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ch man’s death diminishes me
1
정일두는 일본 관방장관(官房長官)의 최측근인 고다마 미쓰오에게 전화했다. 고다마는 외형적으로는 정부에 아무런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거의 관방장관의 개인비서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관방장관 뒤의 막강한 실세이다. 관방장관이 현재의 위치에 오른 것도 고다마의 힘이라는 것을 정계에서는 다 알고 있을 정도다. 또한 일본의 관방장관은 총리대신 다음으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으면서 내각 전체를 조정하고, 정부 대변인 역할도 하며 언론에도 많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일본 내각의 얼굴마담인 셈이며, 또 그만큼 영향력도 크다. 집무실이 총리 관저의 5층에 있을 정도이니까.
고다마 미쓰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가끔 있는 일이다. 혹 회의라든가 개인사정이 있을 때는 정일두가 전화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응답을 해온다. 그러나 이날은 정일두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람 뒤통수만 보아도 그 사람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일두는 자신의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정일두는 일본 최극우단체 중 하나인 사쿠라전일협회로부터 대부분의 자금을 지원받고 있었는데, 최근 자금 지급기일이 자꾸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쿠라의 실세이자 고문이 바로 고다마였다.
정일두는 핸드폰을 끄면서 고마다의 회신 전화가 무척 늦어질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렇게 되면 자금회전에 문제가 생긴다. 지금 사쓰미 반도 앞바다의 해저시설이 거의 완공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은 정일두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부스키 일대를 미래의 태양국 행정수도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외부에서는 아무도 알 수 없도록 비밀기지인 해저 태양관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태양관은 일본 정부 인사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을 정도로 극비로 건설되고 있다. 그러나 태양관의 건설이 지연되면 정일두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그로 인해 한국 측 후원자들이 동요하게 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변하게 된다.
정일두는 초조해졌다.
2
동준은 방황했다. 마음이 허해서 방황하기도 하고, 견 회장에게서 도피하기 위해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이 방황이지 현실에서는 방황의 의미가 너무도 크다. 우선 기거할 장소. 동준은 오피스텔에 임시 머물러 있었기에 처음에는 안전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철규가 도망가라고 한 것은 자신의 오피스텔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견 회장이 정말 그 오피스텔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동준이 민기와 철규를 만난 곳과 자신의 오피스텔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일부러 원래 동준이 살던 곳에서 먼 곳의 오피스텔을 얻은 것이다. 지난 12년간으로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는 했지만, 동준에게 아직 앙금이 남아 있는 인간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준은 어디를 가든 늘 조심한다. 가능하면 남에게 튀지 않고 묻히도록.
그러나 이제 경보신호가 발령되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말고도 없다. 숨어야 한다. 이쪽 세계를 동준은 너무도 잘 안다. 아마 일반인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대강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 이상이다. 그들의 정보망은 어떤 국가기관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그리고 그런 일에 동준도 실제로 참여한 적도 있다. 따라서 그들과 상대한다는 것은 곧 파국을 의미한다. 그냥 숨어야 한다. 지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깨끗하게. 그리고 그 기간도 상당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영원할 정도로.
동준은 우선 핸드폰 전원부터 꺼놓았다. 핸드폰이야말로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최악의 도구니까. 이제부터는 오직 공중전화만 이용해야 한다. 그것도 견 회장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을 인물하고만.
정말 우습게 되었다. 교도소 생활 12년 동안에도 아무하고나 자유롭게 대화하던 동준이 바깥의 너르고 자유로운 세상에 나와서 도피해야 한다니. 그러나 그것이 인생이다. 세상 이치 터득한 사람처럼 말하면.
어디로 갈까? 서울에서 벗어난다? 제주도에라도 갈까? 지리산 계곡에 묻혀 살아?
동준은 갑자기 담배 생각이 났다. 교도소 생활 중에 끊은 담배. 에잇, 그 쓴 담배나 한 대 태워야겠다. 내 꼴불견 인생 태워버리듯.
동준은 어디에서 담배를 파는지 둘러보았다. 아무 가게나 불쑥 들어갈 수도 없고. 요즘에는 무슨 물건 하나 사는 데도 복잡하다. 아무거나 다 파는 가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살펴보다 결국 담배를 한 갑 샀다. 마치 대마초 사는 듯이 눈치가 보인다. 세상이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젠장.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동준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더듬었다. 어라? 라이터가 없네. 성냥도…….
동준은 또다시 투덜거리며 가게로 들어가서 라이터 하나를 샀다. 거 참, 사람 되게 귀찮게 만드네.
동준은 가게 안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라이터를 탁 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젠장. 동준은 라이터 불을 얼른 끄고서 구시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아이고, 더러워. 담배 한 대 마음대로 못 피우는 세상, 참! 에잇, 퉷……. 하려다가 또다시 주위를 살펴보니 눈이 수십 개.
진짜 아이고…….
동준은 마음속으로 퉷퉷퉷 하고서 보란 듯이 라이트를 탁 켜고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는데…….
우웩! 입에 물었던 담배를 얼른 빼냈다. 무슨 담배가 이렇게 써? 뭐야, 이거? 제일 비싼 양담배를 샀는데, 맛이 왜 이런 거야? 아예 담배 피우지 말라고 일부러 쓴 것만 꾹꾹 눌러채운 거야, 뭐야?
동준은 두 손가락으로 잡은 담배를 바닥에 확 집어던지려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쳐다본다. 뭐야? 왜들 그러는 거야? 내가 뭐 못할 짓 했어? 아직 던지지 않았다고. 던질 뻔한 거지. 아니, 그냥 시늉만 한 거야. 자 자, 그냥들 가셔. 아무 일도 아니니까. 이것 봐, 내가 담배 손에 들고 쓰레기통 찾아다니잖아. 아니, 서울특별시는 시민들 세금만 받아 처먹고 쓰레기통은 왜 제대로 설치해 놓지 않은 거야? 특별시 맞아? 도대체 나 같은 모범시민이 담배꽁초 하나 마음 놓고 버릴 곳이 없잖아……. 투덜투덜.
동준은 하릴없이 길거리를 왔다갔다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냈다. 버튼을 꾹 눌렀는데 아무것도 안 나타난다.
뭐야, 이거? 이젠 핸드폰까지 속 썩여?
버튼을 몇 번 꾹꾹, 꾸욱꾹 눌러보다가 그제야 아예 전원을 꺼놓은 것이 생각났다. 나 참, 나이가 들어가니 별 게 다 생각이 안 나네. 나이 들면 그냥 죽…….
또다시 투덜거리면서 동준은 핸드폰 전원을 켰다.
바로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어르신.
갑자기 ‘양자’라는 단어가 동준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네, 접니다. 어르신.”
3
동준은 정말 고민이 되었다. 이런 것은 사실 부부 사이에도 부탁하면 안 된다. 부자지간에도.
부자지간……?
또다시 동준의 머릿속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쳐 가는 단어. ‘양자.’
동준은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크게 쉬면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한숨 쉬는 게 상대방에 보이지 않게 조심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말씀대로 하죠.”
이렇게 해서 동준은 제 발로 경찰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담당형사 앞으로 가서 지문 찍고, 전과 조회하는 거 지켜보고, 야단맞고, 자술서 쓰고, 피해자와 합의 보겠다고 약속하고, 피해자와 통화도 하고, 치료비 전액 물어주고 위자료까지 주기로 하고, 훈계 듣고, 형사한테 서류철로 머리통 얻어맞을 뻔하고, 또다시 공자님 같은 말씀 듣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고, 피해자와 다시 전화를 해서 요구하는 금액을 듣고 놀라자빠지고, 결국 경찰서 복도로 나가 핸드폰을 손으로 가리고서 소곤소곤 말하듯 어르신에게 금액과 동준의 통장번호 불러주고, 핸드폰으로 동준 통장의 돈을 (눈물 날 정도로 아깝게도) 피해자 통장으로 보내주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형사와 피해자가 대화 나누는 것 지켜보고 엿듣고 한 끝에 간신히 경찰서를 나설 수 있었다. 상대방 피해자는 합의서를 써서 사진 찍어 핸드폰으로 동준에게 보냈지만, 어르신이 그 피해자를 직접 만나서 합의서를 받아오라고 하는 바람에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직접 만나서 서류를 받겠노라고 말을 했다.
그런 뒤 동준은 또다시 투덜거리며 피해자와 만나기로 한 커피숍으로 가고 있었다.
거 참, 뺑소니라니…….
아니, 어르신처럼 명망 높으신 분이 뺑소니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동준처럼 막 나가는 인생이면 몰라도.
뭐 어차피 그어진 빨간 줄 한 번 더 그어진들 덧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동준으로서는 억울하긴 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대신 어르신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양자’라는 단어가 다른 때보다도 아주아주 약간만이지만 살짝이나마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준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에비, 얼른 꺼져…….
동준은 만나기로 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핸드폰으로 전화하니 저쪽 깊숙한 곳에서 여자가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다.
동준은 그쪽으로 가서 쭈뼛거리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앳되게 보이는 여자였다. 20대 초반 간신히 넘긴 듯한 느낌. 겉보기보다는 나이가 한둘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대 중반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다.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종이 한 장을 내민다.
동준이 종이를 받아들고 핸드폰 사진과 비교해 보았다. 동일했다. 동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바로 여자가 일어선다.
“아, 잠깐만요…….” 동준은 이렇게 말하면서 합의서의 이름을 보았다. “해선 씨……, 아니 장해선 씨.”
여자가 몸을 멈칫하면서 일어선 채 내려다본다.
“차는 한 잔 하고 가셔야죠.”
동준은 얼른 카운터 쪽을 돌아다보며 손을 들고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여자를 향해서 말을 했다.
“어디 좀 봅시다. 어디를 얼마나 다친 겁니까?”
이거 왜 이래? 하는 듯한 여자의 눈빛. 생긴 건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와, 겉보기하고는 영 다르네. 완전 날도둑일세.
“난 팔이 왕창 부러진 줄 알았수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한 걸음 내딛으려 한다.
“아니, 잠깐만요. 피해금액 다 보내줬는데 그럼 다친 데 확인이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뇨? 그게 우리네 인정 아닌갑쇼? 뭐 얼굴 좀 반반한 것 보아하니 사기 칠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뭐예욧? 여자의 마음속 말이 들리는 듯했다.
“아, 그 정도 다친 것에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진단서 끊어준 병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해서요…….”
여자가 노려본다.
“그 병원 고소할 생각인데…….” 동준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환자가 무슨 죄 있겠습니까? 그런 진단을 내린 의사가 문제지. 도둑이지. 개……이지. 안 그래요?”
동준이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다방 종업원이 와서 서 있었다. 말다툼하는 데 끼어들지 않으려고 그랬는지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여기서 제일 비싼 차 두 잔 주세요. 이 아가씨가 낼 거니까 얼른 가져다줘요.”
종업원은 신이 났는지, 아니면 제일 비싼 거 취소하고 다른 것으로 다시 주문할까 걱정되었는지 얼른 돌아서서 쌩하고 가버린다.
“앉으세요. 나도 댁처럼 벌떡 일어나서 그 의사 새끼 도둑 중에서도 왕도둑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쳐도 괜찮겠어요? 어서 앉아요. 실은 그쪽이 피해자가 아니라, 내가 피해자요, 안 그래요? 남의 피 같은 돈…….”
돈 소리에 여자의 얼굴이 약간 움찔하는 것 같았다. 여자가 입을 꼭 다물고 있더니 몸을 돌이켜서 의자로 다가가서 천천히 앉는다. 그리고는 다리를 꼬고서 동준 너머 저쪽 어디께를 바라본다.
동준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돈 이야기를 하고 보니 동준 자신의 돈은 아니지만 정말 아까웠다. 그 돈을 자기에게나 주지…….
동준은 갑자기 풀이 푹 죽었다. 여자도 말없이 동준의 어깨 너머 어딘가로 눈길을 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비싼 차가 나왔다. 금액이 얼마일지는 몰라도, 이깟 조그만 차 한 잔에 또 얼마나 받아 처먹으려나. 온 세상이 그저 돈, 돈이다. 돈 도둑들.
동준은 갑자기 고개를 푹 떨궜다.
동준은 잠시 그대로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까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여자의 눈이 참 깊어 보인다.
동준은 여자에게서 눈을 내리고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여자가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뒤지는 것 같았다.
동준은 별 관심 없었지만 그냥 올려다보았다.
여자가 편지봉투 같은 것을 하나 가방에서 꺼내어 동준에게 내민다. 제법 두툼하다. 가만 보니 은행 봉투 같았다.
동준은 여자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봉투로 눈을 돌렸다.
여자가 봉투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동준은 어깨는 약간 숙인 채 그대로 봉투 뚜껑을 슬쩍 열어보았다. 5만 원 권 지폐가 차곡히 들어 있었다. 뭐야, 벌써 은행에서 찾은 거야?
동준은 고개를 들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눈을 피한다. 그리고 일어나려 한다.
동준이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여자가 움찔한다.
“앉아요.”
여자는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그대로 멈춰 있다. 동준 역시 여자의 손목을 잡은 채 그대로였고.
동준이 그 상태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여자가 손목을 비튼다. 동준은 손을 놔주었다.
“저, 말예요……. 아직 세상물정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전화번호 알려주는 거 아녜요. 그러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그런 다음 동준은 여자에게서 눈을 돌리고 기어들어가듯 말을 했다.
“이건……, 고맙수다.”
4
여자가 커피숍에서 나간 뒤 동준이 봉투를 살짝 열고 세어보니 금액이 꽤 되었다. 게다가 찻값까지 내고 갔다.
아주 막 나가는 여자는 아니네, 뭐.
동준은 기분이 좋았다.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해서 살 길이 생긴단 말이야.
동준은 천천히 일어나서 커피숍을 나갔다.
어디로 갈까? 원래대로라면 곧장 어르신에게 가서 합의서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당장 그리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씁쓰름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다. 다른 사람 뺑소니를 대신 뒤집어썼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겠지. 아버지나 아들이나 이렇게 그 노인네에게 봉사나 하다 마는 것인가……?
젠장!
동준은 마음이 허했다. 어디 달래줄 곳이라도 있나 생각해 보았지만 이 세상 어디에서도 자신을 받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 마음이 힘들 때 위로받을 곳 하나 없이 살아왔으니.
갑자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평생 남 뒷바라지나 하고 아들은 별로 챙겨주지 않은 선친. 사실은 동준 스스로가 빗나갔지만, 그래도 아버지라면 아들을 제대로 이끌어줄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 아버지는 사실 아들을 방관했다고도 할 수 있다. 친구와의 의리만 중시했지 아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무심했던 양반. 물론 아버지는 호인이었다. 아들의 일에 일일이 간섭하려 하지 않고 믿고서 두고보는 성격이었다. 방치에 가깝긴 했지만.
동준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며 걸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친구도 없고, 부모도 형제도 없다.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안 된다. 그렇다고 어디 취직할 데도 없다. 어쩌면 평생 이렇게 건달처럼 살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중에도 한 가지 희미하나마 희망이라면 어르신밖에 없다. 그분 마음 거스르지 않고 잘 따라준다면 혹 부친이 그분에게 베푼 것 일부나마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부친이 동준에게 남긴 유산 아닐까.
동준은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고 어르신 저택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동준은 어르신 댁으로 가서 합의서를 내밀었다.
어르신도 핸드폰으로 받은 사진과 합의서를 비교해 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너한테 이런 일 떠넘겨서 미안하다. 내 너한테 큰 신세를 졌다. 앞으로 섭섭하지 않게 해줄 테니 걱정 말거라. 오늘은 우선 집에 돌아가서 쉬고, 며칠 있다가 내가 다시 연락하마.”
동준은 어르신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인 다음 서재에서 나왔다. 그리고 저택을 나서면서 아차 싶어서 핸드폰을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핸드폰 전원을 아직도 켜놓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서 가서 자술서 쓰고 그 여자와 연락하느라 켜놓은 다음 그만 깜박 잊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런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다행이다.
동준은 얼른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그와 동시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좌악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 견 회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했다. 동준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떻게 어떻게 되겠지.
자, 그런데 문제는 동준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독도 건도 끝났고, 어르신이 저지른 일도 마무리됐고……, 뭐 또 끝난 거 없을까? 아니, 새로 시작할 일 없을까……?
그런데……, 아니 어르신은 왜 새파란 애를 치고 다니고 그러는 거야? 미사대교? 그런 다리도 있었어? 밤중에 그런 데는 왜 갔대? 천주교 순교지와 관계있는 곳인가? 하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은 남고 할 일은 없어서 동준은 터덜터덜 걸어서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하철 노선도를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가볼까 궁리했다. 그러다가 미사대교가 생각나서 도대체 한강에 다리가 몇 개인지 알아보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어 잠시 전원을 켜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총 31개. 서해와 가까운 하류에서 시작하면 그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일산대교, 김포대교, 신행주대교, 방화대교, 마곡(철교), 가양대교, 성산대교, 양화대교, 당산(철교), 서강대교, 마포대교, 원효대교, 한강(철교), 노량대교, 한강대교, 동작대교, 반포대교, 잠수교, 한남대교, 동호대교, 성수대교, 영동대교, 청담대교, 잠실대교, 잠실(철교), 올림픽대교, 천호대교, 광진교, 강동대교, 미사대교, 팔당대교.
이 중에서 철교는 넷, 일반 다리는 스물일곱. 모두 대교이고 둘만 그냥 ‘교’이다. 잠수교와 광진교. 기왕이면 이것들도 대교라고 하지 않고? 뭐 내다버린 자식인가?
한 자료를 참조해 보았더니 잠수교의 경우 그 내용을 대강 정리하면 이러하다.
잠수교는 툭하면 물에 잠긴다. 그래서 오히려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잠수교는 유사시 가장 빨리, 또 가장 적은 비용으로 복구할 수 있도록 한강 둔치와 같은 높이로 만들었다. 다리 중간의 교각도 15m여서 다른 다리들에 비해 무척 짧다. 이 때문에 잠수교는 ‘안보교’라고도 불린다. 전쟁이 나서 한강다리가 모두 끊어졌을 때 한강 이북과 이남을 가장 빨리 연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수교는 인공위성에서도 보이지 않는단다. 2층에 해당하는 반포대교가 가려주기 때문에. 잠수교는 1976년 7월에 개통되었다가 한 달 뒤인 1976년 8월 14일 서울에 집중호우가 내릴 때 첫 번째로 잠수를 하게 되었다. 이때 많은 시민이 몰려와서 잠수교가 물에 잠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잠수교는 전쟁 등으로 한강다리가 무너졌을 때 가장 빨리 복구할 수 있도록 낮게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뭐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내용이군. 아니야, 사실은 중요한 다리일 수 있어. 잠수교, 허투루 보면 안 되겠는걸.
그건 그렇고, 한강에는 참 다리도 많다. 이렇게 다리가 많은데도 길은 늘 막히니 몇십 년 지나면 아예 한강을 다리로 도배해 버릴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동준은 핸드폰 전원 끄는 것은 잊지 않았다.
동준은 어찌어찌하다 보니 7호선을 타게 되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상봉역에서 내려 경의중앙선으로 갈아탔다. 전철은 한없이 달려갔다. 역마다 서서 사람들은 내리고 타고, 또 다음 역으로 가면 또 다른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이것이 한없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아마 절대로 이 반복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전동차 안에는 어느덧 사람도 별로 없게 되었다. 드문드문 앉아서 졸고, 핸드폰 들여다보고, 멍하니 맞은편 창을 내다보고……. 그러다가 갑자기 덕소역이라는 안내방송이 툭 튀어나왔다. 그전에도 무슨 역, 무슨 역 방송이 나왔겠지만 의식하지 못해서 그런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덕소역이라는 방송이 마치 대형 스피커로 꽝하고 소리치듯 동준의 귀를 울리는 것이었다. 동준은 깜짝 놀랐다.
동준은 벌떡 일어났다. 운명이 부르는 소리. 내리지 않으면 누구한테 혼날 것 같은 느낌.
에이, 너무 오버했다. 그냥 내리면 되지 뭐가 그렇게 요란하냐…….
동준이 덕소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니 그 길이 덕소로2번길이란다. 저 앞에 보이는 것이 미사대교. 서울양양고속도로와 연결된다고 한다. 동준이 덕소로2번길을 따라 미사대교 쪽으로 걸어가니 무슨 자동차공업사가 나온다. 그 공업사 앞을 지나가는데 막 택시 하나가 그곳에서 나온다. 동준이 손을 들어 택시를 세우고 다리를 건너가서 공원에 세워달라고 했다. 운전기사가 공원 어디쯤이냐고 묻는다. 동준은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모른다.
“그냥 아무데나 세워주세요.”
택시는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드디어 미사대교로 올라섰다.
한강. 참으로 경치가 좋았다. 탁 트인 강. 경치. 마음이 시원해진다. 다른 때도 늘 지나는 한강다리였지만 이번에는 특히 감상이 달랐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택시는 금세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램프로 나가서 정말로 아무데나 가서 동준을 내려주었다. 동준이 한강 쪽을 바라보니 축구장도 있었고, 야구장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와, 야구장이 좀 작기는 하지만 무려 다섯 개나 있는 것이다. 아니, 축구장도 세 개네. 대~단하다!
동준이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세상이 천지개벽한 것이다.
하긴 나 같은 쓰레기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도와주는 거지.
쳇!
동준은 앞에 있는 조그만 돌을 발로 힘껏 찼다. 돌이 멋지게 날아간다. 기가 막히게 알맞은 각도로 찼는지 멀리까지 간다. 돌이 탁 하고 풀밭에 떨어졌다. 그리고 돌이 떨어진 곳 옆에 마침 서 있던 여자가 깜짝 놀라 피하면서 뒤를 돌아다본다.
뭐야, 저 여자? 왜 여기에 와 있어?
5
동준은 여자와 마주앉아 있었다. 조그만 커피점. 오늘 두 번째다. 얼굴 보는 것만. 아침부터 그 여자 때문에 시달렸다. 그런데 또 만나다니. 서울특별시가 좁은 거냐, 특별시라서 인연이 특별히 깊은 거냐?
“궁금한 게 많습니다.”
서로 말없이 외면하듯 다른 데 바라보다가 동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그래요.”
“네? 뭐가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뭘 솔직? 동준은 가슴이 조금 덜컹했다. 혹시 이 여자가 운전한 사람 얼굴을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빤히 동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뭘 봐?
동준은 한마디 하려다 참았다.
“말해 봐요.”
여자는 옆자리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낸다. 와, 대단한 카메라다. 망원렌즈까지 있는 것 같았다. 사진작가? 기자?
동준은 괜히 마음이 졸리면서도 궁금해진다.
그러나 여자는 말을 하지 않고 동준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그 눈은 산전수전 다 겪은 동준으로서도 읽기 힘들었다. 요것 봐라…….
“그쪽이 먼저 말해 보세요.” 여자가 입을 열었다.
“뭘 말해요?”
“여긴 왜 다시 오셨어요?”
“다시 오다니, 내가 언제……?”
동준은 아차 싶어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여자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동준의 마음이 졸아들었다. 여기 괜히 왔어…….
동준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여자는 카메라 화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것저것 찾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몇몇 장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하, 이것 참…….
여자는 야릇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더니 가방을 뒤적인다. 그리고는 볼펜 하나를 꺼낸다. 평범한 볼펜.
여자는 그 볼펜을 동준에게 건네준다. 동준은 얼떨결에 받고 말았다.
“그거 찾으러 오셨어요?”
? ? ?
동준은 볼펜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New Rainbow Hotel’이라는 상호가 인쇄된 흔한 판촉용 볼펜. 이게 뭐지? 동준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아, 이거? 어디에 떨어졌나 했네. 아니, 그런데 이거 어디서 주웠습니까?”
여자가 동준을 빤히 쳐다본다. 이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네. 동준으로서는 그날 밤 상황을 전혀 모르니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어르신이 이런 호텔에도 가나? 하긴 이런 판촉물 볼펜은 여기저기에서 다 주는 거니까.
- 뭐 별일은 아니고, 내가 바람 좀 쐬려고 강가에 나갔다가 차를 돌려 나오는데 백미러에 어떤 여자가 살짝 닿았던 모양이야. 누군가가 옆에서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 난 전혀 의식하지 못했거든. 내 생각엔 거의 다치지도 않았을 거야. 괜히 트집 잡는 것 같은데, 자네가 알아서 해줘. 일 크게 벌이지 말고 그냥 무마시켜. 시끄러워지면 우습게 되니까.
어르신은 이 이상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동준으로서도 그 이상은 알고 싶지 않았고. 그냥 경찰서 가서 조서 쓰고 벌금 내고 피해자 요구 들어주면 그뿐이다. 벌점도 왕창 받겠지만 당분간 차 안 가지고 다니면 된다. 돈도 동준 거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내가 어쩌자고 이곳까지 와서 이 고생이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날 밤?
그건 그렇고 요게 지금 나 가지고 놀겠다는 건가……?
동준은 갑자기 여자가 괘씸해졌다.
“여기에는 왜 왔습니까? 병원 가서 치료받고 누워 있어야 되는 거 아녜요? 진단서 보면 엄청 중병이더만. 꾀병이었습니까? 내가 당한 거예요? 그것도 불법인 거 몰라요? 요즘 그런 사람 많아서 다 잡아내고 있어요.”
“신고하세요.”
“좋습니다.”
동준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연하지……. 꺼놨으니까.
동준은 여자에게 화면이 안 보이도록 핸드폰을 높이 들고 번호를 누르는 척했다. 그러다가 전화를 탁 끊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내리고 여자를 노려보고 말했다.
“이것 봐요, 지금 뭐하는 겁니까?”
그러나 여자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빤히 동준을 쳐다본다.
동준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나를 계속 그렇게 쳐다보는데, 내 나이 몇인 줄 알아? 옛날 같으면 우리 부녀지간 나이라고. 옛날엔 열두어 살이면 시집가고 장가갔어. 그쪽 아무리 봐도 스물 중간은 넘지 않았는데, 내 나이 꺾은 여든이라고. 우리 나이 차가 얼마나 나는 줄 알아? 못 돼도 열다섯 이상이야. 알았어? 니 애비뻘이라고.”
그러나 여전히 여자는 동준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동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후회하게 될 거야. 이거 완전히 꽃뱀에게 당했네.”
동준은 몸을 홱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