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ire of itself
1
동준은 12년 만에 교도소에서 나와 곧바로 서울 근교의 산꼭대기에서 올라 작은 호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 호수는 과거에 몇 번 갔었던 곳이다. 젊은 시절 그곳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부풀렸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곳에 와서 지난날의 감상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다. 내려가야 한다. 어차피 마주쳐야 할 세상, 피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에서, 국가에서 판정을 내려주었다. 그 정도면 죗값은 치른 것이라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치른 지난 12년의 세월에 대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동준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지난 일은 잊자. 그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동준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다. 게다가 이것이 동준이 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도 하다. 그것을 위해서 동준은 자신의 인생 중에서 12년을 희생했다.
그날 밤 동준은 지하철을 타고 오산역에 가서 내렸다. 그곳에 동준의 과거와 미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오산역 앞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역전 부근은 많은 건물들이 올라가고 늘어서고 해서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밤이라서 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간판과 빌딩의 불빛 아래로 오밀조밀 걸어가는 사람들, 좁은 도로에서 엉키다 시피 밀려서 흐르는 자동차들을 보니 교도소 좁은 방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여겨졌다.
눈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너무도 실감났다. 정말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것이다.
“아저씨, 껨방 찾으세요? 끝내주는 데 있어요.”
“포커 한번 안 하실래요? 잘 하실 것 같은데.”
“담배 있는데……. LA에서 온 거예요. 진짜예요…….”
“이거 없어서 못 파는 거예요. 기막힌 건데.”
기막히건 귀 막히건 니들끼리 놀아라. 동준은 귀찮은 사람들을 피하면서 걸어갔다.
사람들 눈은 참 무섭다. 동준이 자기들 세계 인간인 것을 어떻게 그렇게 금방 알아보고 접근하는지. 옛날 같았으면 맞장구치거나 을러대서 오히려 한 건 올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도, 그럴 처지도 아니다.
동준은 그들을 피해 왁자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일단 어디에든 들어가서 자야 한다. 동준은 수원 쪽 국도로 올라가다가 여기저기 골목으로 들어가 보았다. 죄다 모텔뿐이다. 여관이나 여인숙은 찾을 수 없다. 그래도 이곳저곳 뒤진 끝에 필봉산 근처에서 간신히 허름한 여관을 찾아냈다.
이렇게 해서 12년 만에 첫 사회의 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동준은 일찍 일어나 남촌동을 지나 오산시를 벗어나서 수면리 쪽으로 걸어갔다. 수면리와 내리 사이에 있는 조그만 실개천. 그 이름은 정확히 모르지만 누군가에게서 안녕천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12년 전의 일이니까.
아무튼 그 실개천이 동준의 목적지였다.
동준은 급할 것도 없어서 느릿느릿 걸었다.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참 많이 변했다. 아파트며 도로며 길가 풍경들은 물론 조그만 개천까지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20대 초에 일본의 작은 마을들을 돌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감탄을 하면서 본 광경들보다 더 깔끔했다. 하지만 동준의 입장에서는 그런 풍광에 감탄만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동준으로선 옛 그 개천이 과거의 모습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곳’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혹 하천정비사업을 한다고 다 파헤치고 메워놓고 했으면 모든 것이 다 허망하게 끝나게 된다. 12년 간 참으며 기다렸던 꿈이 몽땅 날아가는 것이다.
동준은 마음이 초조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마음 급하다고 세상 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동안의 세월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참새 떼가 후루루 날아간다. 요즘 보기 힘든 새가 참새인데, 여기는 아직 많이 남아 있네…….
동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참새 떼가 날아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색깔이 참 곱구나. 보기 좋아……. 옛날에도 저랬었나……?
2
동준은 전철을 타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일단 마음은 든든했다. 어쩌면 12년 동안 고생한 것 모두 보상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오산에서 가져온 가방의 자료가 12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가였다. 대통령이 몇 번 바뀌고 정권도 두 번이나 바뀌었으며, 정치환경도 경제환경도 외교환경도 국제환경도 사회환경도 기업환경도 바뀌었다. 12년 전의 문서, 그 내용은 그보다도 5년 전의 내용이다. 즉, 17년 정도 된 과거의 그 문서가 현재도 유효할까? 물론 범죄와 매국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개념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민주화 시대의 정의가 민주화가 완성된 시대에도 동일하게 통용되지 않듯이 말이다. 즉, 사람들이 진실을 보는 기준과 안목과 정서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동준은 두려웠다. 만일 그 문서가 이제 와서 문제시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12년은 의미 없이 끝나고 만다. 물론 그 세월은 동준이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이긴 하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꿈꾸었던 미래가 다 날아가는 것이다. 세월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신념과 심지어 미래까지도 모두 헛것이 되고 만다. 자신은 오직 범죄자로만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다. 12년 전에 미래를 위해 자청해서 희생한 세월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로 끝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인생도 끝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동준은 한낱 추악한 범죄자요 음모자인 상태로 영원히 남게 될 뿐이니까.
동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지난 12년 동안도 이것 때문에 늘 마음이 개운치 못하고 저도 모르게 주눅 들어 지내왔었다. 자신이 출소한 뒤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저들은 동준이 만기 출소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마중 나와 주지 않았다. 사실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서로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라도, 그리고 의리상 어떤 형태로라도 접촉은 해 와야 한다. 그들의 제안대로 동준이 12년 동안 세상과 격리되어 살았으니까. 그들은 그동안 혹 동준이 마음을 바꾸어 진실을 밝힐까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동준이 출소할 때 저들이 아무런 접촉도 해 오지 않았다는 점이 동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동준이 감추어둔 문서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실 교도소의 12년 세월은 생각보다는 편했다. 저들이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었으니까. 그 덕분에 동준은 이제 컴퓨터에서는 도사가 되었으며 영어와 일본어는 자유자재로, 중국어는 약간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동준의 인생에서 매우 큰 무기가 될 것이다. 적어도 저들한테는.
지하철이 종각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릴 때가 되었다. 그러나 동준은 점점 더 불안해져 갔다. 저들이 자신의 12년의 대가를 어떤 식으로 보상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그러나 그 보상이 반드시 해피엔딩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도 한편으로는 드는 것이었다.
3
동준은 후회했다.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그 가방. 그것을 여기까지 가지고 오면 안 되었다. 그 가방 속 문서는 절대로 빼앗기면 안 되는 것이다. 지금 동준으로서는 그 문서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다. 거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으니까. 그것은 단지 문서의 가치만 지닌 것이 아니다. 심지어 정의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다. 그 문서는 역사인 것이다. 그 문서가 없어지면 진실도 사라지고 역사도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공개되면 하늘이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저들은 동준에게 두 가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는 12년 세월 침묵해 준 대가.
또 하나는 그 문서 자체에 대한 대가.
20년 전 일본은 국제친선화해재단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민간단체 같은 성격이 짙지만 실은 일본 총리실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극우 성향의 이 단체는 주로 정부에서 직접 나서기 곤란한 일들을 맡아서 하며, 만일 문제가 생기면 일본 정부에서는 자신들과 관련 없다고 발뺌하기 좋은 일종의 어용단체인 것이다.
그 단체의 회장은 와타나베 겐이치로(渡辺玄一郞)였는데, 그는 당시 재계의 실력자이며 정치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그 집안은 대대로 사무라이였으며, 1차대전과 2차대전 때 군부에 전쟁물자를 공급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척한 와타나베 류의 조카이다. 와타나베 겐이치로는 일본 총리실의 밀명을 받아 당시 한국의 여당 실력자와 접촉해서 비밀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을 대강 정리하면 이러하다.
일본과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공동으로 UN에 국제분쟁지역에 대한 조율안을 제출한다. 그리고 UN을 통해 당시 한일 양국의 뜨거운 감자였던 독도 해역을 분쟁지역으로 지정한 뒤, 적당한 시기에 중립해역으로 변경하고, 궁극적으로는 독도를 영구 무국적 무인도로 UN에 공식 등록한다. 이에 대해 한국 국민이 반발할 것을 예상해서 일본에서 준비 중인, 일본 규슈의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하여 대마도를 거쳐 부산까지 이르는 해저터널에 대한 시공권과 30년 운영권을 한국 측에 제공한다. 그리고 그 모든 비용은 일본과 한국이 75:25의 비율로 부담하지만, 일본은 그로 인한 일체의 어드밴티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완공된 이후 해저터널 운영회사를 한일이 50:50의 비율로 공동투자하여 설립하되 그 대표를 5년마다 한일이 교대로 맡는다. 그리고 독도 인근에 해저해양탐사기지를 만들어 한일이 공동으로 운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해의 명칭을 동해나 일본해가 아닌 제3의 명칭으로 변경하되, 양국에서 찬반 국민투표를 통해 정한다. 그러나 이때 득표수가 아니라 비율로 따진다. 즉 한국의 찬반 투표율과 일본의 찬반 투표율을 합산하여 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북한이나 러시아의 반발을 의식해서 해저해양탐사기지를 통해 얻는 모든 정보와 학술적 내용을 한국과 일본은 물론 북한과 러시아에게 모두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한국과 일본에게 공평하고, 오히려 한국에게 득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속셈은 간단하다. 독도를 중립지대로 만든 뒤 막강한 자본력으로 독도 해저해양탐사기지를 장악해서 동해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당시 한국 여당의 일부 친일극우 인사들은 정부로부터 장차 외환보유고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일본 측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여 일본이 제시한 것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위 문제를 비밀리에 확정짓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양국이 공동으로 발표하기 전까지는 특급비밀로 규정해서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협상을 벌이던 중 한국의 정권이 바뀌면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도 그 협상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추후에 한국 정치환경이 바뀌었을 때 재논의하기로 합의하고서 당시까지 진행되었던 모든 일을 문서로 만들어 당시 협상대표로 참여했던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보관하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극비에 부치기로 하고서.
그 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동준은 위 문서를 작성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한 정치인의 집에서 뜻밖의 것을 얻게 되었다. 그 정치인은 당시에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었지만 여전히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 정치인은 동준의 부친과 아주 막역한 친구였다. 두 분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함께 다녔고, 그 친구 분이 나중에 정치세계로 들어갔을 때 동준의 부친은 외부로는 나타나지 않게 하면서 오랫동안 자금을 후원해 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준의 부친이 갑작스럽게 타계한 뒤 부친이 진 빚을 모두 갚고 나니 늦둥이에 외아들이었던 동준은 거의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자라고 겉멋만 들어 허랑하게 보냈던 동준은 갑자기 실업자에 건달이 되고 만 것이다. 제대로 골프도 치지 못하면서 내기 골프로 빚지고, 제대로 나인볼도 못 하면서 당구장에서 살다가 또 빚지고, 화투나 포커판에 가서도 사기치고 빚지고, 그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불법, 탈법, 위법한 일은 골고루 다 저지르며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러면서도 늘 한탕거리 없나 두리번거렸지만 그때마다 빚만 쌓이고 주변 사람들과도 차례차례 원수지고, 게다가 이곳저곳에서 저질러놓은 일이 하도 많아 경찰 피해 다니다가 한강다리 왔다갔다 하며 몸 던질 곳만 찾고 있던 차에 그 정치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서 상의할 게 있다며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 그 정치인, 그를 동준은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황해도가 고향이고 육이오 직전에 가족과 함께 극적으로 이북에서 내려온 어르신은 동준의 부친보다 세 살 위였다. 그래서 학교를 좀 늦게 들어간 탓에 동준의 부친과 함께 공부했지만 나중에 정치에 입문해서 크게 성공하여 이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원로 대접을 받고 있는 분이었다.
도망자 신세에다 갈 곳도 없는 동준이 아무런 기대감 없이 의례적으로 어르신을 찾아갔더니 그분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부친 타계 후 동준이 궁핍한 처지를 잘 알고 있으니 자기 밑에 와 있으면서 잔잔한 일들을 처리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적당한 기회가 되면 큰일도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갈 곳 없는 동준은 그분 집에 머물면서 집사처럼 일을 하게 되었는데, 고맙게도 용돈까지 주는데 그것이 제법 괜찮아서 그냥 눌러앉기로 했다. 또한 어르신은 동준이 경찰에 쫓긴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는지 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따라서 동준은 어르신의 집에 머물면서 외부와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동준으로서는 기막힌 도피처가 생긴 것이다.
그러던 차에 어르신 집 이층에 작은 화재가 났다. 마침 어르신이 지방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그 화재 때 어르신 부인이 기겁을 해서 이층 서재로 뛰어 올라가 남편과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서재 옆의 비밀금고를 열고 여러 봉투를 마구 꺼내어 옮기게 되었다. 그때 어르신은 비밀금고에 있는 서류들을 부인 혼자서 옮기라고 한 모양인데, 그러나 상황이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부인이 아래층에 있는 동준에게 소리쳐서 올라오라고 한 뒤 서류들을 마구 건네며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으라고 한 것이다. 동준으로서야 당연히 그 봉투들을 받아서 정신없이 집 밖으로 가지고 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이층에서 난 조그만 화재였는데 그것이 크게 번져 소방차까지 출동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화재가 진압된 뒤 동준과 부인은 밖으로 가지고 나온 여러 물품과 봉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도 부인은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을 동준이 혼자서 처리했는데, 중요한 물건들을 모두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서류봉투들을 살펴보니 밖으로 가지고 나오면서 마구 던져놓았던 탓에 봉투 하나가 찢겨져서 내용물이 조금 쏟아져 나와 있었다. 동준은 아이쿠 하면서 그 서류들을 정리하는 중에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한글과 일본어, 그리고 영어로 된 문서인데 얼핏 보았더니 내용이 약간 이상했다. 그래서 대강 훑어보면서 제일 뒤까지 펼쳤더니 거기에 여러 사람의 이름과 서명이 들어 있었다. 물론 어르신의 이름도 포함해서. 동준은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는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부인 몰래 그 문서를 빼돌려 감춰두었다.
자, 사태가 이쯤 되었으니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갔을지는 짐작이 될 것이다. 어르신은 집에 돌아와서 그야말로 혼비백산한 상태가 되었다. 불에 그슬린 이층 비밀금고와 그 옆에 쌓아둔 서류들을 몇 번씩 뒤지고 또 뒤지고 했다. 그러더니 동준에게 서류봉투가 하나 없어졌다며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동준이 보지 못했다고 말했으나 그것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이후로 어르신은 동준을 한편으로는 으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달래고…….
동준으로서는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준 은인을 배신한 꼴이 되었지만, 그 문서의 내용은 동준이 어르신에게서 개인적으로 받은 호의와 연결시킬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가운데 동준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했다. 야비하긴 하지만 그것을 이용하면 자신의 처지를 확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동준은 익명으로 어르신에게 편지를 보냈다. 물론 어르신은 누가 보낸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르신으로서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동준이 뒤로 무슨 공작을 해놓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동준은 그 상황을 즐겼다.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당연히 애국심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르신에게는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친이 어르신에게 오랫동안 후원한 것은 동준이 잠시 그분에게 신세 진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런 말 하기는 좀 이상타만……, 그래도 나중을 위해 간단히 말하련다.” 동준의 부친은 동준을 앉으라고 하고서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나하고 심호(深湖)는 친형제와 같은 사이다.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심호를 나처럼 대해야 한다. 이 세상이 다 무너져 내려도 내가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심호뿐이다. 심호도 너를 친아들처럼 대할 터이니, 심호를 보면 나를 본 듯이 하거라.”
부친은 늘 이렇게 동준에게 말했다. 평소 자식인 동준은 물론 남들과도 거의 말이 없는 분이 하신 말이다. 그만큼 두 분은 가깝고 또 서로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따라서 그러했던 어르신을 동준이 먼저 배신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동준은 그 문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심했다. 순리대로라면, 나라를 생각한다면 당장에라도 터뜨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문서와 관계되는, 한국 정치권에서 내로라하는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다. 외교문제로도 복잡하게 번지게 되고, 한국과 일본은 물론 북한과 러시아, 게다가 UN까지 얽혀서 엄청난 국제문제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것은 어르신 한 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 문서에 서명한, 지금도 정치 현장에서 큰 목소리 내며 당당하게 활동하는 그들 중량급 정치인들의 공동의 문제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속한 정치집단의 운명과도 연결된다. 따라서 지금 저들은 자신들의 인생 중 아마 가장 큰 위험에 처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다만 정치의 영역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아마 전 국민적인 저항까지 받고 심지어 그들의 나머지 생애가 편치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저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모여서 대책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 공동의 파멸을 막기 위한 어마어마한 음모를 꾸며가면서. 그것을 위해 모든 인적 물적 사회적 정치적 자원과 자산을 총동원할 것이다.
동준은 겁이 났다. 저들은 혹시 일어나게 될지도 모를 이러한 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마련해 두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오히려 반격을 당해서 이 일이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사실 동준은 그동안 바람직한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형제자매 없이 혼자 자란 탓에 부친이 타계하고 나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되고 말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동준은 그런 말 듣기에 딱 좋게 된 경우였다. 마약, 사기, 도박, 절도, 협박, 폭력, 상해, 밀수, 가택침입, 인신매매, 허위사실유포, 성폭력, 청소년 성추행, 아청법 위반, 성매매 알선, 혼인빙자사기, 공문서위조, 학력위조, 세금포탈, 신용카드법위반, 전자금융거래법위반(대포통장), 외환거래법위반 등등에 억울한 살인미수까지. 그러나 이 모든 짓을 다 하면서도 동준의 주머니는 늘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돈 관리에 대한 개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허영, 사치, 과시, 도박 등등……. 어떻든 그런 짓을 다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요리조리 잘 빠져나왔지만 그중 한 가지로만 경찰에 들어가도 나머지들이 줄줄이 엮여나와 잘못하면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할지도 모른다.
동준은 자신의 처지가 이러하기 때문에 그 문서를 들고 함부로 나서기도 쉽지 않았다. 틀림없이 저들은 동준의 약점을 이용해서 역공을 펴고 자신들이 빠져나갈 길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렇게 동준이 결단하지 못하고 끝없이 고심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한 가지 제의가 들어왔다.
저들은 동준이 지금까지 저지른 일에 대해 다 알아냈다고 한다. 이제 동준이 경찰에 붙잡히면 20년 이상 형을 살게 된다. 따라서 자신들이 최대한 작업을 해서 형량을 반 이하로 조절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문서 원본을 넘기라고 했다. 그리고 형을 살고 나온 뒤에는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도 약속했다. 즉, 윈윈 게임을 하라는 것이다. 둘 다 파멸이냐, 아니면 둘 다 공존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복사본이 존재한다면 그것도 넘기고, 혹 나중에라도 복사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다.
4
동준은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지 않나 주위를 면밀히 살피며 종각역에서 내렸다. 사실은 교도소에서 나올 때부터 누군가가 은밀히 따라왔어야 했다. 동준은 그것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철저히 계획을 세워두었었다. 그러나 미행의 낌새조차 보이지 않자 다소 실망했었다. 혹 동준으로서는 알 수 없는 기묘한 방법으로 뒤쫓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나 소설과는 엄연히 다르다. 동준이 일부러 너른 공간 한복판을 택해서 지나가기도 했지만 동준의 앞뒤옆 어디에서도 수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혹 드론과 같은 첨단장비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것이 더 알아차리기 쉽다. 인공위성을 동원한다면야 모를까.
따라서 종각역에 도착할 때까지 동준은 자기를 뒤쫓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기 몸이나 옷 또는 소지품에 어떠한 장치도 설치해 놓지 않았다는 것도 확신했다.
그렇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오산에서 가방을 찾아서 가지고 온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뒤쫓는 사람이 없더라도 앞뒤 생각 없이 출소하자마자 가방을 찾아온 것은 경솔했다고 여겼다. 갑자기 후회가 되었다. 그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조심에 조심을 할 수밖에.
동준은 물품보관함을 찾았다. 1번과 6번 출구 쪽에 각각 한 세트씩 있었다. 기본 4시간, 추가 4~12시간, 추가 12시간, 1일, 장기보관(1개월), 기본 4시간에 소형 2천 원, 중형, 3천 원, 대형 4천 원 등등. 동준은 장기보관하려고 했으나 5일 이상 보관 시 별도장소에 보관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 3일로 택했다. 결제는 교통카드나 신용카드 또는 모바일 QR 코드 스캔으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동준은 교통카드를 사용해서 소형 한 칸을 열고 그 안에 가방을 집어넣었다.
동준은 교도소를 나올 때 모든 짐을 우편으로 붙였다. 어르신 주소로.
그러고 나서 동준은 간편하게 작은 백팩 하나만 등에 짊어지고 나선 것이다. 복장은 평범한 30대 후반의 모습. 하긴 그것은 동준의 생각일 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있듯이 유행주기가 아주 짧은 현대인의 취향에서 볼 때 현재 동준의 복장이 평범한지는 사실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교도소에서 마련해 준 복장 그대로 나온 것이니까. 그러나 막상 밖으로 나오고 보니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따라서 이제는 대중 속으로 녹아들어간 것이라고 동준은 생각했다.
“강산은 10년이면 변하면서 사람들 모습은 별로 바뀌지 않았네. 인심이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동준은 이 사람 저 사람 쳐다보다가 자칫 오해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눈길을 돌렸다. 하긴 오해가 아니라 진실이겠지. 좀 이상한 사람.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 그래, 맞다. 12년 동안 세상에서 격리되었다가 나온 사람이니까.
동준은 다소 풀이 죽은 채 자신이 나가야 할 출구를 찾아 터벅터벅 걸었다.
이윽고 종각역에서 밖으로 나온 동준은 수송동 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안국동 사거리를 지나 삼청파출소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걸었다. 그리고 삼청테니스장을 지나 삼청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동준은 으슥한 나무숲으로 들어가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12년 전과 달라졌나? 잘 모르겠다. 그러나 숲이 더 짙어졌다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신하지는 못한다. 하긴 주변 모습이 달라지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이 바위가 그대로 있고, 또 이곳까지 무사히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중에도 여러 형태로 자신을 뒤따르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자주 살폈다. 청와대 근처라서 비행기나 드론 등을 띄워 하늘에서 감시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동준은 확신했다. 안전하다고.
12년 전 동준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 문서 복사본은 오산에 숨겨두고, 그와 동시에 원본을 모두 사진 찍어 USB에 담은 것은 별도의 장소에 묻어두었다. 한쪽이 없어지더라도 나머지는 남아 있을 테니까. 그 두 곳 중 하나가 바로 지금 동준이 앉아 있는 바위 아래였다. 혹 많은 비가 와서 떠내려갔거나 공원정비 등을 통해 바위를 치우거나 공원 배치가 바뀐다면 낭패였지만 그 당시로서는 시간이 없어서 더 좋은 방법은 찾기 어려웠다.
동준이 앉은 곳은 사람 왕래가 거의 없었다. 산책길에서 조금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무척 깊은 숲속같이 깊은 느낌이었다. 동준도 그곳에서 바깥 길 쪽이 안 보였고, 마찬가지로 바깥에서도 그곳이 안 보일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꽤 그럴듯한 곳을 고른 듯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동준은 바위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엉덩이를 털고 옷매무새를 한번 만졌다.
산책길로 나와 하늘을 보니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있다. 참 보기 좋은 광경이다. 하늘은 맑고, 뭉게구름 높으며 숲은 짙으니.
그 순간 동준은 맥이 탁 풀렸다. 이제 복사본과 원본을 찍은 사진 모두 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더 조심해야 한다. 혹 납치라도 되면 USB를 꼼짝없이 빼앗기고 원본 위치도 불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몰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간첩들처럼 청산가리가 든 캡슐을 깨물고 죽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런 것 어디 가서 구해 올 수도 없고.
어떻든…….
이제 동준은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
12년 전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동준은 어르신과 약속을 했다. 아니, 어르신이 동준에게 약속해 주었지. 12년 이후의 인생은 완벽히 보장된 것이라고. 물론 동준이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동준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동준이 어떤 수작을 꾸며놓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동준에게 함부로 할 수도 없을 터이다. 그래서 동준이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동준의 주변을 철저히 조사해 놓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테지. 당연하다. 동준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에게 알렸다가 그가 어떤 연유로 해서 고초를 겪는다든가, 최악의 경우 동준을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동준 혼자서 안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저들은 모른다는 것이 동준에게는 큰 이점이라고 생각하고, 저들에게는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놔두기로 했다.
5
“네, 그렇게만 전해주십시오.”
동준은 공중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당연하지. 직접 연결해 줄 리가 없다. 그러나 저들은 지금 마음이 바쁠 것이다. 모른 척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동준은 최고급 노트북과 USB를 여러 개 샀다. 그리고 문구점과 선물가게로 가서 아주 조그만 상자들을 사왔다.
동준은 커피숍으로 들어가 USB를 상자에 하나씩 넣고 포장했다. 그런 다음 그 독도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그들이 속한 정당의 주소를 적어넣었다. 그리고 보내는 사람으로는 어르신의 이름을 썼다.
동준은 우체국으로 가서 번호표를 뽑았다. 잠시 기다리니 동준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동준은 번호표를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우체국에서 나왔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한다……?
원래는 저들이 동준한테 연락해서 무엇인가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신호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잘못된 거지?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