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 선생은 일단 자신의 생활이 안정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통일양말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혹 한성인쇄에 자리라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성인쇄에서는 의외로 싸늘했다. 아마도 손 사장이 인희 문제로 인해 정 선생을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인희를 찾았으면 자신에게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정 선생은 짐작했다.
정 선생은 하는 수 없이 통일양말 사장 집으로 전화를 했다.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사장을 바꿔주지 않는다. 부인 말대로 집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떻게 한다…….
한성인쇄 정문 어귀에서 정 선생이 서성거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미스 곽양이 커다란 가방을 힘들게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정 선생은 얼른 뛰어가서 가방을 받아주었다.
미스 곽은 밝은 얼굴로 맞으며 묻는다.
“아유, 고생 많으셨다죠, 그동안? 저희 사장님께 말씀 들었어요. 많이 수척해지셨네요. 몸은 괜찮으신 거죠?”
“미스 곽 염려 덕분에 아주 좋습니다.”
“안에 들어가시죠. 사장님이 좋아하실 텐데.”
“아, 안에 들어가 뵙고 나오는 중입니다. 저기…… 혹시…….”
정 선생은 자기 사정을 이야기했다. 당장 어디 가서 일을 해야 할 처지라고.
미스 곽은 환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전화번호를 뒤졌다.
“저…… 여기도 인쇄소인데……. 만리동에 있어요. 여기서 좀 먼데,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하죠. 알려만 주십시오. 지금 당장이라도 가겠습니다.”
“전화번호 적어드릴 테니 그곳에 가서 사장님을 찾으세요. 제가 전화 걸어놓을게요. 내일 가시는 게 좋겠어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녜요. 얼굴이 많이 수척하셨어요. 몸 좀 챙기셔야죠.”
정 선생이 만리동의 서울인쇄소에서 총무 일을 하기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다. 워낙 성실한데다 법학을 전공한 덕에 회사 내의 모든 일을 질서정연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었다. 경리 일에서부터 거래처 관리, 회사 내의 모든 장부 정리 등 모든 분야를 혼자서 담당해도 될 정도였다. 또한 정 선생은 미스 곽이 소개할 때 자신의 동네에서 본 이름 대신 정 선생이라고 불린다는 말을 한 덕에 이곳에서도 정 선생으로 모두들 불렀다. 그러나 정식 직급은 관리과장이었다. 즉, 송정민 과장인 것이다. 그러나 정민은 정 선생으로 불리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또다시 정 선생이 된 정 선생은 그동안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쇄소 사무실에서 잠을 잤고, 먹는 것은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별도의 방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정 선생은 짬을 내어 한성인쇄로 갔다. 팔덕에 대한 그림자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손 사장에게 인사하러 사무실로 올라갔으나 화투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정작 주인은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다가 또다시 미스 곽과 마주쳤다.
“어머, 오랜만이시네요. 일 잘 하고 계시죠? 저도 말씀은 들었어요.”
“미스 곽한테 한턱내야 하는데 이렇게 어물어물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호호, 기대할게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아, 저……, 제 사정 아시겠습니다만, 팔덕이를 찾아야 해서요. 혹 아시는 거 없습니까? 지나가다 들은 얘기라도…….”
“글쎄요……. 음……, 그게 도움이 되시려나……. 저 혹시 통일양말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 있잖아요. 좀 성격이 괄괄하셔서 사람들이…….”
“아, 심통 아주머니?”
“네, 그분. 그분한테 좀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정 선생은 미스 곽을 통해 양말 빼돌린 사건에 대해서 소상히 들었다. 그때 심통 아주머니가 팔덕과 공모했다 하더란 말, 그 뒤 그 아주머니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그 이후는 통 소식을 모른다는 것 등등.
그래, 맞다. 지난번에도 심통 아주머니를 통해 팔덕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무언가 짚이는 게 있었다. 그 당시 심통 아주머니가 팔덕에 대한 정보를 자신에게 흘려주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의도적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하…….
정 선생은 심통 아주머니에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팔덕은 눈치 빠르고 영악한 녀석이라 직접 다가가기 힘들다. 지난번처럼 심통 아주머니를 통하면 팔덕에게, 그리고 인희에게 연결될 수 있으리라.
이제 시작이다. 기다려라.
정 선생은 통일양말로 갔다. 일단 고우나 미우나 젊은 꼰대에게 가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젊은 꼰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 선생은 사무실에서 내려와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사람이 몰려왔다. 다들 정 선생 얼굴이 밝아졌다며 좋아한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눈 뒤 정 선생은 심통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말문이 터져나왔다.
심통 아주머니, 이름은 문혜실. 고향은 강원도 원주. 가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정 선생이 통일양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곳에서 일을 했다. 꽤 오래 한 곳에 붙어 있었던 셈이다. 술과 노름을 좋아하고, 만사태평 성격인 듯하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친구는 거의 없지만 노름판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야매물건 거간꾼인 철종이라는 인간과 경기물산을 통해 양말을 빼돌렸다. 그러나 통일양말 사장은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불량양말이야 어차피 폐기시켰을 것들이고, 정품양말 약간 손해난 것은 없는 셈 쳐도 상관없다고 판단했을 듯하다. 사장 자체가 그런 수법을 통해서 재산을 모은 인물이었으니까. 어차피 이쪽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누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 아니, 그보다는 경찰에 신고하면 오히려 여러 번잡스런 일들이 발생해 피곤해질 것을 염려했을 터이다.
어떻든 철종이라는 사람과 경기물산 쪽으로도 접근을 해보자고 정 선생은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통일양말 직원들을 통해 심통 아주머니, 즉 문혜실에 대한 실오라기 같은 정보라도 모아보기로 마음먹었다.
2
인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순지 언니가 왜, 왜,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자신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고 책까지 선물한 그 언니가……. 왜, 왜, 왜……? 늘 꿈꾸는 듯했던 그 눈망울, 남한테 탓하는 말 한번 안 했던 그 여린 성격.
안 돼…….
그리고 인희 자신이 저지른 일, 그게 정말일까? 정말로 내가 그 일을 저지른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자신은 순지 언니를 보고 너무 놀라서 정신없이 뛰어간 것뿐이었다. 그러다 무엇에 걸려 넘어졌지. 그리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그렇게 크게 번진 걸까?
인희는 거의 사고가 마비되어 있었다. 인희의 기억에는 순지의 얼굴, 그 중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툭 튀어나온 듯이 보이는 눈, 그것이 너무도 크고 또렷이 자리 잡고 있고 나머지는 꿈결같이 흐릿하게 머릿속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던 불길이나 자신이 공장 안을 정신없이 뛰어 계단으로 올라간 것들이 모두 흐릿한 영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 정신없이 순식간에 이어진 소동, 비명, 시커먼 연기가 3층 전체를 채우고 여기저기에서 쿨럭거리며 창문을 깨고 아우성치던 것들이 모두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인희는 소방차 사다리를 통해 구조되어 공장 마당으로 내려오고,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는 소동 속에서도 혼비백산한 얼굴로 계속 울부짖기만 했다. 인희는 무엇인가 반복해서 말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그 소리는 그저 놀라서 부르짖는 단순음으로만 들렸던 모양이다.
아아아…….
제과점에서 팔덕을 기다리는 인희는 그대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인희 스스로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앉아 있는 의자에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 몸은 별개의 것이었다. 인희의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말만 끊임없이 맴돌았다.
순지 언니, 안 돼, 눈, 불, 연기, 죽고 싶어, 도망가고 싶어…….
그런 중에도 팔덕이 달래고 진정시키고 계속 말을 시키고 하는 바람에 인희는 조금씩 조금씩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희는 팔덕을 따라서 경기도의 시흥군 동면 가리봉리에서 서울로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가리봉동으로 갔다. 서울의 남서쪽 끝이었다. 허름한 여인숙에서 사흘을 묵었다. 그동안 팔덕은 여러 번 몇 시간씩 나갔다 오곤 했다. 인희는 변소 가는 일 외에는 거의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누워 있기도 하고, 그러다 잠들어 어지러운 꿈에 시달리기도 하고, 벽에 기대어 앉아서 다리를 오므린 채 무릎을 껴안고 멍한 눈으로 맞은편 벽을 바라다보기도 했다. 밥은 잘 넘어가지 않았으나 팔덕이 재촉을 하는 바람에 억지로 넘기기는 했다. 하지만 속에서는 받지 않아 토하기도 하고 간신히 참아내기도 했다. 한번은 밖에 나가 조금 걷다가 그대로 도망가자 생각하고 골목 벽을 붙잡고 제법 멀리까지 갔으나 머리가 어지러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땅만 바라보고 있기도 했었다.
3
팔덕은 여기저기 열심히 찾아다녔다. 지금껏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이리저리 연결된 인맥을 통해 요즘 한창 불고 있는 수출 바람을 타고 마구 세워지고 있는 공장들의 생리에 대해 이것저것 얻어들었다. 그러한 정보들을 통해 팔덕은 조 계장과 나눴던 대화의 행간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아직 정확한 판단이 서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일을 서둘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팔덕은 그동안 무모하리만큼 엉뚱한 짓을 여러 번 저질렀다. 최근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자면 수원의 싸구려 하숙과 밥집, 심통할멈의 도피 겸 납치, 인희와 얽힌 여러 번의 모험을 비롯해서 자신이 서울로 올라온 초기 때부터 있었던 크고 작은 충돌과 말썽, 또한 그때마다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던 사건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벌일 때마다 팔덕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아직까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모험을 통해 팔덕 자신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변신해 있었다. 이제는 엄연한 사업가로. 나이 스물도 안 되어 해곶에서 서울로 올라와 배곯으며 몸부림치던 그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팔덕은 다시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늘 그러하듯이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본능이 앞장서서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팔덕의 발걸음은 부천의 편물공장으로 향했다.
“인희 물건들을 가져가려고요.”
팔덕은 정문 현관에서 연결된 인터폰으로 조 계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 계장은 공장 밖 조그만 다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동안 조 계장님 덕을 제가 많이 봤습니다.”
“뭐 그런 말을. 인희는 괜찮아?”
“예, 처음에는 그 충격으로 힘들어 했는데 많이 나아졌습니다.”
“아이가 착하고 말이 없어서 어디 가나 귀여움 받을 거야. 내 안부나 전해 줘. 그리고 다시 한번 부탁하는데, 이곳 근처에는 오면 안 돼. 알았지?”
“아 참, 그렇잖아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팔덕은 조 계장의 눈길을 피하며 어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인희가 당장 일할 곳도 없고 해서……. 공장에서 좀 생각해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조 계장의 얼굴빛이 변했다.
“아니, 뭐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다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조 계장은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듯이 팔덕을 바라본다. 팔덕은 여전히 눈을 내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인희가 뭐 어린애도 아니고 알 건 다 알아서……. 그 아이가 겉은 그래도 속은 꽉 찬 애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뭐 속속들이 다 아는 것 같더라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확실히 말을 해.”
조 계장의 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인희도 먹고 살게 해주셔야죠.”
팔덕은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조 계장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당돌하면서도 음흉한 눈길 그것이었다.
“인희 그 애가 나이가 어리잖아요…….”
팔덕의 말은 이러했다. 자신이 여러 군데 다니며 다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공장에서 가공의 직원들을 만들어서 임금을 많이 빼돌리고 있었는데, 인희도 그 속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인희의 경우에는 성인으로 둔갑시키고 아주 적은 월급만 주면서 나머지 차액은 회사에서 가져간다.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에서 빼돌린 돈을 비자금으로 만들어 사장 개인이 사용하거나, 세무서나 소방서 또는 경찰서를 비롯해서 여러 정부 관련 부처들을 관리하는 데 쓰이고, 심지어 국회의원의 쌈짓돈으로도 이용된다는 것이다. 이 밖에 경리장부를 조작해서 만드는 금액도 상당하여 그 모두를 합하면 꽤 큰 금액이 된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서 인희와 같이 너무 나이가 어린 아이를 고용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팔덕 자신은 법률지식이 없지만 변호사를 통하거나 언론에 알리면, 그렇잖아도 화재로 죽은 여직원 문제로 사회 모든 눈이 집중되어 있을 때 위와 같은 문제가 더해지면 회사 입장은 더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인희의 입, 사실은 팔덕의 입을 닫게 하려면 그 대가를 지불하라는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한 협박을 전달한 것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 은근히 흘리듯 말을 덧붙였다. 목매 죽은 여직원이 임신했다는데 혹 그 상대 남자가 누구라는 소문이 돌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속삭이듯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마무리했다.
“괜히…… 조 계장님이 그런…… 소문에…… 휩쓸리면 어떡해요…….”
4
정 선생은 철종이나 경기물산 쪽 사람들과 접촉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그쪽에서 경계해서 만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혹 경찰의 끄나풀은 아닐까 의심하는 눈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정 선생이 돈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정 선생으로선 공연히 문제가 커지지 않게 하려고 심통 아주머니와 연관된 일이라고 밝히지 않은 것이다. 정 선생은 하는 수 없이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심통 아주머니, 즉 문혜실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모았다. 자신이 통일양말에 근무할 때 보았던 문혜실 서류의 고향 주소를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내어 원주로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그 일가친척은 오래 전에 다른 곳으로 떠난 뒤였다. 그밖에 문혜실이 일했다는 곳 몇 군데도 알아보았으나 대부분 업체명이 불명확했고 나머지에서도 별 도움이 되는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저 떠돌이로 여기저기 다니며 살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특별히 누구하고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또 원수지며 살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하니 어느 누구와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고 할 형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이곳에서 지내다 훌쩍 떠나 저곳으로 가면 그뿐, 그가 가고 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관심 둘 사람도 없었던 것 같았다. 형제자매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고, 경찰기록은 물론 얻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가공의 인물, 허구의 인물과 같았다. 문혜실은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 선생은 심통여사 (이제는 줄여서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문혜실을 뒤쫓는 것을 당분간 미뤄두기로 했다. 그 대신 그동안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나서지 못한 것을 매듭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 선생은 공휴일과 주말이 겹친 연휴기간을 이용해서 새벽 일찍 해곶을 찾아갔다. 그러나 말이 해곶이지 넓은 지역 일대를 다 해곶이라 부르고 또한 마을이 밀집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인희의 고향집을 찾는 데 꽤 어려움을 겪었다. 주소를 모르고 있으니 그저 아무 가게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도 인희라는 이름이 흔한 것은 아니어서, 어떤 아주머니가 얼마 전 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린 손자 하나 남았는데, 서울로 도망갔다는 그 아이 누나 이름이 인희 비슷한 것 같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시골 아이 이름치고는 특이하고도 예쁘게 들려서 기억에 남았노라고 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물은 결과 그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정 선생이 찾아오기 2년쯤, 그러니까 인희가 떠난 지 1년쯤 지난 시기였던 것 같았다.
“혹시 그 집이 어디쯤인지 알고 계시나요?”
“에구, 나도 여러 사람들 모여 입방이 찢는 데서 귀동냥한 건데 그걸 어떻게 알우?”
“저, 혹시 그저 방향이라고 알려주시면…….”
정 선생은 담뱃값이라도 하라며 지폐를 몇 장 꺼내고 나서 정말로 방향만 얻어들었다.
그 뒤 이곳저곳 들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그 할머니 집을 묻고 물어 정 선생은 가까스로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에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완전히 폐가였다. 집 한쪽 반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게다가 인희 남동생은 이름이 인국이라 했는데,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 집과 인국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으나 대부분 경계의 눈만 보낼 뿐 제대로 응대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꼬마를 통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조 재 너머 동네에 머슴으로 갔다고 그랬는데…….”
조 재 너머 동네라는 곳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해곶에서 한참 인천 쪽으로 올라간 농촌의 한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북쪽에 있는 배곧이라는 어촌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한 월미도가 나온다. 그 근처에는 소규모 염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인국이 머슴으로 간 곳은 내륙으로 좀 들어간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정 선생은 초여름 더위에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미심쩍어하는 눈길을 받아가며 여러 사람에게 물어 간신히 그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집 근처에 가서 정 선생은 아이들에게 물어서 인국을 찾아 만났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랬겠지만 비척 마른데다가 키도 생각보다 작았고 얼굴은 바닷바람 농촌바람에 타서 시커멓게 되어 있었다. 이제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이일 텐데 그 얼굴은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촌로의 표정과 같았다. 아무런 의식도 없는 듯한 멀건한 눈, 검게 반짝이는 광대뼈에서 풍겨나오는 빈곤과 절망의 빛, 헤 벌리고 있는 허옇게 부르튼 입술 사이로 보이는 지저분하고 누런 이, 남루한 옷…….
“네가 인국이니?”
소년은 눈만 멀거니 쳐다보며 대답은 없이 고개만 약간 끄덕였다.
“어디 아픈 데 있니?”
“…….”
소년은 고개만 약하게 흔들었다.
“그래, 알았다.”
정 선생은 초로의 주인을 찾아가서 만났다.
주인 영감에게 정 선생은 자신의 신분에 대해 밝히고 여기까지 오게 된 연유를 짧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인국을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누나인 인희는 곧 찾게 될 것 같다며, 그 남매를 자신이 기르겠노라고 했다. 할머니도 함께 모셔가려 했는데 이미 2년 전에 돌아가셨다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주인은 대답은 하지 않고 먼 논밭만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댓살 몇 개 부러진 쥘부채를 펴서 활할 부쳐대면서.
“제길……,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새끼를 데려다 입히고 먹이고 가르쳐 놨더니 그냥 데려가겠다는 거네……. 이제 겨우 일을 부려먹을 만하니 원 쌍판때기도 모르는 인간이 찾아와서 지랄이야 지랄은……. 에잇, 재수 없어. 원래 저런 놈은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굶어죽는다고 하도 사람들이 아우성쳐서 할 수 없이 떠맡았구만……. 에잇, 내 입도 풀칠하기 어려운 처지에 남에게 간신히 베풀었더만 돌아오는 건 그저 공수뿐이야…….”
정 선생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저 영감님…….”
“에이, 됐수다. 가보슈. 애 일할 시간에 이렇게 빈둥거리면 저 밭 누가 다 맬 거야?”
주인은 엉거주춤 일어나려 한다. 정 선생이 주인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이 양반이 이거 왜 이래? 왜 남의 팔을 붙잡고 이러는 거야? 뭐 힘이라도 쓸 요량이오? 애를 강제로 빼앗아 가게?”
“아이고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합니까?”
정 선생은 화들짝 일어나서 허리를 반은 숙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제 말씀을 잠깐 더 들어보십시오. 그러니까 제 말은…….”
주인의 요구는 간단했다. 값을 지불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생면부지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아이를 달라 하면 덥석 내줄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정 선생은 일단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내밀었다. 그리고 원하는 금액을 말하면 차용증을 써주고 근처 이장이나 뭐 믿을 만한 사람에게 가서 보증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못 미더우면 이틀 후에 연휴가 끝나는 대로 은행에서 돈을 찾아 다시 오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드린 돈은 우선 받아두라고 덧붙였다.
주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곰방대를 문 채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반쯤 돌아앉으며 이렇게 말을 했다.
“못 믿는 게 아니고, 사람이 다 그렇잖소? 아니, 서울에서 왔든 어디에서 왔든 내가 어떻게 알겠소? 저 아이가 겉보기엔 저렇게 미련퉁이 같아도 속은 좋은 애요. 일도 웬만큼 하고. 그런 아이를 한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벌건 대낮에 와서 덥석 데려가겠다는데 어느 누가 그러쇼 하고 뒷짐 지고 있겠냔 말요. 안 그러우? 개르던 개나 소도 헤어지면 눈물 나는 건데 사람새끼는 더할 것 아니겠소? 내가 저놈을 글자 그대로 눈물로 키웠소. 밤낮 끼고 자며 애지중지 이때껏 정을 쏟았다고. 알겠소? 그런 인륜지정은 함부로 끊는 게 아니오……. 험.”
주인은 곰방대로 마루의 턱을 탁탁 두드려 재를 털어냈다.
사실 정 선생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주인의 말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구구절절 옳은 말임에는 틀림없다.
정 선생은 무릎을 꿇었다.
“제가 크게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못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거듭거듭 사과드립니다…….”
결국 정 선생은 주인의 마음을 간신히 달래고는 차용증을 써서 짐짓 못마땅해 하는 주인에게 강제로 손에 쥐어주다시피 하고서 굽신굽신하며 일어섰다.
절을 하듯이 허리를 몇 번이나 굽히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자그마한 누렁이가 뒤쫓아오며 깩깩 짖어댄다. 정 선생은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5
팔덕은 조 계장으로부터 두둑이 챙겼다. 사악하고 영악한 팔덕이 항상 이기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나온 돈이든 조 계장 개인 돈이든 관계없었다. 목맨 여자와 조 계장이 상관있었든 없었든 그것도 관심 밖이었다. 사실 팔덕이 보기에 조 계장은 목맨 여자와 그런 관계를 가질 위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 속을 누가 알랴. 설사 그렇더라도 아무려면 어떤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은 주머니만 부풀리면 되는 것이다. 팔덕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렇잖아도 수원의 밥집을 거두고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었던 차에 자금이 넉넉히 들어온 것이다. 아직도 운은 팔덕 편이었다.
하지만 팔덕에게는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심통할멈을 빼내온 것이 잘한 짓인지 못한 짓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어딘지 매듭이 하나 풀어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심통할멈의 수작 덕분에 자신의 꼬리가 밟힌 적이 있었잖은가.
그 생각만 나면 가끔 뒤가 따가워져 얼핏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십리나 성수동 쪽으로는 이제 아예 얼씬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이름을 바꾸었고, 또한 주변에서도 새로운 별명으로 불러주었기에 다소 안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혹 인희를 통해서 그쪽에 알려지게 될까 걱정되어 가능한 한 저쪽에서 먼 곳으로 돌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인희 문제는 정말 골치 아팠다. 화재사건 이후 인희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하다 싶기도 했지만 사실 걱정은 걱정이었다. 수원 하숙에는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괜스레 심통할멈에게 핀잔 듣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보다는 그곳에서 어수룩하지만 예쁘장한 아이가 팔덕과 함께 있다는 소문이 돌면 자칫 왕십리 쪽으로 들어갈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힘들기는 했지만 서울 남서부 변두리 쪽을 돌면서 이곳저곳 끌고 다녔다.
하지만 그렇게 1년이 넘자 팔덕은 지쳤다. 차라리 해곶으로 다시 데려다줄까 몇 번이나 망설였다.
“인희야, 너 집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 지금도 가고 싶니?”
인희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말해. 내가 데려다 줄게.”
인희의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팔덕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릿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 때나 가고 싶으면 말해. 나 간다. 밥 잘 챙겨먹고 주인아줌마 시키는 대로 일 잘 해. 알았지?”
돌아서서 수원으로 향하는 팔덕의 마음은 무거웠다.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쉬어졌다.
팔덕의 수원 하숙은 잘 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반값이어서 큰돈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일대에서는 제법 잘 나간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 말이 들릴 때마다 팔덕은 속으로 피식거렸다. 소문난 잔치일 뿐이지.
게다가 주변 건달들이 늘 찝쩍거렸다. 돈 깨나 나올 법해 보였던 모양이다. 대부분은 외다리 상이군인이 배 째라고 드러눕는 덕에 넘어갈 수 있었지만 사실은 팔덕이 뒤에서 용돈 쥐어주어 쫓아보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 푼돈 모아 목돈 내주는 꼴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주머니가 조금씩이나마 불어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팔덕으로서 가장 골치 아픈 일은 경찰서나 보건소에서 뭣 좀 챙길 것은 없는지 하는 심보로 툭하면 찾아오는 놈들이었다. 그들을 잘 관리하면 팔덕의 장사에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날이 갈수록 속이 뒤틀리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수완이 좋네 그려. 아이디어가 좋았어. 반값이라는 거. 그런데 그것도 주머니가 두둑해야 버티는 건데 재미가 아주 좋은가 봐. 이봐, 젊은 양반, 우리가 자꾸 찔러대면 여기도 골치 아파져. 눈치껏 잘 해야 돼.”
씨×, 니 아가리 채워달라는 거잖아! 까놓고 말해. 씨×.
“아까 밥집 주방 들어가려다 말았는데, 거 겉보기에도 아주 험해. 신경 좀 쓰셔야겠어.”
팔덕은 여기저기에서 꼼수 쳐서 그러모은 돈, 가난뱅이 길거리 비렁뱅이들 주머니에서 빼낸 돈들 돌아서서 꼬깃꼬깃 꺼내어 그런 놈들 주머니에 슬쩍 꽂아줄 때 눈에 핏발이 섰다. 결국 조 계장들 돈을 그 악당들에게 운반해 준 것밖에 뭐가 되느냐는 말이다. 팔덕 자기는 사기치고 다니고, 이놈들은 자기가 사기친 돈 가만히 서서 빨아먹고. 팔덕은 으드득 이가 갈렸다.
6
편물공장에서 나온 이후 근 1년 반 이상 인희는 이곳저곳 떠돌았다. 팔덕의 손에 이끌려 밥집, 다방의 주방보조, 야채가게의 심부름꾼, 중국음식점과 조그만 회사의 청소 등등을 전전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인희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울며, 때로는 발작하고, 때로는 쫓겨나거나 심한 욕설과 손찌검을 당해 도망치기도 하고, 한밤중 거리를 방황하다 파출소에 끌려가 팔덕이 데려오기도 했다.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심한 비명을 지르며 깨기도 하고,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울기도 했다. 게다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가도 다시 멀쩡해지곤 하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팔덕은 이러한 인희의 증상을 미끼로 조 계장에게서 조금씩 돈을 뜯어냈다. 인희의 병원비와 약값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번도 병원에 가거나 약을 산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인희가 안정되어 가자 팔덕이 인희를 끌고 안양 아래의 군포에 있는 봉제공장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지금 인희는 이곳에 온 지 3개월이 되었다.
봉제공장에서는 숙식제공 조건으로 월급은 거의 없이 용돈 수준만 조금 주겠노라고 했다. 인희의 처지를 잘 아는 팔덕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우선 더 이상 인희의 뒤치다꺼리에 시간과 돈과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도 팔덕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 남에게 이끌려 수원의 하숙과 밥집을 처분하고 평택과 대전으로 전전하다가 이제 겨우 다시 자신의 사업이랍시고 막 대천해수욕장 근처의 낡고 허름한 여관을 사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봉제공장은 군포에서는 보기 드물게 4층으로 된 건물이었다. 바깥쪽이 원래는 매끈한 흰 타일로 치장되어 있었으나 2년 전 화재가 나서 외벽이 다 그을리고 일부는 떨어져 나가 있었다. 이 건물을 헐값으로 인수한 새 주인이 다른 곳에서 하던 봉제공장을 이곳으로 이전했다. 이곳 역시 여공원들은 인희보다 대부분 대여섯 살 위였다. 공장에는 직원이 많았으나 대부분 외부에서 출퇴근했고, 인희를 비롯한 다섯 명만 3층에 있는 조그만 공간을 개조하여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인희는 지금까지 모은 약간의 돈이 있었지만, 지난 1년 반 여의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늘 팔덕의 손에 끌려다닐 수도 없었다. 인희는 앞으로는 얼마나 벌게 되든지 당분간은 그 돈을 모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해곶에는 인희 자신에게 어느 정도 금액이 쌓인 뒤에 보내자고 생각했다. 할머니와 인국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인희 자신에게 힘이 있어야 그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희는 이 봉제공장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말이 없어졌다. 누가 말을 걸어도 대꾸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것으로 대신했고, 어쩌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말할 때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즈음 팔덕에게는 거의 연락이 오지 않았다. 팔덕은 멀리 서해안 쪽으로 가게 되어 자주 올라올 수 없다는 말도 했었다.
그러던 중에 숙소에 함께 있는 한 언니와 그나마 조금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예쁘장하고 잘 웃는 그 언니는 인희에게 여러 가지를 잘 가르쳐 주었다. 자신에게도 인희 나이의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하며, 지금 고향에서 자신이 보내주는 돈으로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 대신 공장에서 일을 하는 인희를 보면 가슴이 아리다고 했다.
“너 내 동생하고 너무 비슷해. 그 아이도 거의 말이 없었거든. 그 애가 하도 답답해서 많이 싸우기도 했단다. 우리는 싸우지 말자.”
언니는 이렇게 말하며 헤헤 웃었다.
“그 대신 나한테 다 털어놔. 네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 말이야. 알았지?”
인희는 언니가 고맙기는 했지만 마음을 다 열어놓지는 않았다. 아니, 그 언니에게는 물론 앞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희는 그런 식으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서도 외부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