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전체의 한 부분

A part of the main

by Rudolf

제4장

A part of the main

전체의 한 부분


1


출소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무 연락도 안 온 것이다.

동준은 불안했다. 자신이 교도소에 들어가 있었던 1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더군다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문서에 서명한 다섯 명의 인물이 아무도 아무런 제약 없이 언론 여기저기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한 사람은 몇 년 전에 지병으로 타계했다고 한다. 이제 남은 사람은 넷. 그리고 정계에서 한 발자국 뺀 어르신 역시 아직도 사회원로 대접을 받으며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혹시 내가 없었던 12년 동안 대한민국이 일본 땅 된 거야? 나라가 뒤집혀진 거냐고?

동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갑자기 원본을 넘긴 것이 실책이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오른다. 원본을 넘기지 않았다면 동준의 형기는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따라서 어찌 보면 동준으로서는 손해 본 것 없다고 자위할 수도 있다. 아마 저들은 이 점을 동준이 알아주길 바랄지도 모른다. 은인으로서. 그리고 나중에 혹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동준과 연결되는 것을 철저히 막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저들은 그 문서가 공개되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평할 수 있는 것일까? 이건 마치 그 문서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한번 읽어보기만 해도 매국행위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혹 저들이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닐까? 어떻게? 그 문서에는 한국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본 정치인들의 이름과 서명이 들어 있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그게 말이 돼?

동준은 혼란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12년 전과는 다른 지구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 문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구.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동준은 오피스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처지를 찬찬히 돌아다보았다.

그래, 나는 손해 본 것 없어. 이쯤에서 손을 뗀다 해도. 오히려 이득을 보았다고 할 수 있지. 12년으로 자신의 허물을 다 때웠으니까. 그 12년. 처음에는 천년만년 같았던 그 세월이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지금부터 조심해서 산다면 다시는 그런 곳에 들어갈 일 없다. 초라하지만 그냥 대충 살아간다면 앞으로는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동준은 교도소에서 나올 때 한 교도관이 건네준 USB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내용은 짐작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준 출소 기념선물이니까. 아마 동준이 먹고살 만한 최소한의 대책이 들어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니까. 그러나 동준은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리고 저쪽에서도 그 이상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결정해야 한다.

첫째, 앞으로의 인생을 피라미처럼 살아가는 것.

둘째, 인생역전을 위한 한판 큰 도전.

셋째, 애국심.



2


동준은 인터넷 신문 하나를 선택한 뒤 독도문서 사진이 들어 있는 USB를 포장했다. 주소를 다 쓰고 발신인을 어르신으로 한 다음 주머니에 집어넣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허름한 점퍼에 회색 면바지. 뒷굽 없는 흰색 스니커즈. 키 185cm. 선글라스를 쓰고 동준은 터벅터벅 걸었다. 지난번에 갔었던 그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우체국 앞에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한참 서 있었다.

동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저쪽 인간들은 동준의 생각은 다 꿰뚫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다. 언론, 유튜브, 카톡, 이메일 등등의 SNS는 너무도 쉬운 방법이다. 그런 곳에는 이미 백신을 다 놔서 조금 앓다가 말 것이다. 아마 저들은 오히려 그것을 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한두 번 앓다가 말면 나중에는 무감각해질 테니까.

아니다, 이것은. 어설프게 했다가는 오히려 당한다.

저들은 동준 위에 있다. 아주 위에, 저 꼭대기에. 동준으로선 쳐다보지도 못할 하늘 높은 곳에.

동준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흰 구름 몇 조각이 떠 있다. 가만히 있는 것 같은데 가장자리가 조금씩 변한다. 흩어진다. 그러고 보니 약간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가장자리가 조금 더 퍼졌다.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처음의 모양에서 꽤 많이 변해 있었다. 약간 어지러웠다. 오랜만에 자유의 하늘을 올려다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늘에서 눈을 내려 거리로 향했다. 사람들이 동준을 쳐다보다가 얼른 눈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뭘 봐, 씨.

동준은 한쪽 발로 돌멩이를 차듯이 발을 살짝 움직여 보고는 발걸음을 힘차게 옮겼다.

다 비켜.

그래, 내가 더 높이 올라가자. 그곳에서 니들을 다 내려다볼 거야. 니들 다 죽었어.

동준은 남산타워로 갔다. 제일 꼭대기 전망대로 올라갔다. 생전 처음이다. 그곳에 가보았더니 N서울타워라고 부른다. N은 무슨 뜻이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알았는데 ‘New Namsan’이라고 해서 N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고 대인과 소인의 요금이 다르다. 동준은 기꺼이 대인요금을 냈다. 남들보다 작지 않으니까 당연히 대인이지. 마음까지 대인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곧 하늘 높이 올라가면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클 거다. 그때 가서 마음도 키우면 될 테지.

동준은 전망대를 돌면서 천지를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동준의 머리 위로 솟구쳐 있는 대형안테나를 통해서는 전국 TV 시청자들의 48%에게 전파가 보내진다고 한다. 우와! 이런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동준은 생각했다. 내 발 아래에는 천지가 놓여 있고, 머리 위로는 전 국민의 반이 있단 말이지? 그거 괜찮은데. 저놈들, 지금까지 나를 졸로 보았겠다. 웃기지도 않는 것들. 지금부터는 내가 귀여워해 줄 거다. 가지고 놀 거라고, 내 발 아래 있는 것들아.

흐흐흐.

말은 폼 나게 했지만 동준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도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에잇, 그래도 소리나 한번 질러보자.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

이 새×들아, 내가 간다아아아아아아!

니들 다 죽…….

목만 아팠다.


3


동준은 어르신 집 근처로 갔다. 부촌이라 그런지 멀리서 봐도 CCTV 카메라가 여기저기 빽빽이 달려 있었다. 이런 동네에서는 밤중에 골목에서 연애도 못하겠네. 동준은 침을 탁 뱉었다. 그래, 잡아가라, 가래침 뱉었다고.

그 동네에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동준이 유일한 것 같았다. 고급 자가용만 뻔질나게 지나간다.

이거는 보도가 아니라 완전 차도군. 신호등이라도 달아놔야 되는 거 아냐?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고급 차를 보고서 동준은 투덜거렸다.

동준은 12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어르신 저택으로 갔다. 제대로 찾았다. 신통하게도. 화재가 난 탓에 수리하긴 했겠지만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어르신이 아직 그곳에 사는지는 모르겠다. 문패 같은 것은 없으니까. 그것은 그전에도 그랬다. 대문 한쪽에 주소만 인쇄된 조그만 판이 하나 붙어 있을 뿐이다.

육중한 대문. 두드려 볼까? 예전의 그 자리에 벨이 그대로 있을까? 인터폰에서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까?

접니다, 꼴통입니다.

핏. 동준은 혼자 웃었다.

대문 밖에서 높은 담장 너머로 어르신의 이층 저택을 주욱 훑어보고 동준은 그냥 지나쳤다.

여기에 와보면 영감이라도 받아서 혹 무슨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대했던 동준은 다소 실망이 되어 터덜거리며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 시커먼 고급 외제 승용차가 소리도 없이 스르르 나타났다. BMW.

동준은 본능적으로 멈춰서서 승용차를 마주 바라보았다.

승용차가 선다.

동준은 앞 유리창 너머로 멍한 눈을 보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승용차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동준은 계속 유리창만 바라보았다.

뒷좌석 유리가 스르르 열린다. 컴컴한 속에서 아는 얼굴이 비친다.

동준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승용차 안의 얼굴은 표정 하나 없이 그냥 내다보기만 한다.

동준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움직인다.

동준은 오른쪽 앞좌석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열린다. 동준은 다시 한번 뒷좌석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올라탔다.



4


동준은 이층 서재에서 어르신과 마주앉았다. 어르신이 먼저 입을 연다.

“고생했어.”

어르신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진심이 느껴졌다. 어르신은 키가 컸다. 동준과 비슷했다. 어르신 세대와 비교하면 거인이다. 게다가 골프와 같은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몸매가 균형 잡혀 있고, 햇볕을 많이 받았을 텐데도 얼굴은 흰 편이었다. 염색하지 않은 부드러운 은발에 자상하게 보이는 눈. 얼굴 전체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학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기다랗게 내려온 귀, 연세가 많은데도 안경은 쓰지 않았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다. 12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 어르신 앞에 가면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치를 할 때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을 시원시원하게 잘 했는데, 막상 저택에서 모시고 보니 말이 거의 없었다. 일을 시킬 때도 군더더기 없이 간략하게 지시할 뿐이었다. 나머지는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어울리듯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화답했다.

“건강은?”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부친도 강골이셨지.”

동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을 빼닮았어.”

어르신이 중얼거리듯 말한다.

해영(海影)은 동준 선친의 호다.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지녀 그 그늘에서 많은 물고기가 노닌다는 뜻으로 어르신이 직접 지어주었다고 한다. 어르신은 동준의 선친보다 나이가 세 살 위여서 선친을 친구이면서도 아우처럼 아꼈다. 게다가 어르신에게는 평생에 걸친 충직한 후원자였지.

선친의 장례 때 어르신은 다른 사람들 다 보라는 듯이 동준을 옆에 불러놓고 정견발표처럼 말을 했다.

“내 평생의 동지이자 조력자요 후원자요 내가 가장 존경해 오던 해영 선생의 아드님이 여기 있소. 내 해영의 이름을 걸고 이 자리에서 맹세하리다. 오늘부터 동준은 내 아들이오. 내 생명이나 마찬가지요. 해영은 떠났지만 해영은 늘 내 옆에 있는 것이요. 내 아들 동준이 바로 해영이요…….”

개소리.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 두어 번 전화가 왔었나,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동준이 망나니짓을 하고 돌아다니다 돈 떨어지고 사람 떨어질 무렵 그런대로 고맙게 연락해 주어 비서 노릇을 잠깐 했을 뿐이다. 보수는 넉넉하게 주어서 다행이었지만.

“내 일을 해줄 텐가? 그전처럼.”

동준은 눈을 깜빡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거지?

동준은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세상이 쉽지 않을 게야. 내가 요즘 해영을 많이 생각하고 있어. 그런 충직한 분 세상에 없었지.”

동준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묘소에 가서 인사는 드렸나? 우리 한번 같이 가세. 내 해영의 신세를 많이 졌지…….”


동준은 어르신의 집을 나서면서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임자는 내 아들이야. 해영도 그리 생각할 게야.”

동준은 우울했다.

이게 뭐야…….


5


동준은 자신이 농락당한 것을 알고 있다. 어르신은 동준이 자기 아들이라고 하지만 동준은 마음이 무거웠다. 돌아가신 부친 대신 모셔야 할 어른.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어르신과 같은 말을 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준은 이제 어르신이 개새끼인 것을 안다. 게다가 매국노까지 겸했다. 누가 이것을 믿어줄까? 중후하고 인품 좋게 생긴 영향력 있는 은퇴한 정치인. 소문에는 재산도 상당하다. 그런데도 동준의 부친은 어르신을 열심히 후원했다. 평소 어르신을 한국을 일으킬 큰 인물처럼 언급했으니까. 결국 동준 부자만 불쌍하게 된 거다. 남몰래 은밀히 재산 쌓아놓은 인간에게 열심히 돈을 갖다바쳤으니. 차라리 그 돈을 아들에게 남겼으면 고생이나 덜했지.

동준은 이가 부드득 갈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준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 위선자 앞에서 왜 그렇게 주눅 들어 쩔쩔매다 나왔을까? 하다못해 자신의 부친이 갖다바친 돈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못하고. 돈 이야기가 치사스럽게 생각되었다면 안중근처럼 멋들어지게 매국노의 가슴 한복판에 민족의 이름을 던져놓고 나왔어야 하는 건데.

제기랄.

키만 훌쩍 컸지, 속은 겁먹은 강아지만도 못한 자기 자신.

한숨만 푹 나왔다.

어르신 말처럼 동준은 부친의 묘소에 가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은 면목이 서지 않는다. 다음 기회로 미루자.

동준은 심호흡을 한 뒤 머리를 한번 흔들고 오늘 일을 더듬어 보았다.

어르신은 너무도 당당했다. 오히려 철없는 젊은이에게 측은지심을 보내는 인자한 원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말이 안 된다. 12년 전 그 문서가 없어졌을 때는 하늘이 무너진 듯이 기겁을 하고 동준에게 매달리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동준의 형기까지 줄여주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바뀐 것이냔 말이다. 누구 말대로 갑과 을이 바뀐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저들은 지금 동준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동준이 그 문서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아니다. 저들이 동준이라도 만일을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복사본을 만들어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준이 현재 복사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 원본이든 복사본이든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

말도 안 된다.



동준은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받았다. 그리고 렌터카를 빌려 어르신 동네 길 입구에 세우고 BMW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하루 종일 차를 세워둘 수 없어 오전에만 그렇게 했다.

사흘째 되는 날 BMW가 나타났다. 차 번호를 확인하고 천천히 뒤를 따랐다. 미행을 눈치 챌 수 있어서 가능한 한 멀리에서 뒤쫓았다. 한남대교를 지나 시내 쪽으로 들어간다. 남산터널을 지난다. 그러나 그대로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남산 쪽으로 다시 방향을 튼다. 그러더니 남대문을 돌아 서울역을 지나 용산으로 간다. 동준은 신호등에 몇 번 걸려 놓칠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곧 뒤따라갈 수 있었다. BMW는 속도를 크게 내지 않고 천천히 운전하는 것 같았다. 급한 일은 없는 모양이다. BMW가 강변도로로 진입했다. 자유로를 따라 달리다가 방화대교를 건넌다. 그리고 김포 쪽으로 들어갔다.

BMW를 따라 고촌을 지나 김포로 가면서 동준은 깜짝 놀랐다. 웬 아파트가 그렇게 많이 들어섰는지. 완전히 천지개벽한 것 같았다. 길옆에는 높은 상가건물들도 길게 늘어서 있다. 그리고 가만히 보니 전철도 그리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동준이 세상에서 사라진 12년 동안 너무도 많이 변한 것이다. 동준은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온 촌놈이었다.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며 동준은 BMW를 따라 길을 달리면서 옛 추억에 잠겼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산소를 가기 위해 그 길을 많이 오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냥 옛 감상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BMW의 뒤꽁무니가 가끔 안 보이기도 해서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BMW는 그리 서두르는 것 같지 않았다. 규정속도를 잘 지키며 신호등에도 아주 모범적으로 반응한다. 어떤 때는 동준이 너무 따라붙는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했었다. 그 경우에는 차선을 바꾸어서 다른 차가 앞서 가게 해주어 BMW와는 너무 붙지 않게 했다.

BMW가 골목길로 들어선다. 동준의 눈에 익숙한, 그러나 어딘지 낯선 곳. 지난 12년 동안 세상 어느 구석 하나 변하지 않은 곳이 없다. 어둠 속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온 동준은 어디를 가나 소외된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것에 적응하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것은 그렇고……, 그런데 다소 의아했다. 어르신이 이런 누추한 곳을 다 찾다니. 하지만 그가 어디를 가든 그의 마음대로다. 동준으로서는 그가 가는 곳을 알기만 하면 된다.

BMW는 고려공원묘지로 향하는 좁은 도로로 들어섰다. 이해할 수 없었다. 뜬금없이 거기는 왜 간단 말인가? 물론 그곳을 지나 그 너머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딘지 마음이 찜찜했다.

아, BMW가 멈춰선다.

동준도 얼른 길옆에 차를 세웠다. 좁은 왕복 2차선 도로라 뒤따라오던 차가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리고 지나간다. 동준은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나 차 유리창 선팅이 진해서 알아보았는지는 모르겠다.

지나가는 차 사정은 그렇다 치고, 동준이 BMW를 바라다보니 운전석에서 기사가 내린다. 그리고 들어가는 곳이……. 화원이다. 마음이 계속 찜찜하다. 혹 저런 곳에서 어떤 비밀모임이나 접선 같은 것이……?

잠시 뒤 운전기사가 꽃 한 다발을 들고서 화원에서 다시 나온다. 풍성한 꽃다발. 한눈에 보기에도 화사했다. 지금 이런 미행이 아니라면 저런 꽃다발에게 달려가 한 순간의 환희에 빠져들고 싶을 정도였다.

낭만도 꽤 있는 분이네……. 사람 그 자체는 참 멋진 분이다. 중후하면서도 세심한 부분도 갖추고 있으면서.

그런데 누구한테 갖다주려는 거지? 병문안이라도 가려는 것인가?



BMW는 다시 출발한다. 그러더니 아파트 신축공사장을 돌아 공원묘지 입구로 들어간다. 그런데 웬 아파트를 공원묘지 바로 앞에다 짓는 거야? 겉보기에는 대리석 붙인 고급 아파트 같은데. 게다가 가만 보니 아파트 뒷담이 공원묘지와 경계인 것 같다. 허 참, 저래도 되는 거야?

아이쿠, 지금 그런 것 걱정할 계제가 아니다. 저 양반, 도대체 여기엔 왜 온 거야? 그새 사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어르신 지위에 사모님을 이런 누추한 곳에 묘를 쓸 것 같지도 않았고. 혹 요즘 유행하는 납골당이나 수목장 같은 것이라면 모를까.

동준은 공원묘지 안으로 들어가서 BMW가 좁은 주차장 끝까지 가서 서는 것을 보았다. 동준은 그 차 가까이로 갈 수는 없어서 사무실로 보이는 낡은 건물 옆에 차를 세웠다. 그곳에서도 BMW는 잘 보였다.

BMW에서 어르신이 천천히 나왔다. 운전기사가 꽃다발을 들고 나와서 건네준다. 평상복 차림의 어르신. 여유로운 모습이다. 어르신은 꽃다발을 받고서 천천히 조그만 산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묘역 쪽으로 걸어서 올라간다.

동준은 창문만 살짝 내린 채 호기심을 가지고 그 모습을 내다보았다.

잠시 뒤 어르신의 모습이 묘지들 사이로 들어가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성묘 시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공원 내는 한산했다. 인부들 몇이 저 멀리 화장실 앞에 모여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잡담을 하고 있다. 그 화장실은 과거에는 판자로 지어진 허름한 창고 같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는지 화장실 입구에는 공사 자재가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어르신이 묘역 속으로 사라진 공간에는 조요한 침묵만이 들어차 있었다. 아파트는 아직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망치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망치? 요즘 아파트 공사장에서 망치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겠지.

하얀 나비 둘이 동준의 눈앞에서 나풀거리며 날아간다.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 서로 엉기듯 붙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며 살랑살랑……. 서로 어긋나서 멀리 떨어졌다가도 곧 다시 다가와서 붙을 듯 떨어질 듯 나란히 날아간다.

참 보기 좋다. 그래, 혼자보다는 둘이 좋지. 흩어지지 말고 꼭 붙어서 오래오래 살아라. 이곳 공원묘지 적막 속에서도 너희들은 헤어지지 말고 살아가거라.

나비야, 청산 가자…….

아련한 먹먹함이 동준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저들 나비도 나도 다 한갓 지나가는 생명일 뿐인데…….

동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우 맑다. 중국에서 미세먼지가 날아와 뿌옇던 하늘이 오랜 만에 맑기도 하지만 공기도 상쾌했다. 초여름인지라 아직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날씨는 최고였다. 이런 날은 공원묘지가 아니라 골프장에라도 갔어야지. 안 그렇소, 어르신?

그런데 저 양반은 누구를 추억하기 위해 이곳에 왔단 말인가?

물론 동준이 어르신의 모든 사정을 다 알 수는 없다. 나름대로 추도할 사람이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준은 불안했다. 어딘지 모르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동준은 핸드폰을 꺼내어 이것저것 들여다보면서 잠깐잠깐 밖을 내다보며 BMW 쪽을 살폈다.

잠시 시간이 지났다.

아, 어르신의 모습이 보인다. 손에는 꽃다발이 없었다. 당연하지. 망자를 위한 선물일 테니까.

어르신은 아래로 내려와서 곧바로 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출발한다.

동준은 의자를 뒤로 몽땅 젖혀 길게 누웠다. BMW가 렌터카 앞으로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준은 몸을 일으켜 BMW가 공원묘지 출구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차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잘못되었어…….

동준은 미리부터 패배감에 젖어 묘역 쪽으로 걸어서 올라갔다. 동준은 13년 전에 이곳에 왔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때보다 주변 나무들이 엄청 자라 가지들이 빽빽해 보였다. 일부 묘역에는 칡의 넓은 잎들이 완전히 뒤덮여 있어서 다른 풀과 나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명절 등 성묘시기가 되어서야 정리할 것 같았다.

동준은 옛 묘역의 기억을 더듬으며 부친의 묘소로 향했다.

그러나 가까이 갈 필요도 없었다. 묘석 위에 꽃다발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르신의 손에 들려 있었던 풍성한 그 꽃다발.

동준은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당했다. 농락당했다. 완전히. 철저하게.

여우같은 놈한테.


[다음 화로 계속]


이전 03화제3장  우리 모두는 대륙의 한 조각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