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납백천(海納百川)

by Rudolf

해납백천(海納百川) |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1


계명균. 명문대 법대 출신. 젊었을 때 사법고시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대학원 졸업하고 군에 들어갔다. 명균은 사격솜씨가 너무 뛰어나 특등사수가 되었다. 사격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고무줄 새총을 쏘거나 돌팔매질하는 데도 솜씨가 탁월해서 동네에서는 참새 잡는 선수로 알려져 있었다. 몇 십 미터 떨어진 목표물은 거의 백발백중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군에 들어가서도 잘 알려져서 부대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참새구이 잔치를 종종 벌였으니까.

명균은 소문난 사격솜씨로 인해 군 대표선수로 선발되었으나 거절했다. 국가대표 선수로도 추천해서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의도 받았으나 자신은 오로지 사법시험 준비만 하겠다며 이마저 거절했다.

어느 봄날 그동안 사귀던 여자친구 강민지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한 동창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름은 박승업.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놈은 안 된다.

명균은 대학 2학년 때부터 갑자기 빠지기 시작한 머리가 졸업할 때쯤에는 윗머리 부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박승업은 그 사실을 공개적인 자리이건 사적인 자리이건 가리지 않고 거의 경멸적으로 표현했다.

“네 집은 머리가 다 그러니?”

“…….”

“왜 그런 집에서 태어났냐, 병신.”

“…….”

“뭔 불치병 있는 거야? 유전자 검사 좀 해보지.”

“…….”

“넌 자존심도 없니? 이렇게 놀려대도 화 안 나?”

“…….”

“병신 새끼.”

체격도 남달리 크고 성격도 호방하며 거의 재벌에 가까울 정도로 집안도 좋고 머리도 똑똑한 박승업에게 명균은 대항할 수 없었다. 주변 모든 친구나 선후배들도 박승업의 말에 꼼짝 못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강민지만은 그런 박승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정면에서 면박을 주곤 했었다.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 명균과 강민지는 가까워졌고, 둘은 함께 사법고시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둘 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명균은 군대로 갔고, 강민지는 사법고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한 반면 박승업은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민지가 보내는 편지가 명균에게는 큰 낙이 되었다. 민지는 신림동 고시촌 대신 지방의 절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가 때도 만나기 어려웠다. 명균이 제대를 하면 일단 둘이 결혼을 해서, 사법고시에 계속 도전하든지 취직을 하든지 해보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몇 개월 전부터 민지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명균은 몇 번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명균은 강민지에 대한 분노로 견딜 수 없었다. 자신 앞에서 그토록 박승업 욕을 하던 강민지. 자신과 강민지의 대화에서는 늘 박승업을 깎아내리는 말이 등장했고, 그것이 명균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명균이 강민지에게 정신없이 빠져든 데는 그것도 한몫을 했다. 그러던 강민지가 늘 명균을 놀리던 박승업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제대 두 달 앞두고 명균은 총과 실탄을 가지고 탈영했다. 하지만 사흘 뒤에 붙잡혔다. 실탄은 한 발도 사용하지 않았다. 재판을 받는 도중에 사격 국가대표선수로 나가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 다음날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도망치다 경비병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명균은 군 형무소에서 오랜 수감생활을 한 뒤 출옥했다. 그리고 고시원에서 지내며 PC방 총무, 출판사 잡문 번역, 가구업체나 수산물시장 야간경비 등을 서며 생활했다. 그리고 가족은 물론 과거에 알던 사람들에게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미래가 없이 살아가는 명균을 의준이 오랫동안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것이다.

강남역에서 펜트하우스로 돌아와 이것저것 생각하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순간 의준에게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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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균이 노량진 수산물시장에서 야간 일을 마치고 새벽에 퇴근하는데 30대로 보이는 서양인 남자가 다가왔다. 영어로 근처 어느 건물 가는 길을 알려달라며 묻는 것에 명균이 떠듬떠듬 대답을 해주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부른다.

“잠깐만요.”

한국말이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남자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민다.

명균은 얼떨결에 악수를 했다. 서양인이 잠시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영어로 된 명함을 내민다. 오리엔탈 테크라는 회사의 한국 지사 매니저 리처드 윌슨. 사무실은 서초동. 그리고 사실은 자신의 사장이 명균을 만나고 싶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명균이 특등사수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관심 있으면 명함의 번호로 전화를 하라는 말을 남기고 서양인은 떠났다.

명균은 얼떨떨했다.

낯선 외국인. 게다가 자신의 과거를 안다. 그리고 자신이 수산물시장 새벽일을 마치는 시간까지 알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특등사수라는 말을 꺼냈다.

무슨 뜻일까?

명균은 멀어져 가는 외국인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고시원에 돌아와서 며칠 동안 명균은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 연락하지는 않았다.

한 달 뒤, 고시원 우편함에 발신인 없는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었다. 내용물은 지난번 받은 것과 똑같은 명함 한 장.

일주일 뒤 명균은 공중전화에 가서 그 명함의 번호를 눌렀다.

“네, 오리엔탈 테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직원이 전화를 받는다.

“저, 혹시 리처드 윌슨이라는 분이 있는지요?”

그러자 여직원은 그 사람은 자신의 회사 매니저라며 지금은 미국 본사로 출장을 갔다고 한다.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나중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미국 회사라서 그런지 아주 친절했다.

명균은 머뭇거리다가 혹시 사장과 통화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실례지만 성함을 말씀해 주시면…….”

이번에도 명균은 잠시 망설이다 이름을 밝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조금 뒤 어느 남자가 나온다.

그는 자신은 사장 비서이며 명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고시원 우편함에 명함이 든 봉투를 넣은 것도 자신이 시킨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며칠 뒤에 고시원 우편함으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물품보관함의 박스 번호와 비밀번호를 보낼 테니 그것을 열어보라고 했다.

명균은 얼떨떨한 느낌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게 뭐야……? 혹시 사기꾼들인가?

그러나 명균은 사흘 뒤에 정말로 편지를 받았다.

명균은 닷새를 망설이다 물품보관함으로 찾아갔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명균은 그날 생전 처음으로 물품보관함이라는 곳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작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봉투 속에는 현금 5백만 원과 작은 메모지 하나. 메모지에는 일주일 뒤에 안양역 물품보관함으로 가라는 내용. 그리고 마지막에는 ‘특등사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모두 타이핑된 것이다.

명균은 먼 조카뻘 되는 한량인 의준에게서 가끔 전화로 맡겨주는 일을 하고 수고비라며 두둑이 받고 있었다. 그리 험한 일은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의준이 남들에게 알려지길 꺼려하는 종류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준은 그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말해 주지도 않았거니와, 명균으로서도 알고 싶지도 묻고 싶지도 않았다. 모르는 것이 피차 좋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얼마 전에도 서울에서 파산하고 도주한 어떤 치과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어떻든 그런 일들을 통해 당장 살아가는 데 금전적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명균은 어차피 세상을 등지고 살기로 했기에 돈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돈이 모아지면 그것이 든든한 배경이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번의 일은 어딘지 조심스러웠다. 의준이 맡겨주는 일들도 깨끗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 그 정체 모를 회사에서 지금껏 생각지 못했던 특이한 방법으로 지시하는 일은 그동안 의준이 부탁하는 일들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 같았다.

깊고 어두운 동굴의 냄새.

명균은 고민스러웠다. 저들은 명균 자신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도. 만일 명균이 돈만 받고 도망친다면? 하지만 그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멀리 지방으로 가서 잠적한다? 아니면 중국 같은 곳으로라도. 하지만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따돌릴 수 있을까?

명균은 이번에는 정확한 날짜에 맞추어 안양역으로 갔다. 물품보관함에는 이번에도 또 다른 물품보관함의 위치, 그리고 또 다른 내용이 적힌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그 내용은 착수금으로 1억 원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성공하면 또다시 1억 원. 이미 받은 5백만 원은 그냥 용돈. 흥미가 있으면 일주일 뒤 의정부역으로 가라는 것이다.

명균이 의정부로 가서 물품보관함을 열어보니 묘한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AI-AW 라이플. 영국의 올림픽 사격 금메달 선수인 맬컴 쿠퍼(Malcolm Cooper)가 1978년 세운 영국 포츠머스 시의 Accuracy International Arctic Warfare 군수회사에서 제작된 저격용 라이플이다. 12.7mm의 대구경. 특수부대용으로 사용되며 차량의 엔진도 폭발시킬 정도로 화력이 강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균 자신이 특등사수로 선발 받은 이후 사용했던 총이었고, 성능도 워낙 강해서 언젠가 다시 한번 손에 잡아봤으면 하고 생각하던 그 라이플이었다. 이 소총은 고도로 훈련된 사람이 아니면 원거리에서 사격하기 힘들고, 일반적으로 6백 미터 이내에서만 저격한다. 그러나 정확한 사격을 위해서는 목표 가까이로 다가가야 하는데, 중요인물의 경우 경비가 심해서 적어도 2천 미터 안으로는 접근하기 힘들다. 월남전 때 그 유명한 전설의 저격수 카를로스 해스콕(Carlos Norman Hathcock)이 2,300미터에서도 명중시켰다고 하지만, 명균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다. 단지 명균은 정확도만은 아주 높아 중근거리에서는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어떻든 2억 이상의 돈을 준다? 저들은 누군가? 또 저들이 노리는 인물은 누군가? 저들은 정말 내 사격 실력을 믿는 것인가? 게다가 내가 당국에 신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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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균은 그 다음날부터 매일 사격장에 갔다. 처음에는 긴장한 탓인지 표적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으나 곧 이전의 실력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일주일 내내 여러 사격장을 돌며 총을 쏘았다. 명균은 일부러 한가운데를 맞추지 않고, 마음속으로 표지판 이곳저곳을 표적으로 정해 놓고 쏘았다. 원하는 곳에 구멍이 뚫릴 때마다 희열감이 솟았다. 사격장을 나올 때는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명균은 약속날짜에 지정된 곳에 가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다. 고시원 우편함에 지난번 그 명함이 들어 있는 봉투가 또다시 떨어져 있었다.

또다시 한 달이 지났다.

처음에 받은 5백만 원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명균은 처음부터 그 돈이 떨어지는 시점에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의준에게서 받은 돈은 별도로 모아두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명균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다보았다. 나이는 40대 초반. 부모는 없고, 괌으로 이민 간 누나 하나. 버젓한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가능성 제로. 결혼? 웃기는 얘기. 고시원 생활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사실은 이런 생활보다는 일부러 범죄라도 저질러 교도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기도 했다.

그날부터 일주일이 더 흘렀다.

“될 대로 되라지…….”

고시원 우편함에 이번에는 명함만 떨어져 있었다. 재미있었다. 저들은 마음이 조급한 모양이다. 시간이 촉박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대상은 누구? 자신같이 전혀 경험 없는 풋내기에게 살인청부를 맡기면서 2억을 주겠다고 한 것을 보면 꽤 큰 모험을 하는 것일 텐데.

다음날 명균은 지정해 둔 역으로 향했다.

물품보관함에는 또 다른 물품보관함의 위치와 책 네 권이 들어 있었다. 《재칼의 날》과 《피닉스》라는 소설. 낡은 번역서 두 권과, 또한 낡은 영어 원서 두 권. 《재칼의 날》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피닉스》는 처음 본다. 《재칼의 날》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 암살에 대한 것이고, 《피닉스》는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영웅이었던 모세 다얀 국방장관 암살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왜 한가롭게 옛날 고리짝 같은 소설책이나 읽으라는 것이지?

“소설 대여업자인가? 정말 재미있는 친구들이네…….”

명균은 속으로 비웃었다.

“기왕이면 최신 소설이나 갖다주지……. 내가 좋아하는 역사물로.”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명균은 물품보관함으로 보내준 책들을 펴들었다. 주로 원서를 읽으면서 뜻이 통하지 않는 부분은 번역서를 참조했다. 두 권 모두 번역은 꽤 정성을 기울인 느낌이었다.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두 책을 다 읽는 데 나흘이 걸렸다. 그런 뒤 다시 한번 읽었다. 이틀 만에 끝났다.

두 책의 공통점. 암살 실패.

그리고 또 하나는……. 아마도 저들은 이 부분을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라고 명균은 생각했다. 대상 인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는 것 말이다. 그 인물의 자서전과 연설집, 논문, 전기, 언론기사 등등.

그렇다면 그 대상은 꽤 유명한 공적인 인물이라는 뜻인가?

“이거 뭐야? 영화 찍는 거야? 내가 주인공이고……?”

마음은 찜찜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한 기대감도 갖게 되는 명균.

그리고 자신에게 일을 맡기려는 저들은 염두에 두지 못했겠지만 명균의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두 책의 암살자 모두 청부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암살이 성공한 다음에는 각각 프랑스 정보부인 DGSE와 하이에나처럼 끈질긴 이스라엘 정보부인 모사드에게 지구 끝까지 쫓길 텐데, 평생 숨어살 수 있는 금액을 달라고.

명균은 지정된 열흘 뒤에 부천역으로 갔다. 또 다른 물품보관함 위치와 1억 원이 든 가방, 그리고 신문이 한 부 들어 있었다. 꽤 오래된 신문. 10년이나 지난 것. 종이가 약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드디어 현실이 되었군.”

명균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명균은 가방은 그대로 둔 채 신문만 가지고 근처 커피숍으로 가서 샅샅이 읽었다. 눈에 띄는 기사는 없었다. 물론 정치, 경제, 사회, 연예, 스포츠면 등등에 눈에 익은 사람들 사진이 몇몇 나와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접선한 사람이 외국인이어서 국제면까지 세밀히 살폈다. 그들 중 1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이미 사망했거나 은퇴한 사람, 또는 현재 형무소에 수감 중인 이들도 있었다.

어떻든 그 인물들 중에서 하나가 대상인가?

이들 중 한 사람이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엄청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단 말이지……?

명균은 그 신문에 사진이 실린 사람들에 대해 모두 조사해 보기로 했다.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며칠 동안 신문, 잡지, 컴퓨터 등을 모두 살폈다. 그 덕에 조금도 관심 없었던 그 사람들에 대해 전문가 수준만큼 되었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지만.

“내가 별짓 다 하는군…….”

그런데 또 한 가지, 가능성이 아주 적다고는 생각했지만 미국인 남자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어딘지 국제문제까지 얽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신문의 국제면 한쪽 끄트머리에, 두 달 뒤인 10월 11~12일 서울에서 열리는 G-20 회의 며칠 전에 미국 국방장관이 주한 미군부대를 방문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또한 국방장관은 인천 송도 국제도시도 방문해서 센트럴파크역 근처 한옥마을 옆의 경원재에서 한국의 국방장관과 면담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는 G-20 회의 이후 열리는 한국과 미국의 정상회담에 앞서 의제조율을 위한 사전회담의 성격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시 화두로 떠오르고 있었던 미국산 신무기 구입에 대해 조율하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하다는 논평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미국 국방장관이 사실은 미국 공화당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존재였다. 당시는 민주당 정권이었으며, 그 국방장관은 차기나 차차기의 유망한 대통령 후보감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화당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흑인 대통령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극우증오단체들이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해서 갑자기 새로이 마구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 공공연하게 대통령에 대한 암살위협까지 하고 나서는 판이었다. 또한 유색인종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뿐만 아니라 민주당 행정부가 저소득 계층의 복지를 늘리는 것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이들 극우주의자들은 2010년 초 의료보험 개혁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그에 찬성한 의원들에게 공개적으로 테러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하원의장도 그런 협박을 받았다. 또한 몇몇 증오단체들은 SNS를 이용해서 전직 군인들을 모집해 민병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애국주의 그룹이라고 표방했고, 해마다 열리는 보수정치행동회의에는 극우증오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2009년에 새로이 등장한 ‘오스 키퍼스(Oath Keepers)’라는 극우단체는 총기소유 규제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자신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들에 뒤이어 우파들의 새로운 결집체인 티파티 같은 단체가 속속 등장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종주의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복지확대나 이민규제 완화 등과 같은 민주당 정치 사안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러한 극우증오단체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그룹 중 하나인 ‘클린 아메리카’는 거의 비밀에 싸여 있었다. 그 단체는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공산당 간첩이었다고 주장하는 존 버치 소사이어티 회원 중 일부가 만든 것으로, 공화당의 레이건과 부시 대통령 집권 시기가 최근 미국의 역사 중에서 가장 강력한 시절이었다고 주장하며 클린턴 집권 8년의 시기를 잃어버린 세월이라 서슴없이 규정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조지 부시 대통령 이후 빼앗긴 정권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서슴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곤 했었던 것이다. 즉, 그들의 최대 목표는 그 당시의 오바마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있었다. 그를 위해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고 전직 CIA 요원들까지 고용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더욱 눈엣가시인 것은 바로 국방장관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을 최대의 적으로 삼고 그 두 국가와 동시에 전쟁을 해서 이길 정도의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하자고 주장하는 그들의 눈에는 당시 국방장관은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겁쟁이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그러한 인물이 차기 대통령감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균은 한국과 미국의 국방장관 회담에 대한 내용을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다가 갑자기 눈을 다시 그리로 돌렸다. 그리고 그 기사를 천천히 심호흡을 해가며 열 번도 더 읽었다.

혹시 정체 모를 이 자들이 명균에게 미국과 한국의 역사에 길이 기록될 일을 맡기려는 것인가……?

명균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했다.

“나 같은 풋내기에게……?”

하지만 신문의 기사는 10년 전의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대통령 선거가 두 번이나 있었고, 이제는 정권이 보수 공화당 쪽으로 넘어간 상태다. 이런 환경에서 전직 국방장관이 왜 표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 인물이 다시 한국에 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사람이 급히 제거되어야 할 위치에 있기라도 한 것일까?

명균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과잉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잠시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 같았던 환상에서 빠져나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 주제에…….”

명균은 이제 그만 신문을 덮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어차피 그들이 자신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서는 대상인물이 누구인지는 알려주게 될 것이다.

그것을 참지 못하고 호들갑 떤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름을 알려주면 될 것을 왜 신문을 보낸 것이지? 그것도 오래된 신문을.

지나간 옛 국제정치에 빠져 공상이나 하라고 그런 것은 아닐 텐데.

명균은 그 신문을 펴서 다시 한번 샅샅이 훑었다.

두 번, 세 번째 읽다가 문득 시선이 간 조그만 기사.

지금까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갔었지만, 그 기사에는 ‘현모군’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두 부모의 끔찍한 참극과 본인도 빈사상태에서 수차례 고난도 수술을 받은 뒤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어제 오후 병원에서 퇴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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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준에 대한 기사였다.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했다. 그 당시 명균은 형무소에 있었지만 그 일은 당시 세상을 놀라게 한 엽기적인 사건이어서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의준이 명균에게 찾아와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서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것이다.

의준……. 현의준.

왜 의준의 기사가 나온 신문을 보낸 것이지?

우연?

혹 저들은 명균과 의준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일까? 명균은 의준과는 단 한번 만났을 뿐이다. 몇 개월 전에. 그것도 한밤중에 단둘이서만.

어느 날 밤 오류동에 있는 고시원으로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명균은 기진맥진해서 어느 누구와도 말 한마디 나누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명균이 고시원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자신에게 오는 것 같아서 명균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저, 죄송합니다만, 계명균 선생님 되시죠?”

“……?”

“저를 모르실 겁니다만, 말씀드릴 것이 좀 있어서…….”

명균은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한 걸음 더 다가와서는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약간 주저하면서 다른 쪽으로 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명균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몸을 사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였다. 혹 잘못되어 해코지를 당한다 한들 손해날 것 하나 없는 잉여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자 인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

명균은 젊은이를 따라 고시원에서 조금 떨어진 공사현장으로 갔다. 고층아파트 공사장.

그곳에서 명균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

첫째는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 참혹한 사건의 당사자가 바로 그 젊은이 자신이라는 것.

둘째는 그 사람이 명균 자신과 연결된다는 점. 사돈의 팔촌만큼이나 먼 사이이긴 하지만,

이런 말을 듣자 세상을 등지고 사는 명균에게는 그 젊은이가 아주 가까운 피붙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런 마음이 들게끔 젊은이가 말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젊은이, 즉 의준은 자신은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그렇다고 큰일을 맡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의준이 사회경험이 적어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을 대신 해주면 그에 대한 보답을 충분히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날 명균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의준이 돌아간 뒤 명균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떤 애송이 하나가 와서 무슨 말을 한들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애당초 명균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며칠 뒤 명균은 소포를 하나 받았다.

핸드폰. 그리고 뜻밖에도 현금 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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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균은 다시 물품보관함로 가서 신문을 집어넣은 다음 가방에서 5백만 원만 빼냈다. 그리고는 메모를 한 장 남기고서 돌아왔다.


20억-20억


배짱을 부려본 것이다. 싫으면 말고. 그리고 신문을 물품보관함에 도로 집어넣기 전에 의준의 기사에 볼펜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었다.

그런 다음 명균은 일주일간은 도서관과 컴퓨터 속에서 살았다.

또다시 일주일 뒤 명균은 또 다른 물품보관함으로 갔다. 그 안에는 묵직한 것이 든 스포츠백이 들어 있었다. 명균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고시원에 도착할 때까지 가방을 열어보지 않았다. 가방 안에는 에어버블 완충제로 꼼꼼히 감싼 쇠뭉치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명균은 모두 꺼내어 방바닥에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조립해 나갔다. 20년 가까이 오래된 시절 수십 번도 더 분해 조립한 그 기억, 모두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마치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해 온 것처럼 능숙하게 조립할 수 있었다. 조립하는 데 처음에는 약간 더뎠지만 곧 옛 시절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틀리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총알은 없었다.

명균은 조립이 끝난 다음 어깨에 걸치고 겨냥해 보았다. 옛날의 든든한 느낌 그대로였다. 묵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충견과 같은 느낌. 당시 부대에서는 AI-AW를 ‘워터’라고 불렀다. 워터멜론을 줄여서 부른 말. 머리에 맞으면 수박처럼 산산이 조각난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다.

명균은 방 안에서 워터를 이리저리 돌리며 여러 군데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방아쇠가 좀 뻑뻑했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호흡과 방아쇠 당기는 것이 조화가 잘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며칠 동안 길들여 놔야 하겠지. 노리쇠도 몇 번 당겼다 놓았다 하다가 혹 옆방에서 들릴까 봐 그만두었다. 망원조준경으로 창문 건너편 공사 중인 건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망원조준경을 통해서 보는 바깥광경은 언제 봐도 신비로웠다. 현실이 아닌 마치 가상세계 같은 느낌.

명균은 총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워터를 들고 사격연습을 하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나무 위에서, 옥상에서, 창가에서, 참호 위에서, 차량 위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아무런 받침대 없이 손에 들고서 조준하고 사격하고 표적지를 확인하고 영점을 수정하고, 분해하고 조립하고, 손에 들고서 행군하고, 품에 끼고 자고…….

“그래, 너는 이제 내 거다.”

일주일 뒤 명균은 물품보관함으로 가는 대신 공중전화로 가서 명함에 있는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음성 메시지를 남겨놓으라는 말만 나왔다. 명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일주일간은 여러 사격장을 돌며 가장 무거운 소총을 골라 겨냥 자세를 취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면 총알을 발사. 그러나 이번에는 일부러 표적에서 빗나가게 해서 그 각도를 재보았다.

명균은 다시 물품보관함으로 갔다. 이번에도 스포츠백 하나. 가방 손잡이에는 ‘10-10’이라고 써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 종이에는 다음 날짜와 물품보관함 위치만 적혀 있었고. 마지막으로 실탄 한 발. 이것은 아마도 확인하라고 보내주었을 것이라고 명균은 생각했다. 설마 그 한 발만 가지고 저격하라는 것은 아닐 테니. 물론 한 발로 사격연습하라는 말도 아닐 것이다.

“기왕이면 탄창 몇 개는 주어야지 이게 뭐야…….”

명균을 투덜거리면서도 총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세심히 살폈다.

옛 기억들, 잃어버린 시간들이 떠올랐다. 너무도 허망하게 망가진 자신의 과거.

하지만 어떤 몸부림을 치든 돌아갈 수는 없다.

명균은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가방을 열어보았다.

그래, 가장 중요한 것. 10억 원. 가방을 열어보니 헌 돈과 새 돈이 섞인 뭉치가 들어 있었다. 세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명균은 집에 돌아와 라이플 분해해서 넣은 가방과 돈 가방을 나란히 방바닥에 놓고 침대에 앉아서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내 인생은 어찌되는 것일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이 돈을 가지고 도망치면 된다. 저들은 지금도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테지만 그들을 따돌릴 자신은 있다.

아니면 경찰에 신고한다?

그런데 한 젊은이를 살해하는 데 왜 이렇게 엄청난 총기까지 등장시켜야 하는 것일까?

칼도 있고 절벽도 있고 독약도 있고, 하다못해 요즘 영화마다 소설마다 등장하는 교통사고도 있을 텐데. 강도도 물론 단골메뉴고.

그러나 명균은 그 이유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부분은 자기 몫이 아니다. 명균은 그림자라서 생각이, 마음이, 영혼이, 삶이,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살아 숨 쉬고 있으니 그러한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더듬어 보아야 했다.

나는 무엇인가?

아니, 저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처음에는 의준이 명균에게 다가와 자신의 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의준의 반대편 사람이 자기들 쪽으로 오라고 한다.

이렇게 양극단에 있는 그 두 그룹이 모두 자신들한테 오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명균에게 어떤 점이 있어서 저들이 모두 탐을 내는 것일까?

혹 아무런 존재도 아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 중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인간이라 편하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명균은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오라는 곳이 많으니.

명균은 의준이 강남역 커피숍에 놔두고 간 시집을 집어들었다.

그동안 명균은 멀찌감치에서 의준을 뒤따르며 그가 시집을 사고 또 커피숍 탁자에 놔두고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집들은 지금 모두 명균의 방에 쌓여 있다. 무명의 시인들과 함께.

명균은 시집을 주르르 넘기다가 아래쪽 한 귀퉁이가 살짝 접힌 페이지에 가서 손을 멈추고 활짝 펼쳤다. 의준은 늘 시집 한 페이지의 아래를 접어놓고 가는 버릇이 있었다. 그 시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것인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명균은 그 페이지를 펼쳐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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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았다


매일 밤

나는 생각 속에서 죽어가고 있노라

다행인 것은

생각은 죽었어도

머리는 우주를 떠돌며

광활한 구석구석 뒤지느라 쉴 틈이 없음이라

하여

나는 혼자 있어도 바쁘고

할 일이 없어도 분주하구나


* * *

해납백천(海納百川) | 바다는 모든 강을 받아들인다.

노자의 사상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글로서,

낮고 넓은 바다와 같은 마음을 지닌 이에게는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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