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그러하니 사람을 보내어 알려고 하지 마시라

Therefore send not to know

by Rudolf

제12장

Therefore send not to know

그러하니 사람을 보내어 알려고 하지 마시라


1


정일두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해저 태양관 건설은 결국 중단해야 한다. 그 태양관은 단순한 해저기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곳에서 비밀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 정부에서 비밀리에 승인한 실험. 그것은 인체가 수중에서 산소 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으로서, 외국에서 불법으로 일본에 들어와 지하세계를 떠돌다 살인이나 불법 장기적출과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는 외국인들을 붙잡아 어디에도 노출시키지 않고 그 비밀기지로 보내어 실험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들은 일단 수중시설로 보내지면 한동안 치료도 받고 영양도 충분히 섭취하여 몸의 건강상태를 최상으로 만들게 된다. 그 다음 여러 측정기구를 몸에 부착한 채 거대한 수조 속에 집어넣고 익사 직전까지 몸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중에서 최대한 버틸 수 있는 시간을 차츰 늘려가면서 일종의 인공적인 인어를 만들어 나간다. 따라서 이 실험이 외부에 폭로될 경우, 동아시아 삼국동맹 이상으로 국제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일본 정부에서는 이 실험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어놓고, 한국 국적의 정일두가 모든 책임을 맡게 했다. 따라서 만일 더 이상 자금이 제공되지 않으면 정일두는 모든 프로젝트를 묻고 그냥 조용히 이 세상 뒤로 사라지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경우 생명도 위협받게 된다.

정일두는 그동안 아무도 몰래 복제해 놓은 해저 태양관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2


동준은 어르신의 저택으로 찾아갔다. 나름대로는 자신이 아주 중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서 생색내기 위한 것이었다.

동준이 이층 서재의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동준은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어르신이 한 손으로 전화를 든 채 다른 손을 들어올리고 살짝 흔든다. 멈춰서라는 뜻 같기도 하고 문을 닫고 나가라는 뜻 같기도 했다. 동준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몸을 뒤로 물려서 문을 살며시 닫았다.

“…… 알겠소. 그 스웨덴 친구들은…….”

동준이 문을 닫으면서 흘려들은 말.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워낙에 많은 일을 하시는 분이니까.

동준이 문밖에서 멀뚱히 서 있는데 안에서 다시 어험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동준은 순간 망설였다. 들어오라는 것인가?

동준이 살그머니 문을 열자 어르신은 통화가 끝났는지 책상 위에 있는 어떤 서류 파일을 막 펼치고 있었다.

동준은 안으로 들어서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은 동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만 훌훌 넘긴다. 동준은 소파 근처까지 가서 두 손을 모으고 섰다.

어르신이 서류를 다 훑어보았는지 파일을 닫는다. 그러면서 동준을 쳐다보았다.

동준은 얼른 한 발자국 내디디며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책상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볼펜을 내밀었다.

어르신이 볼펜을 한번 쳐다보더니, 받지는 않고 동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동준은 좀 머쓱해져 다시 볼펜을 쑥 내밀었다. 그러나 어르신은 받지 않고 여전히 동준만 바라보고 있었다.

동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거 어제 미사대교에 가서…….”

그러나 어르신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 순간 동준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당했다! 그 여시 같은 년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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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준은 어르신의 저택을 나서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어르신 앞에서 촐싹거린 것이 창피하기도 했고, 여시에게 당한 것이 분하기도 하고,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간단한 함정을 눈치 채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한 것, 혹 여시가 다 알아차렸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만일 그렇다면 일이 커진다. 여시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어르신에게 알려야 하나 마나…….

동준은 여시를 만나 그 마음을 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선 어르신이 부탁한 일부터 처리해야 한다. 서류봉투를 하나 전달해 주어야 하는 일이다.

“마침 잘 왔어. 자네가 일을 하나 해줘야겠네.”

“아, 그럼요. 해드려야죠.”

“음, 봉투를 하나 전해줘야 하는데…….”

어르신은 이렇게 말하며 강남의 어느 빌딩을 알려주면서, 지금 그 빌딩 일층의 커피숍에 가서 기다리면 누군가가 와서 봉투를 받아갈 것이라고 했다. 커피숍 카운터에 가서 동준이 이름을 알려주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르신은 그 말만 하고 다시 전화기를 들어올리면서 동준에게 나가보라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동준은 자기가 한 짓이 있고 해서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저택을 나서서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르신 말대로 택시를 타기 위해 길거리에서 나와서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빈 택시를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다못해 합승이라도 하려고 지나가는 택시 앞으로 뛰어들기도 했으나 클랙슨 욕만 얻어먹고 물러나야 했다.

허 참, 대한민국이 언제 이렇게 변한 거야? 그전에는 택시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나마 그 당시에도 동준은 택시를 거의 타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금방이라도 멈춰설 것 같은 고물 독일 차 타고 다니면서도 늘 폼을 잡았으니까.

그러다가 동준은 문득 택시 앱이라는 것에 대해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젠장, 별걸 다 설치해야 되는 거네…….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더니 아주 싹 변해 버리고 말았어. 투덜투덜…….

동준은 핸드폰을 꺼내어 버튼을 눌렀다. 먹통. 아차, 전원을 꺼놓았지.

동준은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려다 또다시 아차 싶었다. 그동안 전원을 여러 번 켰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특히 여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거의 반나절 이상 켜놓기도 했었다. 그때도 그것이 좀 찜찜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핸드폰 위치추적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경찰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위안을 삼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경찰을 등에 업고 있는 검은 조직이 한둘이 아니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 미국, 유럽 어디에서도.

동준은 전화를 켤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에랏, 될 대로 돼라. 어제 하루 종일 켜놨었으니 내 위치 알아내려 했으면 그때 벌써 알아놨을 텐데 이제 와서 걱정하면 뭐하냐.

동준은 핸드폰 전원을 켰다. 그러고 나서 택시앱이라는 걸 찾으려고 하는데 전화가 온다.

‘견똘’이라고 화면에 이름이 떴다. 지난번 견 회장이 전화한 뒤 얼마 뒤 왔었던 번호를 그렇게 이름 붙여서 저장해 놓았었다.

타이밍 죽이는군. 그래, 좋아. 받아보자.

“야, 너 누구냐?”

“나다, 인마.” 아주아주 건방진 목소리. “니 까시가 얘기하고 싶단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말해’라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여보세요?” 울먹이는 소리. 겁먹은 소리. “서동준 씨? 저 장해선이에요. (반 울음소리) 저 아시죠? (흐느낀다) 이 사람들이…….” 누군가가 전화를 낚아채는 것 같다. “서동준이, 나 견 회장이다. 니 여자가 너 보고 싶다고 한다. 이리로 와.” 여기에서 다시 전화를 바꾸는 모양이다. “서동준. 너 혼자 와. 꼬리가 달리면 둘 다 죽는다.” 조금 전의 졸개 목소리. “너 지난번 그 당구장 알지? 명일당구장. 너 여기 없을 때 이 동네 재개발돼서 싹 다 바뀌었거든. 이 근처에 와서 전화해. 지금 와.” 탁하고 전화가 끊긴다.

영화 많이 봤구나. 아주 똑같아.

잘됐군. 덕분에 근심거리 하나 없어지게 됐어. 고맙다, 견 씨.

동준은 콧노래 부르고 싶은 심정으로 택시 앱을 깔고……,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 누구한테 물어볼까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만치에서 빈 택시가 달려온다. 동준은 찻길로 달려가서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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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준은 커피숍에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요즘 스타벅스만 잘 되는 줄 알았더니 이런 식의 커피숍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적당한 때 어르신이 자신을 좀 생각해 주지 않으려나. 서로 뭐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는 거니까. 뺑소니를 대신 덮어써 줬으니까 알아서 해주면 좋으련만. 이런 커피숍 차리려면 얼마나 들까……? 동준은 괜히 마음이 들뜬다.

“서 선생님 되십니까?”

동준은 멍청한 눈동자에 얼른 힘을 주고 고개를 돌렸다. 젊고 밝은 얼굴의 남자가 바로 앞에 서 있다.

“아, 네.”

동준은 반쯤 일어나며 대답했다.

“아, 앉으시죠. 저는 서류만 받아서 가지고 가면 됩니다.”

동준은 봉투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서류를 받은 뒤 봉인한 것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린다.

봉인…….

“아, 잠깐만요.” 동준이 말했다.

남자가 돌아선다.

“제 어르신이 명함을 받아오라고 하셔서…….”

“아, 네…….”

그러나 남자는 좀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매뉴얼에 없는 상황인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 약간 우물거린다. 순간적으로 판단이 안 서는 것 같았다.

동준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면서 말을 했다.

“저는 서동준이라고 합니다. 어르신 개인비서인데 직장 같은 건 아니어서 명함이 없습니다만…….”

“예……, 저는…….” 남자는 동준이 내민 손의 끝을 살짝 잡으면서 쩔쩔맨다. “지금 명함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그럼 누구한테 전해 드렸다고 말씀드릴까요?”

“저……, 남 과장이라고 전해주십시오.”

동준이 남 과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막상 얼굴을 자세히 보니 동준 자신보다 많이 어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30대 중반?

“그럼 수령증이라도 써주시겠습니까? 안 그러면 제가 혼납니다.”

동준은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메모지를 받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는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조금 어정쩡한 자세로.

“여기에 성함과 서류 수령 사실을 써주십시오. 전화번호하고요.”

동준은 약간 미소를 지으면서 그 여시한테서 받은 볼펜을 꺼내어 메모지와 함께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남 과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 과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그러면서 동준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하면서 카운터 쪽으로 몸을 옮겼다.

남 과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며 낮게 대화한다. 그중 몇 마디는 동준에게도 들렸다.

“…… 여기 그냥 있습니다. ……… 뭐라고 할까요? ……”

잠시 뒤 남 과장이 동준에게 다가왔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저희 지사장님이 내려오실 겁니다.”

동준은 약간의 승리감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남 과장에게도 앉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남 과장은 출입문 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본다.

갑자기 동준의 머릿속에서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평범한 서류가 아니었어. 봉인을 확인할 정도인 걸 보니. 여기 오면서 뜯어볼 걸 그랬나……. 이메일이나 우편, 또는 택배로 보내지 않고 인편으로 직접 보내야 할 정도로 보안이 필요한 서류……. 봉인까지 확인해야 하는 서류…….

동준은 봉투를 뜯어보지 않은 것이 갑자기 후회되었다.

잠시 기다리자 40대 후반에서 쉰 전후의 중후한 남자가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온다. 온화한 모습이다. 그가 문가에서 남 과장이 고개를 돌리는 방향을 보더니 동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동준은 의자에 앉은 채 그대로 있었다.

남자가 동준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동준은 앉은 채 그 손을 잡았다. 남자가 좀 멋쩍어한다.

“반갑습니다. 선생님한테서 전화 받았습니다. 비서 분께서 서류 가지고 오신다고. 제가 직접 내려와야 했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 직원을 내려보냈습니다. 뭐 불편한 것이라도 있었습니까?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남자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동준에게 내민다.

“최정명입니다. 선생님에게 서류 잘 받았다고 전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동준은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이게 뭐야……?


TS Stockholm Korea

지사장 최정명


그러나 최 씨는 상당히 예의 바를 뿐만 아니라 표정도 무척 밝았다. 말도 시원시원하게 하고. 몸의 자세도 아주 당당하면서도 조금도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면이 있었다.

동준은 명함을 받고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꼭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동준은 괜히 위축이 되었던 것이다. 골고루 다 갖춘 남자. 멋진 신사.

그런데 중량급 전 정치인으로부터 봉인된 서류를 꼭 인편으로만 받아야 하는 남자. 그것도 사무실에서 받지 않고 커피숍에서, 게다가 직원을 시켜서. 자신은 노출시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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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준은 커피숍에서 나와 그 근처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최정명의 명함에 나온 ‘TS Stockholm Korea’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스웨덴 무기회사였고, 그 한국지사 사무실의 주소가 커피숍 근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핸드폰 맵으로 확인해 보니 커피숍 바로 앞이었다. 그래서 그 건물로 곧장 들어가기 전에 우선 주변부터 살피려 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제는 옛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외국회사들이 엄청 많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상점들도 마찬가지다. 아예 한글은 없이 알파벳으로만 도배한 곳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영어뿐만 아니라 유럽의 온갖 언어는 다 있는 것 같았고, 베트남식 알파벳도 보였으며, 중국어와 일본어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동준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질감도 느꼈다. 아무튼 동준이 없는 사이에 대한민국은 완전히 국제화되어 있었다. 그 동네 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도 과장해서 표현하면 한국인 반, 외국인 반이었으니까. 약간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모두 일본이나 중국 또는 동남아에서 온 것으로 치면. 그러한 낯선 동네 한복판에 와 있다 보니 동준은 자기 자신만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 같았다.

동준은 스스로가 외계인 같은 마음으로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다가 마지막으로 그 무기회사가 있다는 건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는 사람이 없이 비어 있었는데, 그 위에 걸려 있는 안내판을 보니 거의 대부분 영어였다. 한글로 된 상호는 딱 두 개. 물론 한국 회사들도 영어명으로 적혀 있는 것이 많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 근처, 특히 이 건물은 완전히 외인지대였다.

마침 두 대의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동시에 열린다.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서양인이 반이다. 하필 그 사람들이 잔뜩 타고 내려왔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서 아까 커피숍에서 만난 남 과장이라는 젊은 남자가 보였다. 동준은 얼른 몸을 돌이켜 마주치지 않게 했다. 등 뒤로 사람들이 왁자하며 지나갔다. 영어인지, 아니면 그 젊은 남자가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스웨덴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알아듣지 못할 언어들이 귓전을 스치고 흘러간다. 동준이 그 동안 열심히 배운 영어가 이 경우에는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외국어는 현지인들하고 직접 마주쳐서 배워야 한다니까…….

동준이 자조 섞인 말로 중얼거리면서 저 젊은 친구를 미행해 볼까 하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 건물에 볼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사람 좋게 생긴 얼굴의 남자, 최 머시기라는 사람이 밝은 얼굴로 쳐다본다. 그 지사장.

“아니, 저…….”

동준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변명거리를 찾으려 둘러보는데 마침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동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한 군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예, 저 회사에 잘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오, 그래요? 마침 제 친구가…….” 지사장은 저 앞에 가고 있는 사람을 부른다. “Hey, Juth. Come here. This gentleman here knows a man who works for your office.”

그러자 앞에서 가던 금발의 중년 여인이 뒤돌아본다. 그리고는 지사장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면서 다가왔다. 지사장이 동준을 소개하면서 또 뭐라고 떠벌인다.

그러고 나서 벌어진 망신스러운 상황.

동준은 거의 도망치다시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니, 분명히 그 젊은 친구를 봤는데, 지사장은 언제 나타난 거야……. 게다가 혼자서 영어 공부할 때는 자신만만했었는데, 막상 현실에서는 입 한번 제대로 놀리지 못한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게다가 당황해서 횡설수설한 것까지 겹쳐져서 영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젠장. 아직도 어항 속에서 헤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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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준은 어르신에게 전화해서 서류를 전달했다고 말씀드려야 하지만 일부러 전화하지 않았다. 최정명 측에서 먼저 연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준에게는 감점될 만한 말을 슬쩍 끼워넣었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동준의 성격이 워낙 시비 걸기 좋아하는 면도 있었겠지만, 어느 정도는 동준이 의도적으로 판을 키워보려고 한 측면도 있었다. 남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은밀하게 진행되는 일에서는 글자 그대로 은밀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이 생기게 되면 오히려 더욱 틀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은밀히 진행하려는 측에서 몸이 달아 무리한 일을 벌이다 실수하게 되는 것이다. 동준은 저들 뒤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어르신이 미사대교에 간 것이나, 아주 경미한 뺑소니에 달라는 대로 돈을 다 준 것이나, 특히 이번처럼 꼭 인편으로 서류를 보내고 그것을 받는 측에서도 봉인까지 확인한 뒤에, 수령증을 써달라는 말에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 것에서 자꾸만 알 수 없는 의혹이 쌓이는 것이었다.

만일에, 정말로 만일에 말이다, 이 모든 것에 어떤 ‘의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것이 생길 게 분명하다. 동준이 의도적으로 약간 틀어놨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동준이 그 무엇을 주목하고 있는 이상 어디에선가 반드시 걸려들게 될 것이다.

기다려 보자.

이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마음에 찝찝한 채로 묻어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견 회장. 아니, 장해선.

아니, 저놈들은 어떻게 장해선을 알아낸 거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자. 그런 여자를 붙잡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내가 그 여자의 뭐라도 되는 줄 안 거야? 아니, 그 반대로 그 여자가 나하고 중요한 관계라도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그 어린 여자애를. 그래서 자기들이 그 여자를 붙잡아 두었다고 하면 내가 벌벌 길 줄 안 모양이지? 천만의 말씀. 그놈들, 아예 경찰에 신고를 해버릴까……?

잠깐…….

장해선을 왜 납치한 걸까? 그리고 장해선을 어떻게 알았을까? 또한 왜 장해선을 동준의 ‘까시’로 안 거지?

동준은 천천히 걸어가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놈들 왜 그런 짓거리를 벌인 거야?

독도? 독도가 돈이 된다는 말 때문에? 그 말을 진짜 믿은 거야? 설령 진짜로 믿었다 해도 지금은 훨훨 날아가 버렸는데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미친놈들.

어? 미친놈들? 그래, 그놈들은 미쳤다. 그래서……, 그놈들은 위험한 거야. 위험해. 장해선의 목숨이.

이런 빌어먹을! 동준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어 전원을 켰다.

전화가 하나 와 있었다. 견똘.

동준은 철규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빨리 전화해 달라고.

이번에는 민기에게 전화했다. 역시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놈에게는 음성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다.

동준은 곰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경찰에 알린다. 둘째, 모른 척 넘어간다. 셋째, 간다. 어디를? 거기 응암동을? 동준은 혼란스러웠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거야? 영화에서는 어떻게 했지? 알지도 못하는 여자 꼭 구하러 가야 되는 거야? 그게 맞는 거야?

좋다. 그곳에 간다고 하자. 그 다음엔? 독도 이야기가 말짱 황이라고 이실직고한다면? 그러면 ‘어이구, 그렇구나’ 하고 그래 집에 가 하고 보내주는 거야?

그리고 만일 동준이 그곳에 안 간다면? 그럼 장해선은 어떻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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