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한 차 한잔

차 한잔의 카페 | 첫 번째 이야기

by Rudolf

긴긴밤 허여이


긴긴밤 님이남긴 고운말 더듬을제

북두성 하늘높이 오르고 올라서니

별빛긴 즈믄밤들을 속절없이 지새다


옷섶도 못여미고 댓돌을 내려서서

은하길 달빛받아 종종히 좇을적에

아스라 내님가신곳 그곳까지 오르다


밤하늘 끝간곳에 나들이 간듯만듯

천만년 헤매이며 온밤을 허울적에

눈물이 별달빛받아 보석되어 흐르다


밤하늘 기우뚱히 별빛들 비껴들제

내마음 설우어나 허여이 눈을들어

차마도 잊지못하고 그리우다 하여다



차 한잔의 카페 | 첫 번째 이야기

따끈한 차 한잔



화창한 토요일, 브런치로 대신하려고 일부러 아침을 안 먹은 날 하필 옆집 여자가 찾아왔다. 며칠 전에 이사했다며 인사차 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갈색 종이봉투를 하나 내민다.

“아파트 입구에 제과점이 새로 생긴 모양이에요. 며칠 안 됐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이사 온 날 오픈한 것 같아요. 오늘 거기 지나가는데 냄새가 너무 고소해서 사왔어요. 한번 맛보세요.”

40대 초반 정도 되는 여자는 봉투만 주고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냥 가라고 하냔 말이다.

“별일 없으시면 들어오세요. 제가 마침 아침을 먹지 않았거든요. 함께 드시죠.”

“그래도 되겠어요?”

여자의 표정이 환해진다. 그렇잖아도 들어오겠다는 말을 먼저 꺼내기가 미안해서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미리 말해 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오세요. 정리를 안 해서 좀…….”

“아유, 괜찮아요. 다 그렇죠, 뭐.”

여자는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온다.

“새댁 같은데…….”

여자가 눈치를 보며 말을 한다.

“아뇨. 혼자 살아요.”

“깔끔하시네요.”

“뭐, 별로…….”

이렇게 해서 만난 그녀는 아들만 둘 두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남편은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일부러 지방으로 전근신청을 하고 이번 1학기부터 이 근처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설명해 준다.

“병원에서 근무하시나 봐요?”

여자가 거실을 주욱 둘러본 다음 조심스럽게 말한다.

“네, 터미널 옆에 있는 희망병원요. 오늘 쉬는 날이라서…….”

“어머, 잘됐네. 그렇잖아도 우리 아이들이 원체 약해 놔서 병원부터 알아두려 했었거든요.”


옆집 여자는 돌아갔다. 자신보다 내가 10년은 아래이니 동생 삼겠다는 말을 남기고.

여자와 인사하고 나서 거실 탁자를 치우고 난 뒤 문득 식탁을 보니 아까 마시려고 우려냈던 찻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저 혼자서 외롭게.

아파트는 크지 않지만 새로 지어서 그런지 규모 있게 잘 만들어놨다. 식탁 쪽에서도 바깥 광경이 잘 내다보이는 것이었다. 특히 식당에서 보이는 것이 거실 쪽보다 좋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곳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며 차 한 잔을 하는 게 일종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침 일 정리하고 차나 한잔하면서 식탁에 앉아 있으려 했었던 것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바로 아침 먹기도 그렇고 해서. 그러나 옆집 여자와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여자가 풀어놓은 빵을 먹는 바람에 브런치는 날아가 버렸다. 원래 많이 먹지는 많지만 빵은 좋아해서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먹는다는 것이 어느새 사온 빵을 다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잘됐다 싶기도 했다. 새로 생긴 그 제과점의 느낌이 좋아서 한번 가보려 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 식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전라도 어디에선가 나왔다는 댓닢 차라고 하는데 향이 꽤 좋았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며 이모가 사서 보내준 것이다.

식은 차이지만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옆집 애들은 복도에서 두어 번 봤다. 두 아이가 모두 깔끔하게 생겼다. 가까이에서 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약해 보이지는 않았었는데……. 아빠가 죽지만 않았으면 아이들이 잘 뛰어놀았을 것 같았다.

남의 집 일이지만 괜히 아쉬워진다.

하긴 지금 남의 집 애들 걱정할 때가 아니다. 옆집 여자가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새댁 같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 순간 사실은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흔든 다음 찻잔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모금을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좀 아쉽다.

다시 물을 끓여와서 그 차 티백을 가져와서 집어넣었다.

냄새가 좋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그 김을 따라 생각도 피어난다.

지난 가을…….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핸드폰 벨이 울리기 전부터 잠 속에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자면서도 전화가 올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더니 정말로 벨이 울렸다. 예감인지, 아니면 전화 소리에 그런 느낌이 들었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한밤에 전화 오는 일은 가끔 있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를 하다 보면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때는 깊이 잠들어 있다가도 화들짝 놀라서 허겁지겁 받았다. 그러나 그날처럼 어떤 예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래도 굳이 무슨 느낌이라도 있었다고 한다면 낮에 본 위급했던 환자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었지 불길한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전화는 형민 씨한테서 온 것이었다.

이 밤중에…….

다른 때 같았으면 짜증이 났겠지만 그날은 나도 모르게 가슴을 졸이며 전화를 받았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하신 말이 있다. 한밤중에 전화가 오면 장사가 난 것이라고. 그 ‘장사’라는 단어가 시장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느낌으로 알았어도 처음에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었다. 그런 중에도 그 말이 죽음과 관계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장사(葬事), 즉 장례를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이러한 단어의 정확한 뜻과 그 한자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옛날엔 전화 대신 전보가 왔었지. 주로 한밤중에.”

그리고 할머니는 이렇게 덧붙였었다.

그날 밤에 온 전화가 장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았지만, 그런 중에도 그 전화가 불길하다고 여긴 것은 아마도 본능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갔어.”

“왜, 왜요? 왜……? 무슨 일이에요?”

형민 씨 어머니가 음독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결혼식 일주일 전이다. 시댁이 될 집에서는 이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특히 어머니가. 그러나 형민 씨는 억지로 밀어붙였다. 집안에서 강제로 선까지 보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도 형민 씨는 그것을 무시하고 부모님 허락도 없이 예식장을 예약하고 청첩장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반대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청첩장까지 나온 것을 보고 나는 다 해결됐는 줄 알았었다.

형민 씨 어머니는 아주 위중한 순간까지 갔었다. 그리고 그전까지만 해도 형민 씨를 어느 정도 두둔했던 아버님도 돌아서고 말았다.

이미 아파트 전세를 마련하고 신혼살림까지 모두 들여놓은 상태였는데.



그 다음부터는 지옥이었다. 결국 전세 아파트와 신혼살림을 모두 받는 조건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런 다음 세 달 동안 휴가를 내고서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우리 집안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얘기 다 해서 무엇하랴.

그리고 복직 대신 이곳으로 이사 와서 새로운 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울 근교의 아파트 전세금으로 이 아파트를 사서 온 것이다. 신혼살림도 다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팔아버릴까 하다가 그래 봤자 몇 푼 안 된다고 이모가 말하는 바람에 그냥 가지고 온 것이다.

― 새댁 같은데…….

그 말이 귀에서 울린다.

차가 또 식었다.

갑자기 옆집 아이들이 생각났다.

나도 결혼했으면 저런 애들 낳게 될까……?

그때 핸드폰이 울린다.

어쩐지 받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서 온 것이라도.

내버려두었더니 저절로 끊어진다. 누구한테서 왔는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찻잔을 들었더니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혼자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다 마셔버린 모양이다.

아쉬웠다. 맛도 모르고 마셨으니…….

다시 찻물을 끓였다. 그리고 티백을 넣었다.

이번에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차나 음미해야겠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다가 살짝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음, 좋았다.

또 한 모금.

역시 차는 따끈할 때 마시는 게 좋아.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핸드폰이 또 울린다.

저쪽에 밀어놓은 핸드폰을 슬쩍 쳐다보니 전화번호만 떠 있다. 일단 병원은 아니다.

그래, 너 혼자 울어라.

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참 좋다.

전화가 끊어진다.

또 한 모금.

이 차를 마시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더니…….

또다시 전화가 울린다. 세 번째다. 계속 울려대기에 이번에도 슬쩍 쳐다보기만 했다.

번호가 떠 있다.

번호…….

아, 맞다. 그렇잖아도 낯설지 않았던 번호…….

내 손이 내 생각이나 기억보다 먼저 반응을 하고 핸드폰 쪽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내 의지와 달리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는 것이었다. 또한 핸드폰을 내 귀에 갖다대 주기도 했다.

“어머니가 허락해 주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