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한 방울

차 한잔의 카페 | 네 번째 이야기

by Rudolf

옛 그리워


앞산도 짙어지고 뒷산도 다가오며

저녁놀 물들이고 땅거미 짙어질제

어버이 그리운마음 먼걸음만 재촉해


이런맘 저런심성 한물에 녹아들고

한솥밥 형제누이 누렁지 다툰시절

그모습 그립고애타 숨이차서 달려가


희미한 동네어귀 하염히 돌아들제

옛추억 미소돌다 화들짝 놀라깨니

아리한 고운얼골들 아련저련 꿈이라



차 한잔의 카페 | 네 번째 이야기

눈물 한 방울



매일 출근하며 지나던 길인데 갑자기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하고 차를 몰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무엇인가가 달려졌거나, 아니면 변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가하게 그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을 수도 없기에 운전에 집중하기로 했다. 조금만 어물거리고 지체했다가는 또 그 사거리에서 차가 꽉 막혀 고생하게 된다.

사실 고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좀 늦게 가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조금 늦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남들은 안 하는 짓 혼자서 시간을 정해놓고 늘 일찍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근시간은 9시다. 그런데 일부러 7시 반까지 회사에 들어가서 잡다한 일 처리하고 직원들 기다려야만 직성이 풀려서 매일 아침 서두르는 것이다. 그렇게 일찍 갈 바에야 아예 그에 맞춰서 아침시간을 짜면 될 것을, 꼭 새벽 5시에 일어나 헬스장 가서 땀 흘리고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니 늘 시간에 쫓기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아침 거르는 사람도 많다는데 삼시세끼 꼭꼭 챙겨먹어야 하니 더더욱 시간이 없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그렇게 습관이 들여졌는데.

그런데다가 요즘 일이 많아서 퇴근도 늦다. 회사에서는 딱 중간 나이에 그만한 위치여서 위아래 다 눈치 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아래 일, 위의 일 다 받아서 처리하느라 항상 쩔쩔 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그 나이의 다른 샐러리맨들 모두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욕심이 있어서 아침에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꼭 해야 하는 일을 만들어놓은 것이 탈이었다. 그 일을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 상사와 직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럼 그 일이 꼭 해야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한 일이다. 무슨 일인가 하면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전날 신문을 다 모아 와서 뒤지는 것이다. 각 부서 돌며 버려진 신문들 죄다 쓸어온다. 일간지만 열 가지가 넘는다. 경제지 포함해서. 게다가 주간지, 월간지, 계간지, 심지어 연간지도 있다. 1년에 한번 나오는 요람 같은 것 말이다. 주간지나 월간지, 계간지는 대개 업계 상황에 대한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것들을 모두 가져와서 일단 주간지부터 그 위는 모두 사내 자료실에 갖다놓는다. 그리고 신문만은 따로 한쪽에 챙겨놓고서 하나하나 뒤지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여러 참고할 만한 것들을 오려낸다. 회사나 업무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것들까지 모두 잘라낸다. 한마디로 스크랩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신문을 마구 잘라낼 수도 없다. 적어도 2~3일은 회사에 비치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문 오린 것을 일단 복사한 뒤 셀로판테이프로 다시 원래 자리에 붙여놓는다. 그런 뒤 복사한 것을 모아 정리하고 나서 이번에는 폐기하는 A4 이면지에 셀로판테이프로 하나하나 붙인다. 회사 이면지뿐만 아니라 신문 사이에 끼워서 들어온 광고지도 뒤가 백면이면 그것부터 사용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 분류한 뒤 각각 다른 클리어 파일에 일일이 끼워넣는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 역사, 외국, 여행, 건강, 독서, 취미, 상식, 스포츠 등으로 나누어서 각각 해당하는 두툼한 클리어 파일에 집어넣어야 드디어 일이 끝나게 된다. 그 내용은 전날 미리 읽어두기도 하고, 스크랩하고 복사하고 분류하는 중에 대강 읽기도 하며, 때로는 점심시간 등 낮 동안에 다시 꼼꼼히 읽기도 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필요한 내용이 있다 싶으면 집으로 가져가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집에서도 클리어 파일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아놓은 자료들이 요긴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업무와 관련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일반상식에도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나 이것 때문에 가끔 마찰이 일어나기도 한다. 직원 중에서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윗사람 중에도 있고, 아랫사람 중에도 있다. 그래서 가끔 위아래에서 핀잔을 듣기도 한다. 몇 번은 아주 망신스러운 일을 당하기도 했었다. 그 탓에 사람들 없는 시간, 즉 아침 일찍 나와서 아무도 없을 때 처리하고 끝내기 위해 날마다 서두르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고……, 길거리가 왜 이렇게 한산하지……?

오늘 무슨 날이야? 국경일도 아니고, 물론 주말도 아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전쟁 났을 리는 없는데.

그러다 문득 아침에 아내가 전화로 한 말이 생각난다.

“밥 잘 챙겨먹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딴 날은 그런 말 없다가 갑자기 오늘? 밥은 회사 식당에서 얼마나 잘 나오는데. 매일매일 메뉴 바꿔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간선도로 출구로 나가는데 커다란 플래카드가 여러 장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아차, 선거!

국회의원 선거일.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자 뒤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트럭이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비껴서 지나간다. 그리고 신경질적인 클랙슨 소리.

당연하지.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멀쩡하게 달리다가 갑자기 속도를 줄였으니 뒤 차가 얼마가 놀랐을까. 등에서 식은땀이 치솟는 느낌.

트럭은 벌써 저만치 앞에 가고 있는데 뒤에서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표시를 해주었다.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시들해졌다. 마음이.

집으로 돌아갈까……?

가봤자…….

특별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하지 못하자 자연히 속도도 늦춰진다. 문득 계기판을 보니 연료가 반 정도 남았다. 아니, 반이나 비었다.

‘비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은 사실 머릿속에서 먼 곳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가기는 그렇고. 가봤자 별 특별한 일도 없고…….

주유소가 눈에 띄었다. 순간적으로 망설이느라 그냥 지나칠 뻔하다가 얼른 속도를 줄였는데 그래도 주유소 입구를 아주 살짝 지나쳤다. 출구까지 아슬아슬하게 지나서 멈췄다.

백미러로 뒤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려서 또 한 번 살핀 후 뒤쪽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차를 후진하여 출구 쪽으로 들어갔다. 마침 주유소에 차가 하나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주유 펌프를 꽂고 나서 핸드폰 지도 앱으로 확인해 보니 원주까지 전혀 막히지 않아서 쉽게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속도로가 잘 뚫려 있어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한다고 나와 있다.

그래, 이 참에 다녀오자.



세상 참 좋다. 그 먼 거리를 정말로 한 시간 반 조금 지나 도착한 것이다. 골목길 들어가서 집 문 앞까지 가는 시간이 앱에서 처음 알려준 것과 거의 비슷했다.

대문 옆에 있는 스피커폰을 눌렀더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전화 드려서 확인해 볼걸 그랬나…….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번호를 찾는데 그제야 스피커폰에서 지익 하면서 소리가 난다.

“누구요?”

“아, 백모님, 저예요. 수홍이입니다.”

“에구, 이게 누구여? 아니, 이 아침에 어떻게 왔어? 연락도 없이…….”


백모님을 휠체어에 태워서 집 가까이에 있는 투표소로 모시고 갔다. 생각보다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사전투표를 많이 해서 그런지 그전처럼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자기 주소지가 아니라도 투표할 수 있어서 수홍 자신도 한 표 찍고 나왔다. 두 번째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그 뒤 날이 따스해서 백모님 모시고 가까운 공원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수병 형님하고 수진이 누님 다 잘 있죠?”

“에구, 그럼. 그런데 지들만 잘 있으면 뭐해? 생전 전화 한 번 없어요. 지난봄에 전화 한번 삐죽하고 그만이야. 조카가 가끔 전화하고 이렇게 찾아와 주기도 하지 않으면 나는 그 애들 소식도 몰라.”

“다들 바빠서 그렇죠.”

“아니, 조카는 안 바빠? 혼자서 집안일 다 하며 회사에서도 중요한 일까지 죄다 맡아 하는데.”

“중요한 일이긴요. 다 하는 일인데요.”

“그래 애엄마, 아니 그, 저……, 조카댁은 잘 있는 거지? 언제 온대?”

“좀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장모님이 별로 안 좋으세요.”

“에구, 늙으면 다 죽어야 하는데……. 나도 빨리 안 죽으니까 조카가 늘 이 고생이지.”

“아녜요. 오래 사셔야죠. 백모님은 혈색도 좋으셔서 오래 사실 거예요.”

“에그, 쯧쯧……. 아니, 그런데 애는 왜 안 가져? 빨리 애 낳아야지. 요즘 나라에서 다 해주니까 애 키우는 거 옛날처럼 그렇게 힘들지 않다잖아…….”

“네, 그래야죠.”

“그런데 언제 돌아온대, 조카댁 말야?”

“글쎄요. 장모님이 사실 지금 많이 안 좋으세요. 당분간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미국 간 지 얼마나 됐지? 서너 달 넘은 것 같은데…….”

“오늘이 꼭 세 달째네요.”

“에이그, 그래도 신랑 혼자 두고 그렇게 오래 가 있으면 안 되지…….”



백모님을 모시고 근처 한식집에 가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백모님은 오래 혼자 지내셔서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도 식욕은 무척 왕성했다. 음식 나온 것 반찬이랑 골고루 다 잘 드시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에구, 너무 먹었나 봐. 조카 덕분에 오늘 호강했지 뭐야.”

“아니에요, 더 자주 왔어야 하는데…….”

“에구, 그런 말 말어. 내 새끼들도 코빼기 한번 안 내미는데……. 며느리도 사위도 다 소용없어. 1년에 한두 번 보나, 원……. 전화도 생전 없어요.”

그 말은 맞다. 일가친척 중에서 가끔 전화도 하고 찾아뵙기도 하는 것은 수홍 자신 하나뿐이다. 아내가 미국 가기 전에는 항상 함께 왔다. 그래서 그런지 백모님은 아내를 무척 아껴주신다.

점심 먹고 나서 백모님 말벗 해드리다 2시경에 서울로 출발했다. 보스턴은 새벽 1시라서 전화를 할 수 없고, 이따 밤에 통화해서 백모님 소식을 알려드려야겠다. 백모님은 아주 연로하신데도 그런대로 건강하신 편이다. 다행이다. 혼자 사시다 변이라도 생기면 큰일인데. 그런데 왜 그 사촌형과 누나는 자기 어머니를 잘 돌아보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수홍 자신처럼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뵙고 싶어도 뵙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돌아가는 길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서울 가까이 가자 약간 막혔다.

옆 좌석을 돌아보고 보자기를 만져보았다. 백모님이 주신 거다. 그 안에는 백모님이 오랫동안 혼자 사시면서 본인이 시집오면서부터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써둔 글과 중요한 행사나 일이 있을 때 찍어놓은 사진들을 모아둔 앨범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조카가 가져가서 잘 보관해 둬. 내 새끼들은 아무도 이런 데 관심도 없어. 조카가 잘 가지고 있다가 나 죽으면 자식한테……. 에구, 빨리 애를 낳아야지. 나이도 들어가는데. 쯧쯧…….”

그 자료들을 형에게 주라고 몇 번 말씀을 드렸어도 백모님은 억지로 떠맡겼다.

“그 애 이런 덴 관심도 없어. 처갓집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면서. 수진이도 매한가지야. 양쪽 집안 다 합해서 아들 둘 딸 하나인데, 둘은 관심도 없으니까 천생 조카가 잘 보관해 둬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자료들 다 없어져. 나 죽을 때까진 아무 말 말고 그냥 가지고 있다가 나 죽은 뒤 불태워 없애든지…….”

이렇게 말씀하시던 백모님 눈에 맺혔던 눈물이 생각나 갑자기 코끝이 매워졌다.

그러나 저러나 큰일이다. 이 보자기 이야기를 형이나 누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모른 척하고 그냥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전화라도 해서 알려주어야 하는지…….

잠시 막혔던 길이 다시 뚫렸다.

속도를 높이고 달리기 시작했다. 창을 조금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창을 더 내렸다.

바람이 참 시원했다.

길도 잘 뚫려 있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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