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1
해선은 오진희를 골탕 먹이는 방법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종이에 써보자고 했다.
우선 가장 쉬운 것, 야한 옷 입은 모습을 찍은 사진. 그것을 보낸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소스라치게 놀라겠지. 그리고 앞으로는 극히 조심하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해선에게 유리할까, 불리하게 될까?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은?
모른 척하고 계속 감시? 미행?
오진희가 야한 옷 입고 간 곳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해선은 운전면허증은 있다. 그러니 렌터카를 빌려 그 주차장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따라가 봐? 하지만 운전을 거의 해보지 않아서 많이 서툴 텐데 그게 가능할까?
해선은 머리를 저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흥신소. 그렇지만 돈이 많이 들 텐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건 안 되겠다. 지금 해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진희 문제보다도 사실은 돈이다. 벌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줄어드는 돈.
돈이 가장 안 드는 방법을 찾아보자.
혹시, 택시를 대절해서 주차장 입구에 숨었다가 미행? 오진희가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택시를 기다리게 한다? 이 방법은 차를 빌리는 경우보다 돈이 더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것도 제외.
누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누구라……? 해선 주위에 누가 있을까?
선생님? 고개를 흔들었다. 최정명 지사장? 글쎄……. 남주환 과장? 아니지, 그건.
이것저것 죄다 생각해 보았지만 적당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론은……, 오진희 빌라에 다시 한번 가서 진 치고 기다려 보는 것으로 났다. 그러다 보면 뭐가 어떻게 돼도 되겠지. 안 돼도 할 수 없고. 게다가 이것이 가장 값싼 방법이다. 기껏 지하철비랑 라면 값만 드니까. (그 아까운 라면…….)
그런데 직접 그 빌라로 가서 기다릴까, 아니면 주차장?
아니다. 처음부터, 그러니까 호텔에서부터 시작하자. 어차피 집은 알고 있으니까 바짝 붙어갈 필요도 없어서 좀 편할 거다. 혹 중간에 다른 데로 샐지도 모르니까 뒤따라가긴 해야 하지.
아직도 운이 해선의 편인지 오진희는 호텔에서 제시간에 나와주었다. 그리고 역시 지하철로 향한다. 해선은 좀 편한 마음으로 뒤쫓았다. 역시 지하철 전동차의 오진희와 같은 칸 뒤쪽으로 탔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타는 칸의 같은 문에서 타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해선 자신도 특별한 일 없으면 그렇게 하니까.
해선은 그 칸 뒤쪽에 타서 느긋하게 손잡이를 붙잡고 전철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여기에서 느긋하다는 말은 전동차 안이 한산해서 편하다는 뜻이 아니다. 서울의 퇴근시간 지하철이 편할 리 없다. 그러니까 그 표현은 마음이 조급하지 않다는 뜻이다.
전동차가 다음 정거장에서 섰다.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피해 안쪽으로 조금 들어갔다. 그리면서 눈으로 오진희를 찾았다.
없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갔나 보다 하고 더 안쪽을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전동차 밖을 내다보았다.
안 돼!
오진희가 플랫폼으로 나가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해선은 사람들을 헤치고 문 쪽으로 나가려 했다.
“저 내려야 해요! 조금만…….”
‘비켜주세요’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전동차 문이 닫히고서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정 많은 서울시민들은 만원 전철 안에서 조금씩 몸을 비틀어 해선이 문 쪽으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해선은 전동차 문에 바짝 붙어서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오진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서울시민 여러분…….
다음 정거장에서 해선은 내렸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생각하고서 지난번 그 건물로 가볼 생각이었다. 이미 늦긴 했지만.
한 정거장 거리이지만 지상으로 올라가서 버스 타기도 그렇고, 택시 타자니 택시도 제대로 잡을 수 없겠거니와 그보다는 돈이 아깝고 해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반대편 지하철 승강장으로 가서 거꾸로 한 정거장 거슬러 가기로 했다.
투덜투덜……. 중얼중얼……. 한심해, 한심해……. 그런 태도로 무슨 미행을 한다고……. 그 꼴에 뭐, 무슨 비밀요원……? 아이고…….
해선은 욕만 빼놓고는 안 좋은 말을 다 동원해서 자기 자신을 나무랐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요 모양 요 꼴이지. 그런데다가 머리까지 나쁘니 하는 짓이 죄다 그렇고 그렇지…….
해선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사람들 틈에 쓸려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 개찰구 쪽으로 향했다. 혹시나 지난번 그 건물에 올라가서 일식집을 살펴보다 보면 운 좋게 뭐라도 걸려들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 없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래면서.
그런데, 어……?
개찰구 몇 미터 앞까지 다가갔는데 개찰구 너머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오진희의 모습이 사람들 틈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해선은 얼른 뒤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이 올라온 계단 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해선은 승강장 쪽으로 조금 내려가는 듯하다가 고개를 돌려 오진희를 찾았다. 그녀는 막 개찰구로 들어와서 해선 쪽 계단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고야!
해선은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전동차에 늦은 사람처럼 다른 이들을 마구 헤치며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승강장에 가서도 힐끗힐끗 뒤돌아보면서 마구 뛰어갔다. 다행히 사람들이 몸을 피해 준다. 다시 한번 존경하는 서울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해선이 다음 출구의 계단 근처까지 가서 뒤돌아보았더니 그때 막 오진희가 계단을 다 내려와 해선과는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살았다!
누구 잡으러 오는 사람한테서 무사히 도망친 사람처럼 해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
해선은 오진희의 옆모습을 흘끔흘끔 훔쳐보면서 가볍게 흔들리는 전동차에 몸을 맡겼다. 전동차는 호텔이 있는 역을 지나 해선이 늘 가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쪽 방향은 내 홈그라운드지.”
서울시 반은 자기 영역인 것처럼 해선은 우쭐해서 절반의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오진희는 뒷모습이 대부분이고 옆모습이 살짝 보이는 상태였지만 마치 세상일에 통한 사람처럼 평온한 듯해 보였다. 무슨 비밀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짓을 벌이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도 긴장을 하고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평범한 퇴근길 시민,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해선은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아마도 오진희는 그 USB의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가 이상하게 된다. 그래서 억지 같지만 해선은 무조건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고 우겼다. 또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뒤쫓는 게 헛짓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해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이 수요일이었다. 그리고 지난주를 더듬어 보니 오진희가 USB를 받은 날도 수요일이었다.
아하, 수요일!
“흠, 수요일의 비밀이구나. 일식집의 수요 비밀모임. USB 비밀전달. 너, 오진희, 나한테 또 잡혔어. 자동차, 그리고 비밀리에 USB 전달. 거기다 모텔의 밀회까지. 완전히 영화네, 영화.”
해선은 신이 났다. 그러면서도 너무 흥분해서 오버할까 봐 스스로를 조금씩 타일렀다.
오진희는 호텔을 지나 다섯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리고 지상으로 올라가 남쪽 방향으로 조금 걷다가 건물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 높지 않은 고만고만한 건물들을 지나 안쪽으로 한참 들어간 뒤 좀 오래된 듯 낡아 보이는 건물 속으로 사라진다.
해선은 오진희가 그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카메라로 몇 커트 찍고 동영상으로도 담아두었다. 그런 다음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실 같은 것은 없었다. 얼른 엘리베이터 앞에 가서 올려다보니 건물 층을 나타내는 숫자에 불이 하나도 켜 있지 않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옆에는 사무실 상호들이 있는 큼직한 게시판이 붙어 있었다. 치과, 이비인후과, 무역회사, 무슨무슨 엔지니어링, 수학학원 등등. 해선은 그 게시판을 핸드폰으로 사진 찍었다. 그러고 나서 계단 쪽으로 가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 중년 여자가 위에서 내려온다. 그 뒤로 또 한 남자가 내려오고. 해선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좁은 복도 양쪽으로 문이 다섯 개. 계단 올라와서 복도 맞은편 쪽에는 치과, 그 옆에는 무슨 연구소 간판. 역술 어쩌고 씌어 있는 것을 보니 운명을 알려주는 곳 같았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일층 게시판에서 본 엔지니어링 회사. 영어는 영어인데 읽기가 복잡해서 그냥 무슨무슨 엔지니어링. 나머지 둘에는 종이접기연구회와 간판은 없이 205호라는 번호판만 붙어 있는 사무실. 그리고 그 옆에 화장실. 남자화장실. 여자화장실은 위층에 있나?
해선은 아무래도 205호가 수상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문이 열리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해선은 날쌔게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막 화장실 한 칸의 문이 열리며 남자가 나온다. 물 내리는 소리 요란하게 나면서. 게다가 그 화장실 칸 안에서 지저분한 냄새가 확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해선은 코를 가리거나 찡그릴 수가 없었다. 머리가 부스스하고 얼굴이 붉은 60대의 푸른색 짧은 가운을 입은 남자가 화장실 칸 문을 닫으면서 노려보듯이 해선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는 곧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개수대로 가서 손을 씻는다. 치과에 있는 사람 같은 느낌. 그리고 아무래도 지독한 소화불량 환자 같은 또 하나의 느낌.
해선 역시 그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그때 막 옆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나온 두 사람의 대화에 온 신경이 쓰였다. 화장실 칸에서 나오는 냄새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지만.
“김 전무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시고, 다음 주 안에 좋은 소식 있을 것이라고도 알려주세요. 그리고 이건 별 거 아니니까 화장품이나 사서 써요. 꽤 미인이시네. 나중에 같이 한잔 하십시다.”
느끼한 목소리가 화장실 칸 냄새보다 해선의 신경을 더 자극한다.
문이 닫히는 소리. 복도를 걸어가서 계단으로 내려가는 소리. 그리고 아직도 나고 있는 개수대 물 흐르는 소리. 소화불량 남자는 꽤나 오랫동안 손을 씻는다.
소화불량이 개수대 옆에 놓인 두루마리 화장지를 후르르 돌려서 탁 소리를 내며 뜯어내서는 손을 닦고 휴지통에 버린 다음 해선이 벽 쪽으로 더 바짝 붙어서 확보해 준 공간으로 느릿느릿 지나서 나갈 때까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해선은 숨을 멈추고 있었다. 소화불량이 나간 뒤에야 비로소 해선은 숨을 크게 쉴 수 있었다. 그동안 질식해서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해선은 소화불량 냄새를 감수하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생명이 냄새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바깥의 동정에 잠시 귀를 기울인 다음 화장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해선은 얼른 복도로 나가 계단 쪽으로 급히 걸었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칫 하고는 다시 돌아서서 205호 앞으로 갔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어 그 문을 사진 찍었다. 또한 복도와 계단 전체 모습도 영상으로 담았다.
그리고는 급하게 계단을 급하게 뛰듯이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오진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진희가 간 곳은 짐작이 갔다. 별 다른 일이 없으면 지하철역으로 가서 집으로 향했으리라. 지금 뒤쫓으면 조금 늦는다 해도 그 빌라의 창에 불이 켜져 있는지, 그리고 또다시 옷을 갈아입고 차를 타고 외출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선은 건물 앞에 그냥 서 있었다.
205호 남자가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3
해선은 205호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벌써 밖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해선 옆을 지나 건물에서 나간 남자 중에 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아주 적었다. 해선이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에 205호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창문으로 밧줄을 타고…….
해선은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탁 치고 싶었다. 지금 장난해?
해선은 건물 옆으로 난 골목을 통해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건물 뒷면을 올려다보았다. 건물 저쪽 끝이 화장실 같았다. 그쪽 작은 창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조금 떨어져서 나 있는 두 창문. 불이 켜져 있었다. 해선은 핸드폰을 꺼내어 얼른 사진 찍었다.
그리고 건물 앞으로 돌아와서 현관을 통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해선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다. 205호에 사람이 많이 있을까? 그럼 그중에서 누가 오진희와 대화했는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든 일단 그 사무실 앞으로 보자. 가서 문을 두드리든, 괜히 비명을 지르든 무슨 짓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층에 올라섰다. 해선은 핸드폰을 꺼내어 카메라의 동영상 버튼이 나오도록 했다. 아무 때나 누를 수 있도록.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뒤 205호 쪽으로 갔다.
아, 그때 막 문 안쪽으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해선은 갑자기 심장이 쿵 떨어진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후다닥 뛰어서 205호 앞을 지나 또다시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205호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나오듯 듯한 기척. 그러면서 말소리가 들린다. 해선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마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어떤 남자가 화장실로 뛰어든다. 바로 그 소화불량. 해선 앞을 지나 쏜살같이 화장실 한 칸으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 그런 다음 문이 제대로 닫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화장실 전체로 퍼져나가는 고약한 냄새.
우악―.
하지만 해선은 그 냄새에 신경 쓸 수가 없다. 205호 남자가 문 밖에 나와 천천히 문을 닫으면서 선 채로 통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형님이 알아서 해줘요. 나야 뭐 심부름만 하는 거니까. ……… 아니, 아니, 괜찮다니까. ……… 나중에 나 잊지나 마쇼. ……… 지금 만나러 갈 거요. ……… 알았다니까. ……… 아, 그런데 그 애 볼수록 괜찮던데, 형님이 혹 건드린 건 아니죠? ……… 아니, 내가 같이 술 한잔해도 괜찮은지 해서. ……… 알았소, 알았어.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 마시고. ……… 헤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 그냥 애가 반반해서…….”
남자는 어서 갈 생각은 않고 서서 계속 전화만 한다. 문은 이미 닫은 것 같은데.
“…… 내가 며칠 내로 어른한테도 갈 거니까 그때가 되면 답이 나올 거요…….”
아, 빨리 가라, 쫌. 미치겠다, 이 냄새. 나 조금 더 있으면 질식해서 쓰러져. 지금 숨도 못 쉬고 있다니까.
“알았소. 이따가 결과 알려드리지. ………. 알았어, 문자는 안 되고 오직 전화로만. 알았다니까……. OK.”
드디어 남자가 전화를 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해선은 바지주머니 속에 넣은 핸드폰을 꺼내어 버튼을 눌러두었었다. 목소리만이라도 녹음하려고.
“이거 무슨 냄새야……?”
남자가 낮게 투덜거리는 소리.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내려가. 빨리 빨리……. 제발 제발…….
남자가 계단 쪽으로 향하며 멀어지는 발소리. 빨리, 제발……, 나 좀 살려줘…….
해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뛰쳐나갔다. 그와 동시에 참았던 숨을 하! 하고 내쉬었다. 그리고 뒤이어 깊이 들숨 날숨을 번갈아 반복했다.
하악 하악…….
하지만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직도 뒤통수 쪽으로 날아오는 냄새에서 도망치듯 날듯이 계단으로 가서 뛰어 내려갔다. 아래층 조그만 홀에는 현관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이 몇몇 있었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스포츠형 머리에 흰 티셔츠를 입고 몸집이 단단하게 생긴 남자. 뒷모습과 위층에서 들었던 목소리로 보아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해선은 핸드폰을 꺼내어 남자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다.
남자가 현관을 나가 왼쪽으로 돈다. 주차장 쪽 방향이다.
해선은 숨을 몰아쉬며 뛰듯이 내려가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좀 전에 가보았던 주차장으로 향했다. 남자가 보였다. 아직 날이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여름 긴 해가 좋긴 좋다. 게다가 가로등도 막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해선은 주위를 둘러본 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 셔터를 눌러댔다. 남자가 차 옆으로 가서 돌아선다. 일본 차 렉서스.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자동차에 오른다. 곧이어 가벼운 엔진 시동소리.
해선은 카메라를 내리고 몸을 돌이켜 다른 차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엇인가를 꺼내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스포츠형 머리의 차가 해선의 등 뒤를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해선은 몸을 돌이키고 카메라를 들어올려서 셔터를 눌러댔다. 동영상도 찍고.
4
해선은 전철을 타고 오진희의 빌라로 향했다. 무작정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 뿌리라도 뽑을 기세였다.
오뉴월 서릿발이라는 말을 네가 알아? 해선은 마음속으로 오진희를 향해 중얼거렸다. 옛 오뉴월은 음력이다. 요즘이면 칠팔월 한창 더울 때지. 그 찌는 복더위에 서리가 내린단 말이야. 지금 내 마음이 그래. 이에는 이. 네가 행한 대로 받아봐. 눈에는 눈.
해선은 마음이 울컥했다. 이런 짓 하려고 지금껏 악착같이 살아온 것은 아닌데.
해선은 시무룩한 얼굴로 손잡이에 매달려 전동차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갑자기 어릴 적의 여러 장면이 떠오른다. 해선은 순한 편이었다. 아버지는 무척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엄마가 재혼했다. 먼저 부인과 이혼한 새아버지에게는 해선의 오빠뻘 되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중학교 때 물놀이 갔다가 빠져죽었다. 그 뒤로는 다른 남자의 딸만 하나 키우는 아버지 밑에서 해선은 살얼음판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해선은 어렸을 때는 무척 영특했었다고 한다. 말도 빨리 배우고 예쁜 짓만 골라서 했다는 것이다. 엄마가 늘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해선은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제비처럼 늘 재잘거리던 것도 없어지고 죽고 못 살 정도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깥에는 아예 나가지 않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렇다고 공부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 음악 이런 데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셧다운. 이 단어가 가장 어울린다. 갑자기 전기가 나간 듯 모든 게 멈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깥에서 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해선 내부에서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할 것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들을 표출하지 않고 가슴 깊은 곳으로 꾹꾹 눌러놓으며 지냈다. 남들은 해선이 사춘기가 지나면서 얌전해지고 여성스러워진다고 했다. 해선 자신도 처음에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음속은 점점 더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되어갔다. 그때, 바로 고등학교 1학년 때 민 선생님을 만났다. 담임과 학생으로. 민 선생님은 해선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래서 교무실과 상담실로 자주 불러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해선은 말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말이 큰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성적도 조금씩 오르고 무엇인지 모를 가슴의 응어리도 약간이나마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 뒤 학년이 올라가면서 민 선생님과는 더 이상 접촉할 기회가 없어졌지만, 가끔 복도나 운동장에서 마주치면 자상하게 웃어주며 힘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힘내라는 말, 그 간단한 말이 해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때 이후로도 남들과는 떨어져 계속 고립된 채 살아갔지만 그래도 가슴 속 저 밑에서는 자그마하지만 혼자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책을 읽었다. 소설, 전기, 시, 수필 등등. 그리고 그 덕에 지방 전문대학의 문예창작과에 간신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해선은 오진희 동네의 지하철역에서 내릴 때까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에 푹 잠겨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내릴 곳을 놓칠 뻔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간신히 전동차에서 내린 해선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계단을 올라갔다.
해선이 오진희의 방을 올려다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사진을 한 커트 찍었다. 그냥 괜히.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쩐지 오늘 밤엔 오진희가 밖에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그런데, 그 라면! 지난번에 단 한 젓가락도 먹어보지 못하고 놔두고 나온 라면……. 그거 아직 그냥 남아 있을까? 아까운데. 내 피 같은 돈으로 산 거란 말야.
해선은 지난번 갔었던 편의점 앞으로 가서 창 쪽의 간이식탁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해선이 남겨두고 나온, 김이 모락모락 나던 컵라면도 보이지 않았다.
해선은 씁쓸한 마음으로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컵라면 하나 사서 뜨거운 물을 붓고 식탁에 앉았다. 평소 안 먹던 라면을 앞에 두고 앉아 있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이 짓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처량한 마음으로 라면 먹어서 뭐한담? 하긴 옛 말에 먹는 것 가지고 타박하지 말라고 했는데…….
라면이 다 된 것 같았다. 해선이 뚜껑을 열자 허연 김이 올라오고 먹음직스런 냄새가 풍겨나온다. 그래, 다른 거 다 잊고 맛있게 먹자.
해선은 라면을 한 젓가락 푹 건져서 올리며 저도 모르게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라?
오진희.
해선의 바로 코앞을 지나간다.
해선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카메라 가방을 들고서 뛰쳐나갔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 라면을 쳐다보았다.
아까워라…….
오늘 밤 오진희의 복장은 평범했다. 화장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좀 길었던 머리만 뒤에서 하나로 간단히 묶고 핸드백도 지니지 않았다. 편하게 여름밤 산책을 나가거나 근처 가게에서 무엇인가를 사러 가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상점들의 불빛에 비친 오진희의 모습에서는 호텔에서나 지난번 야하게 차려입고 나섰을 때와는 다른 청순미가 흐르는 것이었다. 해선 개인적으로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해선 자신이 늘 그리던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앳된 듯이 여겨지는 풋풋한 청순미, 그리고 거기에 가로등 불빛에 비친 고혹미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한여름밤의 가슴 설레는 낭만미까지 겹쳐져 있는 한 여인.
해선은 우선 사진부터 찍어두었다. 그 뒷모습이나 길을 건널 때 옆으로 얼굴을 돌려 살피는 모습에서 질투까지 느끼며 해선은 송곳으로 자기 자신의 가슴을 후벼파듯 셔터를 꾹꾹 눌렀다. 그러는 중에도 다른 사람들 시선 끌지 않게 조심하면서.
오진희는 한가한 모습으로 걷는다. 그리고 지난번 그 주차장 쪽으로 향한다.
오늘밤에는 저런 모습으로 외출하는 건가? 누구를 만나러?
질투가 더 끓어오른다.
오진희는 주차장 입구로 들어선다.
해선은 카메라를 동영상 모드로 바꾸고 오진희의 등을 향해 들이댔다.
그때 갑자기 주차장 깊숙한 곳에서 방향지시등이 번쩍 켜지며 삑 소리가 난다. 오진희의 방향이 그쪽으로 바뀐다. 그리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오진희가 다가간 차. 해선도 알고 있다. 검은색 대형 벤츠. 김상기 전무의 차.
오진희가 조수석 문을 열자 차 안의 실내등이 켜진다. 오진희가 안으로 들어갈 때 남자의 몸이 그리로 쏠리면서 오른쪽 팔을 쭉 뻗어서 여자의 손을 잡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좌석에 앉으면서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마지막 장면으로 남긴 뒤 벤츠의 실내등이 꺼졌다.
벤츠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해선은 하릴없이 질투 반, 남겨두고 온 라면 생각 반으로 그 지루한 시간을 때웠다.
한 20분 흘렀을까, 그동안 차 몇몇 대가 들락날락한 뒤 벤츠가 시동소리를 내며 헤드라이트가 켜진다. 해선은 주차장과 그 옆 학원 건물 사이의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벤츠가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해선의 카메라는 셔터 소리로 바빴다. 벤츠가 조금 가다가 신호등 앞에서 섰다. 그리고 오른쪽 앞문이 열린다. 오진희가 내렸다. 차 문을 연 채 팔을 뻗어 서로 손을 잡는 것 같았다. 오진희가 차 문을 닫았다. 차창 문이 내려간다. 그 뒤 차가 출발했다.
오진희가 손을 살짝 들어 흔든다. 그런 다음 차는 곧 멀어져 갔다.
그리고 해선은 카메라를 내렸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