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단편열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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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가 왔다. 각종 고지서나 공적인 내용 외에는 최근에 특별히 받아본 적 없는 편지. 부고나 청첩장도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보내는 요즘 시대에 사적인 편지가 온 것이다.
발신인, 그 사람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인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5년 전에 자살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편지가 그가 죽기 전에 보낸 것이라는 점. 더욱 놀라운 일은 우표에 찍힌 소인을 보니 그가 자살하기 일주일 전 날짜였다. 어쩐지 편지봉투가 좀 지저분하다고 느꼈었다. 우표도 요즘 것은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어딘지 밋밋한 느낌이 들었고. 나중에 우체국에 확인해 보니 어찌 된 일인지 자기들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다만 그 편지가 잘못 배달되었는지 최근에 우체국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보내준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잘못 배달된 편지를 받은 사람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가 최근에 우체통에 넣은 것 같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주일이라면 그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편지를 받는 즉시 나는 연락했을 테니까. 그날 당장에 달려가서 초인종을 눌렀을 것이다. 그는 아파트에서 바로 내 옆집인 403호에 사니까. 나는 그 편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대화했겠지. 그러면 그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우체국을 고소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바로 옆집인데도 우체국을 통해 편지를 보낸 그를 탓해야 할까? 그것은 그렇다 쳐도 그는 나한테 전화는 왜 안 했으며, 내 아파트 문은 왜 안 두드렸단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일주일 동안 내가 문 두드리길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자살한 것일까?
안 돼…….
젊은 나이에 성공한 인물로 보이던 그이. 어느 날 바로 옆집에서 그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었다.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갔다가 죽은 것을 그 사람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살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급사한 것이 분명하다고 우기고 싶었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억지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가 자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그에게는 우편물이 무척 많이 왔다. 개인이나 여러 단체에서 오는 편지뿐만 아니라 주간지, 월간지, 계간지, 연간지(연감) 등등 그 종류를 셀 수도 없이 많아서 며칠 가져가지 않으면 수북이 쌓이는 것이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남이 그 우편물을 가져다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밖에 나갔다가 자신이 한 아름씩 들고 들어오는 뿌듯함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탓에 혹 그가 며칠 지방에 다녀오고 하는 때에는 아파트 현관 우편물함에는 그의 자부심 상징인 우편물이 잔뜩 쌓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두 팔에 가득 안고서 전리품처럼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시영 아파트 긴 복도를 처벅처벅 걷는 것이었다. 그러한 때 그는 세상 모든 것이 자기 품에 있는 듯이 느껴졌으리라.
어떻든 그의 우편물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나는 좀 불편하긴 했어도 며칠 기다렸다. 그러다가 정말 더 이상 봐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야 나는 전화를 했다. 카톡을 보냈다.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연락하고, 급기야는 경찰에 신고하게 된 것이다.
그 뒤 과정도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다. 타살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별히 바로 이웃이었고 친구였던 나는 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정도였다.
아무튼 지난한 과정을 통해 그는 자살로 판명되었고, 그 순간 나는 해방감뿐만 아니라 끔찍할 정도로 자괴감과 후회, 자책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그 당시 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사람들 대하기가 무서웠다. 오늘 웃으며 나하고 이야기하던 사람이 내일 아침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지. 한동안 나는 아침마다 혹 그런 이메일이나 카톡이 와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안고 핸드폰을 극히 조심스럽게 열곤 했었다. 어떤 때는 손을 부들부들 떨기도 했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리고 밝고 명랑한 사람일수록 수상해 보이곤 했다. 저 사람 혹시 내일 아침에…….
참으로 무서웠다. 그것을 떨쳐버리는 데 근 5년이 걸렸다. 그리고 다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편지를 뜯어보았더니……, 편지지는 들어 있는데 내용은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백지. 티 하나 없는 새하얀 백지. 그러나 일반 종이가 아니라 고급 한지 같은 것이었다. 촉감이 부드럽고 약간 도톰하며 폭신한 느낌까지 들었다. 게다가 5년 전에 넣은 종이였는데도 새것처럼 깔끔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런 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혹시 다른 종이를 위에 대고 꾹꾹 눌러써서 자국만 남게 한 것은 아닌가 하고 전등에 비춰보았으나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추리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비밀 잉크를 사용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이것저것 알아보고 나서 확인해 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깨끗한 백지였던 것이다. 아무런 글자도 무늬도 없는 새하얀 백지.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5년이나 늦게 도착한 편지에 백지 편지지. 지금 이거 혹 무슨 추리소설은 아닌 거지?
아무튼 어처구니가 없었다. 살짝 소름이 돋기조차 했다.
그런데 그는 왜 백지 편지를 보낸 것일까? 무엇을 암시하기 위함인가?
죽는 사람이 장난으로 그렇게 그랬을 리는 없고, 그와 나 사이에 무슨 큰 원한이 있어서 복수의 암시로 그랬을 리도, 또는 나에게 뭐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려고 그런 편지를 보냈을 리도 없다. 그는 참으로 명랑한 사람이었다. 나 몰래 현실에 힘겨워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겉보기에는 활달하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다. 그랬던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그는,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 많았다. 내 나이 지금 서른다섯. 5년 전 그녀의 나이도 서른다섯이었다. 그런 나이에 자살을 한 것이다. 편지를 받아본 지금 생각하면 나 보란 듯이 그런 일을 벌인 것 같기도 했다. 나에게 자기를 찾아주지 않은 데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그렇다면 나는 마땅히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다. 나는 지금 정신이 정말 멍했다. 이것이 죄책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의도대로 그렇게 정의해 주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편지를 받은 오늘이 그녀가 자살한 날이란 사실이다. 이 점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것일까? (물론 그 날짜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경찰이 그렇게 추정했을 뿐이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아파트 복도에서였다. 오래되어 낡은 시영 아파트에서 우리 둘 다 거의 동시에 아파트 문을 열다가 만났다. 나는 들어가려다가, 그녀는 나오다가 서로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이 아파트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였다.
“새로 오신 모양이에요?”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네요. 일주일 전에 이사 왔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일 다녀오시나 봐요?”
“네. 오늘 좀 일찍 들어왔습니다.”
“오늘 내가 바쁜 일이 있는데, 나중에 찾아뵐게요.”
“예, 그러세요. 다녀오세요.”
다음날 저녁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내가 문구멍으로 내다보니 옆집 여자였다. 문을 열어주자 그녀가 손에 무엇인가를 잔뜩 들고서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서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만났고, 급격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주 찾아왔다. 나는 그녀의 집에 몇 번 가보지 못했다. 내가 일부러 찾아갈 필요도 없이 그녀가 항상 먼저 왔으니까.
그녀는 시인이었다. 호는 백엽(白葉). 이름은 문시선(文詩善). 이름부터 그녀는 시인이었다. 그녀가 시인이라는 사실은 그 집에 가서 알았다. 그전에는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 이름으로 된 시집이 몇 권, 여러 시인이 함께 수록된 시집도 있었고, 월간지나 계간지 외에도 여러 은행이나 회사의 사보 등등에 그녀의 시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지인이 만들어 주었다는, 그녀의 시가 들어간 시화가 두 점 벽에 걸려 있었다. 눈부시게 황홀한 커다란 석양 사진 한쪽 구석에 그녀의 시가 들어가 있는 액자도 있었고.
나는 갑자기 붕 뜬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도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에 막 첫발을 내디딘 느낌이었다. 나도 책꽂이에 시집이 몇 권 있고, 외우는 시도 몇몇 있다. 연애할 때 그 시들을 써먹기도 했고, 친구들 앞에서 뻐기듯 읊기도 했었다. 시인 흉내도 내어 끄적끄적 시를 써서 남들에게 보여주기도 했고. 그러나 그러한 겉멋용 시가 아니라 진짜 시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시인의 옆집에 살게 되다니.
또한 그 시인은 알고 보니 꽤 영향력도 있는 것 같았다. 30대 초반이면 무척 젊은 축에 속할 텐데도 여러 군데 나가 강의도 하고 시인들 단체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성공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연간 수입이 가장 적은 직업 중에 수녀와 신부와 시인이 거의 꼴찌를 차지한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그녀는 예외였다. 그런데 한 가지 그녀에게 미안한 것은 시의 세계에서는 좀 유명한 것 같았는데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개의치 않는 것이었다.
나는 부러웠다. 더군다나 당시 내 처지가 너무 초라해서 그녀의 존재는 마치 우상과도 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참 뒤 그녀의 집에 두 번째 갔을 때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갑자기 풀이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 와서 활달하게 놀다 간 그녀였다. 그날은 그녀가 자기 집에 와서 저녁을 먹자고 카톡을 보내어 가게 되었다. 나는 집에 있는 밑반찬 몇 개를 가지고 갔었다.
그녀는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뒤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 없었다. 아니, 사실 그 전부터 약간 침울해하는 기미가 있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저녁 먹고 커피까지 다 나눠먹은 뒤 그녀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책꽂이 쪽으로 갔다. 나는 사실 그때 약간 기가 죽어 있었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라 약간 불안했었기 때문이다.
그녀, 아니 문 시인은 두툼한 옛 사진앨범을 꺼내어 가지고 왔다. 앨범을 꺼내왔으면 보통은 여기저기 펼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주욱 훑어주는 것이 다음 수순일 텐데 문 시인은 제일 뒤쪽의 어느 한 페이지를 찾아 펼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사진에 눈길을 주었다.
나는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얼굴이 똑같이 생긴 두 여학생이 얼굴을 옆으로 맞대고 웃고 있는 사진. 중학교 여름 교복을 입은 채.
아, 쌍둥이였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미소를 지으며 문 시인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문 시인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나는 좀 뻘쭘해져 얼른 고개를 돌려 사진을 자세히 보는 척했다. 하지만 어쩐지 뒤통수가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 시인을 돌아보았는데 문 시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일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문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서서 창가로 가는 것이었다. 밖의 야경을 감상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나도 그 뒤를 따라서 창가로 갔다.
그날 저녁 우리는 평소와는 아주 다르게 그렇게 말없이 서 있다가 가벼운 말만 주고받은 뒤 나는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 밤 아주 불편했다. 뭔지 모를 불안감도 있었고.
그다음부터 근 보름간 문 시인은 우리 집에도 오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카톡이라도 보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냥 놔두는 편이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보름 만에 현관문 벨이 울렸다. 문 시인이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 모처럼 만에 즐겁게 이야기하며 놀았다. 혹시라도 분위기가 가라앉을까 봐 나는 평소보다 애교를 더 얹어서 문 시인을 대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평소대로 돌아가 문 시인은 우리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오랜만에 문 시인의 집에 가게 된 날, 그녀는 울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문 시인은 한참 운 뒤 나한테 고맙다고 했다. 자신이 울 때 그냥 내버려둔 것 말이다. 게다가 그때 사실 나도 좀 같이 울었다. 나도 내 자신이 서러웠던 것이다. 누구한테 말 못 하며 지내는 여러 속상한 사정들을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는데 문 시인의 울음을 보면서 나 자신도 처량해졌던 것이다.
문 시인의 아파트를 나올 때 그녀는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반면에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우울했다. 그리고 그렇게 펑펑 운 문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도 그런 일은 서너 번 더 있었다. 그때도 역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나 자신의 처지에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고 나면 문 시인은 울음을 멈추고 나한테 고맙다고 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인 모양이다.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점점 더 죽고 싶어졌다.
그러던 차에 문 시인은 자살한 것이다.
그때의 내 허망함과 상실감이란…….
그 이후 한때 나는 우울증이나 실어증, 대인기피증 같은 것을 겪어야 했다. 물론 병원에 가서 그렇게 진단받은 것은 아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러나 실제로 그런 병에 걸린 사람처럼 나는 꽤 심각한 상태까지 가기도 했다. 나도 자살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까지 했으니까. 이 여파는 오래 갔다. 그 탓에 그러잖아도 매끄럽지 못했던 대인관계는 더욱 나빠져서 온갖 군데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생겼고, 그때마다 정말로 죽고 싶은 마음이 앞서곤 했다.
그렇게 어둡고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겨우 나 자신도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여겼을 때 그 편지가 배달된 것이다.
아, 한 가지 빼놓았다.
나는 문 시인을 통해서 그 아파트 단지에 사는 다른 독신녀 셋을 소개받았다. 그렇게 해서 모인 우리 다섯은 글자 그대로 정신없이 놀았다. 시집갈 가망 없는 노처녀 다섯 모이면 어떻게 난장판이 되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하긴 그 당시 우리 나이가 노처녀에는 명함도 못 내민다고 서로들 위로했지만.)
우리 다섯 중에서 나이는 내가 제일 막내였으며, 문 시인이 가장 손위였다.
우리 다섯은 각자의 아파트를 돌며 꽤나 낄낄거리고 놀았다. 어찌나 죽이 잘 맞는지 마치 전생에 쌍둥이들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며 정신없이 어울렸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서로에게 별명을 지어주기로 했다. 둘러앉은 순서대로 왼쪽으로 한 사람씩. 그렇게 해서 각각 부여받은 별명은 이러했다.
병신년에 낳았다고 병신년
지랄 맞게 잘났다고 지랄년
화가로 돈냥이나 만진다고 화냥년
남자 한번 못 만난다고 못난년
죽어라 일만 한다고 죽일년
그중에서 나는 지랄년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나와 같은 이력을 가진 여자가 얼마나 되느냐고 하면서 붙여준 것이다. 하지만 잘나기만 하면 뭐하냔 말이다. 시집도 못 가면서.
우리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손가락질하고 정신없이 깔깔거리고 웃었지만 나 자신은 지랄년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속으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긴 화냥년이라 불린 자칭 가난한 화가라는 한 언니는 나중에 나한테만 살짝 자기 별명이 너무 싫다고 말한 적 있다. 그녀도 나처럼 그때까지 남자하고 ‘제대로’ 데이트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화냥년이라니. 그녀는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게다가 자기가 사는 꼴을 보듯이 그림을 아무리 열심히 그린다 한들 남들 보기에만 그럴듯할 뿐 자기 주머니는 늘 비어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다만 문 시인이 소개를 해서 몇몇 작은 작품을 문학단체 회관에 넉넉한 금액을 받고 판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여진 모양이라며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 별명을 바꿔달라고 하기에는 좀 이기적인 것 같아서 그만두었단다. 다른 ‘년’들도 다 좋은 뜻은 아니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물론 짐작은 했었지만, 나중에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더니 화냥년의 뜻은 이러했다.
화냥년 | 서방질을 하는 여자를 욕하여 이르는 말.
서방질 | 자기 남편이 아닌 남자와 정을 통하는 짓. 화냥질 또는 계집질이라고도 함.
이 무슨 자폭질인지, 그때는 우리들 자신을 비하할 대로 비하하는 자학을 통해 좋게 말하면 카타르시스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더 나아지거나 속이 후련해지는 것도 아니면서. 지랄년이 된 나나 화냥년이 된 그 언니는 물론 우리 모두가 자기 별명에 대해 불만이 있었을 텐데도 그때는 그렇게 서로를 놀려대며 놀았었다. 철없는 어른들.
아무튼 우리들은 그렇게 지냈다.
그러나 문 시인이 자살하기 얼마 전부터 우리 모임도 차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달 두 달 서로 연락 없이 지내던 도중 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바로 옆에 살면서도 그녀가 자살하기 보름간은 서로 들여다보지도 않았으니까. 그즈음에는 심지어 카톡도 주고받지 않았다. 사실 2년여를 그렇게 정신없이 어울렸으니 좀 쉴 때가 되기는 했었다. 한마디로 서로들 시들해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도 우리 모두가 잠시 휴식하는 것이라고 무언중에 합의를 보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밝혔듯이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문 시인의 또 다른 면을 나는 보았다. 우리들의 맏언니이며 리더이자 언제나 경쾌하고도 통이 컸던 그녀는 사실은 우울증 환자였다. 그렇다고 병원에 가서 그렇게 진단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심각할 정도로 조울증을 알고 있었다. 남들 앞에서는 명랑하고 친절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병적으로 자신을 학대했고 울기까지 했다. 그녀는 내 앞에서 실컷 울고 나면 신기할 정도로 감쪽같이 변신되어 남들 앞의 모습으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우리 둘만의 비밀로 간직했다. 그리고 우리 둘은 그를 통해 묘한 공유의식, 즉 공동의 비밀을 안은 결사체 같은 형태가 되고 말았다.
이러했던 탓에 그녀가 자살하고 나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너무 허망해서 한동안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자살한 뒤 우리 동료들은 매년 그녀가 죽기 바로 전날 모두 모여서 추억하기로 했다. 따라서 그 약속대로라면 어제 우리들은 모이거나 서로 연락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모두들 이사 가고 나만 이 아파트에 남았다. 하나는 결혼해서 배신자가 되어 가버렸고, 또 하나는 저 멀리 남쪽지방으로 이사 갔고, 나머지 하나는 어디에서 돈이 났는지 강남에 멋들어진 커피점 차려서 도망갔다.
그래도 그녀가 죽고 나서 첫해에는 이 아파트에 나 포함 셋이 남아 있어서 그 셋이 모이고 나머지 하나에게는 전화를 해서 추도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그 다음 해에는 나 혼자 이 아파트에 남아 전화로 안부 겸 추도 겸 연락을 했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하나만 전화를 받고 나머지는 카톡으로만 연락을 했다. 그러나 작년에는 모두들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아 그냥 단체카톡방으로 문자만 보내고 말았다. 그 다음날 그 중 하나한테만 답이 왔고, 그나마 하나는 카톡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러니 이제 이 아파트에서 그녀를 추억해 줄 이는 나밖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여자 나이 서른다섯. 아니, 독신녀 나이 서른다섯. 무슨 의미일까? 이제는 독신을 붙박이 개념으로 받아들이라는 나이일까, 아니면 박차고 벗어나야 하는 나이라는 뜻일까? 노처녀의 마지노선?
그러잖아도 서른다섯은 넘기지 말라며 몇몇 사람이 남자 사진과 이력을 보내왔다. 웃긴다. 내가 회사인가? 사진과 이력이라니. 나한테 취직하겠다는 거잖아. 야, 결혼이 취직이니? 직장이야?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그 사진과 이력을 꼼꼼히 살폈다. 사실 상대방한테도 내 사진과 이력이 가 있을 거다. 결혼정보회사는 아니더라도 중매하는 사람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냈기 때문이다. 사진도 적어도 세 장이 필요하단다. 여러 모습의 사진.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내심으론 서른다섯을 넘기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자존심 꽉 눌러두고 달라는 대로 다 응했다. 일이 성사되기만 한다면야 그까짓 거…….
그런데 죄다 깨져버리자 분노의 마음까지 일었다. 배신감에 사기당한 것 같고, 잘못하면 내 정보가 온 세상 돌아다닐 것 같은 불안감, 후회, 그러면 그렇지 하는 자괴감 등등.
사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실물이나 사진이나 나만큼 갖춘 여자가 드물 거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이력이나 경력이야 죄다들 조금씩 부풀리는 거 당연할 것이고. 나만 빼놓고 말이다. 나는 고지식하게 곧이곧대로 적었다. 꿀릴 게 없으니까. 서울대학교 통계학과 졸업, 미국 예일대 대학원 졸업, 석사. 삼성물산 입사, 건강상 퇴사, 현재 컨설팅 회사 프리랜서. 이게 뭐 어때서 그런가?
돈은 좀 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의 빚보증 선 게 발목 잡고 있어서 수입의 대부분이 그리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이것도 앞으로 5년 정도만 지나면 해방될 거다. 나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부풀리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밝혔다. 무남독녀라서 아버지 회사가 망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채무 보증을 섰고, 그것이 발목 잡혀 지금껏 시집도 못 갔다. 어머니는 화병에 고혈압, 당뇨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아직도 교도소에 가 있다. 사기, 횡령, 배임 등등 죄목도 수두룩하다. 처음에는 자주 면회 갔으나,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간다. 그것도 이제 3년 남았다.
짜식들, 나한테 장가들었다가 괜히 덤터기쓸까 걱정되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그만둬. 아쉬울 것 하나 없으니까. 쪼잔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제기랄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 이렇게 망가져도 되는 건가…….
뭐 이미 망가졌는데 이제 와서…….
어떻든 대학 때 연애하다 깨진 이후 아직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데이트 한번 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제 아버지 문제 때문에 선봐서 시집가기는 틀렸고 연애를 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 남자들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슬쩍슬쩍 눈치를 보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죄다 유부남이었다. 왜들 그렇게 빨리 장가가는 건지.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 연애는 아예 포기했다. 남들이 겉보기에는 과장해서 20대 중반 같다고, 앳되게 보인다고 말들을 해주는데, 그래도 남자들 눈에는 나이가 금방 드러나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거울로 아무리 뜯어봐도 스물여덟 이하인데 어찌 그렇게 잘들 아시는지 신기하다. 눈가에 주름 하나 없는데 말이다.
이러다 결국 시집가는 건 포기해야 할 팔자인 모양이다. 좀 억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막 같이 살자고 덤빌 수는 없잖은가.
신세타령은 이만하고……, 문 시인의 편지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것을 넘어 기괴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냔 말이다. 실종된 편지가 5년이 지나서 들어오다니. 해외토픽감이다.
그것은 그렇고, 그 빈 편지지. 무슨 뜻일까? 누구 말대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 같잖은가. 문 시인의 시는 정말 괜찮았다. 현대시인데도 조금도 눈에 거슬리거나 어색하지 않고 매끄러웠으며, 운율도 제법 있어서 시를 감상하는 맛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어딘지 해맑은 어린 소녀적인 감상과 순수가 배어 있어서 그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 이제는 잊혀진 먼 과거의 추억과 어린 동심의 세계가 아련히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러한 덕인지 무슨무슨 알 수 없는 상도 많이 탔던 것 같다. 그런 시인이 차라리 동시와 같은 시 한 수를 편지에 써서 보냈다면 이해할 수도 있으련만, 오히려 글자 하나 없는 편지지라니.
혹 무언의 시를 내게 보낸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혹 그 편지지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이참에 셜록 홈스 한번 돼봐?
나는 괜히 약간의 스릴감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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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충북 음성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음성이 도시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음성군이라는 커다란 지역이 있고 그 남서쪽 귀퉁이에 음성읍과 음성군청, 음성역이 있는 것이었다. 두툼한 C자처럼 생긴 음성군 제일 위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살짝 걸쳐 있고, 음성군 한가운데로는 평택제천고속도로가 왼쪽 중앙에서 오른쪽 위로 약간 비스듬하게 지나간다. 음성군 서쪽은 안성시, 동쪽은 충주시다.
내가 음성으로 가는 것은 문 시인이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고향은 경북 울진이지만 그곳에서는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그 이후에는 음성에서 살면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문 시인은 늘 자신이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진출’했다고 말했다. 약력에도 그렇게 써 있다. 지방대 나와서 풍운의 꿈을 안고 독한 마음으로 상경했기 때문이란다. 그래, 진출이 맞다. 그 꿈에 맞게 보란 듯이 성공하지 않았는가.
나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와 함께 음성에 갔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의 먼 친척뻘 되는 할아버지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친지가 별로 없어서 아버지라도 가봐야 하겠다며 내려간 것인데, 어쩐 일인지 나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때 한밤중 지도를 보면서 가로등도 없는 도로를 조심조심 달려갔었다. 그런데 어떤 곳에 가자 사망사고지점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고 왕복 이차선 도로 한복판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흰 페인트로 그려져 있었다. 그 당시 그것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었는지 나중에 꿈에 나오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혹 그런 그림을 보게 될까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다행히 대낮에 큰 도로로만 가게 되어 그랬는지 그런 그림은 볼 수 없었다. 지금도 그런 모양이 그려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 그 장면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문 시인의 유골이 안치된 가섭산(迦葉山) 미타사(彌陀寺)의 가족납골당으로 향했다. 미타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 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8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높이 41m에 달해서 동양 최대라고 하는 지장보살입상이 압권이다.
미타사 범종루(梵鐘樓) 아래에 있는 납골당에 가서 나는 문 시인과 추억을 나눈 뒤 음성의 향토문학인 회관으로 찾아갔다.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에 미리 전화를 걸어 학술담당 이사라는 분과 약속을 해놓았기 때문에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길은 잘 찾으셨습니까? 이 촌구석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요.”
“길이 좋아서 편하게 왔어요. 여기 경치가 참 좋네요.”
“아이구, 여기 음성은 양반 중에서 양반골이라우.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여기 출신 아니오.”
“어머, 그랬군요. 어쩐지 여기 오니까 모든 것이 평화스러워 보여요.”
“허허, 그 말 명언입니다. 어디다 기록해 놔야겠네. 허허허.”
“박 이사 오늘 대통 봤수. 서울에서 미인 내려오셨겠다, 명언 들었겠다……. 나 같으면 박 이사 차로 음성7경 안내해 드리겠네. 휴양림부터 시작해서 설성공원까지.”
“네? 음성7경이 뭐예요?”
“거봐, 모르신다잖아. 오늘 해 지기 전에 모시고 다녀. 그래야 서울 가서 광고하시지.”
사무실 안은 웃음꽃이 피었다.
“아, 문시선 시인에 대한 자료를 모으신다고 하셨던데…….”
“네. 서울에서 그 언니하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모여 문시선 시인 기념집을 만들어 보려고요.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오. 그러잖아도 우리도 음성 출신 예술인 기념관을 하나 만들고 싶어 벌써부터 얘기들이 오가는 중이라오. 문 시인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서울에 가서 큰 성공을 거뒀으니 당연히 거기에 들어가야지.”
“그 언니가 여기 여고를 나왔죠?”
“응, 맞어. 여기 여고 출신 중 그렇게 이름난 이가 몇 안 될 거야.”
“아, 참 그 언니 쌍둥이였다고 하던데…….”
“그랬지. 그런데 여기 사람은 그 동생 쌍둥이 못 봤다고 하더라고. 여기 오기 전에 죽었다나 봐요. 어이, 정형, 당신 죽은 문 시인 쌍둥이 동생에 대해서 잘 안다면서?”
“에이, 내가 뭘 알어. 그냥 소문만 들은 거지.”
“그거라도 말씀드려.”
“들을 것도 없어. 별로 좋은 얘기 아니니까.”
“어허, 이 사람,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할 얘기도 별로 없어.”
“그럼 3분 만에 끝내.”
“3분도 안 걸려. 딱 두 가지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은 정말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문시선 시인의 본명은 문백선(文白善)이라는 것. 동생의 이름은 문백엽(文白葉). 문 시인은 동생이 죽은 뒤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동생의 이름을 자기 호로 사용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상한 소문이 떠돈다는 것. 그러나 그 소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자기는 그 소문의 진위를 알 수 없기에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굳이 알고 싶으면 문 시인의 고향인 울진으로 가보라고 했다.
이야기가 약간 싱겁게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두 가지 모두 의미 있는 사실이었다. 이름을 바꾸고서 동생 이름을 호로 사용한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소문이라는 것. 사실 나도 그 이야기는 어느 주간지에서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제목만 읽고 나머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원래 유명인사는 이런저런 가십에 휘말리기 마련이다. 어디 가서 누구하고 식사라도 하면 온갖 억측으로 도배되는 것이 그들의 세상이니까. 문 시인도 나름대로는 유명인사다. 그러니 그런 가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 죽고 이 세상에 없는 바에야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
나는 음성 문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이번에는 울진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호기심 반 의문 반으로 음성으로 내려왔지만 내친김에 문 시인의 고향까지 가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그 소문이라는 것이 좀더 구체적인 형태로 떠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와서 한동안 고심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을 포함해서 문 시인의 가십에 대해 있는 대로 수집을 했다. 이는 문 시인의 허물을 캐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소문들에 대항해서 내가 알고 경험한 문 시인을 확인하고 부각시켜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어떻든 내가 수집한 문 시인에 대한 소문은 이러했다.
문 시인의 고향은 잘 알려진 것처럼 음성이 아니고 경상북도 울진이다. 그곳에서 문 씨 집안의 쌍둥이 두 딸이 경북 봉화와 영주, 충북 충주를 거쳐 음성으로 간 것이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직전인 2월 말이었다. 울진에서 쌍둥이 부모가 뺑소니 사고로 모두 돌아가시자 두 아이는 먼 친척이 있는 음성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울진에서 대전으로 가는 포터 트럭이 있어서 그 운전사가 적당한 운임만 받고 두 아이와 짐을 음성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포터 트럭은 태맥산맥을 넘어 봉화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금산 지나 세덕산과 동묘산 사이로 난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달리다가 분천역 옆을 돌아 경북 봉성면의 당산 근처 음지교 조금 못 미처에서 갑자기 차가 고장 났다. 운전사가 차 앞에서 보닛을 열어 안을 살펴보고 있을 때 쌍둥이 중 동생은 밖에 나가 서성이고 있었다. 길의 커브가 그리 심하지 않아서 멀리에서도 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을 텐데도 마침 잔잔한 비가 내리고 또 해가 막 진 상태라서 시야가 그리 좋지 않고 노면이 살짝 얼었던 것이 문제였는지 덤프트럭이 달려오다가 길가에 세워놓은 포터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만 뒤쪽을 들이받았다. 그때 트럭이 크게 회전하면서 밖에 나와 있던 동생을 강하게 치고 말았다. 동생은 숨이 넘어가면서 손에 들고 있었던 노트를 언니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그 안에 써놓은 시를 책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시를 잘 써서 초등학교 때는 동시로 많은 상을 탔고, 중학교에 가서도 백일장에서 여러 번 상을 타서 고향인 울진에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언니가 대학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가 시인이 되어 유명해지면서 고향인 울산에서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언니가 동생의 시를 빼앗은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어서 그저 소문으로만 돌 뿐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결국 음성으로까지 퍼져 그곳 문인들 사이에서 맴돌게 되었다. 그러자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언니 문 시인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보내어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는 서울에 있는 시인단체나 언론사 등에도 그러한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의혹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아무도 문 시인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투서는 점점 심해져 갔다.
그와 동시에 문 시인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점점 지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문 시인을 비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나는 항상 문 시인 편이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살을 한 번쯤은 꿈꾼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살할 정도의 깊은 고뇌. 그것은 죽는 것보다 괴로운 것이었으리라. 차라리 죽는 것이 해방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문 시인의 자살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가 내게 보낸 백지 편지지처럼 모든 것이 하얄 뿐이다. 그리고 그 하얗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나는 여전히 모른다.
나는 다만 그가 그리울 뿐이다.
그리고 그가 보낸 편지를 너무 늦게 받아 미안한 마음밖에는 없다. 다음에 또다시 음성에 갈 기회가 있으면 문 시인의 유골함 앞에서 그 백지 편지지를 태워주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백엽 문시선 시인님, 고이 잠드세요. 아무런 고뇌 없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고요. [끝]
[다음 화 '님의 소식 받은 날'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