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그대의 친구가 그리된다 해도

Or of thine friend's were

by Rudolf

제 2 부

Certainty Principle

확실성의 원리




제9장

Or of thine friend's were

그대의 친구가 그리된다 해도


1


일본 규슈의 최남단 이부스키(指宿). 이곳은 후쿠오카에서 산요신칸센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가고시마에서 내려 다시 특별쾌속열차인 나노하나 DX를 타고 50분 달리면 나오는 휴양도시이다. 원래는 특별한 눈길을 끄는 면이 없는 조용한 곳이었으나 온천과 모래찜질로 소문이 나서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가장 남쪽에 있어서 열대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낭만적이고도 이국적인 풍광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 서쪽에 있는 높이 924미터의 가이몬 산과, 이부스키와 가이몬 산 사이에 이케다 호수와 우나기 호수가 있어서 바다와 호수, 산 등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면을 지니고 있다.

이부스키 역에서 내린 정일두는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승용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국도를 지나 지방도로 접어들면서 정일두는 주변 경치에 넋을 잃고 있었다. 이곳은 벌써 백 번도 더 와본 것이다. 일본 말고도 세계 여러 나라를 두루 다녀본 정일두이지만 특히 사쓰미 반도 남쪽의 이 지방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열대적인 풍광도 그렇거니와 바다를 끼고서 달리는 도로와 아름답고 깨끗하게 단장된 여러 경치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부스키는 그의 꿈과 야망과 미래가 담겨 있는 곳이다.

정일두가 탄 차는 플라워파크 가고시마를 지나 나가사키바나 파킹가든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사쓰미 반도에서도 최남단이다. 그곳에서 바다 건너편에는 오스미 반도가 있으며, 그곳의 사타 곶은 규슈 섬의 최담단 곶에 해당한다.

정일두는 비공식적인 인물인데도 일본 정부 비밀요원의 안내를 받아 용궁신사에서부터 우라시마 타로 상(像)을 지나 사쓰미 나가사키바나 등대까지 갔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동행들과 대화를 나눈 뒤 다시 조금 더 아래에 있는 나가사키바나 등대 전망대로 향했다. 그 전망대 아래는 태평양이다.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정일두는 이곳에 오면 세상을 다 정복한 느낌이 든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정복감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이곳 나가사키 등대에 서면 그것과는 다른 웅대한 감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바다를 통한 온 세상 정복. 이것은 정일두의 꿈이다. 광복 전 일본에서 태어나 육이오 직후에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간 정일두는 비록 어렸을 때 떠난 일본이기는 했지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 그 기억들을 늘 소중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 기억은 주로 바다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서 지리와 역사를 배우며 바다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바다에 대한 동경은 점점 커져 갔다. 근대 서양국가들이 바다를 통해 신세계로 나아갔고, 일본 역시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가며 남방정복의 꿈을 키웠다.

정일두에게는 바다가 꿈이며 세상이었다. 답답한 한국에 살면서도 늘 어릴 때 보았던 일본의 바다를 그리워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으로 나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일본으로 가서 해안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 것이었다. 일본은 바다를 통해 동쪽으로 진격해서 하와이까지 갔으며, 남쪽으로 내려가서 호주 근처와 버마까지 진출했다.

그 넓은 대양. 바라보기만 해도 정일두는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또다시 21세기에 바다를 통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일두는 오래 전부터 큰 야심을 키워왔다.

태평양 제국. 일본열도는 물론 한반도와 대만까지 아우르는 큰 대국을 형성하는 것이다. 일본과 남한, 대만의 인구를 합치면 2억이 넘는다. 일본 1억3천만, 한국 5천만, 대만 3천만이기 때문이다. 이 세 나라가 삼국동맹을 이루어 하나의 제국이 된다면 태평양의 반을 차지할 수 있다. 즉, 서태평양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정일두는 삼국동맹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태양국을 만들고 이부스키를 태양시로 이름을 바꾸어 삼국의 정치수도로 삼는 것을 구상하고 있다. 일본 최남단에 수도를 둠으로써 한국과 대만, 그리고 일본 삼국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쿄와 서울, 타이페이는 경제수도로 기능하게 하며, 삼국은 미국의 주처럼 각국이 독자 행정기능을 갖지만 외교, 국방, 화폐 등은 중앙정부인 태양시가 주관하게 된다. 또한 한국의 원화, 일본의 엔화, 대만의 신 타이완 달러 대신 새로운 명칭의 화폐로 통일시키면 미국 달러나 유럽의 유로화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언어 문제가 가장 민감한 부분인데, 아무래도 일본 인구가 가장 많기 때문에 공용어는 일본어로 하되, 정부 공식문서는 일본어 아래에 한글과 대만 한자를 병기토록 한다. 그리고 한국어와 대만어는 제2의 공식어로 인정해서 삼국 국민이 세 개의 언어 중 의무적으로 자유선택에 의해서 두 가지를 배우도록 강제하지만, 단 일본어는 제1 선택이 되도록 정한다. 따라서 삼국의 국민은 적어도 두 개의 언어를 국어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 즉 일본 국왕의 지위와 성격에 대한 것은 언어 이상으로 예민한 부분이어서 당분간은 논의에서 제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삼국 대표가 합의해서 정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이때 합의가 안 되면 바티칸처럼 천황시를 만들어 독립시키는 것도 검토하도록 정해 놓는다.

이에 더해 북한을 설득하여 한국, 일본, 대만과 동등한 자격으로 사국동맹을 형성해서 들어올 것을 제안하고, 그 경우 북한도 앞서 삼국에서처럼 독립된 주로 인정하며 평양을 네 번째 경제수도로 만든다. 이렇게 해서 거의 2억5천에 이르는 대국이 된 이후 태평양 지역의 섬나라들을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하나씩 태양국에 편입시키게 되면 거대한 태평양 제국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남쪽 필리핀과 뉴기니, 호주, 뉴질랜드 등을 제외한 북태평양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대제국 그 중심에 이부스키, 즉 바로 태양시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일두는 오랜 세월 일본과 대만의 인사들을 비밀리에 만나 논의해 왔다. 그러나 아직 대만에서는 큰 반응이 없다. 반면에 일본에서도 특히 극우 인사들은 크게 환영하며 정일두가 한국과 일본에서 이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도록 막대한 자금을 제공해 주기로 약속했다.

정일두는 자신의 신념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와 극우단체의 막대한 비밀자금을 받아 이부스키에 삼국해양이라는 위장 건설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미래 태양국의 수도를 미리 설계해서 준비해 나가도록 하는 업체이다. 그를 위해 사쓰미 반도 끝 쪽 바다 속에 대규모 해저시설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그러나 정일두는 요즈음 큰 고민이 있었다. 즉, 일본 극우 쪽에서 정일두에게 거리를 두려 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2


해선은 지금까지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한데 모아 다시 한번 주욱 살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진희와 김 전무가 벤츠 앞좌석에 나란히 앉은 사진이다. 회사가 아닌 엉뚱하고도 으슥한 곳에서, 그것도 야밤에. 주차장 주변의 가로등 덕분에 앞 유리창을 통해 두 사람이 여러 형태로 바짝 붙어 비비는 모습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사진뿐만 아니라 동영상에서도. 그리고 또 하나, 205호 남자의 렉서스 차 번호.

벤츠 사진이 불륜의 현장이라면, 렉서스 사진에서는 어딘지 비밀스런 냄새가 난다. 음모처럼.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해선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벤츠 사진이 더 중요하다. 그것으로 그 둘 사이를 추궁하면 해선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해선은 자꾸만 렉서스 사진으로 마음이 가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제는 호텔 직원이 아니라 비밀요원으로 직업을 바꾸어야 하려나 보다.

해선은 통장의 액수가 자꾸 줄어드는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남자들이 막노동하듯이 해선도 행사장 찾아다니며 치어리더 같은 일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어학 실력을 충분히 갖고 있으니 당분간은 그쪽 일을 더 찾아보는 게 옳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도 저도 안 되면 막장처럼 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좀더 기다려 보자고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어찌 보면 앞으로도 다시 올 수 없는 한가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때에 호기심을 충족시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속담이 늘 마음을 찜찜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그것은 고양이에 대한 것이고, 나는 사람이야 하면서 해선은 스스로를 달랬다.

그런데 해선으로서는 차 번호만으로는 해볼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경찰에 의뢰하지 않는다면. 그러니 또다시 그 지루하고도 아슬아슬한 일, 즉 남을 뒤쫓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런데 해선은 차가 없다. 어떻게 미행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해선에게 유리한 점은 저쪽에서는 해선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것. 그러나 그 사실이 차가 없는 불리함을 이겨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해선은 오진희의 불륜장면을 사진 찍은 짜릿한 경험이 있었다. 방법은 모르지만, 일단 그 205호의 빌딩으로 가자고 해선은 생각했다. 가서 보면 방법이 생기겠지.

그러나 그 소화불량 아저씨는 사절이다. 그 냄새…….


해선은 지하철에서 내려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집에서 나설 때는 약간의 스릴감이 있어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비록 저녁 무렵이지만 아직 식지 않은 더위 속에서 아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니 처량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할 일은 해야지.

해선은 어제 렉서스가 퇴근한 것보다 한 시간 일찍 그곳에 가고 있었다. 미리 가서 진 치기 위해서. 그런데 어디에서 진을 치지……?

해선은 그 건물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옷가게, 슈퍼, 학원, 병원, 마트, 식당, 주유소, 제과점, 교회 등등. 그중에서 어디에 가서 진을 칠까 둘러본 것이다. 해선은 그중 몇몇 군데를 점찍어 두고서 그 건물로 갔다.

건물 가까이로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응? 그럴 리가 없는데? 해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 그리고 아직도 뜨거운 바람. 그것밖에 없는데 무슨 냄새?

아, 맞아, 그 화장실!

해선은 그 건물로 다가가면서 걱정이 앞섰다. 벌써 그 트라우마가 머릿속을 지배하는 모양이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화장실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해선은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사실은 걱정이다. 어떠한 식으로든 그 소화불량을 다시 만나게 될까 봐.

해선은 마음이 조마조마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옆으로는 올라가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이 지나간다. 해선이 계단을 다 올라 이층 복도로 막 발을 올리려 하는데 눈앞에서 로켓이 지나간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어제 그 소화불량!

안 돼!

해선은 얼른 돌아서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해선의 뒤통수로 어제 그 냄새가 쫓아오는 것 같았다.

건물 밖으로 나온 해선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건물 전체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거대한 똥 덩어리가 땅에서 솟아오른 것 같았다. 그 순간 205호 사무실은 고역이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좀 일찍 퇴근하겠지……? 물론 아직 나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여전히 궁금한 것은 그 사무실에 어제 그 한 사람밖에 없는지 하는 점이다. 뭐 그래도 그 사람 얼굴을 아니까 다행이다. 차도 알고.

해선은 건물 옆으로 돌아 주차장으로 가보았다. 단번에 어제 그 렉서스가 눈에 띄었다.

휴, 다행이다.

해선은 이층으로 올라가서 괜히 냄새나 맡지 말고 여기 주차장에서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아냐, 거기에서 어정거리다가 렉서스와 얼굴을 마주치면 안 된다. 차라리 주차장 입구가 보이는 어디에 가서 기다리자. 아까 점 찍어둔 곳이 몇 군데 있으니까.

해선이 미리 골라놓은 일층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커피를 한 잔 시켜 들고서 창가로 가서 앉는데……, 어?

그 건물에서 205호가 나온다.

해선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카메라 가방을 들고 돌아서려다 뒤돌아보았다. 아까운 커피. 오랜만에 큰마음 먹고 커피 중에서도 제일 비싼 거 시켰는데. 해선은 커피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 가지고 나가려고 몸을 돌리다가, 아차, 카메라. 커피를 손에 들고 있으면 어떻게 사진을 찍어? 해선은 다시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이키는데 또다시 아까운 커피 생각. 그래서 다시 몸을 돌려 커피를 들고 얼른 한 모금 입에 쏟아부었다가, 앗 뜨거!

에베베베베…….

어떡해? 혀를 데었어…….

해선은 스타벅스를 뛰쳐나갔다. 그 건물 옆 골목으로 렉서스가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쫓아가지?

해선은 카메라를 손에 들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렉서스에 들이대지도 못했다. 하긴 어제 찍은 것이 있으니까 상관없지만. 그래도 손에 든 카메라가 괜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아까운 것은 지금 저 사람이 지나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였다. 아깝다기보다는 아쉬운 마음이겠지만.

해선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저쪽에서 빈 택시가 다가온다.

에라, 모르겠다.

해선은 택시를 세우고 올라탔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저 앞에 막 돌아서 나가는 하얀색 렉서스 좀 따라가 주세요. 중요한 일이라서요.”

이렇게 말하면서 해선은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그러고 나니까 해선은 자신이 정말로 비밀요원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그보다는 기자처럼. 그리고……, 좀 쑥스러워졌다.



3


렉서스가 멈춰선 곳은 서울 동쪽의 경계선에서 조금 벗어난 미사대교 아래의 넓은 공원 근처였다. 근처에는 축구장과 야구장, 숲 체험관 등등이 있는 드넓은 휴식 공간.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심신을 달래기 위해 자주 찾는 곳. 게다가 지금은 저녁 무렵이어서 한낮의 더위에서 벗어나 산책하고 싶을 때 발걸음이 저절로 향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고약하게도 렉서스는 주차장도 아닌 곳까지 무단으로 들어가서 선 것이다.

정말 고약한 인간이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게다가 205호가 해선에게 신용카드로 거금의 택시비를 내게 한 것까지 생각나서 그 인간이 더욱 고약하게 느껴졌다. 그 바람에 해선은 205호를 아주 철저히 감시하자는 결의를 확실히 굳혔다. 대체 저곳에 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해선은 이번에는 택시비 아까운 것은 싹 잊어버리고 입을 굳게 다물고서 렉서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른 사람과 접선해도 잘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해선에게는 망원렌즈가 있었다.

해선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대해서 스스로를 칭찬했다.

택시는 돌아가고 해선 혼자만 남았다. 아니, 사실은 주변에 여러 사람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 중 일부는 해선처럼 망원렌즈를 들고서 여기저기를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저 사람들 모두 비밀요원이야?”

해선은 어이가 없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살펴보니 사진작가들 같았다. 서울의 해질녘과 야경 사진, 새 떼들 사진, 또 한강다리의 화려한 조명을 렌즈에 담기 위해 이리저리 장소를 옮기는 사람들 등등. 그러고 보니 해선도 저들처럼 사진작가가 되어 있는 셈이다.

이렇게 좋을 수가…….

해선은 마음껏 셔터를 눌러댔다. 망원렌즈에 잡히는 각종 영상들. 무조건 찍었다. 205호 사진은 몇 장 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해선은 사진작가가 되어 한강의 황혼을 질리도록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해선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도 잠시 잊어버리고 한강 쪽으로 가서 혹시 더 찍을 만한 것은 없는지 둘러보았다.

앗, 저거다!

왜가리 한 마리가 황혼 빛을 받아가며 강가에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다. 새하얀 깃털 몸에 석양이 비쳐 은은한 핑크빛이 감돈다. 마치 홍학처럼.

왜가리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정말 멋진 모습으로 착륙했다. 우와!

그러더니 해선의 감탄에는 아랑곳없이 천천히 걸어간다. 둔치 아래쪽 시커먼 물과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검은 두 다리로 성큼성큼. 주황색 주둥이는 지는 해의 붉은 광선을 받아 더욱 붉어 보였다. 가는 꺽다리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커다란 몸집을 지탱해 가며 걷는다. 저런 가는 다리로 어떻게 저렇게 큰 몸집을 받칠 수 있을까 의문이다. 다리가 불쌍해진다. 적어도 내 팔뚝 정도는 되야 하는 거 아냐?

해선은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본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팔뚝은 가늘어 보였다.

“내 팔이나 왜가리 다리나…….”

해선은 렉서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다시 왜가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들이밀고 찍어댔다. 이번에는 특히 동영상으로.

왜가리는 그 가는 다리로 겅중겅중 걸으며 물가의 무엇인가를 찾는다. 그리고 가끔 긴 목을 내려뜨려 콕콕 쪼아댄다. 어두워 가는 강가에서 먹을 것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하늘길 잃지 말고 일찍 돌아가서 잠이나 쟈야 하는 거 아냐? 해선은 괜히 걱정스러워진다. 저 정도 몸집이면 먹는 양도 무척 많을 텐데, 그 양식 또 어떻게 다 구한담?

하긴 두루미나 학과 같은 종류는 아주 적게 먹는 덕에 오래오래 산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실제로는 엄청 먹는단다. 커다란 물고기를 한입에 꿀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눈처럼 새하얀 깃털을 보고 사람들은 ‘순수’라는 의미를 부여한 모양이다. 순수는 마치 밥도 안 먹고 똥도 안 싸고 고고하게 앉아 있기만 하는 것으로 이미지를 강제 설정해 놓고, 남이야 배고프건 말건 평생 그렇게 살도록 몰고 간 것이겠지. 옛 선비들은 시냇가에 앉아 기생 끼고 술판 거나하게 벌이면서 부어라 마셔라 난장판 속에서 고고한 시조 한 수 뽑으며 멋을 냈겠지만, 아마 평생 살면서 학이나 백로 한 번 못 봤을지도 모른다. 상상으로 그림 그리고 상상으로 노래하며 자신은 지키지도 못할 고고함을 남들한테 강요하다 못해 새들한테까지도 강제하며 멋을 냈겠지.

그런데 헷갈리는 것은 옛 선비들이 고고의 상징으로 손꼽는 학이나 백로와 왜가리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혹 글자 수가 적을수록 고고해지는 것일까?

해, 달, 흙, 꽃, 땅, 물, 샘……, 이런 것들이 어딘지 속세와는 다른 세상의 것들 같기도 하고.

어떤 자료를 보면 학은 두루미라고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똥도 한 글자잖아.

해선은 피식 웃었다.

참, 학(두루미)은 머리 위가 빨갛다고 한다. 그리고 목과 날개 끝이 검은색이다.

백로는 글자 그대로 온몸이 희다. 백로라는 이름답다. 그리고 목이 너무 길어서 항상 S자로 구부리고 있다. 날아갈 때도 목을 구부린다.

반면에 왜가리는 눈에 검은 띠 모양의 깃털이 있다고 한다. 가까이에 가서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학이나 백로보다는 몸집이 많이 작은 듯.

이렇게 학이나 백로나 왜가리를 비교해 보았지만 사진으로 볼 때는 해선의 눈에는 죄다 그게 그거다. 학이나 백로를 실제로 본 기억은 없으니까.



해선은 한강의 황혼에 넋을 빼앗겨 무아지경 근처까지 갔다가 문득 정신이 퍼뜩 드는 것이었다.

아, 렉서스!

해선은 얼른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렉서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해선은 후유 하고 숨을 크게 내쉰 다음 카메라의 방향을 렉서스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잠시 뒤에 렉서스 뒤로 멀찍이 떨어진 채 자동차 한 대가 와서 선다. 이미 해는 거의 다 져서 주위는 어두웠다. 여기저기 가로등과 조명이 켜져 있었지만 그 빛들의 사각지대에 두 차는 서 있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완전히 해가 진 뒤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은밀함을 암시하듯 두 차에서 검은 실루엣이 슬그머니 나온다. 둘 다 남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걸어가서 결국에는 한 지점에서 만났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205호에게서 새로운 남자에게로 건너간다. 꼭 그런 장면을 본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상황을 그려넣고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로 그렇게만 여겨진 것이다. 그렇다면 건네준 물건도 당연히 USB겠지.

그 다음 두 사람은 잠깐 마주 보고 서 있더니 이내 돌아선다. 악수도 하지 않고. 그 대신 205호가 허리를 살짝 굽히는 것 같았다. 새로 나타난 사람은 무심한 듯 그대로 걸어간다. 자신의 차를 향해.

접선 완료!

와, 영화장면이다. 정말로 저런 장면을 목격하다니! 설마 혹 나중에 그 주머니를 열어보니 외상값 청구서가 들어 있었다고 하는 코미디는 아니겠지? 요즘 세상에 카톡은 물론 이메일도 있고, 편지 보내는 것이 번거롭다면 택배나 총알배송까지 있는데, 옛날 스파이 영화에서나 나오는 저런 장면을 통해 USB를 건넨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저렇게까지 수고를 하면서 전달하는 것일까? 혹 배달사고라도 날까 봐 일부러 직접 전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저 USB에 들어 있는 내용은…….

그 순간 해선은 저도 모르게 몸이 오싹하며 부르르 떨려왔다. 해가 지긴 했지만 아직도 영락없는 삼복더위 한복판의 초저녁 밤에.

어떻든 해선은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고 나서 해선은 뛰었다. 누구 말대로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시원텁텁한 강바람 사이를 뚫고 마구 달렸다.

어두워서 차종을 구별할 수 없는 그 두 번째 차가 후진하며 가다가 적당한 공간을 찾았는지 차를 돌린다. 그리고 조심조심 달려간다. 큰길로 나가려면 아직 거리가 좀 남았다.

해선은 여전히 달렸다. 해선은 젊다. 새파란 나이. 청춘의 나이. 돌이라도 소화시킬 나이.

뛰자!

조금만 가면 큰길 입구다. 시커먼 색의 두 번째 차는 길이 좋지 않은지 속도를 늦추고 조심조심 달린다. 해선은 차와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

드디어 차가 큰길 입구로 들어섰다. 차가 잠시 멈추는 듯했다. 해선은 차도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차가 저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반대쪽 이쪽으로 방향을 확 튼다. 그 바람에 해선은 깜짝 놀라 움찔하고서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차가 해선 앞으로 갑자기 속도를 내서 지나갔다. 그리고 해선은 차 사이드미러에 팔이 살짝 부딪쳤지만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하고 균형을 잃고서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해선은 쓰러지면서도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가서 셔터가 눌러졌다.


흐린날-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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