서서 걸어가 버렸다.
운한은 혼자 남았다. 아래쪽 운동장에서는 저들끼리 신나 있고,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저들끼리 재잘거린다. 모두가 바쁜데 운한은 한가하게 혼자 남아 천지간에 독야청청이 되고 말았다.
멋지다. 독야청청.
운한은 오후 강의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연립단지가 나온다. 그 뒤로 길게 난 골목길.
골목길 끝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조그만 상가가 나온다. 그 아래층에 새로 생긴 제과점.
운한은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단팥빵을 사기 위해서.
운한은 단팥빵이 가득 든 큼직한 봉투를 한 손에 들고 언덕을 올라갔다.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할머니가 하나씩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워서 잡수신다. 아직 집에 가지도 않았는데 할머니 웃는 얼굴이 보인다. 운한의 마음이 괜히 배불러 온다.
운한은 휴학을 했다. 학교 친구들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군에나 가야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해군에 갈 거야.”
현국한테서 만나자는 카톡이 왔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만일 전화나 이메일로 더 연락이 왔다면 혹 시험지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것들로 대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국은 카톡 하나로 끝이었다.
운한도 그것으로 끝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