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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준은 미국의 친구 스티브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다. 스티브는 계 실장을 만나서 명함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계 실장에게 여기저기 물품보관함을 찾아다니게 했다. 스티브는 계 실장이 하는 모든 행동을 다 지켜본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의준보다 몇 살 위였으나 미국에 있을 때부터 가까이 지냈고, 의준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특히 미국 내에 있는 의준의 재산을 관리해 주고 있었다. 또한 총기를 구입하고 물품보관함에 가져다놓고 한 일 등도 모두 스티브가 맡아서 했다.
이뿐만 아니라 스티브는 계 실장의 동선에 대해서도 세밀히 관찰했다. 그렇지만 계 실장이 경찰에 신고할 것이라 의심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 의준은 믿고 있었다. 단지 나중을 대비하기 위해서 계 실장의 주변사람들을 확인해 두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계 실장은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중에도 아주 특이하게도 어느 성당에 가서 누군가를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었다. 스티브는 그 일에 대해서도 모두 파악해서 의준에게 알려주었다.
의준은 요즘 자주 펜트하우스의 창가에 가서 서 있곤 한다. 블라인드도 내리지 않은 채. 양화대교, 과거에는 제2한강교로 불렸다는 그 다리와 그 너머 영등포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저 어둠 어디에선가 탄환이 날아온다면 그것이 총구에서 나오는 순간 저 불빛들 하나처럼 찬란한 광휘가 되어 어두운 공간을 가를 것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4천 년 전 바빌로니아 왕국의 6대 왕인 함무라비 대왕 시절 만들어진 282개의 법문. 그중 196조에는 ‘이에는 이’, 200조에는 ‘눈에는 눈’이라는 구절이 있다.
1902년 1월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페르시아 남부의 고대 엘람 왕국의 수도인 수사를 발굴하던 도중에 그 돌이 발견되었다. 세 개로 쪼개진 큰 그 현무암을 복원한 결과 높이 2.25미터의 원형 돌기둥 위쪽에는 태양신 샤마시가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옆에는 함무라비 대왕이 서서 경배하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돌기둥에는 원형으로 돌아가며 법전이 설형문자로 빽빽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 그 유명한 법문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21장 24절에도 역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라는 구절이 있다.
의준은 함무라비 법전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현무암 돌기둥의 높이가 2.25미터인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의준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죄에는 죄, 벌에는 벌.
그래서 의준은 가슴을 활짝 벌린 채 지금 창가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별들이 죽어가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탄환은 아래쪽에서 날아올 것이다. 턱에서 비스듬히 위쪽으로 뇌를 관통해서 후두골 아래쪽으로 나가겠지. 아래턱뼈(하악골), 벌집뼈(사골) 아래, 꼭지돌기(유양돌기), 뒤통수뼈(후두골) 순서로 산산조각내며 지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척수, 숨골(연수), 작은골(소뇌), 대뇌의 후두엽을 차례로 휘저어 놓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붉은 피와 허연 골수와 죄로 오염된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어쩌면 탄환의 회전으로 인해 머리의 반은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 몰골 가관이겠다.
신난다!
의준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의준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의준은 두툼한 스포츠백을 들고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물품보관함으로. 이번에는 수원이었다. 그곳에 가서 스포츠백을 집어넣어야 한다. 방탄복이 든 가방. 혹 의준이 먼저 명균을 발견해서 저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준은 창가에 서서 경치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다. 유리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의자를 놓고 고성능 쌍안경으로 유리창 건너편 아래쪽을 살피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의준 역시 명균에게 준 것과 동일한 라이플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게임인지도 모른다. 생사를 건 저격 게임.
의준은 택시로 강남사거리로 가서 수원으로 향하는 광역버스에 올라탔다.
한낮이라 버스는 그리 붐비지 않았다. 의준은 차도 쪽 좌석의 창가로 가서 앉았다.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창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앞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들. 옆 차도로 추월해서 지나가는 차량. 창밖의 차에 탄 사람들의 무표정한 표정들. 어쩌다 얼굴이 마주치기도 한다. 의준은 하마터면 손을 흔들어 줄 뻔했다. 혹 저 사람들도 그런 마음 아닐까…….
버스가 속도를 늦추는 바람에 의준은 잠에서 깼다. 깜박 졸았던 것이다.
거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의준은 잠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사실은 늘 피곤함을 느낀다. 펜트하우스 한쪽에 헬스기구 서너 가지를 갖다놓아서 나름대로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식사도 거르지 않고 잘 챙겨먹기 때문에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늘 꿈이 좋지 않다. 악몽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곳으로 헤매고 다니며 길을 잃어 힘들어하는 꿈들. 그런 정도다. 그러나 그것이 자주 반복되는 탓에 어떤 때는 잠자는 것이 두려워지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이 가위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온갖 곳을 헤매다가 종종 온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기 힘들어 간신히 몸을 비틀어 잠에서 깨어나곤 하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도 역시 그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 어떤 건물 속. 자신이 사는 아파트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딘지 눈에 익은 듯한 높은 빌딩 속에 들어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엘리베이터를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혹시 한 층을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있을 것 같아 계단을 오르내리며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매지만 끝내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도 역시 몸이 굳어져 갔다. 계단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비틀다가 반쯤 잠에서 깨어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는 의식적으로 억지로 몸을 뒤척여 꿈에서 벗어났다. 그런 뒤에는 아침까지 다시 잠들지 못하고 일어나 앉았었다. 물론 평소에 잠에서 깨는 시간보다 그리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지은 죄가 밤에도 이렇듯 따라다니는 것이겠지…….
“그래, 맘껏 즐기거라, 너 나의 꿈들아. 악몽이든 헛꿈이든 가위눌리는 것이든 가리지 말고 공격하란 말이야. 그렇게 철저히 응징해 봐. 끝까지…….”
의준은 이를 악물었다. 두 손은 이유도 없이 주먹을 불끈 쥔다.
버스가 수원 시내로 들어섰다.
의준은 번잡한 지하철역 근처에서 내려 물품보관함으로 갔다. 그곳의 한 박스를 열고 가지고 간 스포츠백을 집어넣었다. 그 속에는 고성능 쌍안경과 최고급 방탄조끼, 그리고 다량의 실탄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다음에 찾아가야 할 또 다른 물품보관함의 위치. 또한 간단한 내용이 적힌 메모지, 즉 다음의 행동지시가 적힌 종이.
의준은 지하철역을 나서면서 이제는 공평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적군과 아군이 모두 같은 무기, 같은 방호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또한 서로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안다. 차이점이 있다면 오직 하나. 의준은 계 실장이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계 실장은 의준이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의준은 펜트하우스에만 머물러 있지만, 계 실장은 행동이 자유롭다. 어디에서든 원하는 시간에 의준을 노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조건을 모두 따져볼 때 50 대 50이다. 여기에 계 실장이 특등사수 출신이라는 이점을 더한다면 사실 의준이 조금 손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저쪽의 어드밴티지로 남겨두자. 사실 의준이 AI-AW 라이플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계 실장에게 손에 익은 무기였기 때문이다. 의준은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군 면제가 된 대신 기초군사훈련만 받았다. 따라서 무기를 다루는 면에서는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준은 저격용 라이플로 겨루기로 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지…….
2
의준은 오랜만에 모임에 나갔다. 모임 이름은 TTF. Two-Three-Four. 자기들끼리는 부모가 대형빌딩 2채(two), 재산 300억(three), 최고급 유럽 자동차 4대(four)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식명칭은 ‘Tea Table Forum’이다. 티테이블이라고 하니 소박한 느낌이 들겠지만 사실은 금수저 망나니들이 만든 흥청망청 클럽인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변형시켜서 ‘티티피’라고도 부르며, 이에 더 나아가서 ‘티파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티파티는 1773년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 대해 무리하게 세금을 부과하는 바람에, 이에 저항해서 보스턴 시민들이 당시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에 실린 홍차(tea)를 전부 바다에 집어던진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난 2009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 직후 장기간 침체되어 있던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국가재정을 투입하자 이것을 반대하면서 만들어진 극우단체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1773년 당시의 사건 티파티(Tea Party)에서 TEA는 ‘Taxed Enough Already’, 즉 ‘이미 세금을 충분히 냈다’는 뜻의 약자로도 사용되었으며, 2009년 미국 극우단체 티파티의 조세저항운동에서도 역시 같은 의미로 차용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티파티는 주로 서른 살 전후의 갑부 집 자식들이 알음알음으로 모여 만들어진 모임이며, 의준도 우연한 기회에 그들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의준의 끔찍한 가정사에 대해서는 모르고 단지 의준의 집안에서 강남과 강북에 우람한 빌딩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리고 의준이 영국의 런던정경대 근처에서 어물거리며 주식시장에서도 큰손이라는 소문이 의준은 모르는 채 돌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모임에서는 의준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 모임의 젊은이들은 주로 부모의 재산으로 광을 내며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준은 늘 입던 대로 짙은 남청색 싱글 양복에 연청회색 와이셔츠와 주황색 넥타이 차림으로 청담동의 클럽 라페스타(La Festa, 파티)에 들어갔다. 클럽 입구에서 엄숙한 표정의 신사, 즉 보디가드에게 편지를 보여주면 손님 리스트와 대조한 뒤 안으로 안내한다. 이 모임에는 집으로 온 편지를 가지고 가야지만 들어갈 수 있다.
티파티에서는 먼저 편지를 보내어 동봉한 참석확인 답신을 보내달라고 한다. 물론 그와 동시에 금액이 꽤 되는 수표도 함께 보내야 하고. 이렇게 하고 나면 모임 일주일 전에 참석허락 편지가 등기속달로 온다. 그 모임의 화려한 인장이 압인으로 찍히고 또한 누군지 모를 이의 손글씨로 참석자의 이름을 휘갈겨 쓴 두툼한 고급 종이 한 장. 이런 식으로 해서 멋진 흉내는 다 내는 것이다. 마치 미국이나 유럽의 최고급 사교클럽처럼. 게다가 이 클럽은 남자만 들어갈 수 있다.
의준이 클럽 안으로 들어가자 30명 정도의 선남선녀(先男扇帤), 즉 ‘앞에서 보기에는 멀쩡한 남자지만 알고 보면 종이 뜯겨나간 부채’ 같은 인간들이 겉만 번지르르한 채 모여 있었다. 의준이 가장 나중에 도착한 것 같았다. 모임 시간에서 아직 1분이 남았지만.
의준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온다. 클럽 안의 젊은이들은 대개 서로의 집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만나면 서로들 스스럼없이 가족 이야기들을 한다. 그러나 의준은 어딘지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적당한 키의 준수한 외모에 약간 올드풍의 깔끔한 차림새. 말은 별로 없이 속 모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에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끼는 모양이다. 게다가 의준에 대해 돌고 있는 소문도 예사롭지 않고.
“현 실장, 오랜 만이야. 얼굴 좋은데. 같이 나누지. 좋은 것 있으면.”
이 모임에서 제일 연장자인 듯한, 그러나 어딘지 의준을 달가워하지 않아 보이는 표정의 꺽다리가 제일 먼저 다가와서 손을 내민다. 옆머리를 바짝 위로 올려 민 크롭컷(crop cut) 헤어스타일. 30대 후반인 듯하다. 이 모임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나이인데도 겉으로는 다른 이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리더는 아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리더는 오늘 급성맹장염 수술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회장이라는 그 사람은 30대 초반의 재수 없게 생긴 인간인데 화술은 엄청 좋다. 세상 온갖 지식 다 아는 듯이 혼자서 떠벌이면 30분은 족히 지나간다. 미국 중부에 있는 어떤 대학을 다니다 말았단다. 그러면서 자기는 온 세상에서 알아주는 백수라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사실 이 모임에 있는 인간 중에는 외국대학 물 안 먹은 사람이 없다. 하다못해 랭귀지코스라도 다녀왔다고 한다. 미국은 물론 유럽 각국 대학이 모두 등장한다. 그러면서 온 세상 언어로 다 떠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의준은 이곳에서 거의 영어를 쓰지 않았다. 주로 듣기만 하는 편이다.
또 다른 친구가 의준에게 다가왔다.
“현 실장 나 좀 봅시다.”
여기 인간들 중에서는 그래도 말이 통할 것 같은 떠버리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오는 사람들치고 입이 무거운 종자들은 없는 모양이다. 하나같이 자신이 제일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다. 알고 보면 뚜렷한 직업도 없이 부모덕에 먹고 살면서 명함에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다. 하나같이 제 가족이나 친척들 기업에 형식적으로 이름만 올려놓고 일은 하지 않는 종류들이다. 그런 중에도 이 남자는 의준과 동갑쯤 되는데 평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특히 주식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체격도 의준과 비슷했다. 생김새도 언뜻 보면 형제나 사촌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저쪽으로 가서…….”
떠버리가 눈으로 양해를 구하듯 먼저 온 두 사람을 쓰윽 쳐다보며 약한 미소를 날린다. 그리고는 의준의 팔을 툭 치며 따라오라는 표시를 한다.
의준도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약하게 고개를 숙이는 듯하고서 떠버리를 따라갔다.
떠벌이는 홀 전면에 있는 커다란 장식문으로 의준을 데리고 갔다. 바빌론의 문이라고도 하는 푸른색 이슈타르(Ishtar)의 문 모형을 만들어 장식해 놓은 곳이다.
“현 실장, 단독직입적으로 말할게.”
떠버리의 말은 간단했다. 며칠 뒤 코스닥에 한 바이오 업체가 올라갈 예정이란다. 바로 그 회사를 초기에 약간만 띄워달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친 회사에서 전략적으로 세운 업체인데 모기업이 무리하게 자금지원을 한 탓에 요즘 많이 힘들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띄워놓았고 정부 고위층에서도 적극적으로 밀고 있으며, FDA(미국식품의약국)에서도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이어서 스타트만 좋으면 크게 힘을 받을 것이란다. 단지 하나, 경쟁회사에서 특허문제 때문에 시비를 계속 걸어와서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코스닥 출발이 좋으면 다 해결될 수 있으며, 차후 가능하면 그 경쟁회사를 인수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준이 원하면 이미 공개한 회사 자료 말고도 기밀에 속하는 내부자료까지 다 보여주겠다고 한다. 한마디로 함께 엮어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속셈이다.
“부담 갖지는 마. 원하는 정보나 자료는 다 보여줄 거니까, 그냥 살짝 띄워주기만 해. 그런 거 별거 아니잖아. 나머지는 우리가 다 해결할 거야. 누가 시비 걸 일도 없어. 뭐 없는 걸 있다고 하는 게 아니니까.”
떠버리는 그 별명답게 숨도 쉬지 않고 계속 입을 놀린다.
“그리고 그 일에 한두 사람이 엮여 있는 게 아니야. 세세히 밝히긴 곤란하지만, 저 위쪽에서부터 정부 부처나 여기저기 안 걸리는 데 없이 다 엮어놓았단 말야. 진짜라니까. 언론? 그놈들 미리 와서 받을 건 다 받아갔어. 까발리고 싶어도 그렇게 못해. 그리고 그렇게 하는 거 우리만이 아니야. 혹 나중에 문제 된다 해도 좀 떠들다 지나갈 정도지, 그 이상은 달려들지 못한다니까. 그런 거 우리 한두 번 본 게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짝 띄워주기만 하면 돼. 그렇다고 너무 티 나게 하지 말고.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 거야. 그런 김에 현 실장도 재미 좀 보면 되잖아. 어때, 현 실장, 괜찮지……?”
떠버리는 은밀하게 부탁하는 사람 같지 않게 아주 담담하고 당당하게, 골프나 한번 치지 하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선수들끼리 다 알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그런 뒤에 떠버리는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는 장황하게 늘어놓던 말을 끝냈다. 사실 이 모임은 어차피 극비로 열리는 것이어서 내부자 누군가가 발설하지 않는 이상 남들에게 알려질 일이 없다. 이 모임에 들어올 때는 철저한 비밀유지 서약을 하게 된다. 어떠한 경우든. 설사 그로 인해 자신의 생명과 가족은 물론 관련된 회사까지 위험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전통이고 불문율이라고 했다. 물론 겉멋으로 하는 수작이지만. 그리고 그 서약을 철저히 지킨다면 어느 한 회원이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나머지 회원들이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구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의준은 그런 허황된 말 하나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런 것이야 어떻든 이런 경우에는 의준이 좀 당해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중을 위해서.
떠버리는 의준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 손을 내민다. 의준은 미소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나중에 연락하자고 말하고 돌아서서 다른 쪽으로 몇 걸음 옮긴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오른손을 들어올리고서 씨익 미소를 짓는다.
의준도 손을 약간 들어 답을 했다.
클럽 내부는 한마디로 퇴폐의 극치였다. 스트립쇼가 동쪽과 서쪽, 남자로만 구성된 록밴드와 실내악이 남쪽과 북쪽 벽에 각각 하나씩 동서남북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온 세상에 있는 고급술은 죄다 모아놓았고, LA에서 들여왔다는 마리화나 담배 냄새가 홀 안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온 귀공자들께서는 오직 돈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는 듯, 이 사람 저 사람 기웃거리며 돈 냄새 찾아 어슬렁거린다. 하긴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쾌락은 종류대로 모두 다 경험한 터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돈으로 유지된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몇 종류 되는 줄 알아? 딱 두 종류야, 두 종류. 하나는 뭔지 알아? 그 뭐냐 하면, 바로 우리들. 우리들이라니까. 그럼 나머지 또 한 종류는? 그것은 말이야, 우리가 아닌 인간들. 간단하지? 우리와 남들. 우리라는 사람들과 나머지라는 인간들. 이렇게 딱 두 종류가 있다 그 말이야, 이 세상엔.”
그 다음날 의준은 증권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바이오 회사의 이름만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의준은 일주일 동안 펜트하우스 근처 건물이나 주택, 공원 등을 구석구석 돌았다. 계 실장이 숨을 만한 곳을 찾아다닌 것이다. 그리고 지도를 만들었다. 펜트하우스 내부는 완전히 트여 있다. 의준은 운동장 같은 펜트하우스의 넓은 공간에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홀과 그 옆의 대형 레스트룸을 빼고는 일부러 아무런 칸도 만들지 않았다. 거실, 침실, 서재, 스포츠실, 주방, 식당 등등이 모두 트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준은 동서남북 어느 창가에든 가서 설 수 있다. 그중에서 의준은 가장 저격당하기 쉬운 방향이 어디인지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설 생각이다. 당당하게. 자신을 최대한 계 실장에게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공평하다. 의준은 상대방을 알지만, 상대방은 의준이 자신을 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의준은 공평함을 가장한 함정을 파놓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공평함에 대해 합리화시키면서. 즉, 의준은 계 실장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미리 다 찾아내서 그런 곳들을 집중적으로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살고 싶은 욕망일까?
의준은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뭐야?”
이것은 단지 게임일 뿐이다.
누가 더 빠르고, 더 은밀하고, 더 정확한지를 겨루는 죽음의 레이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 만일 의준이 이 레이스에서 지면 자신의 모든 재산은 계 실장에게 돌아간다. 의준이 미리 유언장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친척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멀고 먼 관계이지만, 단 한 방울의 피라도 섞여 있을 테니 남보다는 계 실장이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계 실장이 자신의 과오로 인해 받은 대가는 지나칠 정도로 과했다고 의준은 생각했다. 이제 남은 인생에서 그것을 보상받아야 한다. 게다가 의준 자신보다도 계 실장이 재산관리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계 실장이 레이스에서 이겨야 가능하겠지만.
의준은 서쪽 창을 선택했다.
그로부터 열흘 뒤 의준은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 난장판 모임을 늘 자랑스럽다는 듯 떠버리며 티파티라고 부르는 떠버리에게서. 의준은 티파티 멤버들에게는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편지뿐이다.
편지의 내용은 고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번 만나잔다.
그러잖아도 의준도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바였다. 떠버리는 의준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떠버리는 편지에 자신의 전화와 이메일, 그리고 블로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날짜 하나와 장소, 시간을 정해주고 그곳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의준은 그곳에 나가기로 했다.
서울 광진구 워커힐 근처 레스토랑. 예약은 강 과장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떠버리의 성은 김이었다.
그러나 예약된 곳은 넓은 홀의 좌석이 아니라 칸막이가 된 방이었다. 레스토랑 홀 창밖으로는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떠버리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준이 노크하고 문을 열자 안에서 떠버리가 벌떡 일어섰다. 그가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식탁에서 나와 의준을 맞는다.
“잘 지냈어?”
“…….”
떠버리가 손을 내민다. 의준은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앉지.”
떠버리가 인사치레하고 벨을 누르고 주문하고 음식이 나온 다음, 두 사람은 맛도 없는 희한한 이름의 이탈리아 요리를 찔끔찔끔 입으로 가져다 나르며 의례적인 말을 나누었다.
그러던 중 떠버리가 그때 방금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몸을 옆 의자 쪽으로 돌린다.
“아, 이거 말이야…….”
떠버리는 고급스러운 슈트케이스를 의자에서 들어올려 의준에게 내민다.
의준은 두 손을 내밀면서 가방을 막았다.
떠버리가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바라본다.
“이거 그냥 성의야. 받아둬.”
의준은 말은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영어책 몇 권인데 뭐…….”
책은 티파티 인간들이 쓰는 용어다. 영어책 한 권이면 달러로 10만 불, 한국책 한 권이면 원화로 1억 원.
의준이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떠버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듯 하며 가방을 도로 의자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상체를 주욱 편다. 말을 해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의준은 아무런 말 없이 그냥 마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침묵.
의준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한강 변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유리창에서는 약간 어두운 바깥 풍경과 겹친 채 두 사람의 모습이 살짝 얼비치고 있다.
사실 지금 의준은 망설이고 있었다.
떠버리를 끌어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 손을 털고 일어서서 나간다면 그저 다음 기회에 쓸 수 있는 조커 하나를 확보해 놓는 정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순간에 의준이 손을 내민다면 끌려들어올까……?
생사가 걸린 일인데, 떠버리의 본능은 어떻게 움직일까……?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의준은 계속 창밖을 내다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떠버리는 유리창으로 반사되는 의준의 흐릿한 실루엣을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없이.
의준은 택시를 타고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의준은 아파트에서 나와 자신이 조사해 둔 계 실장의 은폐장소를 둘러보기 위해 오피스텔 서쪽으로 갔다.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우뚝 솟아 있는 고층빌딩 곳곳에 환히 밝혀진 불빛들은 마치 우주 속으로 난 구멍 같아서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별들보다 더 우주스러운 네모난 행성들. 그 하나하나에는 분명 우주인이 살고 있을 것이다. 마음은 은행 잔고에, 그리고 두뇌는 변기 속에 버려두고 눈과 귀와 코와 입만 동동 떠다니는 괴생물체.
의준은 밝은 빛 행성들 중에서 가장 하늘 높이 떠 있는 별을 찾아보았다. 모든 등을 다 꺼놓고 나왔기에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마치 대형 광고판처럼 밤하늘에 빛을 발하는 긴 직사각형이 우주정거장처럼 둥실 떠 있었다. 그보다 더 높이 떠 있는 우주선이나 행성은 없었다.
의준은 어둠 속에서 근처를 돌아다녔다. 다른 고층건물들은 일단 제외시켰다. 그 안에 몰래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저격 후에 도망치기는 쉽지 않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주민들에게 들킬 수도 있다. 물론 아파트나 상가 또는 오피스텔 등을 세내어 입주해서 들어가 있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나중에 집집마다 조사하다가 들킬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낮은 상가건물 등에서는 가능하다. 낮에 미리 들어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저격 후에 창문에서 밧줄 등으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문에 설치된 보안카메라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일반주택은 가능성이 좀 더 높다. 옥상이나 지붕에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 밖에 좀 더 가능성 있는 장소는……?
의준은 건물의 1층과 펜트하우스 그리고 저격장소를 직각삼각형으로 그려서 저격장소와 펜트하우스를 잇는 빗변과 지면의 꼭짓점 각도가 35~60도 되는 곳을 이미 더듬어서 적당한 곳을 찾아놓았다. 그 범위에 드는 지역 중에서 최적의 장소 세 군데. 하나는 공원, 또 하나는 학교 운동장, 마지막 하나는 상가건물 건축현장.
직각삼각형의 빗변은 바닥의 직선거리보다 길어서 총탄이 펜트하우스의 강화유리를 뚫지 못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90도 각도가 아니라 비스듬히 맞으면 총탄의 관통력은 더 약해질 것이다. 그리고 저격장소의 꼭짓점이 45도보다 작으면 사거리가 늘어나는 반면 사격각도와 관통력이 좋아지며, 각도가 45도보다 크면 이번에는 사거리는 작아지지만 사격각도도 너무 가팔라 관통력이 약해질 것이다. AI-AW 라이플의 저격 유효사거리는 600미터라고는 하는데, 그것은 방해물이 없고 직각으로 맞출 경우에 해당한다. 더준캐슬의 1층에서 펜트하우스까지 30층의 높이는 100미터가량 된다. 따라서 이등변직각삼각형의 빗변 길이는 141미터 조금 넘는다. 의준은 AI-AW 라이플을 강원도 깊은 산골에 가서 몇 번 쏴본 것밖에는 경험이 없다. 100미터 밖에 있는 목표물은 거의 맞추지 못했고, 100미터에서는 명중률 20퍼센트, 50미터에서도 50퍼센트가 되지 않았다. 그밖에는 기초군사훈련을 받을 때 몇 번 사격한 것이 전부다. 따라서 의준이 아래에서 저격한다면 강화유리를 감안해서 이등변직각삼각형의 빗변 길이인 141미터의 두 배인 300미터를 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려도 할 수 없고. 물론 계 실장의 경우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에 대해서 아무에게나 물어볼 수도 없다. 따라서 의준은 45도에서 아무리 크게 잡아도 10도 내외, 즉 35~60도 사이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나름대로 판단했다. 이보다 각도가 크거나 작으면 사거리나 사격각도가 너무 불리해진다. 이 저격은 연습이나 훈련이 아니기에 단 한 발로 승부를 내야 한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것으로 끝이다. 일단 저격하고 나면 재빨리 도주해야 하니까. 물론 그때 미리 조사해 둔 보안카메라에 걸리지 않게 요리조리 조심해서 빠져나가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의준의 생각일 뿐이다.
반면에 계 실장은 저격 전문가다. 특등사수. 나름대로 합당한 계획을 세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펜트하우스에서 상대방을 발견하면 그 즉시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유리창이 방해가 되겠지만 상관없다. 승부가 우선이니까. 그 다음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또한 일단 게임이 끝나면 상황이 어떠하든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올 것이다. 시체, 경찰, 언론 등등.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 다음에 의준에게는 영원한 잠이 아니면 잠시의 혼란과 고난이 있을 뿐이다.
영원한 잠이라…….
의준은 자신이 강남역 커피숍에 버린 시집에서 읽은 시가 갑자기 떠올랐다.
돼먹지 못한 시.
그곳
아무나 가지 못하는 곳
그러나 누구나 가는 곳
생각만으로는 가지 못하는 곳
그러나 눈만으로는 가는 곳
하늘보다 먼 곳
그러나 숨소리보다 가까운 곳
잠
침잠
영원한 잠
바로 그곳
의준은 괴로웠다. 끊임없이 시들이 자신을 괴롭힌다. 허접한 시들. 그런데 시 중에서도 꼭 죽음과 관계된 것은 읽는 순간 머릿속에 들어와서 박혀버린다.
게다가 그러한 허접한 시집들이 죄다 짠 듯이 죽음을 슬쩍슬쩍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숨어서 의준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러나 어찌하랴. 의준으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의준은 눈을 감고 소파에 깊숙이 기댔다.
마음을 안정시키자.
침잠.
우선은 숨을 깊숙이. 그런 다음 천천히 내뱉는다. 아주 느릿느릿…….
***
순기자연(順其自然) |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다.
장자의 무의무욕(無意無慾) 사상이 담긴 말로서
자연에 순응하며 산다는 도가(道家)의 정신을 말한다.
의준은 택시를 타고 강남역으로 향했다. 며칠 전에 계 실장에게 전화해서 부탁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남역에서 내려 늘 하는 대로 의준은 서점으로 들어갔다.
의준은 두 사람이 지정해 놓은 곳에서 쪽지를 꺼낸 뒤 또다시 시집 코너로 갔다. 처음에는 외면하려고 문 쪽으로 조금 걸어가다가 갑자기 발을 멈춘 다음 다시 돌아서서 시집 코너로 간 것이다. 그곳에 몇 번 가다 보니 시인이나 시집에 대해 조금 눈에 익게 되었다. 눈에 잘 띄는 시집들은 역시 장정도 눈에 띄고 시인들도 어딘지 근사한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그들과는 멀리 떨어진 곳, 가장 위나 아래 선반 구석에 있는 시집들. 그동안 의준이 꽤 샀는데도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외로운 시인들.
의준은 그들 중 하나를 꺼냈다.
서점에서 나온 의준은 지하도를 건너 늘 가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제일 끝 유리창 쪽 구석에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자그마한 의자 두 개가 낮고 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놓여 있다.
의준은 사람들을 등진 채 의자에 가서 앉았다.
맛없고 쓰기만 한 커피.
짜증 나고 읽기 싫은 시집.
스스로에게 고문을 가하며 의준은 시에 빠져들었다.
시계를 보았다. 30분이 지났다.
의준이 시집에 파묻혔다가 문득 시계를 들여다보면 늘 영락없이 30분이 지난 뒤이다.
의준은 시집 첫 장에 ‘Weltschmerz’와 날짜를 쓴 뒤 탁자에 놔두고서 빈 종이 커피잔만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서 무심코 창밖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