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만일 흙덩이 하나 바닷물에 씻겨가면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by Rudolf

제5장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만일 흙덩이 하나 바닷물에 씻겨가면


1


해선은 눈물을 머금고 통장 일부를 털어서 고성능 카메라와 망원렌즈를 샀다. 그 조작법을 익히는 데만 시간이 꽤 걸렸다. 원래부터 기계 다루는 데 서툰 데다가 카메라 용어가 왜 또 그렇게 복잡한지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다니며 테스트도 하고 사진들을 컴퓨터에 올려 서로 비교도 해보는 중에 어느 정도 손에 잡히는 듯했다. 그러나 막상 망원렌즈 달린 카메라를 들고 서울 거리를 활보할 생각을 하니 자기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사진작가나 기자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기껏 불륜 현장을 잡자고 이렇게 비싼 장비 사들였어야 했는지 후회되기도 했다.

직장 쫓겨나서 돈 못 벌고, 카메라 사들이느라 돈 쓰고……. 참 잘하는 짓이다.

해선은 카메라를 반품할까 말까 고민하는 데만 사흘 걸렸다. 그러다가 기왕 마음먹은 일 한번 독하게 해보자고 결의를 다졌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봄 다 지나고 여름에 들어섰는데 웬 부슬비야? 해선은 부슬비에게도 트집을 잡는다. 전에는 소나기나 장맛비는 싫어도 잔잔하게 내리는 비는 좋았다. 왠지 모르게 포근함을 주고, 축축한 습기가 아니라 촉촉한 스킨로션과도 같은 감촉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슬비는 물론 보슬비도 반갑지 않았다. 오늘부터 김상기 전무나 오진희를 미행하기로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라도 오면 한 손에 우산 들고 다른 손으로 카메라 들이대야 하는 것이다.

비 오는 날이 장날? 사실 이 말은 좀 이상하다. 원래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친구 찾아 먼 길을 갔더니 마침 장날이라 친구가 장에 가고 없었다는 말이 변한 것 같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뭐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해선이 마음먹고 날을 잡아서 카메라와 망원렌즈 가방을 둘러메고 나가려는데 비가 오는 것이다. 굳이 오늘이 꼭 그날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딱 결정을 한 날 비가 오니 괜히 김새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하여간 뭣 좀 하려고 하면 꼭 그런 일 생겨요.

투덜투덜…….

하지만 기왕 마음먹은 것 일단 나가보기나 하자고 해선은 생각했다.

해선은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커다란 우산을 쓰고서. 부슬비에는 비옷을 입고 우산 없이 걷는 것이 분위기 있을 듯한데 자기 혼자 그러기에는 다른 사람들 눈이 있어서 유난 떨기 싫고, 다른 한편으로는 누가 보건 말건 한번 미친 짓 해보고도 싶고 그런 마음이었다.

이렇게 약간의 갈등을 즐기며 거리로 나서서 해선은 일부러 길을 빙 돌아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해선은 호텔 앞, 지난번 그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오진희의 시프트가 바뀌지 않았다면 잠시 후 그녀는 호텔에서 나올 것이다. 또한 아직 차는 사지 않았을 테니 해선과 함께 걷던 길로 나와서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갈 테지. 해선과는 집이 반대방향이었기 때문에 반대편 플랫폼으로 내려가서 서로 마주보고 손을 흔든 적도 있었다. 오진희는 대개 집으로 곧장 가는 것 같았다. 가는 도중에 어디로 새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은 참 착실하게 산다고 해선은 생각했었다. 김 전무는 늦게까지 일을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자주 만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프데이에 만날 확률이 많다.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시간도 남아도는데 한번 따라가 보자고 해선은 생각했다.

누가 아냐, 비 오는 날 로맨스가 더 그리워질지.

해선은 오진희가 호텔에서 나올 시간에 맞춰서 커피숍을 나섰다. 비가 오는 바람에 우산을 써서 미행하기에는 더 좋을 것 같았다. 운이 좋았다. 막 횡단보도를 건너 호텔 쪽으로 가는데 저만치에서 이단접이 파스텔톤 연파랑 우산을 앞으로 비스듬히 쓰고 호텔을 나서는 오진희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 잘 맞추는데. 좋았어. 그렇게만 해줘.

해선은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마침 지나가는 누군가가 낮은 휘파람 소리로 아주 옛날 팝송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

가사 없는 휘파람뿐이지만 저녁 무렵 부슬비 사이로 들려오는 올드패션 팝송 소리는 거리 분위기와 너무 잘 맞았다.

해선은 우산 사이로 오진희를 확인하고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카메라 가방이 비에 젖는 게 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큰비는 아니라서 다소 위안이 되었다.

오진희는 지하철역 쪽으로 간다. 해선과 오진희는 함께 퇴근할 때는 집이 반대방향이라서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면 개찰구를 지나 서로 흩어진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서 철로 반대에서 서로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면 서로 손을 흔들어주며 좋아했었지. 서로 대화는 많이 하지 않았어도 나이가 비슷하고 또 둘 다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사는 처지라서 은연중에 서로를 위로하는 마음도 있었다. 해선이 좀 낫기는 하지만 둘 다 활달한 성격은 아니어서 주변 많은 직원들하고 어울리지는 않아 일종의 동병상련의 정도 있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해서 그 이상은 모르고 있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서로가 만나면 미소 지으며 가벼운 인사만 할 뿐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는 곳이 구로구와 성북구 하는 식으로 큰 테두리만 알지 정확히 어느 동네인지는 모르고, 또 혼자 사는지, 함께하는 동료나 가족은 있는지, 하다못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서로 알지 못한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그냥 말만이 아닌 정말로 동변상련의 정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타지에 와서 서로 고생하며 살면서 왜 나를 힘들게 한 거야. 너만 살고 나는 죽으라는 거잖아. 그건 안 되지.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는 거야. 아니, 죽는 건 안 되지. 게다가 나만 억울하게 죽을 순 없어. 다른 면은 몰라도 핸드백 사건에서 나는 억울하단 말야. 너는, 너는……, 대가를 치러야 해. 혹독하게. 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자는 그 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 알고 있잖아.

복수극(復讐劇). 영어로는 ‘a revenge tragedy.’

여기에 왜 ‘극(劇)’이나 ‘tragedy(悲劇)’가 들어가는지 아니? 특히 왜 영어에서는 비극을 강조했을까? 복수는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 비극인 거야. 비극. 슬픈 드라마.

너나 나 둘 다 비극으로 끝난다고. 알아? 슬픈 연극.

내가 가끔 촐싹거리기는 하지만 부정적인 성격은 아니야. 그것보다는 악착같이 살아가려고 하는 면이 더 클 거야. 그리고 오진희 너도 금수저는 아니잖아. 거기 호텔에 들어가서 일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겠니? 우리 둘 다 불쌍하지 않니?

그런데 왜 그랬어? 왜?

해선은 마구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오진희의 뒤를 따라 걸었다. 간격을 적당히 유지하며.

그렇게 해서 해선은 군중 속의 하나가 되어 인파에 쓸려가듯 지하철로 들어갔다. 저만치에서 뒷모습 일부만 간신히 보이는 오진희. 계속 그 정도 간격으로 뒤따랐다. 그녀가 늘 가는 쪽 플랫폼. 그렇겠지 뭐. 비 오는 저녁 어디 갈 데가 있겠어? 오진희도 해선처럼 친구가 별로 없을 텐데.

열차가 들어온다. 해선은 오진희와 같은 칸의 제일 뒤쪽 문으로 올라탔다. 사람들 옷과 우산의 물기로 인해 눅눅한 냄새가 났지만 에어컨 시원한 바람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어, 그런데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오진희가 내린다. 환승역도 아닌데.

해선은 서둘러 뒤따라 내렸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퇴근 무렵 지하철역은 어디나 다 사람들로 넘쳐난다. 평소에는 그것이 불편했는데 사람을 뒤쫓는 데는 오히려 괜찮은 것 같았다. 군중 속에 묻혀 눈에 띄지 않으니까. 그러나 가끔은 많은 인파 속에서 놓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안 되지…….

해선은 역행하는 폭포수처럼 밀고 내려오는 사람들과 밀려 올라가는 인파들 사이에서 하마터면 놓칠 뻔한 오진희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렸다. 아니, 뒷사람에게 밀려 저절로 올라타게 되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 정도로 사람이 많았으니까. 해선의 바로 옆 하행 에스컬레이터에도 상행만큼 사람들이 장마철 계곡물 쏟아지듯 내려가고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부슬비도 거의 그쳐가는지 공기 중에 아주 작은 물 알갱이들만 가끔 흩날리는 것 같았다.

오진희는 지하철 출구에서 나가 조금 걸어간다. 그리고는 그 거리에서 제일 높은 외국 보험회사 건물로 들어간다. 해선은 서둘러 쫓아갔다. 건물 입구에서 우산을 비닐 속에 넣고 나서 급히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혹 금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을 했다.

안 돼.

그런데 마침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지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밀물처럼 다가온다.

해선은 몇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는지 확인하려고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러다가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넓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몇몇 보였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쯤에서 막 계단참을 돌아 올라가는 여자의 뒷모습.

오진희가 분명했다.

해선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층에 올라서자 전면에서 고급 레스토랑이 보인다. 해선은 다른 곳도 둘러보았다. 중국음식점과 일식집이 있었다.

어느 곳에 들어갔을까? 해선이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일식집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나온다. 해선은 저도 모르게 근처에 있는 화장실로 급히 들어가 입구에 몸을 숨겼다.

“이 주머니에 든 USB 그 사람에게 전해주고 집에 가면 돼. 내가 전화할게. 비 오는데 조심하고. 난 여기 조금 있다가 호텔로 다시 갈 거야.”

“네, 알았어요. 들어갈게요.”

화장실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 남자다. 해선은 깜짝 놀라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몇 마디 더 하는 것 같아서 나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남자가 해선을 슬쩍 쳐다보고 나서 해선 앞으로 지나간다. 해선은 몸을 뒤로 움츠려 벽에 바짝 붙였다. 남자도 몸을 옆으로 약간 피하면서 밖으로 나간다.

해선은 무안했지만 그대로 벽에 기댄 채 조금 더 서 있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몇몇 오가는 소리는 있었지만 그 두 사람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해선은 밖을 슬쩍 내다보려 하다가 또다시 어떤 남자의 얼굴과 맞부딪혔다. 화장실로 들어오려던 남자는 몸을 움찔하면서 화장실 표식을 쳐다본다. 그러더니 다시 의아한 눈빛으로 해선을 쳐다본다. 해선은 그 눈길을 모른 척하고 얼른 화장실을 나서서 남자 옆을 지나갔다. 오진희와 상대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해선은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해선은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오진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다시 지하철역으로 들어갔겠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오진희는 집이 아니라 어느 곳인가에 가서 USB 주머니를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선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실패?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고 했나……?

해선은 아쉽고도 분했다.


제주저녁노을.jpg


2


하루하루 날짜는 지나가는데 취직자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 무기회사에서도 더 이상 연락이 없고.

해선은 달리 할 일도 없어서 한 번 더 카메라를 들고 나가기로 했다. 지난번 부슬비 내리는 날 실패한 뒤 맥이 풀려 그동안 마음이 시들해져 카메라는 꺼내보지도 않았었다.

지난번처럼 해선은 오진희가 퇴근할 무렵에 그쪽으로 가기로 하고 일찍 집을 나섰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진 연습도 하자 생각하고서.

해선이 집을 나서서 조금 걸어가는데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텔로 오라는 것이었다.

해선은 걸음을 멈추었다. 지난번 말을 한다고 별렀다가 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사실 운만 떼려고 했었다. 그러고 나서 서서히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 관계를 끊지 못하면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동안 도움 받은 것 생각하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 해선의 앞날은 선생님의 앞날보다 길다.

해선은 이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생각하고 전화에 대꾸했다.

“저, 선생님, 제가 저번에 카페에서 말씀드리려 했던 것 지금 말씀드릴게요. 그날 다른 일에 신경 쓰다 말씀 못 드렸거든요. 죄송합니다만 이제 더는 만나지 못하겠어요. 죄송해요. 다음에 전화 드릴게요.”

해선은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마구 떨렸다. 숨도 탁탁 막히는 것 같았다. 무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선은 빨리 걸었다. 더 빨리 걸었다. 뛰다시피 걸었다. 나중에는 뛰었다. 어깨에 둘러멘 카메라 가방이 출렁거린다. 땀이 흘러내린다. 등이 젖고 앞가슴 사이로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악 하악…….

해선은 발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서, 뺨에서, 목에서, 목덜미, 팔뚝에서 땀이 마구 흘러내린다. 옷이 다 젖었다. 머리카락 속도 다 젖은 것 같았다. 비 맞은 꼴이었다.

해선아, 잘했어.

아니야, 그러면 안 되었어.

그럼 어떡하라고…….

눈물이 났다. 땀이겠지. 땀 아냐. 그럼 눈물도 아닐 거야. 뭐야, 그럼? 이렇게 눈에서 흐르는 것은?

해선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비켜간다.


해선은 동네 속 어린이놀이터 한옆의 나무그늘 아래 나무벤치에 앉아 있었다. 넋을 놓은 채. 한참 그렇게 앉아 있었던 덕인지 마음은 많이 풀려 있었다.

이제는 아무런 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냥 멍했다. 친구들은 이런 경우 멍 때린다고 했다. 그러나 해선은 그저 멍할 뿐이었다.

눈이 풀린 채 멍하니 앞만 바라보던 해선의 눈에 차츰 빛이 돌아온다.

땀에 흠뻑 젖었던 옷들도 뜨거운 한여름 해에 다 말랐다. 처음엔 옷에서 쉰내가 났었는데 이제는 괜찮다.

해선은 몸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넘어진 것도 아니고, 어디 다친 것도 아니고 뭐 다 깔끔했다. 그런데도 갑자기 한숨이 길게 나온다.

그래, 됐다. 이젠 일어서자.

해선은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 일어섰다. 그리고 카메라 가방을 둘러멨다.

가자!



3


해선은 호텔 건너편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오진희의 시프트는 아직도 바뀌지 않았을 거야. 그래야 해. 지금은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 주변 상황도 그에 맞춰져야 하는 거야. 해선은 이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기다렸다.

나온다. 호텔 정문을 통해 걸어나오는 오진희가 멀리에서 보였다. 아직도 차는 사지 못했구나.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려 남 가슴에 못까지 박고서도.

주위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해선은 창밖으로 망원렌즈 들이밀며 셔터를 힘주어 눌렀다. 셔터 한번에 서너 컷이 한꺼번에 찍힌다. 다시 한번 셔터를 꾹. 한번 더. 연습 삼아.

그런 다음 해선은 얼른 카메라 들고서 서둘러 커피숍을 나섰다. 그리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오진희를 따라갔다. 이번에도 지하철역. 혹 저번처럼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것은 아니겠지? 하긴 그렇다 한들 문제될 것은 없다. 이미 학습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오진희는 다음 역에서 내리지 않았다. 집이 성북구에 있다고 했지. 역시 그쪽 방향으로 계속 갔다. 그리고 환승역에서도 역시 그쪽 방향으로 갈아탔다.

드디어 오진희가 지하철역에서 바깥으로 나간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천천히 걷는 오진희. 골목으로 들어간다. 마트에 들어갔다 나왔다. 드디어 도착한 3층짜리 빌라. 1동에서 12동까지 주욱 늘어선 빌라 제일 끝 쪽 12동 출입구로 들어간다. 해선은 바깥쪽에서 창들을 올려다보았다. 3층 끝에서 커튼인지 버티컬인지가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해선은 바깥에서 그 창문을 사진 찍었다. 그리고 그 주변도 적당히 찍어두었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겠지만.

그럼 이제부터는 뭐를 하지? 여기에서 밤새워? 아직 날이 훤해 밤도 안 되었는데 밤을 새울 준비까지 해야 하는 건가?

갑자기 처량해졌다. 남의 집 밖에서 서성거리는 자기 모습. 그렇잖아도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해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이도 있었는데 계속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려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니 어딘지 처량했다. 여자 집에 창밖의 남자라면 모를까 창밖의 여자라니 그것도 좀 웃기고.

해선은 밤 샐지 말지는 해 완전히 떨어진 다음에나 생각해 보기로 하고 우선 어디에 가서 저녁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빌라 근처에는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멀리 가서 저녁 먹다가 혹시 오진희가 외출하게 되면 놓칠 수도 있다.

해선은 그 동네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편의점이 눈에 띈다. 저기 가서 라면이라도 먹자. 해선은 혼자 살면서부터는 거의 라면을 먹지 않았다. 아무도 챙겨주는 사람 없이 혼자 사는데 먹는 것마저 부실하면 나중에 곯을 수 있겠다 싶어 식사만은 제대로 챙겨먹었다. 그러나 오늘은 라면밖에는 선택지가 없는 것 같았다. 그것도 컵라면.

편의점에서 컵라면 먹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라면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대충 저녁 해결하고 나중에 집에 가서 제대로 챙겨먹자 생각하고 제일 싼 것 하나를 골랐다. 50원 100원도 지금 해선의 처지에선 큰 돈이다. 컵라면에다 끓는 물을 부어넣고 잠시 기다린 뒤 뚜껑을 열고서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냄새는 좋았다. 쫄깃해 보이는 라면을 한 젓가락 돌려서 잡아올렸다. 좀 뜨겁겠다 싶어 호호 불면서 막 입에 집어넣으려는 순간, 사실은 멍한 눈길을 창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는데 그때 한 영상이 해선의 눈에 들어왔다.

오진희.

호텔에서 나올 때와는 달리 쏙 빼입은 모습이다. 약간은 관능적으로.

해선은 한 입도 못 먹은 뜨거운 라면에 입술을 데일 뻔했다. 그러나 젓가락을 그대로 라면에 꽂아놓고 벌떡 일어섰다. 카메라 가방을 들어올리다가 컵라면을 조금 쳤다. 그러나 다행히 쓰러지진 않았다.

후유―.

해선은 후다닥 편의점을 나섰다. 그러나 지갑을 놔두고 나온 것이 생각나서 다시 급히 편의점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오진희는 벌써 골목을 돌아나가고 있었다. 잘못하면 들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해선은 뛰어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신경들 끄세요.

해선은 골목에서 나갔다. 오진희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길게 빼고 쳐다보았다.

아, 저기 가는구나.

해선은 또다시 뛰었다. 오진희가 어디론가 들어간다. 그러나 건물은 아니다. 해선은 머릿속에 물음표를 하나 떠올리고 뒤쫓았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공영주차장이었다. 해선은 다소 어리둥절한 채 안으로 들어가 발돋움하며 오진희를 찾았다. 복장이 특이해서 그런지 금방 눈에 들어왔다.

해선은 급히 망원카메라를 꺼내어 셔터를 서너 번 눌렀다.

그러고 나서 카메라를 내리고 오진희를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어떤 차에 다가가서 문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운전석에 올라탄다. 곧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해선은 얼른 주차장 밖으로 나와 문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뛰어갔다. 그런 뒤 돌아서자마자 오진희의 차가 주차장 문으로 막 나오고 있었다. 깜빡이를 켠다. 해선이 있는 방향이다. 그리고는 잠시 멈췄다가 도로로 나온다. 그런 뒤 속도를 올리며 달려와서 해선의 눈앞으로 지나갔다. 흰색 아반떼. 미국에서는 엘란트라라고 한다나. 그런 게 지금 무슨 상관이니?

해선은 어디에서 그런 순발력이 나왔는지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꺼내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찰칵, 찰칵, 찰칵……. 게다가 마지막에는 동영상으로 모드를 바꾸어 약간이지만 녹화했다. 다행히 신호등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오진희의 차는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집에 돌아온 해선은 카메라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컴퓨터에 올려놓고 여러 번 확인했다. 사진과 동영상 모두 선명했다. 역시 고급 카메라가 좋긴 좋군.

그렇지만 해선은 약간 쇼크를 받았다. 멀리 남쪽 어딘가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하는데 비정규직 월급으로 벌써 그런 차를 몰고 다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최신형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최근에 나온 모델이다. 하긴 중고라면 무리를 해서 살 수도 있었겠지. 절약하고 집에서 도움도 받고 그러면. 그렇지만 그 옷차림은 어떻게 된 거야? 오진희의 본래 모습이 그런 거였어?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얌전해 보이던 사람이. 게다가 그 빌라 아래는 일층이 주차장인 필로티 공법으로 지은 것이어서 차를 세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운 이유는 뭐지? 비싼 주차비를 내가며. 혹 남들한테는 자기가 차를 끌고 다닌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 한 것인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오진희가 부러운 것은 무슨 이유지? 오진희는 해선보다 호텔에 늦게 들어왔다. 입사 순서로 보면 후배인 것이다. 두어 달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그리고 해선이 알기로는 오진희에게는 그 호텔이 첫 직장이다. 알고 보면 오진희도 힘들게 살아가는 청춘이다. 그런데 벌써 차를 끌고 다닌다. 그것도 호텔에는 가지고 나오지 않고 저렇게 야밤에만 몰고 나간다. 남들 눈에 안 띄게. 처음에는 좋은 쪽으로 생각해 주려 했지만, 아무래도 그쪽 방향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그리고 자연스럽게 김상기 전무가 떠오른다.

오진희와 김 전무…….

아 참, 교감선생님. 지난번 모질게 전화를 끊은 다음 줄잡아 몇십 번은 연락이 왔다. 전화, 음성메시지, 카톡, 이메일……. 하지만 해선은 전혀 응답하지 않았다. 전화번호에서 지워버리고, 이메일은 스팸에 집어넣을까 하다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전화를 받지도, 카톡이나 이메일을 읽지도 않았다. 물론 지우지도 않았다. 그냥 내버려뒀다. 어쩌면 선생님은 호텔로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해선이 퇴직했든 해고됐든 알게 되겠지. 하지만 해선은 자신의 집은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다행이다. 그렇지만 사실 그 기간 동안 무척 힘들었다. 자신이 너무 철면피인 것 같기도 해서. 하지만 지금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힘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선생님이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둘 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 그것뿐이다. 지금은 고통스럽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그리고 먼 훗날, 서로가 어디에 있든지 아련한, 그러나 달콤한 추억으로만 남게 되길.

해선은 다시 오진희에게로 생각을 옮겼다. 그녀에 대해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김 전무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

둘째는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 어쩌면 자기 차가 아닌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리고 또 한 가지. 해선은 김 전무에게서 USB가 든 주머니를 받아 누군가에게 전해주었다는 사실. 어떤 주머니인지는 몰라도, 아마 도장이나 보석 등을 넣는 작은 주머니일 테지.

낮에 호텔에서 USB를 건네줄 수도, 아니면 김 전무 스스로가 전해주거나 택배나 우편으로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오진희를 시킨 이유는? 절대로 남의 손에 넘어가거나 분실되면 안 되는 내용물? 그럼 이게 뭐야? 비밀? 비밀 중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것? 비밀조직? 게다가 그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오진희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 중의 심복?

우와, 무슨 영화 같다. 그리고 어딘지 무시무시한 음모가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한단 말야. 오진희하고는 잘 안 어울리지만. 그런데 만일 말이야, 정말 만일에 여기에 어마어마한 음모가 엉켜 있다면……. 그럼 신나는 거 아냐? 내가 그 음모를 캐내고 있는 명탐정, 아니 스파이, 아니 아니 무슨 비밀요원…….

아서라, 아가야. 혼자서 영화 찍는 거냐? 착각은 자유지만 그건 너무 나간 거야. 너 같은 겁쟁이 주제에 무슨 음모씩이나.

에이, 갑자기 시시해져 버렸다. 설령 그 속에 음모가 있다 하더라도 해선이 알아낼 리도 없고, 또 알아낸다 해도 뭐 어떻게 할 건데? 그 속에 잠입해서 영웅담이라도 펼쳐? 웃기는군.

해선으로선 그저 복수만 하면 되는 거야. 자신이 억울하게 쫓겨난 것에 대한 복수. 더 나아가 배상까지 받을 수 있으면 더 좋고.

배상?

그래, 생각해 보니 그 배상이라는 단어가 그럴듯했다. 헐벗고 배고픈 백성에게 배상보다 더 절실한 게 뭐가 있겠냐? 배상인지 보상인지 해선으로선 그것만 받으면 된다. 오진희하고 김 전무하고 둘이 같이 뒹굴든 물고 빨든 그건 니들 마음대로 하고, 나한테는 돈, 돈으로 배상하라고. 내가 다시 그 호텔에 들어간들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겠니? 어쩌면 호텔업계에선 해선의 소문이 이미 다 퍼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해선은 다시 약이 바짝 올랐다.

요것들, 어떻게 결딴을 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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