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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와 오케스트라 (2)

제1장 | 가을정원 (2)

by Rudolf

남궁 여사는 사흘째 두문불출했다.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카톡과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메일은 보지도 않았다.

침대 옆 쓰레기통에는 여러 명함이 찢어진 채 뒤섞여 있었다.

손님들이 남궁 여사에게 준 명함들을 모두 받아서 모아놓았던 것들이다.


비뇨기과 전문의 정…….

한국은행 국제협력실 손…….

대전지검 검사 안…….

수원지법 판사 송…….

금융위원회 김…….

미국중앙은행 FRB의 한국지부 이…….

법무법인 기성의 변호사 표…….

회계사 전…….

국무총리실 사무관 평…….

삼성전자 비서실 윤…….

서울대학교 조교수 류…….

한국방송공사 편성국 이…….

재성그룹 둘째 아들 임…….

하버드 대학 연구교수 박…….


반면에 정 회장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괜히 혼자서 낄낄거리기도 하고 흥얼흥얼 ‘밤하늘의 잔별같이 수많은……’ 노래를 나직이 읊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노래 좋아’ 하며 미소 짓는다.

정 회장에게도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파티 좋았어. 딸 언제 치울 거야? (마누라한테 물어봐.)

골프 한번 치지. (난 골프 안 치네. 운동에 소질이 없어.)

찜질하러 가세. 좋은 데가 있어. (에이, 뭔 찜질. 집에서 샤워나 하면 되지.)

파티 잘 먹었으니 내가 한번 사지. 언제 시간 나나? (요즘 소화불량이라…….)

김 박사가 영국에서 공부하던 둘째 아들이 들어왔다며 만나자고 하는데……. (우리 마누라한테 얘기하게.)

저번에 초청장 보내준 우리 딸 발표회에 오겠나? (마누라 머리 싸매고 드러누워서…….)

과기부 차관하고 만날 일이 있는데 같이 가세. (만나봐야 골치 아픈 얘기겠지.)

동문회에서 초청하고 싶다는데……. (봉투 하나 보내지 뭐.)

민 교수 출판기념회……. (못 간다고 말해 두었네.)

김 회장이 집에다 노래방 기막히게 설치했다는데……. (난 음치라서…….)

무슨 재미로 사나……. (마누라에게 들볶이는 재미.)

사람 참…….

에구, 관두세…….



주원은 우울했다.

남궁 여사는 1층에서, 주원은 2층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흘 동안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주원은 하루빨리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공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한국에서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 남궁 여사의 과잉반응에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렇게 시달리느니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집구석에만 있으면 남자가 튀어나오니?”

“네 아버지 나이가 지금 몇인지 알아?”

“아빠 사업체 그냥 다 날려버리고 싶어? 아빠 평생 고생해서 이뤄놓은 거 죄다 남 주고 싶냔 말야…….”

“내 소리 듣기 싫으면 네가 참한 사람 하나 데리고 와 봐. 미국에 10년이나 있었으면서도 그런 재주 하나 없어?”

“민 사장 댁 딸은 얘…….”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와 닦달.

게다가 남궁 여사는 하루가 갈수록 주원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날카로워져 갔다. 그리고는 사흘이 멀다 하고 이 남자 저 남자 사진과 프로필을 들고 와서 주원을 들볶았다. 주원이 직접 만난 사람도 여럿이었다. 호기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달리기 싫어 나가주었던 것이다. 그들 중 호감이 가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주원은 기본적으로 그들 모두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 나이에 연애 한번 안 해보고 여자 소개받는다는 것이 웃기는 것 같았다. 오죽 못났으면, 아니면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너무 바쁘셨는지 모르지만, 또한 연애하다 찼거나 차였거나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들 과거를 싹 지우고 순진무구한 듯 자신 앞에 나오는 남자들.

하긴 저쪽에서도 주원에 대해 똑같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외국 나가 공부하면서 남자 한번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서로가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사람들끼리 마주앉아 상대방 탐색하는 짓,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남궁 여사는 딸을 공개석상에서 선을 보이기로 한 것이다. 귀국연주회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래서 주변의 힘 있고 돈 있고 멋들어지게 보이는 사람들 죄다 초청해서 경매 붙여보려 한 속셈이었다.

그런 야무진 의도를 주원이 다 망쳐버렸으니…….

주원은 왜 하필 자신이 그 노래를 불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그 노래를 어릴 때 몇 번 흘려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 가사나 음도 평소에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그 노래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주저 없이 구성지게 뽑아버렸으니.

음악성이 있긴 있군. 어릴 때 들은 노래를 가사까지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니.

주원은 씁쓸하게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다가 주원은 갑자기 명함이 하나 생각났다.

파티에서 받은 명함은 모두 어머니 남궁 여사가 챙겼다. 그러나 하나만은 어머니에게 주기가 뭣해서 자신의 드레스 레이스 틈에 밀어넣었다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은 혹시나 해서 정리도 하지 않고 옷장에 집어던져 놓은 드레스를 들춰보았다.

없었다.

피―.

어딘가에 떨어져 버렸군.

잘됐어. 그런 거 찾아봤자…….

옷장 문을 닫으려는데 바닥에 조그만 종이가 하나 떨어진 것이 보였다.

저것인가……?

맞다. 주워보니 바로 그 명함이었다.



인간에서 탈출하다

Body Art


웃겨. 뭘 탈출한다는 거야?

표범으로 바디페인팅을 한 사람.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상반신을 모두 바디페인팅으로 장식했고, 그 아래 바지도 그에 맞게 얼룩덜룩한 것으로 입었었다. 구두는 흰색.

가을밤이라 윗도리 안 입으면 꽤 추웠을 텐데 괜찮았을까? 괜히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고생 참 많이 하는구나.

그런데 표범 바디페인팅 위에 금박을 뿌려놔서 그런지 온몸이 반짝반짝했었지. 머리 뒤가 좀 튀어나왔던 것 같은데, 머리칼을 뒤로 묶어서 그런가……. 장발이었던 모양이네.

주원은 별걸 다 생각하고 있네 하고 자신을 향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눈이 무척 인상 깊었던 것을 주원은 기억하고 있었다.

강렬했다고나 할까, 표범의 날카로운 눈빛. 그러나 어딘지 선한 표범 같았다. 라이온 킹처럼.

직업도 참 여러 가지구나. 힘들게들 산다.

하긴 저쪽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처럼 악기 들고 먹고 사는 것도 힘들겠다고 여기겠지. 떠돌이 악사들. 바이올린 하나 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연주해 주며 던져주는 돈 받고, 남들 흥겨워할 때 뒤에서 깽깽이 소리나 내주는 것. 남들이 보면 그게 그거겠지. 돈 좀 있으면 클래식을 하네 하며 우쭐대겠지만 그런 계층이 얼마나 되랴. 음악 한답시고 평생 남의 그늘에서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텐데.

공연히 이런 생각을 해서 주원의 기분은 그러잖아도 가라앉아 있었는데 더욱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아, 답답해.

주원은 파티 나흘 만에 밖에 나가기로 했다. 친구들한테 연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파티 끝나고 몇몇 친구가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또한 카톡과 메시지나 이메일도 보냈지만 들여다보기만 하고 답은 하지 않았다. 모두들 잘했다, 예뻤다, 부러웠다, 결혼해라, 미국 언제 나가니, 힘들진 않았니 그런 것들이었다. 노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가 노래에 대해서 말을 해주었으면 당장 나가서 밥을 사주었을 것이다.

밤하늘의 잔별 같은…….

그게 뭐 어때서?

뻔하지 뭐. 고상들 하셔서.



주원은 잠원동 저택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카카오택시를 불렀더니 금방 왔다. 몇 번 타봤기에 이제는 신기하지도 않았다. 서울에서는 차 몰고 다니는 것보다 택시가 더 나을 것 같았다. 복잡한 서울 거리, 운전하고 싶지도 않았다.

교보문고빌딩.

안으로 들어가 안내판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높이 달려 있어서 그거 쳐다보는데 고개가 다 아팠다.

18층.

그곳에 핀란드 대사관이 있었다. 전화로 미리 알아보니 오전에만 문을 연다고 한다.

주원은 미국에서 이미 몇 번 이메일을 보내어 유학비자에 대해 문의했다. 따라서 일부러 이곳에 와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주원 스스로에게 외출할 핑계를 주기 위해 핀란드 대사관을 떠올린 것이다.

18층에 올라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좁은 복도를 걸어가 왼쪽으로 한번 꺾어지니 오른편에 핀란드 대사관이 나왔다.



대사관 입구는 유리문으로 되어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몇 사람이 와 있었다. 주원이 유리문을 밀어보니 열리지 않았다. 안에 앉아 있는 한 외국인 남자가 손가락으로 문 옆을 가리킨다. 그곳을 보니 벨 누르는 곳이 있었다.

주원이 벨을 누르자 한국어로 묻는 목소리가 조그만 스피커를 통해 나온다. 유학비자 때문에 왔다고 하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조그만 로비 건너편에 또 다른 두꺼운 유리창 안에서 한국인과 유럽인이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돌아다보았다. 주원이 다가가서 또 한번 유학비자 문제로 왔다고 영어로 말하자 사람 좋게 생긴 유럽 여자가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로비에는 의자가 몇 개 있었다. 한 의자에는 좀 전의 그 외국인 남자, 아마도 인도인 같은 40대 남자가 웃는 얼굴로 주원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또 다른 의자에는 한국인 할아버지가 손자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와 조그만 색종이 비행기를 접어서 날리며 놀고 있었다.

주원은 인도인과 할아버지 사이에 있는 두 개의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귀여운 남자아이가 비행기를 잘못 날려 주원의 가슴께로 날아왔다. 주원이 살짝 잡아서 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가 옆에서 아이 대신 말을 했다.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하준아, 너도 죄송합니다 그래야지.”

“죄송합니다.”

주원은 어린 남자아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것을 보고 손을 저으며 웃어주었다.

“애 엄마가 저 안에 들어가 인터뷰하고 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애가 지루해 하네요.”

할아버지가 점잖은 목소리로 말해 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이야기가 꽤 이어졌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 주원이 다니는 학교 NEC 작곡과 졸업생이었다. 주원도 아는 사람이다. 자신보다 한 학년 위였다. 작곡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부자들이 다니는 학교로 유명한 LA의 사립대학 USC의 대학원 영화음악과에 들어갔다. 그곳을 우등으로 마친 뒤에 한국에 돌아가서 해군에 입대했다는 말까지 듣고 그 뒤의 소식은 모르고 있었다. 세상 참 좁았다. 이렇게 알게 되는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그 선배는 지금 한국의 유명한 게임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한다고 했다. 주원은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주고 그 선배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주원은 핀란드 헬싱키의 유일한 음악대학인 핀란디아 아카데미로 유학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어머니 남궁 여사가 하도 유럽으로 가서 더 공부하라고 닦달을 하는 바람에 핀란드로 방향을 정한 것이다. 어머니가 말하는 유럽은 물론 남쪽의 이탈리아이다. 그래서 일부러 유럽의 제일 북쪽인 핀란드를 택했다. 남궁 여사가 알면 한번 더 드러누울 것이다.

핀란드 대사관 인터뷰실에 들어가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주원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니 더는 갈 곳이 없었다. 어느 찻집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는 것 외에는.

날은 화창했다. 기온도 기분 좋을 정도고, 미세먼지도 없다고 한다. 이는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으로 확인했다. 주원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무엇인가가 잡히자 무심코 꺼내보았다.

명함.

바디페인팅.

풋.

웃음이 나왔다.

웃어?

그래 웃었다, 왜?

주원은 자신에게 시비 걸었다.

아서라.

주원은 명함을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걸었다. 무턱대고. 목적도 없이.

세종로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메가폰을 들고 정치적 구호를 외치거나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어서 주원은 골목길을 통해 종로2가 쪽으로 걸어갔다. 보스턴에서 공부하며 가끔 서울에 들어와 여러 곳을 다녀보기는 했지만 종로 쪽으로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대한민국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정말 많이 변했다. 빌딩뿐만 아니라 차도와 간판, 행인들 모습, 게다가 문화까지도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이방인. 이런 식으로 거창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수송동.

응? 뭐지? 수송동이?

갑자기 수송동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종로구 수송동.

주원은 머리가 멍했다. 걸음을 멈췄다. 지하철 종각역 사거리의 종로타워 건너편이었다.

주원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명함이 손에 잡힌다.

꺼냈다. 들여다보니 종로구 수송동…….

아하.

전화번호.

눈에 크게 들어온다.

주원은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이 소설을 2회까지 연재하다가 '실수'로 3화부터는 연재가 아닌 '일반 글'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컴퓨터에 미숙한 탓에 저지른 잘못이지요. 혹 이 이야기의 뒷부분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의 글 목록으로 가셔서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3화부터 28화까지 읽으시면 됩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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