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그대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

As well as if a manner of thine own

by Rudolf

제8장

As well as if a manner of thine own

그대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


1


동준은 어르신의 옛 번호로 전화했다. 집 전화번호로. 어르신의 핸드폰은 모른다. 알려주지도 않았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인터넷이나 어디에도 어르신 핸드폰 번호는 나와 있지 않다.

전화를 받는다.

“여보시오.” 어르신의 목소리.

“저, 동준입니다.”

잠시 말이 없다.

“죄송합니다. 사과드리려 전화했습니다.”

역시 말이 없다.

“제가 많이 힘듭니다. 도와주십시오.”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저, 어르신…….”

“지금 어디인가?”

“어르신 댁 근처입니다.”

“누구하고 같이 있나?”

“아뇨. 혼자입니다.”

“지금 와.”

전화가 탁 끊어진다.

동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르신 저택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괴도 뤼팽처럼 신출귀몰하게 남의 집 넘나드는 재주는 동준에게 없다. 그래서 멋쩍지만 동준은 이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잘 안 돌아가는 머리로 기막힌 방법을 짜내느라 힘쓰느니 철면피가 되는 것이 동준에게는 더 쉽다. 어르신에게는 어차피 이미 인간의 도리도 못 하게 된 판이니.

동준은 화원에 가서 꽃다발 하나와 자그마한 동양란 화분을 샀다. 그리고 사모님 드시라고 잣죽 세트를 하나 준비했다. 사모님은 항상 편안하게 동준을 대해 주고 그 눈도 참 인자해서 늘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동준은 어르신 저택으로 향했다.

대문에서 인터폰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린다. 인터폰 화면으로 확인한 것이겠지.

동준이 정원으로 들어가는데 좀 멋쩍었다. 교도소에서 나와서 지난번에 인사드리러 왔을 때와는 마음이 또 달랐다. 동준 같았으면 아예 집 안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역시 대인은 대인이다.

동준이 정원을 지나 현관 계단을 한 단 오르자 현관문이 열린다. 어르신이 직접 내려와서 열어준 것이다.

동준은 허리를 숙였다. 90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가까이 허리를 숙인 것이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어르신의 눈길이 보이지 않아도 얼음장일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허리를 펴고 나서 눈치를 보니 어르신의 얼굴은 그전과 마찬가지였다. 언론에 나오는 그 얼굴. 중후하면서도 온화한 모습. 그것은 마치 가면인 듯 늘 변하지 않았다. 설사 위선적인 표정일지라도 정말 대단한 것이다. 마음의 상태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늘 그렇게 똑같은 얼굴을 유지하는 것.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르신이 쓴 글 중에 1968년에 《설국(雪國)》이라는 소설로 노벨상을 받은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를 가장 존경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 사람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그가 늘 평정심을 유지하고 살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어르신 자신도 어떠한 경우에서든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얼굴을 통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표정관리와는 다르다고 한다. 얼굴과 감정을 일체시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처럼 어르신은 동준이 그를 안 이후 표정이 흐트러지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어르신의 저택에 불이 났을 때 그 ‘비밀서류’가 사라진 것을 안 뒤를 빼고는. 그러나 그때도 잠시 얼굴이 흐트러졌을 뿐 그 이상의 큰 변화는 없었다. 그가 애국을 했든 매국을 했든 아무튼 인물은 인물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독도를 팔아먹을 정도라면 그 속은 대단한 배짱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이다. 동준 같으면 간이 작아서 그런 생각은 꿈도 못 꾼다. 그러나 어떻든 어르신은 나쁜 놈이다.

어르신은 동준이 손에 든 것들을 흘끗 한번 본 뒤 몸을 돌려서 안으로 들어간다.

동준은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서서 주방으로 갔다. 그곳 식탁에 사모님 드릴 잣죽 세트를 올려놓고 화장실로 가서 가져온 꽃다발을 다듬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적당한 화분을 찾아서 꽂은 뒤 거실 탁자에 갖다놓았다. 그 다음 동양란 화분 속 부엽토를 살펴보고 살짝 눌러준 다음 이층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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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벌써 서재에 들어가 있었다. 동준은 화분을 들고 서재로 가서 적당한 공간을 찾아보았다. 서재는 간소하다고 할까, 창문을 뺀 세 벽 중 두 벽에는 고풍스러운 진갈색 티크나무 책장에 각종 서적과 서류철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한 벽에는 작은 액정 TV 모니터와 오디오 시스템, 각종 상패와 감사패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그리 크지 않은 사진 액자와 작은 크기의 수묵화, 붓글씨 족자 등이 대여섯 점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에 화분 몇 개. 그중에는 우아한 동양란도 한 점이 있다. 은퇴한 정치 거물치고는 소박한 것 같았다.

동준은 분위기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하느라 어물쩍거리면서 흘끔흘끔 어르신의 눈치를 보았다. 그와 동시에 서재 여기저기를 돌아보면서 화분 놓을 자리를 찾는 척했다. 그러면서 비품이나 물건들이 살짝 비뚤어진 것이 있으면 손으로 바로 잡고 하면서 혹시 수상한 것들은 없나 살폈다.

“거기 창문 옆에 갖다놔.”

어르신이 아무런 억양 없이 말을 한다.

동준은 찔끔해서 얼른 창문 옆에 놓은 작은 탁자로 가서 손으로 바닥을 한번 쓸고는 동양란 화분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돌려서 어르신이 잘 보이는 방향으로 각도를 맞추어 놓았다. 어르신의 자부심인 외동딸 사진 액자 바로 옆이다.

아, 그 딸. 어르신은 1남1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주 오래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전통 깊은 헤이스팅스 법과대학에 다닐 때 친구들과 술 마시고 한밤중 샌프란시스코의 오르락내리락 하는 곡예 길을 과속운전을 하던 중 경찰에 쫓기다 급회전하는 바람에 전복되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하나 남은 딸은 소문난 수재였으며, 예일 대학 법대를 나와서 변호사로 일하다 현재 뉴욕 주 정부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정계로 진출할 기회를 찾고 있는 중이다. 인도계 미국인과 결혼해서 몇 년 산 뒤 아이는 없이 이혼했으며, 나이는 무척 많지만 아직 재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준 부친의 장례식 때 어르신이 동준을 자기 아들이라 한 것도 아주 빈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동준의 청춘이 엉망이긴 했지만 만일 12년 전 동준이 어르신의 입맛에 맞게 행동했다면 혹 양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 순간 문득 들었다.

그러자 부친이 생전에 생뚱맞게 말씀하신 것이 동준의 기억 속에서 슬며시 기어나온다.

부친은 상당히 건강한 편이었다. 어느 날 혼자 집에 있다가 쓰러졌는데, 동준은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그 다음날 집에 들어갔다가 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숨진 뒤였다. 나중에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급성 허혈성 뇌졸중이었다. 한마디로 중풍이었던 것이다. 일찍 발견했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질병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 이후 동준은 자신을 얼마나 학대했었는지 모른다.

부친은 타계하기 얼마 전에 나중에 생각해 보니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동준에게 했었다.

“앉아봐라.”

동준이 바깥에 나가려고 거실을 가로지르는데 정치계 소식을 담은 잡지를 읽던 부친이 눈은 계속 잡지에 준 채 툭 던지듯이 말했다. 부친은 평소 동준에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네 인생은 네 것이니 네가 알아서 잘 관리하라는 주의였던 것 같다. 그러던 부친이 지나가는 듯이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동준은 평소보다 다른 것을 느꼈다. 갑자기 동준은 마음이 찔끔했다. 그렇지 않아도 건달 같은 친구들 따라다니면서 혹 부친이 알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늘 마음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준이 걸음을 멈추고 부친을 돌아보자 부친은 여전히 잡지에 눈을 주고 있었다.

동준이 순간적으로 망설이고 있는데 부친은 동준을 보지도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앉아.”

그 말에 동준은 지남철에 이끌리듯 부친 앞에 있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엉덩이만 반쯤 걸친 채.

그제야 부친은 잡지를 내려놓고 돋보기를 벗으면서 동준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그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너 혹시 의원님이 부르시거든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보거라.”

생뚱맞은 말. 그리고 ‘의원님’은 바로 그 어르신을 말한다. 부친은 어르신을 언급할 때는 그분의 호인 ‘심호’가 아니면 ‘의원님’이라고 불렀다. 거기에는 친구에 대한 예의뿐만 아니라 존경심을 포함한 부친 자신의 소망과 미래가 다 담겨 있었다. 그 친구를 통해 부친의 꿈과 이상을 이루려 하는 마음.

부친은 이 말만 하고 다시 잡지로 눈을 돌렸다.

동준은 혹 다른 말을 더 하실까 싶어 잠시 앉아서 기다렸지만 부친은 잡지만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그 말. 동준은 부친이 타계하고 나서 가끔 그 장면을 생각해 보았다. 무슨 뜻이었나? 하지만 워낙 그 속을 모를 정도로 자신의 의중을 잘 나타내지 않으시던 부친의 말을 동준으로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 동준의 머릿속에서 슬그머니 부친의 그 말과 ‘양자’라는 말이 뒤섞이며 동준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이었다.

동준은 괜히 입맛이 씁쓸해졌다. 내가 이거 지금 뭐하는 짓이야? 처세나 잘 했으면 이런 고생 안 해도 되는데……. 에잇, 돌대가리!

동준은 어르신 딸 액자를 한 번 더 쳐다보고 몸을 돌이켰다.

어르신은 책상에 앉아 두툼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동준이 책상 맞은편에 놓인 소파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가자 어르신은 얼굴을 들지도 않고 손으로만 소파를 가리킨다. 동준은 천천히 소파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다리를 모았다. 평소 같으면 쩍벌다리였을 텐데 이날은 분위기도 그렇고 또 ‘의도’도 있는데다가, 혹여나 어르신 눈에 잘 들어 양자가 되는 일은 없을까 하는 헛 희망을 마음에 살짝 품고 있었던지라 몸가짐 조심해서 손해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먹은 것도 없는데 마음속으로는 괜히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동준이 자리에 앉자 어르신이 고개를 든다. 동준은 마주 바라보지는 못하고 눈길을 슬쩍 피하면서도 얼굴은 어르신 쪽으로 향했다.

“돈이 필요해?” 어르신이 느닷없이 말한다.

동준은 찔끔했다.

“좀 받지 않았나?”

동준은 대답은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뭘 할 거야?”

독립운동요 하고 대답할 뻔했다. 그 대신 동준은 고개를 들어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이나 감정표시 없이.

어르신은 동준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 보다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로 눈을 내린다. 그리고는 잠시 뒤 다시 고개를 들면서 펼쳐져 있는 서류를 닫는다. 그리고는 그 서류를 동준에게 내밀었다.

동준은 그 짧은 틈에 ‘양자’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굴리며 엉뚱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가 어르신이 내민 서류로 눈을 모았다. 갑자기 동준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이었다.

동준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어르신의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서류를 받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앉지는 않았다. 아니, 앉지 못한 것이다. 서류의 제목이 엉뚱했기 때문이다.

동준은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어르신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호인다운 관대한 얼굴. 중후하면서도 인자한 모습.

동준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제목을 바라보았다.


필적감정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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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준은 어르신의 집에서 나와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낭패감, 초라함, 좌절감, 수치심…… 이런 것들이 동준을 에워쌌다.

“그동안 뭐한 짓이야, 이거…….”

동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마디로 헛짓을 한 것이다.

어르신이 준 서류는 동준이 어르신 서류봉투에서 빼돌렸던 문서에 들어 있는 서명에 대한 필적감성보고서였다. 거기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다섯 명의 인사들 이름이 인쇄되어 있고, 그 옆에 자필 서명이 들어 있었다. 사인이 아니고 자기 이름을 손으로 직접 써서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열 명의 서명에 대한 필적감정. 이것 역시 그 문서와 마찬가지로 한글과 일본어, 영어로 각각 번역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문서는 웬만한 책 두께였다. 열 명의 인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평소의 서명과 습관 등을 과학적 기법에 의해 아주 자세하고도 지루할 정도로 세밀히 분석하고 수많은 사진과 여러 다양한 예시까지 덧붙여 기술해 놓았다. 또한 국제적으로 유명한 필적 전문가들의 의견도 첨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론은 그들 서명이 가짜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럴듯한 엉터리 문서를 만들고 한국과 일본의 실제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가짜 서명을 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문서에는 그렇게 한 의도와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또 다른 영역의 문제이니까.

그럼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어르신은 그 문제를 왜 극비로 보관해 두었을까?

또 하나는 그 문서를 잃어버리고 나서 왜 그토록 애타게 찾았을까?

이에 대해 동준은 아직 어르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물론 어르신도 일부러 먼저 답해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준은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그 대답을 주었다.

즉, 어르신은 그 서류가 아무리 가짜라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오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 서류 원본을 극비로 보관하고 혹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될 것을 준비해서 미리 필적감정을 의뢰해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준이 그 서류를 빼냈을 때 먼저 서류 회수에 온 힘을 쏟았고, 또한 동준이 잘못 입을 놀리게 되면 그 또한 적잖은 파장을 몰고 올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한 것이다.

이렇게 되니 그동안 있었던 일이 모두 설명된다. 교도소에서 나온 뒤 왜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혹 그 문서를 복사에 놓았을지도 모를 동준을 왜 그대로 내버려두었는지 등등이 말이다. 게다가 어르신은 동준에 대해 아무런 꾸중도 하지 않았다. 그냥 측은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동준은 거의 혼이 나간 상태에서 길을 걷다가 갑자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옆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깜짝 놀라서 돌아다본다.

평소 같았으면 동준은 ‘뭘 봐!’ 하며 마음속으로 대들며 노려보았을 것이다. 침을 탁 뱉기도 하며. 그러나 오늘은 아예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창피함, 부끄러움, 자괴감……. 게다가 그 꼴에 행여나 하면서 ‘양자’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이 스스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생각을 아무도 알지도 보지도 못했는데도 어쩐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씨…….”

동준은 자기 자신에 대해 내뱉는 그 말의 다음 글자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보다는 한 단계 내려서 스스로를 비하했다.

“쓰레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차라리 먼젓번 욕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런 단어로 씨름하는 자기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져 한 번 더 내뱉고 말았다.

“병…….”

‘신’이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처음에는 무시하려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번호를 보았다.

견장두.

동준은 전화를 꺼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을 나무랐다.

일이 점점 더 꼬이는군.

핸드폰이 다시 울린다. 뻔하다. 누군지.

동준은 번호는 보지도 않고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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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뒤에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 이번에는 저절로 끊어질 때까지 울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동준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었다. 괜히 노려본 것이다.

어떤 덩치가 마주 쳐다본다.

뭘 봐!

아차, 그런데 이 말이 그만 입 밖에 나와버리고 말았다.

덩치가 얼굴을 들이밀고 다가온다.

아이고…….

동준은 도망갔다.

덩치가 따라온다.

동준은 더 빨리 도망쳤다. 건물 사이로 들어갔다. 동준이 뒤를 돌아다보니 덩치 뒤에서 또 다른 덩치, 아니 꺽다리가 쫓아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덩치가 맞긴 맞다. 꺽다리에 덩치니까.

동준은 건물들 사이로 이리저리 돌면서 도망쳤다. 몇몇 사람이 돌아다보며 깜짝 놀란다.

동준은 계속 달리다가 문득 왜 이렇게까지 도망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말 한마디 실수한 것뿐이데. 갑자기 마음이 시들해져서 동준은 뛰는 것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걸었다. 뒤에서 쫓아오든 말든.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뒤에서 난다. 동준은 초연한 자세로 그냥 천천히 걸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강하게 잡으면서 동준을 돌려세운다. 그리고는 동준이 어깨의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다시 뒤로 돌리더니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것이었다.

동준으로서는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조금도 저항할 수 없었다. 마치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혼이 나간 채 멍하니 서서 당한 것이다.


동준은 경찰서에 끌려들어가 지문 찍고 전과 조회하고, 형사가 어르신에게 전화해서 확인하고 하는 부끄럽고 황당한 과정을 거친 뒤 풀려났다.

꼴좋다…….

이제 어르신의 양자가 될 일은 아주아주 멀리 날아가 버렸다.

동준은 멀겋게 뜬 눈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입에서는 저도 알지 못하는 말들이 독백처럼 흘러나왔다.

투덜투덜…….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쳐다본다. 동준은 순간적으로 성질이 팍 올라와 마주 쳐다보았다. 그러자 상대방이 노려본다.

동준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딴 데를 보았다. 꼬리를 내린 것이지.

젠장…….

그리고 동준은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전화가 셋, 카톡이 하나.

첫 번째 것은 아까 확인한 견장두. 두 번째와 세 번째 것은 철규에게서 온 것이었다. 게다가 철규에게서는 음성메시지와 카톡도 와 있었다. 그 내용은 둘 다 동일하고도 아주 간단했다.


도망가!




| 불확실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 |

이는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76)가 제시한 것으로서 양자역학의 가장 독특한 기초원리에 해당한다. 간단히 말하면 전자나 빛은 본질적으로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즉 입자와 파동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모순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질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빛은 관측하는 방법에 따라 어떤 때는 입자로, 또 어떤 경우에는 파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관측되는 일은 없다. 따라서 빛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도 없다. 이것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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