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rope is the less
1
동준은 교도소에 가기 전 가까이 지냈던 동생뻘 되는 친구에게 핸드폰으로 전화했다. 받는다. 요즘 모르는 전화는 잘 안 받는다고 하는데, 이 친구는 거칠 것이 없는 모양이다.
“나 동준이다.”
“어, 동준이 형.”
그런데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다. 반가운 목소리도 아니고. 하긴 동준이 교도소 간 것은 그 동네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다.
“좀 보자.”
“요즘 일이 많아서…….”
“자식. 많이 컸다.”
“더 클 것도 없수.”
“알았어, 인마.”
“뭔 일 있수? 나한테 연락도 다 하고.”
“나 나왔다.”
“알고 있수.”
짜식, 대답하는 것 봐라.
“좀 보자니까.”
“일이 많다니까.”
이걸 그냥…….
“너한테 줄 게 있어서 그래.”
“안 받고 싶은데.”
“그래라.”
동준은 전화를 끊었다.
동준은 꼬깃꼬깃해진 전화번호 수첩을 주욱 살폈다. 그곳에서 다른 동생을 찾아내서 전화했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 음성메시지를 남길까 하다가 그만두고 나이가 더 어린 또 다른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형, 반갑네. 언제 나오셨소?”
“얼마 안 됐어. 잘 지내지?”
“그럼요. 소주 한잔하셔야죠?”
이렇게 해서 커피숍에서 그 동생과 만나게 되었다.
“형, 민기한테 전화했소?”
“그 자식 튕기기만 하더라. 왜? 그놈한테 연락 왔었냐?”
“아니, 내가 먼저 민기한테 전화해서 형 만나는데 같이 나가자고 했더니 자기한테 먼저 전화 왔었다고 하던데. 전화 끊고 보니 형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대요. 조금 있으면 여기 올 건데, 사과하면 그냥 받아주소.”
나이는 좀 어리지만 부산에서 올라온 성격 시원시원한 철규.
“알았어. 난 괜찮아. 10년 이상 감방에서 썩다 나온 놈 누가 반기겠냐? 나 같아도 싫겠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민기가 나타났다.
“형 신수 훤하시네.”
민기가 넉살 좋게 말을 하며 손가락 두 개를 눈썹에 갖다대면서 경례한다.
“잘 왔다.”
“저번에 전화했을 때 내가 좀 바쁜…….”
“됐어. 앉기나 해.”
이렇게 해서 셋이 시시껍쩍한 이야기 한참 늘어놓다가 동준이 의자에 등을 깊이 밀어넣으면서 표정을 바꾸었다.
“사실 내가 얘기할 게 좀 있는데…….”
민기가 물고 있던 담배를 쏙 빼며 쳐다본다.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거 마, 슬기로운 감방생활에서 얻은 얘기면 아예 하지 마소. 서로 안 좋아예.” 철규가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시늉을 한다.
“감방 얘기가 아니라 독도 얘기야.”
“내 독도 한번 다녀왔소. 파도가 세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배에서만 봤지만.”
“야, 너 독도는 언제 간 거야?” 민기가 철규를 쳐다보며 묻는다.
그러나 동준이 얼른 말을 받았다. “독도 가자는 게 아니고…….”
“가지도 않을 독도 얘긴 뭐 하러 꺼냈소?”
“독도를 빼앗기게 됐다.”
에이, 하며 의자에 등을 기대는 두 사람. 늘 나오는 뻔한 이야기 아니냐는 표정이다.
“매국노가 있거든.”
“이완용인가?”
“요즘 이완용이가 애국자라는 놈들도 있다던데.”
“도쿄가 한국 땅이라고 하지 그래.”
두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하다가 동시에 입을 다물고 동준을 빤히 쳐다본다. 말을 해보라는 뜻이다.
“독도가 큰돈이 될 것 같단 말야…….”
두 사람은 계속 동준을 바라보았다.
“내가 좋은 소스를 가지고 있거든. 그게 말야…….”
동준은 여기까지만 얘기하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망설여진 것이다.
여기에서 일단 말을 꺼내면 어떤 식으로든 퍼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동준의 손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아직은 이르다…….
동준은 커피숍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원래는 고급음식점이었는데 얼마 전 망한 뒤 커피숍으로 바뀐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천장은 호화스러웠다. 샹들리에도 내려와 있고, 천장 나무 마감재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나무 무늬가 좀 복잡해 보이긴 했지만. 동준의 마음이 복잡한 것처럼.
“말을 해야지, 왜 하다 말고 천장만 쳐다봐?” 민기가 약간 놀리듯이 말한다. “뭐 못 볼 거 본 거야?”
동준은 눈을 내렸지만 두 사람을 외면하면서 말했다. “아냐, 내가 쓸데없는 얘기 꺼냈다. 가능성 없는 얘기야. 그만두는 게 낫겠다. 괜히 너희들만 다친다.”
두 사람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혼자 잘 해보슈. 난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민기가 담배를 비벼끄며 일어섰다.
동준이 민기가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철규도 미적미적하다가 일어선다.
“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얘기하소. 피라미 같은 거면 아예 꺼내지도 마시고.”
두 사람이 나가자 갑자기 동준의 등에서 한기가 지나간다.
후우.
동준은 마음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이 일은 동준의 입에서 떠나는 순간 동준의 통제에서는 벗어난다. 여기저기 소문처럼 퍼져나가 떠돌고, 나중에는 물론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도 논쟁거리가 되겠지만 그때쯤 되면 피로감이 쌓여 사람들이 넌더리를 내게 될지도 모른다. 오히려 진실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저쪽에서는 동준이 그렇게 해주길 바랄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문서의 진위에 대해서 논란이 생기고 신빙성 문제가 나오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저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런 소문에 무릎 꿇을 인간들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대비책을 만들어 본질을 흐리게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어떠한 경우든 혼자서 조용히 진행해야겠다고 동준은 마음먹었다.
2
며칠 뒤 동준은 또다시 어르신 동네로 갔다. 이번에도 지난번 차와 같은 종류를 빌렸다. 일부러 그런 것이다. 알아차리라고. 그런데 오늘은 30분 정도 기다렸는데 그 BMW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고생 덜 시키려는 모양이지…….
아무튼 지난번처럼 사흘 동안 지루하게 만들지 않아 줘서 고맙군.
동준은 곧바로 BMW 뒤를 따라붙었다. 가능하면 다른 차들 끼어들지 못하게 하면서 달렸다. 끼어들려는 차가 있으면 클랙슨을 요란하게 울려서 막았다. 저쪽에서 혹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라도 그렇게 하면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런 것이다.
그 의도대로 정말 저쪽에서 알아차린 것 같았다. BMW가 처음부터 달리던 직진 차선에서 벗어나 좌회전 하려 한다. 원래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려는 의도겠지.
좋아, 그렇게 하라고. 나는 계속 뒤쫓아갈 것이거든. 무척 귀찮게 되겠지. 그러면 어떤 일이 생겨도 생길 테지.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니까. 나는 바쁠 것도 짜증 날 것도 없어요. 달리 할 일도 없는 몸이라서.
BMW는 좌회전, 좌회전, 좌회전을 계속한다. 빙빙 도는 것이다.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괜찮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피곤하시다 그 말이지.
BMW는 다섯 번을 그렇게 돈다. 이제는 좌회전 신호등에 계속 걸리는 것도 짜증 나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동준은 그것을 즐겼다. 마음속으로 낄낄거렸다.
여섯 번째의 첫 번째 좌회전 사거리. 그러나 이번에는 BMW가 차선을 바꿔 직진 차선으로 들어간다. 겨우 다섯 번으로 끝나는 거야? 아이고, 뚝심도 없군. 이 레이스, 내가 이겼네, 이 사람아.
동준도 차선을 바꿔 우회전하여 돌아서 달려갔다.
다음날 동준은 또다시 어르신 동네로 갔다. 역시 차를 몰고. 그러나 오전 내내 기다렸어도 BMW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또 그곳으로 갔다. 역시 BMW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후 일주일 내내 그곳에 갔지만 BMW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동준은 갑자기 시들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에이, 좀더 놀아야지 이게 뭐야?
어떻든 자동차 놀이는 이것으로 끝인가 보다. 그럼 다음에는 무엇을 하며 놀까?
우리 옛 놀이. 강강술래, 공놀이, 굴렁쇠굴리기, 널뛰기, 그네뛰기, 기마싸움, 낚시, 널뛰기, 눈싸움, 말타기, 물놀이, 벌레잡기, 소꿉놀이, 술래잡기, 썰매타기, 씨름, 연날리기, 윷놀이, 제기차기, 줄넘기, 줄다리기, 쥐불놀이, 지신밟기, 차전놀이, 팔씨름, 팽이치기, 화전놀이, 활쏘기 등등.
현대 놀이는 사실 뭐 있냐? 죄다들 컴퓨터 게임에나 빠져 있지. 굳이 운동을 말한다면 골프나 당구 같은 것 빼놓고는 올림픽 종목 다 갖다붙이면 될 것이고.
하지만 이런 것들로 어르신하고 놀 수는 없다. 어르신이 좋아하는 놀이는 뭐가 있을까? 혹 화투나 트럼프 좋아하실까? 그런 쪽이라면 동준이 못 말릴 정도로 신나는데. 어르신에게 그런 거 가르쳐서 용돈 좀 벌어……?
혹시 춤은 어떨까? 춤을 가르쳐 드리면……. 춤에는 어떤 것이 좋을까? 하긴 춤이 좀 많으냐. 블루스, 차차차, 4분의 4박자 지르박(jitterbug) 같은 것들이야 동준에게는 신나는 것이겠지만 어르신에게는 안 맞을 것 같고……. 발레? 이건 아니지.
그럼 우리 고전무용은 어떨까? 좀 느릿느릿한 것으로 골라본다면. 그동안 들은풍월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농악무나 승무 빼놓고도 양주 산대놀이와 송파 산대놀이, 부산 동래 들놀이, 봉산탈춤과 강령탈춤, 함경도 북청사자놀이와 대관령 단오제 관노가면(官奴假面) 놀이, 게다가 안동 하회별신굿놀이 등등. 여기에 강강수월래도 빼놓을 수 없지. 나비춤, 무당춤, 살풀이춤, 소고춤, 장고춤도 있고.
하지만 어쩐지 어르신은 이런 것들보다는 도쿄 긴자에 있는 가부키자(歌舞伎座)에 앉아서 일본 부채 센쓰(扇子)를 천천히 흔들어대며 일본 정종인 청주 사케(酒) 한 잔 마시면서 가부키 연극 감상하는 것을 선호하실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아니면, 매국놀이나 친일놀이는 너무 즐겨서 이젠 질렸을 테니 다음 단계로 애국놀이 같은 것을 소개해 드리면 어떨까 싶은데 좋아할지 모르겠다. 혹시 이런 건 어떨까? 애국가 하루에 100번 부르기, 대한민국 만세 5분마다 한 번씩 외치기. 이런 거 어르신에게 하시도록 권하면 반성을 좀 하실까……?
쓸데없는 공상들. 동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동준은 이것저것 생각하다 뾰족한 것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어르신 저택 근처로 갔다. 그리고 무턱대고 그 집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감시카메라에 잡히든 말든. 아니면 이층 창문으로 내다보든 말든.
원래 이렇게 고급주택지에서 한낮에 어슬렁거리면 사람들이 신고하고 그러지 않나?
사실 그렇게 되면 좀 불편하게 될 수도 있다. 동준의 전적 때문에. 그렇지만 그 경우 얼굴에 철판 깔고 어르신 빽 좀 사용하기로 했다. 어르신은 자신의 입장 때문에 동준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무기를 마구 사용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 최대한 몸조심해서 그런 경우는 없도록 만들기로 했다.
동준은 청소 용역들이 입는 노란색 형광 재킷을 구해 입기도 하고, 방범요원들 복장도 하고, 마치 공무원인 것처럼 옷을 차려입고 골목길 위생 점검하듯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집집마다 광고 전단지 집어넣고 붙이고 하며 골목골목 누비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CCTV로 얼굴 확인해 보면 모두 동일한 인물이겠지만, 지금 당장은 수상한 사람이라고 신고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동준은 이렇게 돌아다니며 핸드폰 카메라로 어르신 저택 주변을 사진에 담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어르신 저택을 감시했어도 사흘 동안 들락거리는 사람 하나 없고, 차고 문도 열리지 않았다. 물론 동준이 하루 종일이 아니라 오전 중에만 감시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며칠 동안 오전에만 어슬렁거리다가 소득이 없으면 나중에는 오후로 바꾸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오전만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눈을 감기도 하고 뜨기도 하면서 이렇게 계속 중얼거리며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동준은 오후에는 집에 들어가서 인터넷에 매달렸다. 어르신의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다 뒤졌다. 언론에 나온 일반적인 기사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인생 전체를. 돌아가신 부친이 남겨놓은 앨범에서 찾은 어르신 사진들, 그가 정계로 나간 뒤 언론에 잡힌 모든 사진, 동영상, 연설, 그리고 정치가로서 그가 밟아온 행적들, 그의 취향, 글의 성향, 말투, 가족과 친척과 교우관계, 가까운 정계인사들, 정치적 성향 등등 모두.
동준은 도서관에 가서 어르신이 쓴 책도 읽어보고, 과거 신문들도 뒤졌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거기에는 물론 동준의 부친도 들어 있다.
이러한 일들을 하는 데는 시간도 많이 걸렸고 지루하고 짜증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어르신의 인간상에 대해 차츰차츰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쉬운 것도 있었다. 어르신이 정계를 은퇴한 뒤에 대해서는 거의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속했던 정당에 자문을 하거나 여기저기 단체나 모임에 나가 사진 찍은 것 정도가 전부였다. 어르신은 은퇴라는 말답게 외부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12년 전에 동준도 경험했듯이 어르신은 주로 집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하고 집필하거나,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잠시잠시 다녀오곤 하는 것이 전부였다. 동준이 어르신 집에 있었던 시기에도 그가 정리해 달라고 했던 자료들은 과거의 기록이나 사진, 신문기사 같은 것들뿐이었다. 그 당시 어르신은 편지도 많이 써서 보냈다. 이메일과 같은 것보다 편지를 선호한 것이다. 그리고 편지만은 절대로 동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우체국에 가서 부치거나 또 어딘가에서 가져오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사서함 같은 것을 이용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당시 동준이 다룬 자료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외부에 노출되어도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어르신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조사하고 계획하고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사실은 그런 것들이 중요한 내용이다. 하지만 공개된 자료를 통해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동준은 인터넷과 도서관에 매달리다가 어느 순간 맥이 빠졌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곳에는 없다. 어르신이 직접 가지고 있다. 즉, 그 집에 들어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에도 동준은 독도 지도를 한 장 샀다. 서도 위쪽의 큰가제바위와 물개바위, 서도 주변의 김바위, 지네바위, 상장군바위, 군함바위, 넙덕바위, 코끼리바위, 보찰바위, 미역바위, 촛대(장군)바위, 닭바위, 삼형제바위, 그리고 동도 주위의 부채바위, 해녀바위, 춧발바위, 전차바위, 얼굴바위, 독립군바위, 물오리바위, 한반도바위까지 자세히 표시된 세밀 지도.
그 지도를 오피스텔 벽에 붙여놓고 동준은 매일 들여다보았다. 마치 독도 사수대라도 된 듯이. 하긴 며칠 그렇게 독도 지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정말로 애국심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에서 동해물이 바로 그 독도의 바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망망 바다에 옹기종기 모여서 떠 있는 바위섬. 외로운 섬. 그러나 이제부터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켜줄 거니까!”
이 마지막 말을 마음속으로 부르짖고 나니 동준은 정말 애국자가 되었다.
동준이 어르신의 집을 감시한 지 닷새째가 되자 차고 문이 열렸다. 그런데 BMW 대신 제네시스가 나타난 것이다.
오라, 차를 바꾸셨다? 뭐 그러시던가.
동준은 이제 더 이상은 차를 뒤쫓는 것은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그동안 특별히 목적이 있어서 어르신 차를 미행한 것은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본 것이다. 그 결과 한 가지 소득은 있었다. 동준이 그렇게 귀찮게 했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 웬만한 사람이면 벌써 신고하고도 남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 동준이 성가신 존재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일이 확대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동준으로서는 좀 쉬워진다. 좀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인내의 임계점이 어디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3
핸드폰 벨이 울린다. 민기와 철규는 아니다. 하지만 동준으로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쌓아가야 한다. 상업성 전화라면 끊으면 되고, 사기꾼 전화라면 더 큰 사기를 치면 된다.
“여보세요?”
“아, 서동준이?”
“네?”
“놀랄 것 없어. 소식 듣고 전화했으니까. 나 견 회장이거든. 독도가 돈벌이가 된다던데, 나한테 넘겨. 잠시 뒤에 우리 직원이 전화할 거니까, 그 친구하고 상의하면 돼.”
이 말 뒤에 곧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견 회장? 옛날 응암동에서 폼 잡고 다니던 그 견장두? 당구장 뒤에다 화투 도박판 차리고서 자릿값 뜯던 그 양아치 같은 인간? 와, 세상 많이 변했네. 그 당시에도 동준을 같잖게 보면서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하더니 이젠 남의 영업권까지 내놓으라는 거군. 그런데 회장은 또 뭐야? 주식회사 만들었어? 그럼 곱게 사업이나 할 것이지, 독도 돈벌이 내놓으라고? 웃기는 놈들. 독도에서 돈이 주렁주렁 열리는 줄 아는 모양이지? 돌대가리들.
그리고 그 두 놈. 민기와 철규. 둘 중 하나, 또는 두 놈 다.
하 참, 세상인심 무섭네. 독도의 독 자 꺼내기가 무섭게 갖다 일러바쳐? 에라이…….
그런데 견장두 제 놈이 직접 말하지 않고 직원을 보낸다고 어이구, 그렇게 높으신 분이 전화는 왜 손수 하셨대? 웃기는 인간들. 그리고 뭐 전화해서 이래라 저래라 그러면 내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머리 조아릴 줄 안 거야? 미친놈들.
동준이 투덜거리고 있는데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난다.
모르는 번호. 아마 견 회장 직원이라는 친구겠지. 동준은 과거에 알던 전화번호를 일단 모두 입력해 놓았다. 그중 일부는 바뀌거나 없어졌을 수도 있지만 앞으로 살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동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급할 것 없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에게 신경 쓸 시간도 없고.
동준은 집 밖으로 나가 어르신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간 것이다. 그동안 어르신 차를 뒤따라다니며 자극한 것은 저쪽에서 먼저 어떤 행동을 해오기를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틈을 파고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 외에는 아직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어르신의 집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화재 뒤에 집 안팎을 좀더 치장한 것 같긴 했지만, 내부 구조는 얼마 전 들어가 봤을 때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내부에 들어가면 뭣 좀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어르신이 지난번처럼 직접 데리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럼 또 한번 대문 앞에서 어정거리다가 끌려들어가?
하지만 어르신은 두 번 다시 그런 호의는 베푸어줄 것 같지 않았다. 동준이 점점 호랑이 새끼로 변해가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방법이 없을까……?
괴도 뤼팽. 신출귀몰 도둑 신사.
어렸을 때 뤼팽이 등장하는 《기암성(L’Aiguille Creuse)》을 읽고 얼마나 짜릿했었는지 모른다. 비록 슬프게 끝나는 내용이었어도 읽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었다. 그런데 커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냥 남들이 부르는 대로, 또 출판사에서 써놓은 대로 ‘알센 루팡’이라고 알고 있었다. 지금도 여기저기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는 책이나 표기가 많이 있다. 프랑스어 표기법대로 읽는다면 ‘아르센 뤼팽(Arsène Lupin)’이 맞는다. 그런데 프랑스어 원서가 아닌 일본어 책을 편하게 번역하다 보니 아무런 의식 없이 일본어식 발음에다 한국식 오류가 섞여서 ‘알센 루팡’이라고 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자 수가 적어서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게다가 광복 7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일부 책이나 언론, 심지어 뉴스에서도 그렇게 발음하고 있다. 또한 ‘기암성’이라 책 제목도 그렇다. 제목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실은 일본어판 제목 ‘기암성(奇巖城)’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사실 일본인이 그 제목은 잘 지었다. 프랑스어 제목 ‘L’Aiguille Creuse‘에서 ‘Aiguille(에귀유)’는 바늘이나 뾰족하게 높이 솟은 바위산을 뜻하며, ‘Creuse(크뢰즈)’는 프랑스 중부지방의 도시 ‘크뢰즈’를 뜻한다. 즉, ‘크뢰즈 지방의 높고 뾰족한 바위산’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직역하면 사실 복잡하게 되고 그 뜻도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어서, 그런 면에서는 일본어 번역인 ‘기암성’이 훨씬 낫다. 지금 이렇게 주절이 주절이 늘어놓는 것은 뭐 쓸데없는 시빗거리를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이름이 일본어식 표기든 아니든 알고나 있자는 것이다. 그리고 기왕 나온 김에 하나 덧붙이자면, 한국의 문장부호사용법에 따르면 책 제목에는 《기암성》처럼 앞뒤에 《 》를 사용하고, 책 속의 한 장(章)이나 중요구절을 표시할 때는 〈 〉 또는 큰따옴표(겹따옴표)나 작은따옴표(온따옴표)인 “ ” ‘ ’ 를 넣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많은 이들이 『 』 「 」 를 사용한다. 이것은 세로쓰기를 주로 하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표기이다. 일반인들이야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른다 해도, 글이나 맞춤법 또는 표기법을 잘 지켜야 하는 출판사나 언론사에서조차 이것을 무시한다. 무지해서 그럴 수도 있고,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서, 또는 알아도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의식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두루뭉술하다’와 ‘두리뭉실하다’ 또는 ‘떨어뜨리다’와 ‘떨어트리다’를 둘 다 사용할 수 있는 복수표준어 제도와 마찬가지로 부호사용법도 다양하게 인정해서 어느 한쪽만 옳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더라도 그 원인은 우리가 우리 표기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데서 온 편의주의의 결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문장부호 중 묶음표(括弧符), 즉 꺽쇠(「 」)는 가로쓰기 조판에서 주로 책이름을 표시할 때에 쓴다’고 명시된 자료도 있고, 겹낫표(『 』)는 책의 제목이나 신문 이름 등을 나타낼 때 쓰고, 홑낫표(「 」)는 소제목, 예술 작품의 제목, 상호, 법률 등을 나타낼 때 쓴다고 설명해 놓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부수적인 형태로 보이듯이 겹화살괄호(《 》)와 홑화살괄호(〈 〉)의 설명에 겹낫표와 홑낫표의 설명을 똑같이 붙여놓았다. 그러니 실제로는 어떤 것을 쓰든 타박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본어 세로쓰기에서 사용되는 문장부호가 우리말 가로쓰기에도 그래도 적용되는 것은 다양성이나 편의성, 또는 관례적이라는 해명만으로는 어딘지 민족적 감정에 충족되지 않는 면이 있다. 일본책에서는 가로쓰기일지라도 겹화살괄호(《 》)나 홑화살괄호(〈 〉)가 사용되는 예는 거의 본 적 없는데, 우리는 세로쓰기의 잔재를 가로쓰기에서도 그대로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을 어기는 짓을 밥 먹듯이 하고 살아온 동준이 이런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웃기는 짓일 수도 있지만, 뭐 그냥 한번 짚어봤다고 동준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사족을 덧붙이면, 일본에서 도쿄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이가 출판사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인재들이 출판잡지계로 진출하여 일본에서는 출판사 편집자라고 하면 그가 사는 동네에서는 존경을 받고 여기저기 다니며 강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비슷한 것 같다. 우수한 인재들이 그쪽 방면으로 많이 진출하는 것이다. 그들 나라에서 출판을 비롯한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반면 한국의 인재들은 주로 어디로 가는가? 그것보다도 출판잡지계로 진출하는 우수한 인재들이 얼마나 되는가? 표기법 하나 독립하지 못하고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남의 나라 것이나 갖다쓰는 현실을 보면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독도를 일본으로 넘기려는 매국노들이 어깨 활짝 펴고 대낮에 마음껏 활보하는 꼴이 된 것이겠지.
동준은 괜히 성질이 났다. 자기 꼴도 잊어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에 열을 올린 자신을 탓하지 않고 특별한 대상도 없는 곳에다 대고 엉뚱하게 화만 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현실로 돌아왔다.
아차, 괴도 뤼팽.
동준은 자신이 왜 뤼팽을 떠올렸는지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다. 오지랖 떠느라 그런 것이겠지만. 그러나 곧 생각이 났다. 어르신 집에 침투하자는 것.
하지만 이게 가능할까?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