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사람은 단순한 섬이 아니라

No man is an island

by Rudolf

제 1 부

Uncertainty Principle

불확실성의 원리



제1장

No man is an island

사람은 단순한 섬이 아니라


1


해고된 지 첫날. 해선은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한 여자 손님이 호텔 매장에서 산 명품 핸드백 포장상자가 들어 있는 종이가방을 잠시 맡아달라고 해서 해선은 리셉션 센터 아래 수납공간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잠시 외출할 일이 있어서 윗사람한테는 보고하지 않고 동료한테만 말하고서 잠깐 나갔다가 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후에 그 손님이 다시 와서 핸드백을 찾을 때까지 그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들어 한창 바쁠 시간 무렵에 그 여자가 핸드백을 찾으러 왔다. 해선은 그제야 생각이 나서 수납공간을 들여다보았지만, 그 종이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호텔이 발칵 뒤집혔다.

우선은 그 여자 손님부터 펄펄 뛰고 난리였다. 그 핸드백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아느냐며.

총지배인, 즉 전무이사가 달려왔다. 전무가 그 손님과 얘기하는 중에 해선은 담당 주임에게 이끌려 사무실로 갔다.

“다시 한번 자세히 말해 봐. 어떻게 된 거야?”

해선은 이미 열 번도 더 설명한 이야기에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또 한 번 말해 주었다.

“저는 그 종이가방을 받아서 카운터 아래에 놔두었을 뿐이에요. 그 다음에는 저도 몰라요. 정말이에요.”

곧이어 함께 근무했던 다른 직원들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들도 해선처럼 자신들이 이미 했던 진술을 다시 반복했다. 그러나 결론은 아무도 보지도 못했고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몰라요. 억울해요.”

직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모두들 곁눈으로 해선을 바라보았다.

해선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억울해.” 그러나 해선은 이 말은 하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해선은 밖에 나갔다 왔으니 그 시간에 어떤 일이 있었어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외출하고 돌아온 뒤로는 리셉션 센터에서 거의 나간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핸드백에 손을 댔다면 해선이 외출했던 시간밖에 없다. 그렇다면 뻔하다. 그곳은 아무나 드나드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해선 외에 딱 한 사람밖에는 그곳에 올 수가 없다. 하지만 해선이 없었던 시간에 그 직원 말고 다른 이가 왔다 갔어도 해선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 직원 역시 자기 외에는 아무도 그 공간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해선 아니면 그 직원, 즉 오진희 말고는 없다.

그리고 분명히 해선 자기는 아니다.

해선은 손님의 가방을 맡고 나서 외출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진희보다 해선이 더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해선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해선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멍한 상태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너무 뻔뻔해.”

직원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몰래 바깥에 나갔다 왔다며?”

“누굴 만난 거야?”

“그때 가지고 나갔겠지.”

해선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입도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호텔에서 그 손님에게 모두 배상해 주기로 합의하고 해선은 해고되었다. 그 대신 경찰에 알리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해고가 아니라 자진사퇴로 처리하겠으며, 손해배상도 청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즉 그냥 나가주기만 하라는 것이다. 혹 해선이 그 물건에 손대지 않았다 해도 근무 중 무단이탈에, 또 하필 그 시간에 호텔에 큰 손해가 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하면 해고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이 경우 해선은 혜택을 받는 것이 되는 셈이다. 만일 그 제안을 거부하면 정식으로 경찰에 신고해서 수사토록 하겠단다. 그러나 이 경우 해선이 밖에 나가서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곤란해진다. 더더군다나 해선이 그 사람에게 핸드백을 건네주었다는 식으로까지 발전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억울했다. 그러나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그래도 엄청난 경쟁을 뚫고 들어온 직장이었는데. 대우도 무척 좋았고.

오진희.

보기만 해도 상큼한 여자였다. 예쁘고 얌전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성실하고 말씨도 고왔다. 그리고 화장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도 늘 화사했다. 키나 몸매도 적당하고. 그리고 그 눈은 정말 선해 보였다.

하지만 해선은 오진희가 의심스러웠다. 오진희 그녀가 한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오진희가 자신 외에는 그곳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오진희가 무엇을 숨기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해선이 유령처럼 그곳에 기막힌 방법으로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면, 흔히 하는 말로 합리적 추론에 의하면 범인은 오진희밖에는 없는 것이 된다. 그렇잖은가. 용의자는 해선과 오진희 둘밖에 없고 해선은 밖에 나갔다 왔는데, 그렇다면 둘 중에서 범행 가능성은 누구에게 있겠는가? 뻔하잖은가.

해선은 원룸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분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혹 오진희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혀내면 복직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해선은 한편으로는 그렇게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해선 자신만 가만히 있으면 그냥 다 넘어갈 수 있다. 억울하지만 빨리 다른 직장 찾은 뒤에 싹 잊어버리면 될 것을 괜히 헤집어 일을 크게 만든다고 해서 무슨 득이 될 것인가. 게다가 그렇게 나섰다가 진실을 밝히지 못하게 되면 해선은 결국 도둑으로 몰리고 소문만 더 크게 날 것이다.

하, 답답했다. 받아들이자니 억울하고, 일을 벌이자니 자신 없고.

그건 그렇고, 그분한테는 뭐라고 말을 하지?

어제만 해도 아무렇지 않다가 오늘 갑자기 회사에서 나왔다고 말해야 하나? 좀 이상하지 않아? 며칠 뒤 또 만나야 하는데, 그때까지 변명거리를 만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좀 어색하잖아. 그동안 회사 자랑하면서, 일하는 것도 사람들도 너무 좋다고 얼마나 많이 떠들어댔었냐 말이야.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만둬? 아니다, 이건.

해선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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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선은 이틀 동안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다. 택배 온 것 가지러 현관문 열고 한 발 내디딘 적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다 알았는지 누구에게서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물론 해선 역시 아무 데도 전화하지 않았고.

그러고 나서 사흘째, 해선은 간단히 치장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면접을 보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여러 군데 알아보다가 호기심이 생기는 곳이 있어서 컴퓨터로 접속하니 금방 연락이 왔다. 급히 만나자고. 좀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이상한 곳이면 그냥 나와버리면 되겠지 하고 가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미리 알려드리는데 직원을 뽑는 것은 아닙니다. 급히 통역할 분이 필요해서요.”

저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잠깐의 아르바이트인 것이다. 게다가 그 회사는 외국계 기업이며, 본사에서 사람이 몇 명 오는데 직원 수가 적어 응대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 업무를 맡고 있는 직원이 있었지만 마침 며칠 전에 퇴직하고 나서 새로운 사람을 뽑지 못해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고 한다. 게다가 현재 직원 중에도 그런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있으나, 다른 일로 출장 가 있는 탓에 급히 다른 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일단 임시로 그 일을 맡기는 것이지만, 그 뒤 서로가 만족하면 정식으로 계약할 수도 있어요. 직원이든, 아니면 전담 통역이든.”

그런 중에도 이 말에는 약간 기대감이 생겼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그 회사에 대해서 검색해 보니 꽤 그럴듯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본사가 있고, 아시아 지역 총본부가 홍콩에 있으며, 한국에는 몇 년 전에 조그만 지사가 들어왔다고 한다. 회사 프로필을 주욱 훑어봤으나 그런 것만 봐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한 회사에 가보면 대개 외국 생활제품 세일즈맨 뽑는 곳이다. 게다가 자기가 일정 비용을 내고 물건을 떠안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가고 있는 곳은 방산업체, 그러니까 무기를 만들어 파는 회사다.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리는 DX Korea, 즉 국제방위산업전시회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한다고 나와 있다. 기업 프로필에 의하면. 그 ‘간접적’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는 몰라도.

무기 만드는 곳. 어쩐지 으스스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생겼다. 무기라고 하니까 탱크나 대포, 군함, 전투기 그런 것들이 떠오른다. 게다가 무기에 대해선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았지 실제로 가까이 가서 보거나 만져보거나 한 적이 없다.

그럴 기회라도 생기는 것일까……?

해선은 약간의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해선은 강남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가게 되었다.

해선은 삼성역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선릉역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전화로 알려준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 옆으로 들어가서 조금 올라가면 또다시 큰 건물이 나오는데, 바로 그 뒤에 있는 15층짜리 빌딩 6층이 그 회사 사무실이란다.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간다.

해선이 그 건물을 찾아 1층 로비로 들어가는데 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서양인 두 사람과 한국인 남녀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울려서 나오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키가 유난히 큰 서양인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며 뭐라고 말을 하고 있다. 해선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사람들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귀에 익은 언어가 아니다. 발음에서 약간 거센 소리가 난다. 혹 스웨덴어인가? 괜히 그런 생각이 든다. 키가 무척 크고 피부도 아주 흰 것을 보면 북유럽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그 두 사람과 함께 어울려 해선의 옆을 지나가는 한국 사람들은 어쩐지 같은 회사 사람들 같았다.

그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해선은 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 5분 전이다. 해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갔다. 그 사무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6층의 반 정도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 유리문에 무기업체다운 마크가 상호명과 함께 에칭으로 새겨져 있었다.

해선은 유리문 옆에 있는 벨을 눌렀다. 작은 스피커로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늘 인터뷰 약속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자 유리문이 스르르 열린다.

해선이 안으로 들어가자 깔끔하게 꾸민 아담한 홀이 나온다. 그리고 문 맞은편 프런트 같은 곳 뒤에서 문이 열리며 한 중년남자가 나타났다.

“장해선 씨 되시죠?”

“네,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남자는 시원시원하게 생긴 모습에 목소리도 우렁우렁했다. 해선과 통화한 사람은 아니다.

“김 과장하고 전화하셨죠? 급한 일이 있어서 외국 손님들과 함께 방금 직원들이 다 밖에 나갔습니다. 지금 내가 혼자 사무실 지키고 있는데, 내가 인터뷰해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는 명함을 한 장 내민다.

해선은 명함을 받고 들여다보았다.


TS Stockholm Korea

지사장 최정명


해선은 다시 남자를 쳐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자신이 나온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가서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해선을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가라는 표정을 짓는다.

“직원들이 없어서 좀 불편하시겠습니다만,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 하는 일이 늘 그래서요.”

그때 홀에 있는 프런트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남자는 해선에게 한 손을 살짝 들어보이며 미소 짓고는 전화 쪽으로 간다.

“네, 티에스 코리아입니다.”

또박또박한 발음.

“아, 예. 방금 밖에 나갔는데, 저한테 말씀하셔도 됩니다. 여기 지사장입니다.”

남자는 해선을 바라보며 눈과 손동작으로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는 표시를 한다.

해선은 조금 멈칫하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살며시 닫고는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회사 면접 보는 것이 이번이 두 번째라서 아직 익숙지도 않았다. 면접 자주 보는 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문밖에서는 남자가 전화로 응대하는 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려온다. 해선은 그 대화를 듣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외면하려 했으나 간간이 계약이니 선금이니 하는 단어들이 들려온다. 해선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살짝 발을 떼어서 문에서 떨어져 사무실 안쪽에 놓인 회의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는 이제 아주 작고 희미하게 들려오고 또 해선이 의식적으로 듣지 않으려 한 덕인지 더 이상 대화가 의미 있게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금액을 뜻하는지 숫자 같은 것이 해선의 귀 언저리에서 맴돌듯 흘러 지나간다.

해선은 그러한 것들을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사무실 안의 테이블이나 의자, 한쪽 옆 벽의 책장에 꽂힌 책과 폴더들, 그 너머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다른 건물들 쪽으로 신경을 쏟았다.

그러자 지난 며칠 동안 힘들었던 시간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이 회사에 전화를 걸어 문의한 것 외에는. 며칠 전만 해도 밝고 맑은 인생이었는데 어떻게 한 순간에 이렇게 될 수 있는 걸까? 남들도 얼마나 해선 자신을 부러워했었는데. 또 그 사람은 얼마나 좋아했었던가. 하긴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우울해지곤 했다. 좋으면서도 슬픈 사람. 더 이상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도 계속 이어지게 되는 사람. 혹 그런 것 때문에 벌 받은 걸까? 불륜 때문에?

갑자기 해선의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때 문이 살며시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해선이 돌아다보니 그 남자가 문을 반쯤만 열고 얼굴을 내민다.

“우리 남 과장이 다시 들어왔군요. 나는 이만 퇴장합니다.”

남자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더 연다. 그리고는 뒤에 있는 사람에게 들어가라는 표시를 하고서는 해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인다. 마치 응원이라고 해주는 것처럼.

해선은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3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젊은 남자가 지사장 다음으로 미소 지으며 들어온다.

“아, 미안합니다. 외국 손님들 바래다주느라고요. 혹시 좀 전에 저 아래 로비에서 우리 만나지 않았나요? 마침 오실 시간이 된 것 같아서 로비를 살펴봤더니 그때 막 들어오시는 것 같던데…….”

“네, 그랬어요…….”

아니,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모두 친절한 거야. 게다가 일부러 죄다 미남만 뽑았나…….

“앉으십시오. 아, 아직 차도 안 갖다드렸네. 미안합니다. 커피나 뭐 다른 거……?”

“아니, 괜찮아요. 그냥 물만…….”

“잠깐 기다리세요.”

남자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가 손잡이 달린 유리잔에 얼음 담긴 물을 가져왔다.

“오시느라 힘들었을 텐데 시원하게 마시십시오.”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는다.

해선은 좀 얼떨떨한 기분으로 물을 살짝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다가 퍼뜩 생각이 났다.

아차, 이력서.

해선은 서둘러서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서 이력서와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꺼내어 내밀었다.

“아, 예, 저는 전화로 인사드린 남주환입니다.”

남 과장도 서둘러 자기 명함을 꺼내어 내민다. 해선은 좀 머쓱한 표정으로 명함을 받았다.

남 과장은 해선이 준 서류를 대강 훑어보다가 불쑥 말한다.

“어? 뉴레인보호텔에서 근무하셨네요? 거길 왜……?”

남 과장이 고개를 들고 해선을 바라본다.

“네, 그냥……, 제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남 과장은 고개만 끄덕거리고는 다시 서류 쪽으로 눈을 돌린다.

잠시 뒤 남 과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렇게 자세히 적어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가 실수했나 봅니다.”

남 과장은 이렇게 말한 뒤 고개를 들고 해선을 바라본다.

해선은 눈을 어디다 주면 좋을지 몰라 슬쩍 피했다.

“사흘 뒤에 스웨덴에서 여러 팀이 옵니다. 전시회에도 가야 하고, 한국 기업 몇몇 군데에도 가서 상담할 일이 있고 해서 통역이 좀 필요하거든요. 저희 직원이 얼마 안 되어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요. 전문적인 용어가 많이 나오기는 하겠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미리 자료가 다 준비되어 있어서 그거 나눠주면 되거든요. 한국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라서 불편하지 않게 대해 주는 게 중요합니다.”

남 과장이 맑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을 한다. 중학생이 선생님에게 청소 상태에 대해 보고하듯이. 귀여웠다.

해선은 보일락 말락 하게 미소 지으며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또다시 아차 싶어서 눈을 살짝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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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선은 닷새 동안 스웨덴 사람들을 안내하고 통역했다. 염려했던 것보다는 무기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 사람들이 자주 묻는 한국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들에 대해 나름대로는 열심히 응대해 주었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게다가 회사 측에서 준 보수는 생각보다 넉넉해서 마음이 흡족했다. 특히 스웨덴 사람들이 통역에 대해 무척 만족해한다는 말을 남 과장을 통해 지사장이 보내와서 해선은 더욱 마음이 뿌듯했다. 그 지사장이나 남 과장의 이미지가 둘 다 해선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남 과장은 수고비를 은행으로 보냈다고 카톡 메시지로 보내오면서, 다음에 또다시 일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관례적인 인사로 쓴 말 같지 않아서 해선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자주 불러주세요, 청소반장님. ^^

이렇게 마음으로 미소 짓다가 해선은 또다시 자신의 현실이 생각나서 마음이 씁쓰름해졌다.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봤지만 해선이 도전해 볼 만한 회사는 없었다. 게다가 일단 호텔업계로 다시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아서 그쪽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한때는 스튜어디스 쪽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 분야는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정도이다. 해선이 지닌 강점은 영어와 중국어를 자유로 구사할 수 있는 점이지만, 반면에 학력은 좀 못 미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모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중간에서 약간 위쪽? 뭐 그 정도면 남들에게 빠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살짝 성형한 것이 있어서 옛 친구들이 보면 입을 삐쭉거릴지도 모른다. 뭐 지들도 다 했으니까…….

어떻든 호텔에 취직할 때까지 투자한 금액이 어마어마하다. 지방에서 평범하게 사는 부모님 재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다. 지방이라 봤자 서울 근교지만. 어떻든 그런 집안 사정으로 그 많은 학원비 등등을 어떻게 다 해결했을까? 사실을 고백하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그분 덕이 컸다. 그리고 또 하나 밝혀야 할 일. 그 사람은 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이었고, 지금은 그 학교 교감이 되었다. 해선이 고등학교 때 두 사람이 만났다면 사제 간 불륜에서부터 미성년자 어쩌고 하는 말이 나왔겠지만, 해선이 전문대 졸업하고 취업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릴 때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났기에 적어도 위의 두 가지 비난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선은 그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어학학원도 다니고 중국에 단기로 언어연수도 다녀올 수 있었으며,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분, 즉 민규식 선생님은 부인과 이혼하고 해선과 결합하겠다고 여러 번 졸랐으나 해선은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분에게 해선은 사랑일지 몰라도, 해선은 그분에게 인생을 걸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보다도 해선이 더 철저하게 두 사람의 관계가 노출되지 않게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그것만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분은 점점 애가 닳는 모양이었다. 학교에다 무슨 핑계를 대로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종종 한낮에 불쑥 전화가 와서 호텔 근처 커피숍에 와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학교가 서울 바로 옆에 있어서 가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선생님은 어떤 때는 심지어 모텔에 들어가 있다고도 했다. 그럴 때마다 혹시나 호텔로 직접 찾아올까 봐 조마조마해서 호텔 측에 이것저것 구실을 대고 빠져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는 그분이 정말 호텔 바로 앞까지 와서 전화를 했다.

“5분만, 정말 5분만 보고 갈게.”

“지금 많이 바빠요.”

“그럼 내가 거기 가서 보면 안 될까?”

“안 돼요, 절대로…….”

해선은 난감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바로 그 핸드백 사건이 시작되었다. 중년 여자가 다가와서 종이가방을 맡긴 것이다.

해선은 핸드백을 받아 수납함에 넣자마자 동료 오진희에게 잠깐 나갔다가 오겠다고 살짝 말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몰래 나가고 또 시간도 없었기에 뛰듯이. 그리고 그분을 달래서 빨리 돌아가게 하려는 데만 온갖 신경이 쏠렸던 탓에 그만 핸드백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해선은 자신이 종종 자리 비우는 이유를 어쩌면 오진희가 눈치 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렇잖아도 그 부분이 늘 찜찜했었지만, 오진희는 항상 선한 눈망울을 하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주고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서 돌아서곤 했었다. 오진희는 나이는 해선보다 한 살 많지만 그런 것을 내세우지 않고 자기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묵묵히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평하면, 그 속을 알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번 오진희 이름이 떠오르자 해선은 그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 핸드백.

아무리 생각해도 오진희와 관련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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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선은 선생님을 다시 만났을 때 호텔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적당한 기회에 일이 너무 힘들어 잠시 휴직했다고 말하고는, 빨리 다른 직장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그 스웨덴 회사처럼 통역을 원하는 회사가 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아예 해외지사로 나갈 수 있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선생님 문제도 언젠간 정리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동안 신세진 것 몸으로 때웠다고 생각하고. 아냐, 이 생각은 너무 야박하다. 그것은 선생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해선 자신까지도.

해선은 스스로를 나무랐다. 해선도 돈을 떠나서, 나이를 떠나서 진심으로 선생님을 대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생각과는 달리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지만 처음 그분을 만났을 때, 그리고 한동안 둘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대화할 때 해선은 가슴이 뜨거워지고 밤에 마음이 설레어 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그것은 어쩌면, 어쩌면…….

아니다. 그 이상은 생각지 말자. 지금까지야 어떻게 됐든 이제는……, 이제는 점점 길이 갈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해선의 마음에서.

토요일 오후, 해선은 선생님을 만나러 모텔로 가면서 오늘 어느 정도 힌트라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언젠가는 치러야 할 과정이다. 사실 그동안 몇 번 시도하려다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에서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키고 말았었지만, 오늘은 마음 다부지게 먹고서 시도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상태를 영원히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해선은 선생님에게 모텔에서 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에 가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녜요. 그냥…….”

“얘기할 게 있으면 여기에서 하지.”

“얼른 먼저 가 계세요. 곧바로 갈게요.”

선생님은 해선의 손을 한번 잡아주고는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해선은 침대 모서리에 가서 털썩 걸터앉았다.

후우―.

어떻게 얘기해……?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 왔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울렁거리기도 하고.

해선은 모텔에서 생각보다는 오래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느라고. 그러고 있는데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 갈게요.”

그제야 해선은 마음을 다잡고서 모텔을 나섰다.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큰 빌딩. 아래층에는 은행, 이층에는 증권회사가 들어서 있었으며, 3층에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었다.

해선이 안으로 들어가서 눈길을 저 안쪽으로 주는데 마침 그곳에서 선생님이 손을 살짝 들어올리는 것이 보였다.

해선은 미소를 지으며 그곳으로 갔다.

선생님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앉으라는 신호를 한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는 벌써 무엇인가를 예감하는 긴장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이거 시켜서 벌써 다 마셨어. 네 것만 시키면 되는데, 나도 커피를 조금 더 달래야겠다. 너 기다리다 지쳤다, 인마.”

선생님이 긴장을 풀듯이 일부러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해선이 웨이터가 가져온 커피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선생님이 나지막하게 헛기침을 한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뇨…….” 해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사실은…….”

“아 참, 아까 나 이곳에 오다가 그……, 너하고 낮에 같이 리셉션 카운터에서 일한다는 애 있었지? 얌전하게 생긴 애 말야. 저번에 나한테 알려주었었잖아. 내가 그 호텔에 사람 만나러 갔을 때 너하고 함께 있었던 애 봤다고 했었잖아.”

해선이 멀뚱한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 애가 말이야……, 아까 내가 모텔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서 막 나가는데, 그 애가 옆문으로 들어오더라. 그 애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 애를 알잖아. 그러고 나서 내가 현관으로 가지 않고 주차장 쪽으로 돌아서 나가는데 차가 한 대 들어와서 막 세우고 있더라고. 나는 주차장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다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돌아다보았는데, 그 차에서 그 사람이 나오더라. 너희 호텔 전무라는 사람 말야.”

해선은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을 바라다보았다.

“그 전무는 내가 몇 번 봐서 얼굴을 잘 알아. 교육청 행사를 가끔 서울에서 할 때 주로 그 호텔을 이용했었거든. 나는 그 사람과 직접 대화하지는 않았지만, 교육청 직원들하고 다른 학교 선생님들이 그 전무하고 말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었어. 그래서 그 사람은 나를 몰라도 나는 그 양반 얼굴 잘 알지.”

선생님은 말을 잠시 멈추고 해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듯한 눈길을 보낸다. 그러나 해선은 아직도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 느낌이었다.

“글쎄 뭐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하긴 그럴지도 모를 거야……. 근데 말이야…….”

선생님은 말을 더 잇지 않고 잔을 들어서 바닥에 흔적만 남은 커피를 들여다본다.

“아니, 뭐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거니까.”

자기들이 뭘 알아서 한다는 것일까? 또 자기들의 ‘들’은 누구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해선은 짚일 듯 말 듯,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멍했다. 안개구름이 살짝 낀 듯이 희미했다. 사물이 아니라 생각이, 머릿속의 장면들이.

그 바람에 해선은 선생님에게 꼭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다 잊어버리고 우물쭈물하다가 카페를 나서고 말았다. 물론 선생님이 먼저 일어나서 나가고, 해선은 10여 분 뒤에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나갔지만.

그날 저녁부터 밤 사이에 해선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오진희와 전무. 그러나 그 둘 사이의 애정행각은 궁금하지 않았다. 뭐 알고 보니 해선 주변에서는 너도 나도 죄다들 그저 그런 모양이다. 그거야 다 자기들 개인생활이니 탓할 마음은 없다. 해선 자신부터도 그렇고 그러니까.

하지만 오진희와 전무가 연결되는 것이 왜 자꾸 해선의 마음에 그림자를 남기는 것일까? 예쁘장한 오진희. 늘 엄숙한 표정의 전무. 하긴 직원들한테만 엄숙했지 손님들에겐 얼마나 싹싹하고 부드러웠던가. 물론 직업이 그런 거니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어딘지 그 이중성이 해선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무엇일까? 무엇이 해선의 마음에 자꾸 물음표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 그게 뭐지?

뭐야, 그게?

그거, 그거, 그거…….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