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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May 28.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3)

제1장 | 가을정원 (3)

스타벅스. 종로타워 로비 2층에 있는 커피숍.

    주원은 후회하면서도 앉아 있었다. 모르는 남자한테 먼저 전화를 건 것이다. 생전 처음 있는 일. 역사에 남을 일이다.

    주원은 그냥 일어나 나가버릴까 생각하면서도 커피를 홀짝거리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되겠지 뭐.

    그런데 바디페인팅 안 한 그 사람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혹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눈을 빤히 들여다볼 수도 없고.

    아냐, 여기 혼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들 한번씩 눈 들여다보며 조사해 볼까…….

    주원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쪽에서 알아보겠지.

    그러나 주원의 경험으로 보아 연주회에서 본 모습하고 실제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오겠군.

    정말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 정주원 씨,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저, 내일 뵈면 안 될까요……?”

    주원은 그냥 전화를 끊었다.

    웃기는 사람.

    카톡 문자가 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급한 일이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생존의 문제라서요. 내일 이 시간에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벅×999.


    

웃긴다니까, 정말.

    주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999는 또 뭐야? 은하철도?

    답답.

    친구들에게는 연락하기 싫었다. 아는 사람은 무조건 싫다. 집에 가기도 싫고.

    하―!

    갑자기 크게 한숨이 쉬어졌다.

    주원은 조계사 쪽으로 올라가 안국동 사거리와 동십자각을 지나 삼청동으로 향하면서 크고 작은 미술관과 전시장 등등에 모조리 들어갔다. 몇 개 되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음악회는 모두 밤에 하는 것이어서 포기했다.

    저녁이 되었다.

    더는 갈 곳이 없었다.

    괜히 울고 싶어졌다. 다 큰 처녀가. 서울 한복판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정 회장이었다. 어디냐고 묻는다. 한강다리라고 했다. 왜 거기 간 거냐고 묻는다. 빠져 죽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정 회장이 웃는다. 좋은 생각이란다. 하지만 아직 죽기는 좀 이르니 그곳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한다. 데리러 오겠다며.

    “택시 타고 갈게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기는 했지만 택시 타기가 정말 힘들었다. 삼청동 근방에서는 카카오택시도 소용없는 것 같았다. 퇴근시간이라서 그렇겠지만.

    주원은 눈에 띄는 첫 번째 식당에 무조건 들어갔다.

    메뉴판을 갖다준다. 그리 큰 식당도 아닌데 격식은 다 차리는 것 같았다. 식탁 위에 메뉴판 올려놓아도 될 것을. 아니면 무슨 뜻인지 모를 야릇한 그림 걸어놓은 벽에다 차라리 음식메뉴 붙여놓고 알아서 시키라고 하든지.

    하긴 겉보기보다 값이 좀 비싼 편이라 격식을 갖추는 것 같기도 했다.

    웨이터, 아니 식당 주인 같은 사람이 미소를 지은 채 식탁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 이름들이 주원에게는 생소했다. 알 듯 말 듯 눈에 익숙지 않은 음식 이름. 갑자기 촌뜨기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주원은 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메뉴판에서 그냥 눈이 가는 대로 시켰다.

    화려하게 혼자 외출하고서, 그리고 또 혼자서 먹는 저녁.

    쓸쓸했냐고? 글쎄다. 실은 좀 쓸쓸하긴 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혼자 먹는 사람은 주원 혼자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주원은 자신의 처지가 이상하게 통쾌했다.

    그동안 잘났다고 실컷 뻐기고 나다니더만…….

    쌤통이다.



음식을 다 먹으니 계산서를 가지고 온다. 뭐 싼 거 하나 먹었는데 계산서까지…….

    계산서를 들여다보는데 뭔가 좀 어색했다.

    음식 값은 나와 있는데……, 세금이 없다. 게다가 팁 적는 칸도 없고.

    아, 여기는 한국이지.

    한국이 좋긴 좋다.

    주원은 혼자서 머리를 끄덕이며 카운터로 갔다.

    크레디트카드를 꺼내어 주었더니 주인이 미소지으며 돌려준다.

    뭐야? 현금만 받는다는 거야?

    주원은 당황스러웠다. 현금이 없었던 것이다. 요즘 현금 쓰는 사람이 어디 있담?

    지갑을 뒤지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조그만 수첩을 꺼냈다. 비상시를 생각해서 넣어두었던 돈이 있었던 것이다.

    주원은 입맛이 좀 씁쓸했지만 그것을 꺼내어 주었다.

    주인이 돈을 받고 좀 난감해한다. 그러더니 알았다는 듯이 서랍을 열어 계산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주원은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그거 다시 주세요. 제가 잠시 착각을 해서…….”

    주원은 100달러짜리 지폐를 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다시 생각이 났다.

    자신이 좀 전에 무심코 미국 Bank of America 카드를 내밀었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속으로 머리를 갸웃했다.

    음, 이상하다……. 다른 곳에서는 미국 카드 다 받던데…….

    주원은 남궁 여사가 준 한국 체크카드를 꺼냈다.    

 


다음날 낮. 전화가 왔다. 주원은 자신의 한국 전화번호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전화번호를 보았다.

    모르는 번호.

    끊었다. 이상한 전화겠지.

    곧바로 전화에서 까똑 하는 소리가 난다. 들여다보니 카톡 메시지. 아차, 어제 그 사람. 잊고 있었다. 열어보지도 않고 핸드폰을 껐다.

    또 전화가 왔다. 같은 번호. 꺼버렸다.

    또 전화. 또다시 껐다.

    이번에는 카톡.

    죄송합니다……, 어쩌구.

    주원은 핸드폰 버튼을 한참 눌렀다. 전원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다음날 아침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 다섯. 카톡 셋. 모두 같은 번호.

    웃긴다.

    정말 웃긴다.

    나한테 전화 올 사람이 그 인간 하나밖에 없다니.

    친구들도 더 이상 연락이 없다. 그 인간들은 죄다 끊어져도 상관없다. 적어도 지금은.

    카톡은 보지도 않았다.

    죄송합니다……, 구구절절. 읽어봤자 뻔하지 뭐.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주원은 저도 모르게 부재중 전화번호를 꾹 누르고 말았다.



주원은 택시를 타고 종로타워로 갔다.

    정성이다, 참. 강남에서 택시 타고 남자를 만나러 종로로 간다.

    웃긴다. 정말.

    글자 그대로 징징거리는 남자. 이름은 편지수.

    편지를 얼마나 많이 썼으면 이름이 편지수냐고. 연애편지? 혹 받은 건가?

    상관없음. 받거나 말거나.

    그 인간이 전화로 징징댔다. 죽을죄를 지었단다. 다 먹고 살기 위해 그런 거란다. 하루살이 인생이라 거래처에서 오라 하면 가야 하고, 가라 하면 울면서 와야 한단다. 외국에서 공부만 하고 온 사람은 한국 사정 잘 모른단다.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든지. 자기 같은 사람 한번 만나주는 것도 적선하는 것이란다.

    말은 잘해요. 청산유수.

    주원은 못 이기는 척하고 나가겠다고 했다. 주원 아는 곳으로 정하라고 했지만 아는 곳도 가본 곳도 없어서 어제 간 그 커피숍에서 같은 시간에 보자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곧 후회했다. 자기 연주회에 일하러 온 사람에게 괜히 전화했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인생 참.

    이 나이에 뭔 인생?

    피―.



약속시간 거의 다 되어 커피숍에 도착한 주원은 먼저 와서 기다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안을 쓰윽 둘러보았다.

    그런데……, 없다.

    없어?

    주원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주원이야 당연히 그 사람 본 얼굴을 모르니 저쪽에서 아는 척해야 할 테다.

    어쭈.

    이것 봐라. 그냥 가버릴까?

    자존심 팍.

    하지만 그딴 자존심 탁 접고 커피 하나 주문해서 의자에 앉았다.

    주원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어 켰다.

    카톡이 하나 와 있었다.

    10분만 늦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블랙커피 맛이 정말 씁쓰름했다. 그럼 커피가 쓰지 달겠니?

    10분이 지났다.

    커피점에는 여러 사람이 들어오고 나갔지만 그 남자라고 여겨질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또 10분만이라는 카톡.

    사람 놀리는 거야, 아니면 정말 그 정도로 바쁜 거야?

    좋아, 이번 10분만 더 기다려 준다. 그것으로 끝이다.

    10분이 지났다.

    주원은 일어섰다. 건물 밖으로 나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주원이 무슨 미련이 남아 있는지 계단 입구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무엇인가를 누르면서 허겁지겁 올라오고 있었다.  

    주원 핸드백에서 전화 왔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 남자겠군. 또 늦는다는 거겠지.

    계단을 올라오던 남자가 주원의 가방에서 나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멈춰선다.

    “아, 저, 혹시 정주원 씨?”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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