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카페 | 두 번째 이야기
우스버 미소짓고 미소에 우스버서
사알짝 실눈뜨고 살그미 바라보니
나른한 고양이수염 봄날햇살 어리다
차 한잔의 카페 | 두 번째 이야기
☼
“순이네서 만나.”
이렇게 해서 펜션 뒷동네에 새로 생긴 쇼핑몰 근처의 카페로 갔다. 카페 이름이 ‘순이와 명수’다. 이름도 구수하고 그래서 옛 동네 친구들이 이곳에 자주 온다. 한 친구가 이곳에 한번 왔다가 찻값도 그리 비싸지 않고 햇볕이 잘 들어 환하다고 하면서 좋다고 하기에 구경삼아 와봤다가 아예 아지트가 된 것이다. 평소에는 자주 보기 힘들어 한두 달에 한번 누군가가 카톡으로 모이자는 글을 올리면 시간 되는 친구들만 나온다.
그래서 11시에 만나서 노닥거리다가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자고 약속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 30분이나 일찍 오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평소에는 입에 익숙한 차만 주문했지만, 이날따라 생소한 이름의 차를 가져다달라고 했다. 이름이 의미심장했던 것이다.
가을장미유혹
에이, 지금 봄인데 무슨 가을 장미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유혹’이라는 말에 넘어가 그것을 시키고 말았다. 그전에도 그 이름을 보기는 했었는데, 젊은 애들이나 그런 거 좋아하겠지 이제 40줄에 올라선 아줌마들이 뭔 유혹, 하면서 눈구석 한쪽으로 밀어놓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밀어놓았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아예 눈 밖에 났다는 것이 아니라 눈 가장자리로 쓰윽 밀어놓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여럿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그런 것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척하다가, 혼자만 있을 때 못 본 체하면서도 저절로 그리로 눈길이 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가을장미유혹’이 나왔다.
강렬한 붉은색 찻잔 세트에, 역시 새빨간 장미 문양이 들어간 찻주전자. 자그마하고 앙증맞은 주둥이에서는 옛 성탄절 카드 그림의 흰 눈 덮인 벽돌집 굴뚝에서처럼 새하얀 김이 사르르 피어 올라와서 퍼진다. 그리고 이 카페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검붉은색의 꽃잎을 말려서 바스러뜨린 가루 역시 붉은 한지 위에 가지런하게 올린 채 그것을 별도의 접시에 담아서 내왔다.
흠, 유혹은 유혹이군.
하지만 죄다 강렬한 레드이다 보니 어딘지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며시 돌아다보고 말았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거야……?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이렇게 ‘유혹’을 탁자에 죄다 벌려놓고 만천하 사람 다 보라고 하는 게 눈치가 보인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다른 친구들이 와서 보고 한마디씩 할까 봐 서둘러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빨리빨리 찻물 우러나게 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혹’에 입술을 살짝 갖다댔다. 앗, 뜨거! 하마터면 입술을 데일 뻔했다. 입으로 호호 분 다음 다시 살짝만 맛을 보았다.
오우―!
괜찮은데.
차 이름이나 그 색이나 찻잔 세트나 모두가 잘 어울릴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향긋한 맛. 그러면서도 달콤했다.
와, 이거 어떻게 가공한 거야? 꽃잎에다 뭘 섞었나? 아니면, 혹 물에라도?
찻물이 든 주전자 뚜껑을 열고 김이 나오는 입구에 코를 갖다대고서 흠흠거리며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러나 그냥 맹물이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찻종이에 남은 꽃잎 가루를 손에 묻혀서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음…….
무슨 냄새가 나긴 나는데, 뭐 그냥 장미꽃잎 냄새다. 그런 게 있다면. 그러나 어떻든 이상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약간 아릿하면서도 강한 듯한 향내. 음, 그래서 차도 이렇게 강한 거로구나.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는 좀 많이. 역시 괜찮았다. 처음 살짝 맛볼 때보다는 덜 강했지만, 역시 입 속 가득 향내가 배어 콧속으로 퍼져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한 모금 한 모금 홀짝거리며 결국 다 마시고 말았다.
그리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바로 옆자리에 세 여자가 와서 앉는다. 부산스럽게. 그 중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머리로 밀어올리고서 가방에서 무슨 종이를 꺼낸다. 곁눈으로 슬쩍 보니 무슨 도면 같았다.
“다른 건 다 됐는데, 이름을 아직 못 정했어. 아유, 그게 왜 그렇게 어렵니?”
“저번에 전화로…….”
“응, 그거 애아빠가 다 별론가 봐.”
“얘, 이 카페 이름 어떠니? 좀 순수한 것 같지 않아?”
“우리 애아빠는 이런 거 촌스럽대.”
“시골스럽고 좋은데 뭐. 요즘 이런 식이 대세야. 이름이 편하잖아.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들어온 거고.”
“그래도…….”
“그럼 뭐 달리 생각해 놓은 거 있어?”
“애아빠가 이거 둘 중에서 하나로 정하고 싶은가 봐.”
여자가 다시 가방을 뒤져 조그만 수첩을 꺼낸다. 그리고 손가락에 침을 살짝 묻혀서 종이를 넘긴다.
“음……. 이것 봐. 여기 이거.”
“이거 두 개?”
“그래.”
“아르누보 카페……. 또 하나는 플로리 카페…….”
“플로리? 무슨 뜻이야? 아동복에서 본 것도 같은데. 하긴 이런 이름 요즘 많이 쓰더라. 꽃집도 있고. 제과점에서도 본 것 같아.”
“꽃이라는 뜻이래.”
“그럴 것 같았어.”
“느낌이 좋은데.”
“나는 좀 다른 걸로 해보고 싶은데도 꼭 그 둘 중에서 하나로 정하고 싶다는 거야.”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그런데 둘 중에서 어떤 것으로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저렇게 세월만 보내는 거야, 글쎄. 가게 계약까지 다 했는데. 앉아서 월세만 나가잖아.”
문득 벽에 있는 시계를 보았더니 막 11시가 넘어간다. 손목시계도 확인했더니 11시가 맞았다. 핸드폰 시계도 보았더니 역시 11시. 그런데 아직 한 친구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다. 종업원을 손으로 불렀다.
앳된 모습의 여종업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나는 말은 하지 않고 손으로 찻잔 세트를 가리켰다.
“치워드려요?”
고개만 살짝 끄덕였더니 종업원이 가지고 온 쟁반에다 탁자에 놓인 것들을 하나하나 올려놓는다.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아주 참한 모습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종업원은 차 도구를 모두 쟁반에 담고서 눈을 들어 살며시 쳐다본다. ‘차 어떠셨어요?’ 하는 눈빛.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크게 지어 주었다.
그러자 여종업원은 눈 주위에 다소 부끄러운 듯한 빛이 돌면서 얼굴이 화사해진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기에 고개를 돌려서 보았더니 두 친구가 이제 막 함께 들어오는 것이었다. 여종업원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이쪽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돌아선다.
“차 좋았어요. 아주.”
여종업원이 돌아서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려서 다시 한 번 고개를 까딱 숙인다.
“일찍 왔네. 오래 됐어?” 한 친구가 다가와서 묻는다.
“응, 그냥 좀 일찍 왔어.”
“차 마셨나 봐?”
또 한 친구가 멀어져 가는 여종업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응, 혼자 있기 심심해서.”
“뭘 마셨기에 이렇게 냄새가 좋아? 여기 냄새가 다 배어 있네. 아주 강한 거 마셨나 봐?”
“뭐야, 이름이?”
“유혹.”
“뭐?”
“가을장미유혹.”
“얘가 뭐래?”
“차 이름인가 보지.”
“그럼 우리도 그거로 하자. 가을은 아니지만 유혹이나 한번 당해보자.”
그 뒤로도 곧바로 두 친구가 더 들어왔다.
모두 다섯 친구가 따스한 봄날에 네 잔의 ‘가을장미유혹’을 홀짝거리며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한참 소란을 피운 다음 가장 늦게 온 친구가 찻값을 독박쓰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다시 왁자하며 카페 문을 나서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아까 옆에 앉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카페 이름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것 같았다.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다른 친구들에게 먼저 나가라고 하고서 카운터로 갔다.
“메모지 한 장 주시겠어요?”
카운터 직원이 이곳 상호가 인쇄된 조그만 한지를 한 장 내민다. 예쁜 전통무늬가 들어간 굵직한 볼펜과 함께.
그 종이에 한 문장을 써서 카운터 직원에게 도로 주면서 저쪽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에게 갖다주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돌아서는데 아까 쟁반을 들고 왔던 여종업원과 얼굴이 마주쳤다. 어떤 테이블에 차를 날라다 주고 오는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래서 마주보고 미소 지어준 다음 돌아서서 카페 문 쪽으로 향했다.
카운터 직원이 메모지를 가지고 저쪽 테이블로 가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아르누보 & 플로리 카페
아르누보(Are Nouveau)는 영어로 하면 ‘New Art’라는 뜻이다. 새로운 시대의 예술. 그러나 실제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한 가구 장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구 등에 실물과 똑같은 담쟁이덩굴과 같은 문양들을 집어넣었는데, 일부의 사람들이 그에 반발하면서 전통적인 장식무늬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모티프(motif)를 살려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공예나 건축으로까지 이어지고 나중에는 예술계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된다. 전통에 대한 일종의 반항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는 사회현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00년 전후의 10여 년간만 짧게 유행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예술의식이 싹 트기 시작해서 현대예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기에, 그런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 작가로는 스페인의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í)와 오스트리아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비롯해서 체코 출신의 알폰스 무샤(Alphonse Mucha), 스코틀랜드의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