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 내게귀가있오

by Rudolf

제6장 | 내게귀가있오


1


왕십리 통일양말로 정 선생이 찾아왔다. 급한 일로 시골에 잠시 내려갔다 오겠다고 하고 떠난 사람이 3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얼굴은 초췌했다. 정 선생이 공장 정문으로 들어설 때 여직원 하나가 마침 밖에 나왔다가 알아보고 깜짝 놀라 달려왔다.

“어머나, 이게 누구세요? 정 선생님!”

그때 공장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커다란 상자를 마주 들고 나오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저게 누고? 정 선생 아이가?”

한 사람이 공장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정 선생이 왔어!”

갑자기 공장 안팎이 시끄러워졌다.

“아니,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예요?”

“얼굴이 말이 아니네. 고생 무지 했나 봐.”

“왜 그동안 연락도 없었어요?”

“아이구, 많이 아팠었나 보이?”

이 소란 때문에 그랬는지 이층 사무실 문이 삐죽 열리며 정 선생 또래의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그러나 내려와 보지도 않고 말도 않고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것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계속 모여든다.

“아이고, 어디 갔다 이제 왔소?”

“우리 공장 많이 변했어요.”

“정 선생이 없으니까 공장이 엉망 됐잖아.”

맞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듣긴 했지만, 정 선생은 공장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분위기가 어딘지 썰렁한 것을 느꼈었다. 공장은……, 대강 이야기하면 이렇다. 그동안 사장이 군용 피복까지 생산하려고 애쓴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더해 뇌물수수 혐의로 고발되고 세무조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경쟁 회사에서 한 짓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고.) 다행히 국회의원을 한다는 사장 친척이 어떻게 마무리를 해서 일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납품 규모가 축소되고 직원도 반으로 줄었다. 그 와중에 사장은, 사실은 처음에는 없는 병 만들어 병원에 입원해서 구속을 피하려 했었던 것인데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화병을 얻어서 그랬는지 뇌졸중, 즉 중풍 증상이 발생했다. 다행히 병원에서 빨리 발견하여 곧바로 치료하는 덕분에 큰 장애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때 사장은 너무 놀라 공장 일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대신 사장 조카가 과장이라는 이름으로 이층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는데 일솜씨도 별로인데다 나이도 얼마 안 됐는데도 꼰대 노릇하며 화만 자주 내서 남아 있는 직원들이 뒤에서 입을 삐죽 내민다고 한다. 지금 있는 직원 중 처음 보는 사람도 몇 있었다.

정 선생은 이층 과장에게 올라가서 인사를 하고 자신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사무실 안을 슬쩍 둘러보며 자신의 작은 손금고를 찾았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정 선생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저, 혹시 제 물건들이 저쪽 창고에 있었는데 어디에 치우셨는지요? 그리고 제가 쓰던 조그만 손금고도 여기 책상 옆에 있었는데, 보셨는지요?”

정 과장이라는 젊은 꼰대가 눈을 아래위로 뜨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한다.

“정 선생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정 선생님 개인물건은 상자에 넣어서 저 창고에 그냥 보관해 두었습니다. 정 선생님이 언제 올지 모른다며 사장님이 잘 두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손금고는 따로 캐비닛 안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말투는 그런대로 공손했다.

젊은 꼰대는, (아니, 말이 좀 공손했으니 꼰대 대신 점잖게 불러줘야겠다) 젊은 과장은 성큼성큼 캐비닛으로 가서 문을 열더니 맨 아래 칸에서 두터운 봉투 두어 개를 들어내고는 그 밑에서 손금고를 들어올렸다.

“이거 맞습니까?” 과장이 정 선생에게 다가와서 손금고를 내밀며 묻는다.

“아, 맞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 선생은 꾸벅 인사를 하고 손금고를 받고 나서 다이얼을 돌려 열었다.

자신이 찾던 것이 손금고 안에 없는 사실을 확인한 정 선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 선생은 고개를 들고 과장에게 말했다.

“저……,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전화를 좀 걸어주시면…….”

과장의 눈이 차갑게 변한다.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채 가만히 정 선생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자기 일은 끝났다는 듯이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책상으로 가서 앉는다. 처음에는 전화를 걸어주려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서류를 뒤적이며 이것저것 보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마치 정 선생이 돌아가고 없다는 듯이.

정 선생은 잠시 기다리다 한번 헛기침을 하고서 떠듬떠듬 말을 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주시면 제가 인사도 드리고…… 꼭 말씀을 드려야 할 것도 있고 해서……. 죄송합니다만, 한번…… 전화만…… 해주실 수…….”

그때 마침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과장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천천히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여보세요……. 아, 고모부. 웬일이세요? …… 아아, 그거 아침에 다 처리했어요. 이번 주에는 곤란하고 다음 주에 갖다준다는데요. 아, 네…… 네…… 네……, 알았어요. 제가 알아보고 전화 드릴게요. 그럼……. ”

“저, 사장님이면 저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정 선생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치듯 말했다. 과장이 인상을 쓰면서 돌아다본다.

“저……, 전화 좀…….”

정 선생이 애원하듯 말했다. 과장은 송화구를 손으로 막고 그대로 내려놓으려 한다.

정 선생이 달려들어 전화기를 잡아챘다. 과장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꽈당 뒤로 넘어졌다.

“저, 사장님이세요?”

“…….”

“접니다. 정 선생. 사장님, 저 정 선생입니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아니, 누, 누구라고? 정, 정 선생?”

“네, 접니다. 사장님.”

“아니 아니, 정 선생 맞아?”

“네, 맞습니다. 접니다, 사장님.”

“아니, 이 사람아! 난 자네 죽었는 줄 알았는데 지금껏 어떻게 된 거야?”



정 선생은 통일양말 사장에게 전화를 걸고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양인쇄 손 사장으로부터 아무런 편지도 연락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 선생이 손 사장에게 직접 찾아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편지에 대해 확인해 보았더니 인희가 찾아온 적도 없었고, 편지를 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손금고 속 통장과 도장이 없어진 것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정 선생이 손금고를 판매하는 곳에 들고 가서 확인한 결과 망가뜨리거나 억지로 연 흔적은 없다고 했다. 이게 어찌된 건가? 손 선생은 은행에 찾아가 자기 통장에 대해 확인해 보았다.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양인쇄나 통일양말 어느 한쪽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둘 다 공모하거나, 혹 누군가가 몰래 손금고를 열었단 말인가? 정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손금고는 다이얼 번호를 모르면 열 수 없다. 부수지 않는 한. 혹 통일양말 과장, 아니 그 젊은 꼰대가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닐까?

정 선생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팔덕이다. 그놈밖에 그런 짓을 할 인간이 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정 선생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여기에서 잠깐, 정 선생이 어떻게 3년 만에 다시 서울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이야기인즉 이러하다. 정 선생, 즉 송정민은 정말로 연선의 무덤에 가서 죽을 생각이었다. 연선의 상여가 나간 날 저녁 해질녘에 이제 막 봉분을 올린 연선의 가족묘에 찾아간 정민은 무덤에 엎드렸다. 눈물은 이제 말라버려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정민은 무덤 옆에서 누워 보냈다. 밤에 얼어죽기라도 하길 바라며. 그러나 봄밤이 춥기는 했어도 얼어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완전히 혼이 나간 상태로 아침을 맞이한 정민은 무덤 앞에서 크게 두 번 절을 한 다음 자신의 윗도리를 벗어 무덤에 덮어주었다. 그제야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치지 않고. 잠시 뒤 정민은 연선의 선산 가족묘 옆에 있는 소나무 쪽으로 갔다. 그 주위를 돌며 끈으로 쓸 만한 것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정민은 자기 속옷을 벗어서 허리띠와 연결하여 끈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무덤으로 돌아와 두 번 더 절을 했다. 그 다음 자기 부모님 계신 곳을 향해 크게 한 번 절을 했다. 마지막으로 연선의 부모님 한옥저택 쪽으로 돌아서서 또 한 번 절을 했다. 그리고는 소나무로 가서 끈을 매고 고리를 만들었다. 정민이 고리에 목을 매는 순간 선산 묘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민이 고리에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뛰어와 붙잡았다. 마침 권 부자가 아침 일찍 마름 김 영감과 함께 딸을 보기 위해 올라왔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김 영감이 먼저 뛰어와 정민을 잡아올렸다.

권 부자와 정민은 연선의 무덤 옆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가 할 말이 없어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뒤 권 부자가 뒤로 손을 짚으며 말했다. 일어나세. 정민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권 부자는 일어나서 먼 산만 쳐다보았다. 그날 권 부자는 정민에게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연선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 고하고, 권 부자 자신의 말도 함께 전해 달라고 했다. 이제 어차피 두 가문의 인연은 끝났으니 피차 등지고 살게 되겠지만, 자신의 못난 여식이 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집 자손을 사위로서 정당한 대접도 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라고. 한때 마음에 큰 뜻을 두고 자신이 송씨 가문에 찾아가 사돈의 연을 맺으려 했던 것이 이러한 결과로 끝난 것인데, 그 모두가 자신의 헛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자기로서는 남 탓할 일 아무것도 없노라고 전하라 했다. 그리고 권 부자는 어제 연선을 산에 묻고 나니 비로소 세상이 올바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하며, 자신은 이제 남은 생 스스로의 과욕과 과오를 참회하며 살 터이니 정민에게도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힘을 내어 굳건하게 서라고 당부했다. 그리해야 다음 세상에 가서라도 연선과 아기 인희를 당당히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정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권 부자와 헤어져 산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정민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서 정민은 온양의 그 여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부모님에게 편지를 써서 어제오늘 있었던 일과 권 부자의 전언을 간략하게 알리고, 앞으로 자신은 어느 깊은 산속으로 가서 연선과 인희를 생각하며 참회하고 살겠다고 덧붙였다. 그 뒤 처음 인희가 죽은 다음 찾아다녔던 그 산과 절과 기도원 등을 다시 찾아가 구도의 길을 한동안 걸었었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은 인희였다. 자신의 죽은 딸이 아닌 살아 있는 인희. 그 아이를 볼 수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더. 그 욕구는 날이 갈수록 커져갔고, 결국 그 아이를 다시 만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며칠 전 불쑥 일어나 무턱대고 서울로 올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인희를 정 선생은 어떻게 해서든지 찾기로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희를 찾기 위해선 우선 팔덕을 찾아야 한다. 팔덕이 있는 곳에 인희도 있다. 이미 그 사실은 한번 확인한 바 있다.

정 선생은 이를 갈며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네놈의 교활한 흑심과 내 이 이글거리는 분노 중 어느 것이 더 치열하고 처절한지 겨뤄봐야겠다. 이놈.



2


팔덕의 파라다이 호텔은 사람들로 붐볐다. 휴지나 수건도 제공하지 않고 객실 청소도 해주지 않았으며, 방에는 세면시설이 없었고 그 대신 공동샤워장과 공동화장실이 하나씩 있을 뿐 그나마도 지저분했지만 손님들은 개의치 않았다. 우선은 방값이 다른 곳의 반이었으며, 또 하나는 똑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서로서로 통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사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점이 바로 팔덕이 노린 것이었다.

프런트 옆 지저분한 홀에는 낡은 당구대 하나와 낡았지만 널찍한 판자 테이블, 그리고 하나도 짝이 안 맞는 여러 종류의 낡은 의자 여럿을 늘어놓았을 뿐인데 대천 양아치들을 비롯해서 타지에서 온 건달들로 늘 북적거렸다.

담배연기와 술 냄새로 호텔 전체가 절어 있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달이 건달을, 양아치가 양아치를 서로 찾기 위해 이곳에 들락거렸다. 방은 늘 만원이었다. 늘어지게 자고, 술판 벌이고, 노름에 절고, 이 방에서는 고래고래 목청 높여 노래 부르고, 저 방에서는 애정행각 숨소리 요란하게 울려도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1층에서 3층까지 난장판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친구하자며 이 방 저 방 찾아가고, 여기저기에서 건달들이 찾아와서 서로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관인 것은 한 양아치가 들고 온 야외전축을 틀었을 때였다. 이것을 틀어놓으면 호텔 전체가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삐빠빠룰라…….

삐빠빠룰라…….

고장난 레코드처럼 하루 종일 이 리듬이 반복되었다.

질리지도 않는지 모두가 소리 높여 삐빠빠룰라…….

고래고래, 악을 쓰고, 인상을 쓰며,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팔덕이 보기에 이들은 모두 IQ 32였다.

팔덕은 손님들 비위 맞추는 것이 일이었고, 심통은 손님들 사이를 누비며 말반 욕반 하는 것이 일상이며, 외다리 상이군인은 그 환상적인 전쟁담을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늘어놓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창문 흔들리고 방문과 문틀이 안 맞는 것은 프런트에서 연장 가져가 알아서들 고치게 했다. 양아치들이라서 그런지 변죽들도 좋았고, 건달들이라서 그런지 죄다들 건들건들 그런대로 잘 넘어갔다.

이 모든 것이 팔덕이 계획한 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3


마른장마라 하여 무더위만 이어지고 오히려 그 끈적거리고 지겹다는 장마를 고대하는 한여름의 토요일 밤. 기숙사는 창문 다 열어놓고 웬일인지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들이 한껏 풀어져 잠잘 생각들을 않고 여기저기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인희는 이곳에 온 지 벌써 1년이 조금 넘었다. 키도 좀 자라고 해서 이제는 어린애 티는 벗어나 있었다. 인희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순지 언니의 손놀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지는 코바늘 뜨개질을 잘했다. 갓난아기에게나 맞을 법한 앙증스런 양말, 장갑, 모자 등을 색색으로 뜨고 또 떴다. 분홍, 빨강, 파랑, 밤색, 노랑, 연두, 흰색, 하늘색, 회색, 그리고 여러 색을 배합한 것 등등. 낮에 편물기계 돌리느라 손이 고단했을 텐데도 고 가는 손으로 살금살금 코를 꿰어 요리 넣고 저리 빼고 하면 어느새 딩동댕 하나씩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서두르는 법이 없다. 천천히, 아주아주 느릿느릿, 한 코 꿰고 이리 보고 두 코 꿰고 저리 보고 하며 서두르지 않고 꿈꾸듯이 야금야금.

인희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꼬마장갑이 하나 툭 떨어지면 꼬물거리는 아가 손이 떠오르고, 자그마한 양말 톡 나오면 옴직거리는 아가 발이 눈앞에 보였다. 순지는 이렇게 수도 없이 뜬 양말이랑 장갑들을 예쁜 상자 속에 집어넣어 침대 밑에 쌓아놓았다. 순지는 인희에게 배우겠느냐고 물었지만 인희는 고개를 저었다. 인희는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마음이 포근하고 살폿해져 마치 꿈속에라도 들어온 느낌이었다.

며칠 뒤 순지는 침대 아래에서 두툼한 상자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 안에는 여러 낡은 책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꺼내어 둘째손가락으로 표지를 살짝 어루만지더니 인희에게 보여준다. 파란색 바탕에 연두색으로 아직 다 피지 않은 수국 그림 같은 것이 아래위로 길게 그려져 있는 표지. 1939년에 나온 시집이라고 했다. 수국 옆으로 위에서 아래로 고딕체 한자로 시집(詩集) 신석정(辛夕汀)이라고 쓰여 있고, 그 왼편에 커다랗게 ‘촛불’이라는 시집 이름이 도안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인희는 한자를 읽지 못해 순지 언니가 말해 준 대로 읽었다.

“내가 제일 아끼는 시집이야. 아주 오래 된 책이라 종이가 누렇게 변했어. 내가 살던 섬에서 나올 때 가장 친한 친구가 선물로 주었는데,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가 제일 아끼던 거랬어. 여기 이것 좀 봐.”

순지는 시집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심조심 넘기며 어느 페이지인가를 찾았다.

“응, 바로 이거. 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야. 다는 못 외우고 중간중간만 간신히 외우고 있어. 이거 봐.”

순지는 한 페이지를 펼쳐서 보여주었다. 위에서 아래로 인쇄된 시였다. 고풍스러운 글씨체가 누렇게 변한 종이 위에 꾹꾹 눌린 채 제목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리고 두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시.

순지는 고개를 들고 꿈꾸는 듯한 눈으로 인희를 바라보았다. 좋지? 하는 표정이었다. 순지를 마주 바라보는 인희의 눈도 꿈결같이 깊었다.

“받아. 이거 선물이야.”

순지는 시집을 인희에게 내밀었다.

두 사람의 눈은 모두 여름밤 하늘을 수놓는 별빛처럼 반짝였다.

둘은 이렇게 짧은 여름밤을 보냈다.



올해는 장마 없이 태풍만 오려나 보다고 사람들은 한마디씩 했다. 무더위 속에서 답답하고 눅눅한 침대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벌레 기어나오던 해곶의 그 초가집보다야 훨씬 낫지만 그래도 무덥기는 마찬가지였다.

인희는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문득 눈을 뜨고 옆 침대를 바라보았다. 순지 언니가 없었다. 인희는 돌아누웠다. 목 언저리에 끈끈한 땀이 배어 있었다. 인희는 다행히 이층침대 아래층을 써서 그만했지만, 침대 위층에서 자는 언니들은 밤새 몸을 뒤척이며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인희는 얕은 잠결에 두어 번 이리저리 몸을 뒤채다 무심결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옆을 돌아보았으나 아직도 비어 있었다. 기숙사 안은 캄캄했으나 복도에 켜놓은 누런 전구 덕분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여름이라 복도 쪽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했기에 복도의 전구는 두 개 중 한 개만 켜놓았으며, 그에 더해 모두 밝기가 약한 전구로 끼워 놓았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멍하게 있던 인희는 변소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한밤중 두세 시쯤 되었을 것이다. 인희는 소리 안 나게 조심조심 기숙사 교실을 나가 복도 끝 계단 앞의 화장실로 향했다.

인희는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쳤다. 계단 아래에 누가 있나? 얼핏 난간 사이로 계단 아래쪽에서 흰옷이 비쳤다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등줄기가 오싹했지만 인희는 이를 악물고 소리 없이 세면실 겸 화장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꼬마전구 하나가 켜져 있어서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인희는 화장실에서 나와 기숙사로 향하려다 문득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깜깜한 가운데 창문에서 비쳐 들어오는 약한 불빛으로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인희는 갑자기 순지 언니의 침대가 비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인희는 어둠이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해곶에 있을 때 잠 이루지 못하는 날에는 달 없는 밤에도 밖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저 멀리 바닷가 바위 위로 뜬 잔별들을 세어보곤 했기 때문이다. 요강을 미처 비우지 못한 날 잠들기 전에 할머니가 야단치며 요강 뒷간에 쏟아붓고 오라고 할 때 뒷간까지 가지 않고 뒤란에 가서 부어버린 날도 여러 번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인희는 순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2층으로 내려간 인희는 반대편 끝 쪽으로 가는 통로 중간쯤에 희미한 빛이 어디에선가 새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어떤 흰 물체가 움직거리는 듯했다. 아니, 매달려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인희 머릿속에 해곶 뒷산 무덤 근처에서 새끼줄에 목맸다는 어떤 과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안 돼! 인희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흰 물체는 더 확실히 보였다.

사람.

사람 맞다!

불빛 가까이까지 갔을 때 순지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속옷만 입은 채 매달려 버둥거리는 순지.

“언니!”

인희는 소리쳤다. 그 순간, 순지가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눈을 치켜뜨며 인희를 쳐다보는 듯이 느껴졌다.

“안 돼, 언니!”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로 인희가 외쳤다.

바로 그때 인희는 무엇엔가 발이 걸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인희는 저도 모르게 팔을 휘저었는데 마침 복도 옆에 높다랗게 싸여 있던 깡통들을 치고 말았다.

우당탕탕!

편물기계용 기름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마도 꽉 잠그지 않았을 한 깡통에서 뚜껑이 벗겨져 튕겨나가며 시커먼 기름이 쏟아져 나오고, 그 순간의 요란한 충격으로 인해 맞은편 편물기계 나무판에 켜놓았던 촛불이 흔들리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이렇게 해서 촛불은 바닥에 쏟아져 사방으로 흩어지며 흘러가는 기름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편물기계를 타고 올라간 불은 실타래에 옮겨붙고, 그 불은 편물기계 속의 기름으로 번져 갑자기 번쩍하며 불꽃을 피우기도 했다. 게다가 불붙은 바닥에 놓인 새로운 기름통들이 화염에 달궈져 펑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그로 인해 기름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불은 기름을 좇아 온 공장 안으로 퍼져갔다.

인희는 바닥에 넘어진 채 뒤를 돌아보고는 불이 사방으로 번지는 것을 목격했다. 얼른 일어나 앞을 보니 순지 언니는 밧줄에 매달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번지고 있는 불꽃으로 인해 순지의 흰 속옷과 팔다리와 얼굴이 붉은 빛으로 어룽거렸다. 인희 뒤쪽에서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열기가 확 풍겨왔다. 인희가 얼른 돌아보자 자기 쪽으로 불길이 달려오고 있었다.

인희는 몸을 돌려 창문 쪽으로 뛰었다. 시커먼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가 사방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인희는 죽을힘을 다해 창문 옆을 돌아 계단 입구로 달려갔다. 지옥의 손과 같은 연기가 인희 뒤에 바짝 붙어 쫓아왔다. 인희는 계단을 뛰어오르다 마지막 단에 발이 걸렸다. 앞으로 고꾸라지고 넘어지면서 미끄러져 화장실 입구 쪽에서 쓰러진 순간, 기숙사 교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 매캐한 냄새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계단통을 타고 올라와 막 3층으로 퍼지고 있었다.

여공들이 비명을 지르며 복도 뒤쪽으로 도망쳤다. 그때 한 여공이 달려와 인희를 붙들어 일으켜서 부축하며 함께 뒤로 뛰어갔다. 인희는 여공에게 손이 잡힌 채 뛰어가며 아아아 하면서 눈물이 범벅인 얼굴로 계단 쪽을 연신 뒤돌아보았다.



인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계속 울기만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와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달래고 했지만 인희는 그저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울기만 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인희가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막 문을 나서는 순간 연기가 3층을 덮친 것으로 여기는 듯했고, 그 충격으로 인희가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불은 2층을 거의 다 태우고 꺼졌다. 그러나 유독가스가 포함된 연기가 3층으로 퍼져 올라가 도망갈 곳 없는 여공들을 덮치는 바람에 피해가 컸다. 3층 뒤쪽에 있는, 실외 철제계단을 통해서 옥상과 1층까지 연결된 비상문의 안쪽과 바깥쪽 난간에 물건이 잔뜩 쌓여 있었고 또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탈출이 늦어졌으며, 소방차도 한밤중 상점들이 도로에 물건들을 많이 내놓고 집에 돌아간 탓에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다. 게다가 소방차 사다리가 한동안 중간에서 더 펴지지 않는 바람에 3층 창가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구조가 꽤 늦어졌다. 한 가지 다행이라고 한다면 한여름이고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덕에 다른 화재 때보다 연기가 빨리 빠져나간 점이다. 1층으로도 연기가 약간 내려갔지만 그곳은 피해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여공 두 명이 질식으로 한 명은 현장에서, 또 한 명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열 명이 넘게 병원에 입원했으나 다행히 이들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밖에 많은 여공이 유독연기를 마셨지만 약간의 치료를 받은 뒤로 모두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 인희는 여공들이 가장 먼저 소방 사다리에 태운 덕에 일찍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화재 현장에서 목매어 죽은 여공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뉴스를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경찰이나 언론에서는 모두 이 여공이 공장에 불을 지르고 목맨 것으로 추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러한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이유로는 공장의 도를 넘는 부당한 대우, 상사의 가혹한 억압, 공원들 간의 심각한 알력과 갈등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이게도 그 여공원의 시신감정 결과 임신 4개월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위의 추정에 더해 치정이나 개인적인 비관 등이 더해지고, 그렇다면 누가 그 여공을 임신시켰는가에 대한 추측기사가 난무했다. 그러나 이 여공과 관련 있노라며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한 한편 여공의 옷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자살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단지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말만 간단히 써 있고 그 밑에 신석정의 시를 적어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일부 언론에서는 이 사건이 한 개인의 일탈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 방치되어 가고 있는 인권억압과 소외계층에 대한 외면으로 인해 발생한 참사였다고 해석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공장 안팎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공장 정문 밖에서는 각종 언론은 물론 메가폰과 플래카드를 든 인권, 여성, 시민, 종교단체가 포진하고 있었고, 공장 안에서는 살아남은 여공들이 모두 마당에 나와 주저앉은 채 침묵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회사와 정부에 통보했다.


첫째, 공장의 안전시설 미비 및 방치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해명과 추후조치에 대한 설명.

둘째, 피해자 본인 및 가족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

셋째, 이후의 안전시설과 장치에 대한 확실한 보장.

넷째, 직원에 대한 처우개선.

다섯째, 안전점검을 소홀히 한 당국의 책임자와 소방 지연에 따른 정확한 해명 및 담당 관련자 처벌.


이에 대해 회사와 정부 측의 즉각적이고도 확실한 대답이 없는 한 사망한 동료의 장례는 무기한 연기한다고 공원 대표가 회사와 언론에 알렸다.

여공들은 묵묵히 주저앉은 채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죽은 동료가 불쌍하고, 그들을 이곳 사지(死地)까지 보낸 가족들을 원망하며, 이들을 돌아보지 않은 사회와 국가를 증오하고, 자신들도 언젠가는 죽은 동료와 동일한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에 몸과 마음은 물론 영혼까지 떨려왔던 것이다.

이에 더해 피해자 가족들이 하나둘 도착하여 영안실과 입원실로 달려가거나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여공들과 합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지의 가족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을 신문은 연일 대서특필했다.



4


팔덕은 화재 당일 오후에 공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간신히 인희를 찾았다. 주변에서는 인희가 화재 당시의 충격으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떨기만 한다고 팔덕에게 말해 주었다. 팔덕은 인희를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역시 인희는 거의 말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거나 간간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으나 다친 데는 하나도 없었다.

“너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야. 울지 마.”

팔덕은 인희를 달래며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인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팔덕은 인희를 공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조그만 제과점에 들어가서 인희를 앉혀놓고 또다시 물었다. 그러나 인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팔덕은 인희에게 공장에 들어갔다 올 테니 잠시 앉아 있으라고 하고서 나갔다.

30여 분 뒤 제과점에 돌아온 팔덕은 다시 인희에게 물었다. 그제서야 인희는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다가 문득 잠이 깨어 화장실에 간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눈물이 쏟아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말을 조금 꺼내고는 또 울고…….

결국 인희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팔덕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인희야, 너 절대 이 이야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이게 남한테 알려지면 너 잡혀가. 두 사람이나 죽었잖아. 그리고 공장에서 피해 본 것 다 너한테 물어내라고 할 거야. 죽은 사람 가족도. 다친 사람들도. 너 평생 걸려도 다 못 갚아. 절대 얘기하면 안 돼. 알았지?”

인희는 예상은 했겠지만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너 여기에서 가만히 있어. 나 한번 더 갔다 올 테니까.”

팔덕은 휑하니 제과점에서 나갔다.



팔덕은 처음에 공장에 도착했을 때 공장에 들러 인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러 다니던 중 조 계장이 자기를 급히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선 인희에게서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을 듣고 싶어서 제과점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제과점에서 인희를 통해 자초지종을 알게 된 팔덕은 우선 인희를 멀리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라도 인희가 한 짓을 공장에서 알게 된다면 보통 난감해지는 것이 아니다. 팔덕 자신도 아주 곤란해진다. 혹시 조 계장이 이 일에 대해 눈치 채고서 자신을 찾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냥 이대로 인희를 데리고 멀리 가버릴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한번은 조 계장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찜찜하지만 한번 더 공장으로 향했다.

팔덕이 공장에 도착하자 정문이 닫히고 경비원이 가로막았다. 자신이 좀 전에도 공장에 들어갔었다고 하며 인희에 대해 언급했으나 소용없었다. 팔덕이 잠시 망설이다 돌아서려는데 저만치서 조 계장이 손을 흔들며 부르는 것이 보였다. 팔덕은 괜히 왔나 하며 찜찜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조 계장이 정문 옆 작은 문을 열며 들어오라고 했다.

“잘 왔어. 빨리 들어와. 꼭 얘기할 게 있어……. 어, 들어오라니까.”

팔덕은 머뭇머뭇하면서 공장 마당으로 들어갔다. 조 계장은 건물 옆 그늘로 가서 팔덕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이번에는 내가 부탁 하나 하자.”

팔덕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땅만 쳐다보았다. 삼복더위에 그렇잖아도 무더운데 끈적거리는 뜨거운 팔이 목덜미에 닿아 있으니 갑자기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너 인희를 오늘 데리고 가. 다시는 이 근처엔 얼씬거리지 말고. 내 부탁이다. 인희는 우리 공장에서 일한 적이 없는 거야. 알겠지? 인희의 물건 남아 있는 것 있으면 지금이라도 내가 갖다줄게. 혹 아주 중요한 물건이 없다면 내가 알아서 처분하고 그 대신 값을 쳐서 줄게. 그게 싫으면 소포로 보내줄 테니 주소를 알려줘……. 응,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지난번에는 내가 네 부탁 들어줬으니, 이번에는 내 부탁 네가 들어줘라. 절대 이곳에 다시 오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인희가 여기에서 일했다는 말 하면 안 된다. 알았지? 내가 나중에 한잔 살게.”

처음에는 인희가 그 화재에 관여된 것을 회사에서 알게 되어 인희를 보호하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조 계장의 말투나 표정, 또 절박함에 가까운 부탁 등을 생각해 볼 때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꼈다.

팔덕은 약간 혼란스러운 상태이지만 인희를 데리고 이곳을 아주 떠나는 것은 자신도 바라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조 계장은 팔덕의 모습을 보고 안도하듯이 서둘러 말을 했다.

“이거 가지고 인희 맛있는 것 좀 사먹여. 많이 놀랐을 거야. 혹 병원에라도 가게 되면 나한테 연락해.”

조 계장은 주머니에서 지폐 서너 장을 꺼내어 내민다. 팔덕이 머쓱해서 가만히 있자 조 계장은 팔덕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이면서 지폐를 더 꺼내는 것이었다.

“아 참, 혹 당분간 인희가 갈 곳이 없으면 이 돈으로 여관비 해.”

억지로 주는 돈 사양할 필요는 없지.

팔덕은 적당한 때에 자기가 한번 더 올 테니 인희의 물건은 그때까지 보관했다가 달라고 하고서 공장을 나섰다.

팔덕은 혼란스러웠다. 오히려 자신이 돈을 주면서 인희를 붙잡지 말라고 부탁해야 할 처지 같았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의 상황.

이게 뭐지?

팔덕은 제과점으로 돌아가면서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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