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벤치가 바라다보이는 창문

차 한잔의 카페 | 세 번째 이야기

by Rudolf

세월맞이


산천에 아름저름 세월이 깃들이어

저만치 서둘가는 세상을 붙들려나

오히려 앞서간세월 뒤돌아서 맞누나



차 한잔의 카페 | 세 번째 이야기

나무벤치가 바라다보이는 창문



아파트 뒤 둔치의 오솔길에 나무벤치가 여럿 놓여 있다. 잠깐씩은 앉아도, 사람들이 자주 산책하는 곳이라 그 벤치에 오래 앉아 있기가 좀 무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한 젊은 아이엄마는 저녁 무렵이면 조그만 강아지와 함께 그곳에 와서 거의 매일 30분 정도는 앉아 있곤 한다. 아이는 서너 살은 되는 것 같은데, 멜빵바지에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처음에는 남자아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 예쁜 원피스를 입고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서 벤치에 앉는 것을 보고 여자아이인 것을 알았다. 아파트 창으로 멀리 내다보아서 그런지 엄마나 아이는 모두 조용한 것 같은데, 그 대신 푸들 같은 하얀색 조그만 강아지는 매우 사나운지 사람 지나갈 때마다 요란하게 짖으며 달려드는 모양이다. 그때마다 아이 엄마는 가느다란 목줄을 잡아당기며 강아지를 야단친다. 아파트 통유리가 두꺼워 멀리서 나는 소리들은 잘 들리지 않지만 상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아이 엄마 말고도 일정한 시간에 그 벤치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낚시 모자를 쓰고 어깨에는 테니스 가방을 맨 채 아주 느긋하게 걸어가는 60대 후반 정도의 남자인데, 아침 8시 반에서 9시 사이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물론 비 오는 날은 예외지만. 요즘은 60대를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남들이야 그렇게 부르겠지만, 본인들은 그런 말이 아직 익숙지 않은지 머쓱해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어떻든 그 사람은 그 벤치 앞까지 오면 손으로 앉을 곳을 한번 쓸고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내린다. 그런 뒤 얄팍한 테니스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먹는데 가만히 보니 조그만 귤 같았다. 조심스럽게 껍질을 떼어서 벤치에 내려놓고는 알맹이를 서너 번에 나누어 다 먹은 뒤, 껍질을 다시 집어 윗도리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는 잠시 뒤 일어나서 또다시 천천히 걸어간다. 앉아 있는 시간이 5분 정도? 시간을 재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무리 길어도 10분은 넘지 않는 것 같다. 그 사이에 한두 사람 정도 그 앞을 지나갔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상황이 바뀌었다. 정반대로.

아이 엄마가 아침에 두툼한 테니스 가방을 메고 나타나서 벤치에 앉아 귤을 까먹고 가더니, 저녁에는 60대 남자가 여자아이와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폈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이 한 가족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 싶었다.

하지만 며칠 뒤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60대 남자가 커다란 개, 아마도 골든 리트리버일 것 같은 어린 송아지만 한 개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커다란 골프가방까지 메고서. 아니, 둔치에 산책 나오는데 골프가방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리트리버야 그렇다 쳐도. 요즘 거리에 나가 보면 각종 대형견이 다 등장해서 아이들보다 많은 느낌이 들 정도니까 그거야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골프가방은 좀 안 어울린다 싶은 것이다. 그것도 아침 9시도 안 되어. 하긴 요즘 저 멀리 무슨 연수원 근처에 있는 골프연습장 옆을 버스 타고 지나가면서 보면 아침부터 크고 작은, 그러나 주로 대형 승용차가 잔뜩 몰려와 주차장이 빽빽할 정도다. 그러니 아침부터 골프가방 메고 나간다고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어색했다. 이 아파트 근처에는 골프장은 물론 실내골프장이나 스크린 골프연습장 하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논밭 천지였던 마을에 갑자기 대형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천지개벽한 듯한 변화가 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이곳 사람들은 골프장 드나들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골프를 치려면 자동차로 한 시간 이상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골프장보다는 만리포 해수욕장이 더 가까우니까.

하긴 요즘 이 동네, 특히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갑자기 골프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골프채 사들이느라 난리라는 말을 듣기는 했다. 그리고 떠도는 소문으로는 뒷산 너머에 조만간 실내골프장이 큼직하게 들어설 거라고 하면서, 그것을 대비해서 미리미리 집 안에다 스윙 연습기인가 뭔가 하는 것 한두 개쯤은 들여놓고 골프채 휘둘러 봐야 한다고들 하더라만. 아차, 골프채가 아니라 골프클럽이라고 한다나. 골프‘클럽’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골프 치는 사람들 모임인 줄 알았는데, 그런 모임 같은 것은 동호회라 부른다고 한다.

게다가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서는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외지에서 들어와 오히려 아는 사람 찾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 탓에 수십 년 동안 식구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오히려 낯설어졌다니까.

어떻든 세상이 급속도로 변하듯 둔치의 산책 모습도 갑자기 바뀌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다음날 아침 그 아이엄마를 보고는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 옷이 아마도 스판 레깅스인가 그럴 것이다. 새빨간 쫄쫄이 바지에 배꼽 바로 위에서부터 맨살을 드러내놓고, 커다란 가슴팍에는 분홍색 브라탑을 걸치고서 둔치를 천천히 달리는 것이다.

그것이 브라탑이 맞겠지? 무척 낯선 말이긴 하지만. 요즘 시골 할머니들이라도 영어는 다 알아야 한다. 젊은 사람들도 알아듣기 힘든 말들이 넘치기 때문이다. 브라탑만 해도 실물이나 사진을 보기 전에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나중에는 물건을 보고도 이름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생각이 안 나는 것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걱정이 되었다.

그 조그만 푸들 강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혹 리트리버한테 물려죽은 것은 아니겠지? 사람들은 리트리버가 순한 개라고들 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한다. 대부분은 그 말이 맞겠지만, 잘 훈련받은 리트리버는 군경용으로도 사용되어 맹견 못지않게 무시무시하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집에서 기르는 리트리버가, 그것도 집 안에서 푸들을 물어죽일 리 만무하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뭐 하긴 유튜브에서 보면 집 안에서 엄청 큰 개와 손바닥 크기의 새끼고양이가 함께 뒹구는 장면도 있기는 하더라만.


그 뒤 몇 달이 지나 그 해 겨울, 아파트 정문을 나서다 미국 SUV 포드 익스플로러가 뒷문을 올린 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대형차다. 그 차 옆과 뒤에서는 한 집안 식구인 듯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큼직한 짐들, 아이스박스나 골프가방, 스키장비, 묵직해 보이는 배낭 등을 차 뒤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딘지 눈에 익어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만히 살펴보니, 아 맞다, 바로 그 둔치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60대 남자, 아이엄마, 마치 에스키모 아이처럼 머리에서부터 신발까지 방한모, 방한복, 방한화로 중무장해서 하얗고 둥근 공처럼 보이는 꼬마 여자아이, 그리고 기다란 혓바닥을 내밀고서 선한 눈으로 사람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 큰 리트리버와 그 옆에서 뱅뱅 돌며 짖어대는 푸들.

아하, 정말로 큰 다행이다. 무엇보다도 리트리버가 푸들을 잡아먹지 않은 게 확인된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차 옆을 지나가려는데 저쪽에서 또 다른 큼직한 SUV가 스르르 다가와서 익스플로러 뒤에 멈춰선다. 그리고 그 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남자, 그리고 60대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아이 아빠쯤 되어보이는 우람한 남자.

“할머니……!”

에스키모 여자아이가 달려간다.

대한민국 참 살기 좋아졌다. 이 촌구석까지 세계 최고 브랜드들이 넘쳐나니. 그 사람들이 입고 걸친 것들은 물론 들고 내리는 가방과 같은 짐들이 한눈에 봐도 죄다 잘 알 만한 상표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골이 시골 아니라니까…….

공연히 손주들 본다고 미국 간 마누라와 이민 간 아이들에게 심통이 난다.

날이 화창한데도 어디선가 가는 눈발이 날아와 눈앞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일기예보가 맞으려나 보네. 아침에는 화창하겠지만 오후부터 시작해서 며칠 동안 큰 눈이 내릴 것이라고 했으니.

스노체인 같은 겨울장비 꼼꼼하게 챙기고 잘 놀다 오시오. 운전 조심하시고. 길 많이 미끄러울 테니.

그들 옆을 지나 조금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꼬마가 손을 들듯 말듯 한 자세로 쳐다본다. 귀여운 아기 곰처럼. 그래서 살짝 미소 지으며 손을 조금 들어 흔들어 보였다. 남들 알아차리지 않게.

창밖으로 내다본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잘 놀다 오거라. 건강하게 자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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