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I am involved in mankind
1
정일두는 사쿠라전일협회(さくら[櫻]全日協會)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고마다 미쓰오를 찾았다. 전화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름을 밝혔다. 정일두의 일본 이름으로. 히노토 이치두. 하지만 대답은 차가웠다. 요즘 그곳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뒤에 정일두는 몇 가지 물었지만 대답은 한 가지였다. 모른다.
정일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막대한 자금을 대주어 해저 비밀시설 태양관이 거의 완공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머뭇거린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설은 설사 삼국동맹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일본으로서는 아주 귀중한 비밀 해저요새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거의 완공단계에서 포기한다면 그동안 투입된 자금과 노력이 아깝지 않은가 말이다. 천문학적인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갔는데. 또한 그 시설은 자위대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비밀군사기지로도 활용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사실 정일두는 얼마 전부터 마음이 께름칙한 정보를 하나 듣기는 했었다. 그러나 삼국동맹이 추진 중에 있는데, 그것에 방해되는 일을 일본이 동시에 진행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가능성 없는 헛소문일 뿐이라고 여겨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계획이 망가진다면 멍하니 보고 있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일두는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 채널을 가동시키기로 했다.
2
해선은 카메라에 찍힌, 렉서스와 제네시스가 만나는 장면을 다시 살펴보았다. 렉서스의 205호가 먼저 미사대교 아래에서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 제네시스가 나타나서 한 사람이 차에서 나왔다. 그는 틀림없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서 중간지점쯤에서 만났다. 그 제네시스 남자. 아무리 보아도 젊은 사람은 아니다. 조명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 그것도 멀리에서 찍혀서 얼굴은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몸 전체는 알아볼 수 있다. 서동준과는 체형이 완연히 다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 제네시스의 몸매는 아무리 봐도 젊은이의 그것은 아니었다. 청년과 중년과 노년의 몸매는 어딘지 다르다. 남장 여자가 여자와 달라 보이고, 여장 남자가 아무래도 남자와 다르게 보이듯 중년의 남자와 노년의 남자는 느낌이 다른 것이다. 제네시스 남자가 렉서스 남자보다 키가 훨씬 큰 것을 보면 서동준과 비슷해 보이긴 했지만,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어딘지 어색했다. 게다가 걷는 자세도 달랐다. 제네시스가 걷는 동작은 어딘지 무게감 있고 진중해 보였다. 젊은 사람 걸음걸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준은 달랐다. 아주 나쁘게 말하면 건들거리고, 막 돼먹었다고 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다소 진중하지 못한 걸음걸이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러나 확실히 장담은 못하겠다. 사진은 사진일 뿐이니까.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 서동준은 해선이 내민 볼펜을 받고서 횡설수설해 댔다. 그 볼펜은 205호와 제네시스 두 사람이 만난 곳에서 주운 것이 아니다. 해선이 다니던 호텔 로비나 리셉션 라운지에는 널려 있는 것이 그 볼펜이고, 해선의 집에서도 여러 개가 굴러다닌다. 그중 하나를 해선이 가방에 넣고 다니던 것이었다. 해선은 서동준과 대화하던 중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그 볼펜을 불쑥 내밀어 봤었다. 그러자 그 인간이 덥석 문 것이다. 보기 좋게 걸려들었지.
한마디로 서동준은 그 현장에 없었다. 즉, 해선을 친 운전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일의 하나 서동준은 처음부터 운전석에 앉아 있었고, 제네시스 남자는 옆이나 뒤에 앉아 있다가 차에서 내려 205호를 만났다면 이야기가 다르게 된다. 하지만 해선의 카메라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었다. 사진이나 동영상 모두. 제네시스는 분명히 운전석에서 내렸다. 혹 차 안에서 운전석 사람과 조수석 사람이 차 안에서 바꿔 앉아 내렸다면 모를까. 그러나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무엇 하러 그런 짓을 하겠는가? 아무도 보지 않는데. 뭐 나중에 접촉사고 일어날 것을 예상해서 미리 그랬다고 한다면 모르지만, 그런 말은 더욱 이상해지는 것이지.
만일 해선이 이 영상과 사진을 경찰에 제출한다면 재미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해선은 아직 그럴 마음은 없다. 그것보다도 제네시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만 김 전무, 오진희, 205호, 그리고 제네시스로 이어지는 커넥션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으니까. 게다가 이제는 서동준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수상한 점, 즉 제네시스는 해선이 위자료와 치료비를 달라는 대로 다 주었다. 한마디의 협상이나 불평 없이. 사건에 비해 금액이 터무니없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해선은 저쪽의 속을 떠보려고 일부러 금액을 크게 요구했다. 그런데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그렇잖아도 주머니가 아쉬운 처지에 많은 돈을 주는 것은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단 한 번도 협상이나 항의 없이 두 말 않고 준 것이다.
이 모든 것, 어색하다. 서동준이 등장한 것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또 하나 의문스러운 것.
서동준은 왜 그 현장에 나타난 것일까? 무엇을 조사하기 위해서? 아니면 무엇을 감추기 위해서? 게다가 서동준이 마지막에 논점에서 벗어난 말을 뱉어내며 열을 올리다 가버린 것. 그 장면은 완전히 코미디였다. 그런데 서동준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는 짓을 하고 가버린 걸까? 그리고 서동준과 제네시스의 관계는? 단순한 대역?
해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경찰에 신고해 볼까……?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해선의 입술에 악동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3
해선에게는 두 가지 숙제가 생겼다. 오진희에게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것. 또 하나는 제네시스의 정체를 밝히는 것. 이 두 가지 모두 해선에게는 중요하다. 돈과 모험.
“이거 신나는 일 아냐?”
해선의 가슴 속으로 환희가 지나간다.
해선은 인터넷을 뒤져 포토프린터를 하나 샀다. 인화지까지 합해서 거금이 들었다. 피눈물 나는 돈. 그러나 다행히 합의금 받은 것이 있어서 위로가 되었다.
해선은 포토프린터로 시험 삼아 사진을 한 장 뽑았다. 괜찮게 나왔다. 그래서 세 장을 더 뽑아 네 장이 되었다. 오진희와 김 전무가 주차장 차 안에서 수작부리는 장면, 205호와 제네시스가 만나는 장면 각각 두 장씩. 또한 그 두 가지 사진을 핸드폰에도 옮겨두었다.
해선의 계획은 주차장 사진은 오진희와 김 전무에게, 접선 장면은 제네시스와 서동준에게 각각 한 장씩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 뒤에 해선의 통장번호를 적을까?
해선은 그 네 사람이 사진을 받아들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표정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그러면 아마 퓰리처(Pulitzer)상이나 포토제닉(photogenic)상감이 될 것이다.
해선은 한동안 돈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공상을 누리다가 그것도 시들해졌다.
다음에 무엇을 한다? 인터넷으로 취직자리를 끊임없이 찾아보지만, 겨우 한두 사람 뽑는 데도 큰 벼슬이라도 주는 것처럼 유세를 떤다. 임시직이라면서. 싫으면 관두라는 것이지. 또한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올라온 글들을 보면, 막상 이력서를 보낸다 해도 엉뚱한 요구를 하는 곳도 많다고 한다. 그 뭐라더라, 보증금이나 예치금인지 하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기다. 그래서 가능하면 인적 네트웍을 이용하라는 것인데, 이 말은 인맥을 통하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는 이 없는 해선 같은 경우는 아예 취직할 생각을 말라는 뜻이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야간업소나 행사장 같은 곳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혹 외국계 회사로 가는 방법은 없는지 찾아봤더니 사실은 꽤 많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우선 학력 요구가 어마어마했다. 최소한 대학원을 졸업해야 하고, 그것도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야 원서를 낼지 말지 하는 정도가 되는 것이다. 또한 여러 사람에게 알아보니 보통 몇십 대 일의 경쟁이라고 한다. 차라리 취직을 하지 말라고 하지. 그러고 보면 해선이 지난번 그 호텔에 한번에 취직이 된 것은 천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좋은 직장을 날려버렸으니……. 아니, 빼앗겼지.
그렇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든 그 호텔에 다시 들어갈 순 없을 것이다. 오진희를 아무리 들볶는다 해도 불가능하다. 아쉽지만 이것은 진리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것을 만회하는 길은 그 호텔 이상의 직장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해선이 어학실력은 좀 갖췄다 해도 학력이 못 미친다는 것. 외모도 그리 안 빠지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보면 해선 이상의 외모는 차고 넘친다. 게다가 인맥도 없다.
다른 모든 조건보다 가장 중요한 인맥.
벌 받은 것일까? 다른 이들은 취직문 한없이 두드릴 때 해선은 단 한번에 그럴듯한 곳에 들어간 죄. 외모가 뛰어난 오진희도 열 몇 군데 이력서 넣은 끝에 그 호텔에 들어왔다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무엇보다도 큰 것, 불륜의 죄.
해선은 침대에 앉아 있다가 뒤로 벌러덩 누웠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해선은 혹시 이력서 보낸 회사는 아닐까 생각하다가 어쩐지 지금은 받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벨이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잠시 지나자 방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었다. 괜히 전화 안 받았나?
해선은 어쩐지 자신이 초라해진 느낌이 들면서 핸드폰을 켜고 그 모르는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상대방이 받지 않고 끊어진다.
그래, 내가 필요하면 다음에 또 전화하겠지. 맘대로 해라…….
그렇게 생각하고는 침대에서 윗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서 다시 취직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해선은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답답해서 밖으로 나왔다. 집 안에 있어 봐야 인터넷과 씨름하는 일밖에 없다. 그것은 이력이 날 정도로 해봤다. 그래서 무턱대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왜 카메라 가방은 들고 나온 거지?
해선은 스스로에게 물어봤으나 뾰족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겠다. 그럼 누구한테?
웃긴다. 지금 해선은 전화번호를 찾고 있는 척하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미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마도 그 인간 말고 다른 사람은 없는지 찾아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는데 다른 이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하긴 눈에 들어올 사람도 없다. 친구도, 친지도, 친척도,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나 힘은 안 되어도 전화라도 한번 걸어볼까 하고 생각될 만한, ‘친’자가 들어가는 인간이 아무도 없으니까.
이럴 땐 차라리 남이 났다니까.
에잇, 모르겠다.
해선은 전화번호 하나를 꾹 눌렀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 해선의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인데도.
어쭈. 내 번호를 씹어?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닐 텐데…….
해선은 한 번 더 전화를 했다. 그러나 역시 받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문자 보내볼까? 협박성 단어를 슬쩍 곁들여서.
해선은 괜스레 쾌감이 느껴진다. 고양이가 쥐 한 마리를 구석에다 몰아넣고 흐뭇해하는 느낌. 괜히 허풍만 떨다가 나간 대역.
그래, 그 운전사 바꿔치기는 어떻게 종결지을까? 돈 받은 것으로 끝내?
아, 제네시스!
맞아, 그 정체를 밝혀야 되잖아.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서동준을 대역으로 내민 거짓연막을 걷어내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운전사 교체로 신고하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 방법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것은 제네시스에게 망신 줄 수는 있어도 그 정체를 밝히는 일에는 오히려 방해만 될 것 같았다. 차라리 은밀히 캐내는 게 낫겠다. 운전사 교체는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카드니까 일단 숨겨놓고.
해선은 또다시 미사대교로 향했다. 왜 서동준이 그곳에 왔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4
해선은 미사대교 근처, 지난번 서동준과 마주앉았던 그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205호와 제네시스가 만났던 곳과 그 두 차에 서 있었던 곳에 다시 한번 가서 그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혹시 정말로 뭔가 떨어진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지난번에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고, 서동준이 정말로 제네시스인가 하는 생각으로 그곳에 가서 그날 밤 장면들을 연상해 보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동준이 제 발로 그곳에 온 바람에 둘이서 또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지. 하지만 해선이 세 번째 그 현장으로 가서 샅샅이 살펴본 결과 거짓말처럼 뜻밖의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해선이 커피숍에 앉아서 손에 들고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 검은색 비닐 주머니였다. 쓰레기봉투가 아니라, 2단 접이우산을 집어넣는 주머니 말이다. 그것은 제네시스가 주차되었던 곳에 떨어져 있었다.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꼭 제네시스와 연관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해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날 오전에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선이 그 비닐 주머니를 제네시스와 연결시킨 것은 상호 때문이었다. 사실은 상호가 아니라 정당 이름이다. 미래공영당 창당대회. 그 이름이 은색으로 우산 주머니에 인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큰 정당에서 한동안 매우 시끄럽다가 소수파가 떨어져 나와 새로운 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동북아 평화를 위해 새로운 연대가 필요하다나 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위해 무엇무엇을 하겠다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해선은 그런 데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어서 아예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그 정당이 분리되어 나오는 과정이 하도 요란해서 그런지 정당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야 어떻든 그 정당 이름이 인쇄된 비닐 주머니가 다른 곳에서 굴러온 것일 수도 있고, 또 제네시스에서 무엇이 떨어졌다 해도 벌써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선은 그것이 그날 제네시스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제네시스 남자의 풍채가 어딘지 정치와 연결될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해선은 어떤 정치인이 그 실루엣에 어울릴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정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왔던 탓에 도무지 연관시킬 만한 인물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해선은 일단 그 주머니를 사진 찍어 놓고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끊임없이 저들을 추적하다 보니 그 주머니를 발견한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쫓아가다 보면 뭐가 나타나도 나타날 것이다.
해선은 오늘은 여기까지다 하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나섰다. 그런데 실은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몇 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우스웠다. 해선 자신이야말로 사람들을 뒤쫓고 있잖은가. 혹 그 사람들도 해선처럼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보았다.
해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가 자기 일에 빠져 있을 뿐, 아무도 해선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내가 뭐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
해선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5
해선은 다음 단계로 무슨 일을 할까 곰곰 생각해 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정치인일지도 모를 제네시스. 대역인 게 분명한 서동준. 벤츠 안에서 딱 붙은 채 수작 부리는 장면이 포착된 그 두 인간. 그리고 또 한 가지, 즉 205호가 제네시스에게 넘긴 USB.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갑자기 그것이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USB는 김 전무에게서 오진희, 그리고 205호를 거쳐 제네시스에게 전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오진희는 수요일마다 호텔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곳의 일식집으로 가서 김 전무한테서 USB를 건네받았다. 그렇다면 그 일식집 안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김 전무는 그들에게서 USB를 받아 오진희에게 주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 일식집 안에서 어떤 모임이 있었고, 그 결과를 담은 서류가 그 USB에 들어 있을 수도 있다. 낮에 호텔에서 USB를 주어도 될 일을 꼭 그 일식집에서 전해준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다시 초점을 그 두 인간에게 맞춰야 하나?
해선은 갑자기 고민이 되었다.
저녁. 밤이 깊어간다.
해선은 마음이 답답해서 밖에 나가 산책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혹 오진희처럼 왕자님이 차를 가지고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꿈도 야무지다…….
여름밤은 시원하다. 그리고 어쩐지 낭만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낭만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낭만. 아무 거라도 좋으니 낭만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뭐 예를 들면 오진희의 낭만 같은 거라도. 민 선생님과의 그런 거 말고. 하긴 오진희의 낭만도 알고 보면 칩칩한 거지. 그렇지만 어쩐지 오늘밤에는 오진희의 불륜을 낭만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 밤, 종류 불문하고 낭만이여, 나에게 오라…….
어디선가 핸드폰 벨이 울린다.
아, 나에게 다른 이의 전화벨 소리가 들리니 나에게도 낭만의 벨이 울리는 모양이다. 종이 울리듯이.
For whom the bell tolls - John Donne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ach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ner of thine own
Or of thine friend's were.
Each man’s death diminishes me,
For I am involved in mankind.
Therefore, send not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존 던
사람은 단순한 섬이 아니라
그 자체가 완전한 것
우리 모두는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한 부분
만일 흙덩이 하나 바닷물에 씻겨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리니
모래 알갱이도 그와 같으리라
그대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가 그리된다 해도
그 역시 나 자신의 상실이려니
나는 인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지
그러하니 사람을 보내어 묻지 마시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조종(弔鐘)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리니
셰익스피어와 거의 동시대 괴짜 시인 존 던(1572~1631)의 유명한 시. 성공회 신부이자 시인. 해선은 학교 때 배운 그의 시가 꽤 독특해서 항상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서 두 번째 구절이 영화 제목으로도 되어 있어서 더욱 잘 기억되고 있었다.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대해서 문학수업을 할 때 해선이 그 시에 대해 리포트로 써낸 적도 있었다. 그때 성직자이면서도 약간 기행적인 면을 지닌 존 던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구절도 덧붙였던 것이 기억난다.
One short sleepe past, wee wake eternally,
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짧은 잠이 지나가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고
다시는 죽음이 없으리니 죽음아, 너는 죽으리라
이 시는 ‘Death, be not proud(죽음아, 오만하지 말라)’라는 시의 끝부분이다. 당시 이 시의 마지막 구절 ‘thou shalt die’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다. 누구는 기독교적 영생을 의미한다 하고, 또 어느 친구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라고도 했다. 그러나 해선은 그 어느 것에도 동의하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해선은 차라리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이나 생각나지 왜 그렇게 음울한 시를 떠올렸을까 하고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 시야 어떻든 해선은 지금 한여름밤의 시원한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아직 한낮 무더위의 뒤끝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어둠의 공기 속에는 어딘지 낭만도 실리고 꿈도 실려 있는 것 같았다. 남들 뒤쫓을 때 느꼈던 그 여름밤이 아니었다.
해선 자신만의 한여름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낭만이 어딘지 반쪽 같은 느낌이 드는 점. 그러나 그깟 것 무슨 상관 있으랴. 해선 자신이 한여름밤 하늘 잔잔한 별빛 아래 나와 있는데.
그때 아까 전화벨 소리가 들렸던 것이 문득 생각났다.
“아차, 전화벨. 혹 내 전화는 아니겠지……?”
해선은 주머니를 뒤졌다. 핸드폰이 없다. 집에다 놔두고 그냥 나온 것이 기억났다.
벌써 늙어가나? 핸드폰 안 가져온 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해선은 집에서 제법 멀리까지 걸었다.
잘 꾸며진 공원. 이 동네 살면서 딱 한번 이곳에 가봤다. 그것도 비오는 날 우울한 감정으로. 그리고 그 뒤로는 그 공원 생각이 가끔 나서 다시 가보고 싶었으나 마음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해선은 의식을 하지 않았는데도 발걸음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한 것이다.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공원 구석구석에 가로등도 밝게 빛을 내고 있어서 어둡지도 않았다. 혼자 걷는 사람, 뛰는 사람, 벤치나 돌에 앉아 담소하는 사람, 가족이 함께 나와 웃고 재잘거리고, 둘이서 셋이서 다정한 모습, 아이들, 어른들, 강아지들, 입마개를 한 커다란 맹견, 자전거……. 참 보기 좋다. 세상은,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해선은 한여름밤의 낭만에 자신도 포함된 것에 흐뭇해졌다. 진작에 나와 볼걸. 그동안 놓쳤던 낭만들이 괜히 아깝게 느껴졌다.
해선은 공원 뒤로 난 산책길을 한 바퀴 돌아 집으로 가기로 했다.
산책로 옆 산비탈 쪽으로는 쥐똥나무들이 담장처럼 줄을 지어 심겨져 있다. 5월 달에 흰꽃이 무더기로 피면 참 예뻤다. 해선이 자란 서울 근교 야산에도 많이 심겨져 있어서 퍽 정다운 나무다. 그리고 그 산에는 여름이면 꽃창포도 많이 자라고 있었다. 보라색 꽃들. 특히 밤에 보면 아주 신비롭게 느껴졌었다. 그 보라색이.
아, 맞아, 그 보라색. 너무 가슴 뭉클했었어. 그냥 보라색이 아니라 그 꽃창포 보라색 말이야. 보라색 꽃들,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팠었는지. 지금도 그 꽃들 피어 있겠지. 여름이니까. 보고 싶다. 꽃들아, 보라색 꽃들아, 잘 자라, 이 밤…….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여름이면 큰 개울 속에서 팔뚝만 한 붕어들이 노닐었었다. 다 자란 붕어들이 떼를 지어 한곳에 모여 지느러미를 힘차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때가 산란기라고 한다. 어른들은 그러한 때가 낚시하기 가장 좋은 기회라 하고 월척 낚으러 간다며 신이 나서 나가곤 했다. 그러나 어떤 할머니가 그 사람들을 보며 나무랐던 것이 기억난다.
“붕어도 새끼를 낳아야 나중에 잡아먹을 거 아닌감? 냅둬요, 좀. 걔들도 살아야지. 먹을 거 없던 때야 알 낳는 붕어까지 잡아먹는다 하지만, 아 요즘이 굶어죽던 시절이야? 낚시도 좀 작작해…….”
갑자기 떠오르는 어렸을 적 기억들. 그리운 것인가, 어린 시절이? 사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리웠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해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땀이 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데 두 남자가 조깅을 하면서 뒤쫓아와 해선 양쪽으로 흩어져서 지나간다. 아니, 지나가는 줄 알았다.
갑자기 두 남자가 양쪽에서 해선의 팔을 붙잡고 옆 숲으로 끌고 들어간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해선은 소리 지를 수도 없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