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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선생은 간혹 대천 백 사장에게 편지를 보내어 팔덕의 행방에 대해 물었으나, 아직 아무런 소득이 없다 하며 한번 놀러오라는 답장을 받곤 했다. 그러나 글씨체가 너무 반듯한 것을 보아 아무래도 백 사장의 말을 먹물이라고 불린 부하가 받아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 선생으로서는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심통여사는 3년 전 새해 첫날 대천 파라다이 호텔에서 만난 이후, 백 사장의 편지를 통해 잘 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만나지도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정 선생은 마음이 답답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대신 인국에게 정성을 쏟았다. 인국을 데려오고 나서 그 다음해에 인국은 만리동 근처의 중학교에 입학했다. 인국의 성적으로 간신히 갈 수 있는 학교였다. 그러나 입학한 뒤 성적이 계속 올라갔다. 인국은 3학년이 되었을 때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명동길과 퇴계로 사이의 명동성당 쪽에 있는 남대문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곤 했다.
중구 명동2가 25번지에 있는 남대문도서관은 당시 서울 시내 사대문 안의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으로 이름나 있을 정도였으며, 특히 사법고사 낭인들이 모여 공부하고 서로 정보를 나누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인국은 정 선생으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법대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아직 그에 대한 자신은 없었으나 학교 성적이 3학년이 되어 간신히 상위권에 들어가자 다소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정 선생이 바라는 일류 고등학교에 가기에는 아직 턱없이 모자랐다.
멀고 먼 꿈같은 법대, 그리고 사법고시. 인국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머리를 흔들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어느덧 정 선생의 꿈은 인국의 꿈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국은 1학기 중간고사 성적이 생각보다 좋게 나와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어디로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1학기 기말고사를 보기 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서 요즈음 거의 매일 남대문도서관을 찾고 있었다.
정 선생은 모든 법의 기초는 헌법이라고 말해 주었다. 인국은 도서관 사서에게 헌법에 관한 책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사서는 친절하게도 책이 있는 곳까지 데리고 가서 안내해 주었다.
헌법 책은 스무 종이 넘었다. 헌법, 헌법개론, 최신헌법, 국가와 헌법, 현대헌법해설, 헌법강의, 헌법연구, 헌법과 입법 등등. 그 중에서 한 권만 추천해 달라고 사서에게 부탁하자 두께가 비교적 얇은 책을 골라주었다. 그러나 사서가 돌아간 뒤 인국은 그 책들 중에서 가장 두꺼운 것을 골랐다. 그리고는 정 선생님에게 물어보기 위해 책 이름을 노트에 적어놓았다. 그리고는 책 여기저기를 들춰보았다. 한자투성이. 그러나 대부분은 읽을 수 있었다. 정 선생이 한자에 대해 많이 가르쳐 주었던 덕분이다.
권두언, 추천의 변, 간행사, 서문, 서론, . . 론, ……. 론……. 무슨 ‘론’이 그렇게 많은지. 인국은 여기저기 조금씩 읽어 보았다. 말은 어렵지만 대부분 뜻은 알 것 같았다.
책을 덮고 난 뒤 인국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이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다 읽을 자신이 있을까? 처음에는 고개를 저었지만, 곧 한번 도전해 보리라 생각하고 전체 페이지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았다. 무려 1,088쪽이나 되었다. 여기에서 제목이나 색인 등을 빼고 나니 1,056쪽으로 줄어들었다. 그것을 1학기 기말고사와 2학기 중간고사 및 기말고사 시험공부 기간 등을 제하고 고등학교 입학 전날까지 도서관에 와서 읽을 수 있는 날수를 대강 계산한 150일로 나누니 대략 7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좋다! 일단 도서관에 올 수 있는 날에는 하루에 7쪽씩 읽어나가자.
인국은 당장 그날부터 시작했다. 따라서 그날은 우선 책 제목이 있는 첫 장의 다음 페이지에 있는 권두언 등에서부터 7페이지를 읽었다.
지루하고 지겹고 지난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가운데에서도 억지로 억지로 7페이지를 아주아주 간신히 채웠다. 마치 전쟁을 치른 느낌이었다. 다 읽고 나니 끝났다는 만족감이나 성취감보다는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감이 더 컸다. 한자투성이에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용어들. 그러나 어떻든 오늘 하루는 해냈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일의 일이다.
인국은 자신의 하루의 승리를 남기기 위해 어떤 방법이 좋을까 궁리하다 오늘 읽은 페이지 끝에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조그맣게 써넣자고 생각했다.
인국.
이 두 글자를 도장 찍듯이 또렷이 적었다.
인국은 이렇게 사흘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끔찍했던 일이 차츰 보람으로 다가왔다.
인국. 인국. 인국.
세 번째 도장이 책에 찍혔다.
아! 내 미래를 향한, 세상을 향한 자신의 도전이 사흘째를 맞는 것이다.
인국은 생각했다. 일단 작심사흘은 성공했다. 내일부터 또다시 작심사흘을 위한 행진이다.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감에 취한 인국은 날아갈 듯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국은 도서관에 올 때나 집으로 돌아갈 때나 퇴계로를 통하지 않고 늘 명동 한복판 길로 해서 소공로와 중국대사관 앞을 지나 남대문경찰서, 염천교를 지나 만리동으로 올라갔다.
인국은 도서관 현관문을 나섰다. 많은 사람이 뒤엉켜 들어오고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다가 문득 어떤 느낌이 들었다.
“……?”
몇 발자국 걸어가다 인국은 갑자기 돌아섰다.
누나!
틀림없다.
어떤 여자, 학생은 아니지만 학생처럼 앳돼 보이기도 하고 처녀 같기도 한, 그러면서도 갸름하며 눈에 익은 느낌이 드는 여자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인국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방금 지나간 그 여자. 어디에 있지?
인국은 뛰어갔다. 사람을 밀치기도 하고, 비슷한 느낌이 드는 사람 앞을 가로막기도 하며 도서관 현관 안쪽으로 뛰어갔다.
없다. 없어졌다. 틀림없이 보았는데.
인국은 도서관 전체를 샅샅이 뒤지며 찾았다.
그러나 없다. 그럴 리가 없다. 틀림없이 보았다. 그 느낌. 그것은 분명히 누나에게서 풍기는 그것이었다. 피붙이는 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인국 자신은 안다. 그 가난했던 시절 할머니와 몸을 비벼대며 해곶 쓰러져 가는 그 초가집에서 뒹굴며 산 다정했던 누나. 천사 같았던 누나.
안 돼!
찾아야 한다.
인국은 도서관 전체를 세 번 돌았다. 그러나 없었다.
인국은 맥이 풀려서 이층에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있었다. 인국을 피해서 이리저리 돌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인국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정 선생에게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이제 인국에게는 도서관에 가야 하는 확실한 이유가 두 가지가 되었다.
헌법 책과 누나.
2
사장과 인희는 점심을 간단히 먹은 뒤에 시내로 향했다. 사장은 명동 남대문도서관 근처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인희를 돌아다보며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인희가 눈을 크게 뜨고 있기만 하고 받지 않자 사장이 재촉한다.
“받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물론 내가 옆에 있어 줄 거니까 아무 문제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거니까, 만일을 위해서라도 받아둬.”
사장의 이러한 말에 거절할 수 없어서 인희가 봉투를 받자, 사장은 신촌 호텔로 돌아가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찾아가기 힘들면 택시를 타. 그 정도 돈은 내가 다 줄 수 있으니까.”
사장은 저녁때 호텔로 오겠다고 말했다.
차에서 내린 인희는 사장의 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인희는 도서관으로 향하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돌려 소공로 쪽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인희는 사장이 알려준 대로 신촌 호텔로 찾아갔다.
방에 들어간 인희는 간단한 편지를 썼다. 사장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프런트에서 구한 봉투에 넣고 봉했다. 그리고는 프런트에 맡기면서 사장이 오면 전해 주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트렁크를 호텔에 맡기고 다시 남대문도서관이 있는 명동으로 향했다. 오후 4시가 넘었다.
명동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인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하며 두리번거리면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정 선생님이 늘 찾아가서 공부했다는 곳, 그곳을 보고 싶었다. 신창 연선의 산소로 가겠다고 한 그분.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제발, 제발 불행한 일이 없기를 빌었다. 그러면서 혹 자신에게 기회가 생긴다면 신창을 찾아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면 어떤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겠지.
정 선생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졌다. 그보다 슬픈 사랑 이야기가 또 있을까? 어떤 영화나 소설이 그보다 슬플 수 있을까? 인희는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 글썽거렸다.
도서관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마침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서 서로 엉기고 부딪고 했다. 인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간신히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어서 앞이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밀리듯 간신히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다가 인희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
인희는 돌아섰다. 눈물을 닦았다.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럴 리가 없지. 인국이 여기에 왔을 리가 없지.
그러나 가슴은 마구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만일, 만일에……. 인국도 정 선생님처럼 법을 공부하고 이런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는다면…….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인희는 고개를 저었다.
저 먼 해곶에서 배를 곯아가며 지냈던 인국.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가슴이 메어졌다.
그런데도 현관문을 들어설 때 까만 교복에 까만 모자를 쓴 그 아이, 그 눈매나 콧날, 입술 등에서 마치 인국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인희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인희는 슬퍼졌다. 자신과 인국, 그리고 할머니…….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늘 생각나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그 가여운 사람들.
그 생각만 나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버려두고 도망쳐 나온 동생, 할머니.
인희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디라도 가서 주저앉아 울고 싶었던 것이다.
인희는 화장실을 나와 도서관 내부로 들어갔다. 인국이 여기에서 공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정 선생님처럼 법을 공부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기를. 그래서 자신이 좀 전에 본 반듯한 모습의 학생처럼 그렇게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인희는 법 관련 서적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법을 공부한다면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 도서관 직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도서관 사서는 인희를 데리고 두껍고 어딘지 오래 묵은 냄새 같은 것이 나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헌법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며 그에 관련된 책들이 있는 곳으로 간 것이다. 사서는 인희에게 그곳을 둘러보라고 말한 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돌아갔다.
“며칠 전에는 헌법 책을 찾는 아이가 오더니만…….”
인희는 그곳에 남아 이것저것 잠시 둘러보다가 문득 아주 두꺼운 책이 눈에 띄었다.
아유, 이런 책도 읽어야 하나?
인희는 그 책을 꺼내어 앞에서부터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한자가 너무 많아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일정한 페이지 간격으로 책 제일 아래쪽에 두 글자를 써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꾹꾹 눌러 쓴 힘찬 글씨.
仁國
그러나 한자여서 인희는 읽을 수 없었다.
인희는 책을 후루루 넘기다 그대로 덮었다. 그리고 서가에 꽂아넣었다.
도서관을 나서는 인희는 묘한 흥분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혹시, 혹시라도 인국이 제대로 자라나서 좀 전에 자신이 본 그 두꺼운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가능성 없는 기대감. 그리고 인희 자신은 그러한 동생에게 너무도 나쁜 누나요, 할머니에게는 너무도 못된 손녀라는 죄책감. 앞으로도 그러한 죄책감을 안고 어떻게 더 살아갈 수 있을까? 평생 짊어져야 할 죄책감. 슬프고 괴로웠다. 또다시 눈물이 눈자위를 적셨다.
인희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사장에게 전해 달라며 신촌의 호텔에 남긴 편지에는 인희 자신이 새로운 곳으로 떠나겠다고 써놓았다. 어디로 떠나야 할지는 몰랐다. 그래도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을 나온 인희는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남대문 방향으로 걸었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앞을 지나서 남대문 옆으로 걸어가자 서울역이 눈에 들어왔다. 남대문을 지나 좀 더 내려가자 동양고속터미널이 나타났다.
그곳으로 들어간 인희는 시간표를 살펴보았다. 사실 이러한 행동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고 보아야 옳다. 마음속에서는 해곶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가신 것은 아니겠지? 인국은 학교에 다닐까? 제대로 다녔으면 아까 도서관에서 본 그 아이만큼 컸을지도 모른다. 교복 입고 모자 쓴 인국. 얼마나 늠름할까. 그러나 인희는 지금은 그곳에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 인국아.
마음이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그곳. 그러나 가지 못하는 그 죄책감은 평생 인희가 짊어지고 가야 할 마음의 짐이었다.
인희는 의식적으로 온양 시간표는 보지 않으려 했으나 눈은 제멋대로 그곳을 향하고 말았다.
아직 차가 있었다.
어떻게 하나?
마음은 거부하고 있었으나 발걸음은 매표소 향하고 있었다.
온양에 밤늦게 도착한 인희는 기억을 더듬어 지난번 묵었던 여관을 찾았다. 아, 저기 있구나. 인희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신창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인희의 마음은 무척 무거웠다. 지금 연선의 부모님인 권 부자 댁으로 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당돌한 생각이었다. 더구나 평소 인희의 성격으로 보아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희의 마음은 확고했다. 정 선생님의 소식을 알려면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막상 그 집에 가게 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와 같은 생각이나 행동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든 그곳에 가자고 인희는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인희는 연선의 상여가 나가는 날의 장면들이 하나하나 명확하게 떠올랐다.
정 선생님의 예상치 못한 행동, 뒤이어 이어진 모진 매질과 발길질, 처참한 몰골로 변했던 정 선생님, 뒤이어 벌어진 역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여러 기이한 일들, 그것이 초혼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뒤 연선의 상여 행렬과 그 장면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되었던 정 선생님의 모습. 인희에게는 마치 어제 일처럼 그 모든 장면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인희는 자신이 그 집에 가서 정 선생님 소식을 묻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인희의 심정으로서는 그러지 않을 수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시켰다. 지난번 그 일 이후 정 선생님에게 혹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났을까 봐 그것이 걱정되어 마음이 자신을 마구 채근하는 것이었다.
인희는 버스에서 내려 기억을 더듬어 가며 권 부자 댁으로 행했다. 인희의 모습이 그곳 농촌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듯 사람들이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인희는 다소 부끄러웠지만 꾹 참고 바삐 걸어갔다. 사실 이러한 행동에 인희 자신도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집이 가까워져 가자 마음은 급격히 요동쳤다.
아냐, 이것은 예의가 아니야.
대체 어떤 말을 꺼내며 정 선생님 소식을 묻겠다는 거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러면서도 인희의 발걸음은 쉬지 않고 권 부자 댁으로 향했다.
드디어 그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고귀한 저택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높다란 솟을대문.
인희의 발길이 그 대문 앞에서 멈추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
늙수그레한 얼굴에 힘없이 처진 어깨를 한 노인. 지난번에 정 선생님이 그 사람에게 매달리다 시피하며 연선에 대해 물으며 절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물론 세월이 흘러서 그렇게 되었겠지만, 인희가 보기에 그 노인은 지난번 그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전체 분위기는 그때보다 몇십 년 흐른 모습 같았다.
인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 힘없는 노인이 인희를 보면서 말은 없이 표정으로 묻는다.
어떻게……?
인희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
노인은 인희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눈으로 재촉한다.
“저……, 지난번 이 댁 언니 상여 나갈 때…….”
그래서?
노인이 다시 이마의 주름으로 인희에게 묻는다.
“그 후 소식을 알고 싶어서…….”
“누구 소식?”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온양 정 선생님…….”
인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의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라졌기 때문이다. 힘없고 축 처졌지만 그 눈매나 입매에서는 어딘지 온화한 인상을 풍겼던 모습이 갑자기 노기 띤 얼굴로 바뀐 것이다.
그러더니 거친 목소리로 벼락이 치듯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 일 뒤에 이 댁 어르신이 쓰러져서 타계하신 지 3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뭐하는 게야?”
인희는 넋이 빠진 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듯 그 마을을 빠져나왔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이 단어 외에는 인희 머릿속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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