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ch is a piece of the continent
1
해선은 호텔에서 제일 가까운 커피숍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난번 해선이 해고되던 날 선생님을 만난 곳이다. 여기에서 10분 정도 선생님을 보고서 곧바로 호텔로 돌아갔었다. 급히 호텔에서 나오고 돌아가고 하는 바람에 가슴도 조마조마하고 숨도 무척 가빴었다.
그날 오후 핸드백이 없어진 것을 알고 난 이후 해선이 해고될 때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일은 얼떨떨하다는 것밖에 다른 말은 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여자 손님의 항의에 이은 배상과 해선의 해고. 아마 호텔 측에서는 깔끔하게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며 한숨 돌렸을 것이다. 호텔에서는 핸드백 매입비만 손해 보았겠지. 그러나 그 정도는 호텔 전체 입장에서 볼 때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총지배인인 김상기 전무 선에서 간단하게 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김 전무는 그날 적어도 해선이 그 핸드백 도난과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진짜 범인을 숨겨주기 위해 서둘러 해선을 해고해서 내보내고 그 사건을 빨리 종결시키려 했을지도 모른다. 즉, 범인은 김 전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해선은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했지만, 그 사건 어느 부분인가가 어색하다는 사실을 늘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선생님이 모텔에서 김 전무와 오진희를 보았다는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은 어렴풋하게나마 해선의 머릿속에서 맴돌기는 했지만 김 전무와 오진희의 연결고리를 생각해 낼 수 없었기에 그저 흐릿한 추측으로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건의 실체가 어느 정도 명확해지고 있었다. 아니, 그런 느낌.
자,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
그 핸드백은 오진희가 빼돌린 것이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김 전무는 오진희를 감싸기 위해 서둘러 해선을 쫓아냈다. 마침 해선이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한 것이 얼마나 좋은 구실인가. 그리고 혹 해선이 반발할 것을 염려해서 해고가 아니라 자진사퇴 쪽으로 몰고 간 것이다. 선처해 주는 척한 것이지. 그렇게 해야만 해선이 받아들이고 경찰의 개입도 막을 수 있었을 테니까. 또한 그 과정을 가능한 한 짧게 해서 해선에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을 주지 않고 끝내서 덮어버려야 일이 확대되지 않는다. 게다가 호텔 손님에게도 가능한 한 빨리 배상해 주어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해선의 눈앞에 그날 있었던 일이 영화장면이 되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영화는 오진희가 김 전무의 팔을 끼고 다정히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이 났다. 어쩐지 마지막 장면에서는 오진희가 뒤를 돌아보며 해선에게 윙크할 것만 같았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그 대신 해선이 오진희 뒷모습에 윙크를 해주었다. 마음속으로.
축하해.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선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복직……?
고개를 흔들었다.
복수……?
글쎄.
복제……?
뭘?
무엇을 복제한단 말이야? 복제, 복사, copy…….
2
해선은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답변이 오지 않았다. 그동안 돈을 조금 모아놓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은 선생님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관계를 정리해야 할 상황이다. 지난번에 암시를 주려고 했던 것이 엉뚱한 일로 인해 조금 미뤄지기는 했지만 아무튼 조만간 결론을 내야 한다.
어떻든 해선은 지금 마음이 조급한 상태다. 정식으로 취직이 안 되면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한다. 저번 스웨덴 회사에서처럼. 사실 해선의 머릿속에는 그 회사가 늘 맴돌고 있었다. 필요하면 꼭 불러주겠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해선이 그 회사가 더 필요했다. 그렇다고 먼저 연락해서 일거리 없냐고 묻기에는 자존심이 좀…….
자존심?
그렇게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지금 여기 그 회사 앞의 커피숍에 앉아 있단 말이지? 혹시나 그 회사 사람들이 우연히 들어와 주어 마주치기를 기대하면서. 기왕이면 그 지사장이나 남 과장이 들어오면 더 좋고. 그런 공상을 하면서 해선은 의자에 깊숙이 앉아 유리창 밖을 빤히 내다보며 제발 나와라 나와라 하고 빌고 있는 중이다. 이 짓이 벌써 이틀째인데, 아마 사흘이 넘어가면 더는 못 참고 그 회사로 직접 쳐들어갈지도 모른다.
아는 사람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마침 이 커피숍을 알려주더라고요.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바쁘신데 일 보세요. 회사는 잘 되시죠? 혹 일이 있으면 연락주세요. 좀 바쁘긴 하지만 그쪽 회사 일은 우선순위 1위랍니다. (살짝 미소와 눈웃음 ^^)
해선은 이 문장을 머릿속에서 스무 번도 더 반복해서 외웠다. 잘못하면 다른 사람 만났을 때도 저도 모르게 이 말이 나올 판이었다. 지금도 입속에서 우물거리고 있는 중이나까. 눈썹을 찡긋거리면서.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창밖으로 어떤 화사한 모습의 중년 부인이 지나간다. 괜히 부러웠다. 자신도 저 나이가 되면 저런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저 여자, 아이도 한둘 있겠지. 남편도 넉넉한 사람일 거고. 집도 이 근처에 있을까? 비싼 동네인데. 나는 저 나이쯤 되면 어떤 모습일까? 어떤 사람하고 결혼하게 될까? 결혼……? 내가 결혼을 해?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면서……?
“장해선 씨?”
장해선 씨가 뭐야? 여보나 자기라고 불러야지…….
응?
해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에 어떻게 오셨어요? 누구 만나시나 봐요?”
해선은 얼떨떨했다. 지사장이 언제 여기에……?
“아, 예……. 혹시 일이 있나 해서요.”
“무슨……일……?”
“통……역…….”
갑자기 지사장이 얼굴을 출입문 쪽으로 돌린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기 때문이다.
해선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여자. 조금 전 창밖에서 지나가던 중년 부인.
지사장이 손을 들며 여자 쪽으로 성큼 다가간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응, 여보, 여기야.”
해선은 얼굴이 화끈했다. 그와 동시에 괜히 분한 마음도 들었다.
해선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리고 따박따박 걸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커피숍을 나갔다.
해선은 계속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웃겼다, 자기 자신이.
병신. 벼엉신.
괜히 눈물도 나는 것 같았다.
완전 병신이네. 진짜 병신.
근데 그 새×는 더 병신이야. 내가 그렇게 힘들게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도 몰라주고 뭐 어떻게 오셨냐고? 일거리 찾아서 왔다, 왜? 어쩔래? 네 부인만 챙겨주면 다냐? 나같이 춥고 배고픈 백성 돌봐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구시렁구시렁.
걷다 보니 해선은 어느덧 한강 둔치까지 왔다.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들볶고 자학하며 비하하다 보니 그보다 더한 고통은 없었다. 다리 통증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일……, 만일 여기 한강에서 이 초라한 인생 마감한다면 어떻게 될까……?
둔치 위로 바람이 불었다. 초여름 더운 날씨에 시원한 바람이면 좋으련만 습기 잔뜩 묻어 있는 눅눅한 바람. 그래도 안 부는 것보다는 나았다.
해선은 계속 걸었다. 한강 상류 쪽으로. 길옆으로는 자전거 타는 사람, 뛰는 사람, 스케이트보드를 열심히 밀고 나아가는 사람, 해선과는 그 마음이 다르겠지만 끝 모를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걷는 사람, 가족이나 연인끼리 걷는 사람 등등 참 보기도 좋았다. 오직 해선 자신만 어둠을 꿈꾸며 그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중에도 안 부는 것보다는 나은 눅눅한 바람은 약하지만 끊임없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윤동주 시인의 ‘바람이 불어’에 나오는 구절. 지금 이 상황과 어울리는지는 모르지만 해선에게 그 시가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서 해선은 ‘이거 왜 이래?’ 하고 누군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타박한다. ‘나 이 정도는 안단 말야. 문창과 출신이거든.’
맞다. 해선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주변 선배들을 보고서 자신도 그 길로 나갔다간 미래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아 문학공부는 집어치우고 외국어에만 매달렸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차라리 문학의 순수함에 갇혀 사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외국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되었다고 자부하지만, 그 대신 약은 처세에만 매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씁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타박하며 걷고 걷는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한참 벨이 울리다 지쳤는지 저절로 꺼진다.
잠시 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어 화면을 보니 아까 만난 그 지사장이었다. 해선은 갑자기 약이 올라서 꺼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눈에 맺힌다. 왠지 모르게 분했던 것이다. 좀더 일찍 전화하지 왜 지금 전화하느냐고 타박하고 싶은 마음도 일었다. 꼭 그렇게 자기 부인만 챙겨줘야 하냐고…….
그 뒤로도 전화가 몇 번 더 울렸다. 여기저기에서 온 것이겠지. 그러나 하나도 받지 않았다. 아마 음성메시지나 카톡도 왔을 것이다. 다 싫었다. 모든 게 다. 몽땅 다.
해선은 이렇게까지 된 자기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어쩌자는 의식도 없이, 지금껏 목표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왔다. 직장과 결혼과 미래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매일매일 먹고 자고 그랬던 것이다. 학교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기를 쓰고 어학공부한 때가 사실 목표가 확실했다. 그때는 오직 공부뿐이었으니까. 하루 종일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도 약간 곁들여 공부했다. 그 이외의 것에는 눈도 주지 않았다. 연애에도 관심 없었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집에도 거의 연락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미래로 나갈 일만 신경 쓰고 있었다. 아, 선생님이 있었지. 사실 그때 선생님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그 공부 다 감당할 수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일탈이라면 단 하나, 선생님뿐이었다. 그것도 해선에게는 중요한, 너무도 중요한 도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호텔에 취업할 때만 해도 인생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선생님도 차츰 정리될 것이고, 그러면 해선 자신은 좀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자신했었다.
하지만 그 핸드백 사건이 모든 것을 망쳐놓고 말았다. 오진희. 그리고 김상기 전무.
요것들…….
며칠 전 그 둘의 관계를 알게 되고, 또 그 사건의 실체를 짐작했을 때는 이상하게 담담했었다. 그 일도 해선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인생의 한 고비라고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달랬었다. 물론 괘씸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둘에게 해코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사람들에게 매달리기에는 자신의 앞날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비참한 마음이 되니 생각이 달라진다.
갚아주자. 철저하게, 한 마흔 배 정도로……. 아냐, 오십 배로 하자. 백 배는 너무 많고.
3
해선은 남주환 과장에게 전화했다.
“아, 장해선 씨, 제가 몇 번 전화했었어요.”
“죄송해요.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된 것도 모르고 그냥 놔뒀었어요.”
“저번처럼 통역 일 할 수 있으세요? 요즘 안 바쁘세요? 스웨덴에서 또 손님들이 오시는데.”
“아뇨. 할 수 있어요. 언제……?”
“내일인데, 괜찮겠어요?”
“그럼요. 좋아요.”
“제가 이메일로 자세한 내용을 보내드릴 테니까, 내일 아침에 인천공항으로 직접 가주세요. 시간 늦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교통편이 불편하면 저희 직원이 데려다드릴 수도 있어요.”
“아뇨, 괜찮아요. 제가 직접 갈게요.”
“자세한 것은 이메일로 보내드릴 테니까 그거 보시면 돼요. 거기에 시간과 게이트 다 나와 있으니까.”
“알았어요.”
“아, 그런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저희 지사장님이 걱정하시던데…….”
“…….”
“장해선 씨?”
“……. 아, 네. 아무 일 없어요. 요즘 좀 일을 많이 맡아서 하다 보니…….”
“이거 비밀인데, 사실 내일 통역하는 분 다 정해졌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지사장님이 장해선 씨에게 연락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지사장님하고 통화하신 적 있으세요?”
“아뇨, 없었어요. 전혀…….”
“참 이상하네요. 한 번도 그러신 적 없었는데…….”
“저, 내일 그 시간까지 가면 되죠? 다른 건 준비할 것 없고요……?”
“아, 그럼요.”
“그럼, 내일 뵐게요.”
“아, 잠깐만요. 깜빡 잊을 뻔했네. 내일 저희 직원은 아무도 안 나가고, 지사장님만 잠깐 가서 스웨덴 손님들에게 인사드리고 곧장 다른 곳으로 가실 거예요. 그래서……, 잘 하시겠지만 아주 특별히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아무튼 자세한 것은 이메일로 보내드릴 테니까 잘 읽어보세요.”
이 뒤로는 관례적인 대화 한두 마디 하고 전화가 끝났다.
해선은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최정명 지사장 얼굴이 떠오른다. 해선은 아랫입술을 깨물듯이 입을 꼭 다물고 마음속으로 고개를 꾸벅했다. 그리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시시한 것들은 여럿 있었는데, 남 과장이 보낸다는 것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해선은 사흘 동안 통역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많이 피곤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피곤하기야 하지만 일이 끝나서 후련하다는 것 같은 마음은 없었고, 그보다는 잘 끝나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그보다 더 고마운 것은 지사장이었다. 공항에서 만났을 때도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많이 바쁘실 텐데 우리가 자꾸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참 복도 많은 사람이다. 후덕한 미인 아내를 둔 데다가 성품도 넉넉해서 아마 회사 안팎 사람들이 잘 따를 것 같았다. 외모로 봐서는 아버지뻘까진 되지 않겠지만 꼭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다. 사람 속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만한 인격 갖춘 사람 드물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사람은 공항에서 만났을 때 봉투까지 하나 주었다.
“이것은 급행료입니다. 바쁜 사람 잡아서 일 시킨 값이니까 받아주세요. 다른 일 하지 못한 보상은 해드려야죠.”
해선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나는 언제 그런 아버지 얻나…….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도 생각 안 나는 아버지도 어쩌면 그분 같았을 거야……. 새우 눈으로 맨날 노려보는 것 같은 새아버지 말고.
그런데 웃긴다. 아버지를 얻는다는 표현이 뭐야? 아버지가 딸을 얻는 것이겠지. 아버지를 늘 믿고 따르는 착하고 예쁜 딸을.
나 그런 딸 될 테니까 어디 날 데려갈 아버지 없어요……?
해선은 오늘은 이것저것 공연한 생각일랑은 아예 하지 말고 잠이나 푹 자자며 일찌감치 침대로 올라갔다.
잠이 들락 말락…….
민규식 선생님. 민규식 교감선생님. 아냐, 그냥 선생님……. 그분은 나한테 어떤 사람일까? 아버지일까? 사실은 한 번도 아버지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럼 뭐지? 그냥 도와주는 사람……? 그분은 결혼하자고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니 딸이니 하는 그런 감정은 없는 거잖아. 그러나 해선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맞다. 호텔 근처에 와서 나와 달라고 졸라대는 것 말고는. 그럴 때는 오히려 어린애가 칭얼대는 것 같아서 밉살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가도 할 수 없이 나가곤 했다. 그렇지만 어떻든 이런 비교를 하는 데에서 선생님은 제외.
아, 오진희. 김 전무.
그 두 사람도 아버지와 딸의 관계? 그런데 딸을 모텔에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많은 거야……?
해선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좋은 아버지도 많을 것이다. 진짜 아버지. 딸바보라는 말도 있잖은가. 딸이라면 벌벌 떠는 그런 아버지.
해선은 아버지 생각이 잘 안 난다. 너무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라면 그저 추상적인 느낌만 들 뿐이다.
언젠가 대학 다닐 때 학과에서 학생들 모두가 한강 공원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무엇이든 좋으니 원고지 10장 내외의 글을 써오라는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딸이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는 그 옆에서 함께 뛰는 장면을 본 적 있었다. 날씬한 딸과 뚱뚱한 아버지. 아마도 아버지의 뱃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시켜드리려고 부녀가 함께 나온 것 같았다. 아버지는 뛰다가 걷다가 하면서 허리에 찬 수건을 빼서 계속 땀을 닦았다. 딸은 자전거 안장에 편히 앉아서 아버지 속도에 보조를 맞춰 자전거를 천천히 몰고 가면서 계속 아버지를 닦달했다. 서지 말고 계속 뛰라고. 아버지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리고 발은 거의 걷는 모습인데도 팔만은 위로 들고 흔들며 뛰는 흉내를 내면서 걷듯이 뛰어갔다.
그런데 당시에 그 모습이 해선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었는지 모른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있다면……. 지금 집에 있는 퉁명스러운 새아버지 말고.
자전거를 타고 가며 아버지를 나무라는 딸. 하지만 해선이라면 그 아버지를 부축해서라도 옆에서 함께 뛰고 싶었다.
아버지. 아빠. 이 말은 엄마 소리보다도 해선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는다. 아직까지도.
그날 해선은 그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썼다. 본 대로 느낀 대로 그대로.
그 다음주 교수님이 따로 해선을 불렀다. 글도 잘 쓰고 소재도 좋았다고. 특히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지나치게 감상적이도 않고 냉정하지도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글과 같은 지극히 객관적이면서도 사람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을 계속 써보라고 했다.
그러나 해선은 글쓰기를 포기했다. 아니, 거부했다. 글만 가지고는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없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해서 학교는 간신히 졸업하고, 그 뒤로는 글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 아버지에 대해 썼던 그 옛글을 다시 떠올리며 해선은 후회를 했다.
글을 쓸걸. 그때 교수님이 분명히 말했었다. 해선에게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그리고 교수님이 이끄는 창작교실에 들어오라고도 했었다. 하지만 해선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돈.
그러나 해선에게는 아직도 돈이 없다. 꿈을 찾지 않고, 돈을 찾아 떠났는데도 돈이 없는 것이다.
어리석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인가……?
이렇게 답도 없고 길도 없는 생각에 한없이 붙잡혀 있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어느새 잠은 다 달아나고 머릿속은 뾰족뾰족한 채 눈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이었다.
해선은 오지도 않을 잠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일어나자고 생각하면서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문의 버티컬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바깥세상의 빛에 눈을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해선은 차츰 현실의 자신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해선은 지금의 현실에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우선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취직하지 않으면 자신에게는 미래가 없다.
세상 다 가진 듯이 좋아했던 호텔 취직. 그것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끝나버렸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현실인데. 그 호텔과 같이 좋은 직장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 나쁜 것들…….
해선은 생각할수록 분이 치밀었다.
그래, 오진희와 김 전무.
해선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여름의 방 한가운데서.
요것들…….
갑자기 열이 확 올라왔다. 해선은 얼마 전 새로 산 연분홍 인견 이불을 걷어찼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가 창가로 갔다. 버티컬을 올렸다. 바깥의 여러 가지 복잡한 빛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해선은 팔짱을 끼고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