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반출량(諱伴出糧)

by Rudolf

휘반출량(諱伴出糧) | 친구 몰래 양식을 빼돌리다


1

명균은 방탄복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저격을 하라는 거야, 아니면 당하지 말라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저격한 뒤 도주하다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게 될 때를 대비하라는 것인가?

명균은 자신에게 청부를 맡긴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은 한번도 그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생각이 없다고 여겼으니까. 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서 하기로 작정했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청부 맡긴 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또 저격 대상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저들의 사정이다. 그것을 따져보려 한다면 애당초 맡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방탄복이 등장하자 명균은 멈칫했다.

저들이 내 안전까지 걱정한단 말이지?

명균이 자신의 안전이 걱정된다면 스스로 해결할 문제다. 그런데 친절하게 그것까지도 배려해 주신다? 인도주의 정신이 충만하신가? 그런데도 살인을 계획한단 말이지?

누굴까, 저들은?

그리고 왜 하필 의준일까?

의준은 따지고 보면 피해자일 것 아닌가? 청소년 때 남들은 상상도 못할 끔찍한 경험을 한 젊은이. 물론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의준의 잘못이 아니다. 횡령한 것도, 도둑질한 것도, 남에게 사기 친 것도 아니고 저절로 굴러들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그 뒤 의준이 그 돈으로 분탕질을 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삶을 힘들어하고 고뇌하는 젊은이 같았다. 몇 마디 대화해 보지 않아서 그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대개의 경우 젊은 나이에 그 정도 돈이 생겼다면 흥청망청해 댔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살인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균이 보기에 의준은 그런 종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명균은 혼란스러웠다.

바닥에 드러누워 지저분한 고시원 천장을 바라보면서 다시 생각을 집중했다.

의준이 죽는다면 저들은 어떤 이익을 얻는가?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돈이다. 어마어마한 돈. 의준이 죽으면 자동적으로 저들의 몫이 되는 것인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면 원한이나 복수심?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수?

의준이 어떤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들은 그의 목숨을 취하려 하는 것일까?

게다가 미국인까지 동원되었다. 이게 무슨 국제 갱단들 사이의 싸움도 아니고…….

만일 여기에서 명균이 청부를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

첫째, 도망간다.

둘째, 경찰에 신고한다.

셋째, 차일피일 미룬다. 사실 아직 언제까지 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혹 다음 물품보관함에 그 지시가 들어 있을지는 몰라도.

명균으로서는 이 세 가지 모두 가능하다. 물론 저쪽에서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청부를 맡겼다. 무슨 뜻일까? 명균을 믿는다?

무슨 근거로?



명균은 의준의 서교동 빌딩 근처로 갔다. 물품보관함의 가방에는 방탄복과 함께 그 주소가 적힌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더준캐슬. 명균이 의준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던 이미지와 비슷했다. 그렇다고 그런 거창한 건물을 상상한 것은 아니다. 명균이 의준을 직접 본 것은 한번밖에 없었다. 그때 그 모습이 무척 어둡고 외로워 보였지만, 그 눈 뒤에는 스케일 큰 세계가 있는 듯이 느껴졌다. 다만 돈으로 치장한 소소한 젊은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30층 높이의 주상복합아파트. 그 최상층 펜트하우스가 목표다. 그 주변에서는 제일 높다.

명균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조사했다. 건물 높이와 각도, 은폐물, 보안카메라 등등.

저쪽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방탄복과 함께 고성능 쌍안경까지 보내주었다. 지금은 대낮이라서 남들 눈에 띄게 쌍안경을 들고 다니면서 살필 수는 없지만, 앞으로 몇 번 더 이곳에 와서 샅샅이 조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도주경로까지 포함해서. 밤에도 낮에도.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해서는 안 된다. 보안카메라에는 절대로 잡히면 안 되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돈을 주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아직 언제까지 저격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혹 명균이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일까?

그리고 도주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지?

나머지 돈은 어떤 식으로 받게 될까?

만일 실패하면?

앞으로 차차 알게 되겠지…….

명균은 고시원으로 돌아온 다음 장비를 챙겨서 강원도 깊은 숲으로 떠났다. 사격연습을 하기 위해서.


2


명균의 고시원으로 편지가 왔다. 공과금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는 처음 받는 개인적인 편지다. 물론 그놈들한테서 온 것이겠지. 그러나 발신인의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무렇게나 적어넣은 것이겠지만.

명균은 궁금한 생각이 들어 봉투 앞뒤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등 불빛에도 비춰보고 흔들어도 보았다. 그러나 곧바로 뜯지는 않고 방바닥에 내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것은 또 무슨 수작인가?

명균은 갑자기 청부 일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니, 의준을 만났던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느껴진 것이다. 의준과 연결되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니까. 그전까지는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했다. 그러나 이제는 명균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수렁으로 계속 빠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으로서는 멈출 수도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문득 지금 받은 돈만 가지고 사라질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었다.

명균의 생리와 맞지 않는다. 이는 저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을 맡겼을 테니까.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명균은 편지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종이 한 장.

아니, 사진.



명균은 편지의 발신인 주소로 찾아갔다.

서울 성북구 석관동 화랑로 32길 146-20.

그러나 그곳은 의릉(懿陵)이었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석관동 캠퍼스 건너편에 있는 사적(史蹟) 204호로 조선 20대 왕 경종(1688~1724)과 계비인 선의왕후의 묘역이었다. 계비(繼妃)는 임금의 둘째 부인이라는 뜻.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 나이 33세에 숙종에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병약하여 36세에 승하했다. 첫 부인인 단의왕후는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에 죽었고, 두 번째 부인인 선의왕후는 경종 사후 6년, 즉 영조 6년인 1730년에 사망했다. 경종은 병약하여 후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종사를 제대로 감당할 힘이 없다고 해서 훗날 영조가 된 경종의 동생 연잉군(延礽君)이 대리청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경종의 제자 책봉 때부터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극심한 대립으로 인해 조선의 대석학 송시열이 사약을 받는 등 경종 생애 동안 끊임없는 정치적 보복과 혼란으로 인해 수많은 신하가 처벌받고 유배당하는 끔찍한 일이 계속되어 경종은 자기 뜻을 올바로 펴보지 못했다.

결국 경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사망하고 세제, 즉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이 조선의 21대 왕에 올라 훗날 영조대왕이 된다. 그러나 경종의 죽음이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연잉군이 올린 음식과 관련이 있다 하여 지금까지 독살을 비롯한 온갖 설이 난무하고 있다. 즉, 연잉군이 형인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렸는데, 경종이 이것을 먹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방에서는 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으면 독성이 발생한다 해서 금기시되고 있었던 터였다.

그 진위야 어떻든 불운한 생애를 보낸 경종과 그 둘째 부인 선의왕후가 나란히 묻힌 쌍릉(雙陵).

경종은 3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부터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해서, 영조의 대리청정 3년 동안 당시 실세였던 노론이 아무리 흠을 잡으려 해도 아무것도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종사를 감당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3세 때인 1701년에 어머니 장희빈의 처절한 죽음을 목격한 이후부터는 말이 별로 없고 몸도 병약해져 36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불우하게 보내고, 결국 후사가 없이 사망했다. 왕위에 오른 기간은 고작 3년.

명균이 받은 편지 속에는 경종의 무덤인 바로 그 의릉의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던 것이다.

명균은 저만치에서 보이는 의릉 앞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경종을 생각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독살과 같은 암살을 의미하는 것인가?

경종의 불우한 생애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거의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그 어머니 희빈 장씨가 더 유명하고, 경종에 이은 영조의 선정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영조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지금 왜 잊혀진 왕, 백성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임금 앞에 서 있는 것인가?”

명균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설마 이 의릉 앞에서 좋은 것들만 떠올리라는 것은 아닐 터이다. 역사의 한 장면 앞에서 숙연하라는 의미도 아닐 것이고.

명균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의릉 앞에서 나는 무엇이 떠오르는가?

저들이 내게 원하는 것. 내가 떠올려야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나란히 조성하지만, 의릉은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앞쪽에는 선의왕후, 뒤쪽에는 곡장(曲墻)으로 둘려진 경종의 묘. 곡장이라 함은 말발굽 편자처럼 반원형으로 굽은 담장을 말한다.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경종의 한은 뒤로는 곡장에 막혀 있어 그리로는 뻗지 못하고 앞으로만 향한다. 선의왕후 쪽으로. 경종은 선의왕후가 후사(後嗣)를 생산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을까? 실록에는 경종이 병약해서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맞는다 치고.

만일 경종에게 후사가 생겼다면 어찌되었을까? 영조가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또 한번 조정에 왕의 후계자를 놓고 피비린내 나는 칼바람이 불었을까?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한 사람은 비운의 왕으로, 그리고 또 한 여인은 한 많았을 자신의 마음을 아무에게도 내비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화가 되어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왕후로 두 부부가 지금 명균의 눈앞에 누워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저 음모자들은 이 시점에서 경종과 선의왕후의 쌍릉을 보고 명균에게 무엇인가를 떠올리라고, 빨리 눈치 채라고 채근하고 있는 것이다.


고시원으로 돌아온 명균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바보 저능아가 된 기분이다. 상대방은 명균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차릴 것이라 여기고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알아차려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혹 명균은 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둔한 것일까?

그리고 만일 명균이 저들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시험에서 떨어지는 것일까? 탈락?

떨어지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젠장.

다음번 물품보관함에 가야 하는 날짜는 아직 며칠 남았다.

혹 그날까지 숙제를 풀지 못하면 그 물품보관함에 돈과 총을 반납하고 손을 털면 되는 것인가?

탁탁탁. 먼지까지 모두.

그리고는 돌아서면 된단 말이지?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주머니가 비었어도 마음의 부담 없이 살아가던 때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인데…….

더군다나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명균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의준을 저격한다는 것은 사실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 역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닌가. 배은망덕.

의준…….

의준은 명균에게 무엇일까?

아니, 의준은 어떤 존재인가?

명균과는 남이나 다름없는 멀고 먼 친척. 청소년 때 끔찍한 사건으로 부모를 잃고 그 자신도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게다가 얼굴도 몇 번씩이나 성형수술을 받아 옛 모습을 완전히 찾지 못했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다. 그나마 부모의 재산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의준이라…….

이름이 한자로 어떻게 될까……?

명균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고시원의 낮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혹시 의준 이름의 한자……?

의준의 의가 의릉의 의(懿)는 아닐까?

명균은 급히 컴퓨터로 그 한자를 확인해 보았다. 아름답다, 훌륭하다, 기리다, 칭찬하다, 깊다…….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혹 그 한자가 사람의 이름에게도 쓰이는지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마중달(司馬仲達). 중달은 자(字)이고 이름은 의(懿)였다. 역사학자들은 삼국지의 진정한 승자는 위오촉(魏吳蜀) 세 나라의 조조, 손권, 유비가 아니라 바로 사마의였다고 한다. 그는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의 명재상 제갈량과의 오장원 전투에서 끝까지 인내하여 제갈량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그 지루한 지구전에서 제갈량이 병들어 죽자 촉한의 군사들이 퇴각하는 바람에 싸우지도 않고 승리했다. 그 이후 사마의는 위오촉 삼국을 통일한 위나라의 조조, 조비, 조예, 조방 등 4대를 보필하며 세력을 키웠고,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나라 마지막 황제인 조환에게서 황제의 자리를 양위받아 진(晉)나라를 세웠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국지의 진정한 승자는 사마의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17세기에 황해도의 8명당이라는 묏자리 중 하나에 자리 잡은 민의(閔懿)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이라는 벼슬과 함께 정2품인 검교상서좌복야(檢校尙書左僕射)라는 직위도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여기에서 좀 특이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흔히 ‘쏠 사’로 알려진 사(射)는 ‘ 맞힐 석, 벼슬이름 야, 싫어할 역’으로도 발음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벼슬이름인 ‘야’로 발음이 된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여러 가지로 조사해 본 결과 사람 이름에 의(懿)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의준의 이름에는 그 한자가 들어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정황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의릉과 의준의 ‘의’의 한자가 같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머니가 처참하게 죽는 것을 경험한 불우한 왕과, 끔찍한 가족사를 지닌 고독하지만 부유한 청년.

암살당했을지도 모를 왕과, 암살당해야 할 운명을 지닌 청년.

둘이 동일한 한자를 지닌 무덤과 이름.

어쩌면……, 어쩌면 저들은 그 둘에 조의를 표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과거에 대한 조의, 미래에 대한 조의.

그리고 미래에 조의를 표할 수 있도록 확실히 실행하라는 독촉과 격려. 여기에서 격려라는 단어는 좀 안 어울린다. 그보다는 담보, 확약, 협박 뭐 그런 것들.

명균은 머리를 흔들었다.

뭐가 이리 복잡해…….


3


명균은 의준의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냐는 인사 정도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의 지시인 것이다. 서점에 쪽지를 갖다놓았다는 뜻.

명균은 간단히 대답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의준이 부탁하는 일은 늘 좀 싱거운 것이었다. 의준 스스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본인이 귀찮다면 심부름센터나 흥신소에 부탁해도 될 듯한 소소한 일들. 하지만 명균은 그런 것은 괘념치 않았다. 누구든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 남들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본인은 숨기고 싶은 것들. 명균만 해도 그런 처지니까. 따라서 명균은 가타부타 말없이 의준이 부탁하는 일을 해주고 두둑이 주는 돈을 누리면 된다.

그러나 이번 일은 좀 특이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을 부탁하는 쪽지를 의준이 서점에 남겨둔 것이다.

명균은 쪽지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점에서 나갔다.

지금쯤 의준은 커피숍에서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의준이 커피숍을 나가기 전에 그곳에 가서 살펴야 한다. 별것 아니지만 명균은 의준의 시집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가 버리고 가는 시집을 모으는 것. 그리고 의준은 늘 시집 어느 한 페이지 아래를 살짝 접어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 시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 접힌 곳의 시는 대개 죽음에 대한 것들이었다. 의준처럼 부자 청년은 아직 죽기에는 이르다. 그 많은 재산 다 쓰고 죽으려면 몇 만 년 살아도 부족하리라. 그가 지니고 있는 부가 계속해서 부를 창출할 텐데, 아마도 인류가 종말한다면 모를까 그 끝은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죽음의 시를 좋아한다……?

사치의 역설인가?

하긴 의준은 흔히 생각하는 부자 청년들과는 달리 그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어딘지 초연한 듯한 느낌. 나쁘게 말하면 어두운 골목을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방황자. 그렇다고 고독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두려움? 글쎄,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어둠이 그 젊은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명균으로선 상관없는 일이지만.

강남역 지하도로 들어가니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인파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어느 한 상점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무슨 일인가 살펴보니 조그만 빵 종류를 특이하게 구워 파는 가게였다. 얼마나 맛있는지는 몰라도 특히 젊은 남녀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장면이 좀 특이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자신들의 취향에 집착하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쁠 것도 없지. 그것도 한때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니까.

그러잖아도 평소보다 시간이 좀 지체된데다 사람들에게까지 막히니 명균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1번 출구로 나가면 거리가 약간이라도 줄겠지만 그쪽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명균은 급한 마음에 2번 출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4

의준은 커피숍 유리창 아래에서 뜻하지 않게 두 사람을 보았다. 아니, 사실은 세 사람이다.

한 사람은 계 실장.

또 다른 사람은 떠버리. 그리고 떠버리 왼쪽에 붙어서 함께 걸어오는 한 여자.

의준은 계 실장은 뒷모습을 보았고, 떠버리와 여자는 앞모습을 보았다.

의준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계 실장이 커피숍에 들어오기 전에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계 실장이 커피숍에 들어와 안을 살필 때 의준과 마주치지 않게 된다. 의준은 그동안 계 실장이 자신의 시집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준이 커피숍을 나가는 척하며 뒷문 그늘에 서서 살펴보면 어디에선가 계 실장이 허름한 차림으로 나타나 의준이 앉았던 자리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의준의 자리에 가서 시집을 집어드는 것을 확인하고 의준은 그 건물의 뒷골목을 통해 강남대로 쪽으로 나가곤 했다.

의준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 뒷문 옆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옆눈으로 계 실장이 계단을 급히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의준은 계 실장이 시집을 집어드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 얼른 강남역 지하도 1번 출구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떠버리와 여자가 이 커피숍으로 올라오지 않았으니 틀림없이 1번 출구를 지나 테헤란로 쪽으로 갔을 것이라 생각했다.

떠버리는 어차피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 그에게는 관심이 없다. 의준은 그 여자, 떠버리와 함께 걸어오던 여자에게 관심이 쏠린 것이다. 지금껏 단 한번도 의준은 여자에게 관심을 돌린 적이 없었다. 잠시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기는 했어도 그 이상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기는 했지만 첫눈에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떠버리와 다정히 함께 걸어오던 여자였으니 의준이 그 사람에게 마음을 두는 것이 잘못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모습을 한번만 더 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껏 이런 일은 없었다. 너무도 밝고 환한 그 여자의 모습. 얼굴에 한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서 약간 올려다보듯이 떠버리를 바라보던 그 모습이 의준의 눈에 크게 들어왔었다. 그 순간 의준은 가슴이 철렁하는 야릇한 감정도 느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눈이 떠버리가 아닌 의준을 향하고 있었다고 착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의준은 테헤란로로 달리듯 나가서 살펴보았다. 두 사람이 그쪽으로 향했으면 뒷모습이 보여야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의준은 당황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지하도 계단 쪽으로 가서 아래를 살펴봤으나 그곳에도 없었다. 다시 몸을 돌이켜서 보도 옆의 농협이나 양복점 등을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양복점 옆 골목으로 들어가서 살펴보았으나 그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의준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의준은 갑자기 스스로가 어처구니없게 생각되었다.

남의 여자를…….

그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의준은 그날 강남의 거리를 한없이 걸었다. 이런 식으로 걸었던 적은 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허해서 도심의 한가운데를 걸어본 적은 없었다.

갈망. 그래, 갈망이었다. 무언인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찾고 싶은 마음. 그것이 갈망이 아니면 무엇이랴.

지금껏 삶의 한 부분을 외면하고 살았었다. 의준은 스스로 비하하고 절망하고 자책하고 후회하면서 자신을 부정했었다.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취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에게는 세상에서 돌아다니는 달콤함은 수평선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준은 불안과 죄책감과 자학 속에 숨어서 자신의 모든 감정을 억제해 왔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어떤 갈망이 갑자기 솟구치는 것이었다. 그 종류도 파악할 수 없는 막연한 동경 같은 것. 남들은 다 하는데 자신에게만은 금지된 것.

의준은 가슴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여자. 아니다. 세상에 여자는 많다. 그러나 미소가 환했던 그 모습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이쪽으로 올려다보는 얼굴 모습. 그것은 그 떠버리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2층 유리창으로 내려다보는 의준을 향한 것이었다. 그 유리창이 비록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은 그런 물리적인 구조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듯이 그 여자는 보이지 않는 유리 너머로 지독한 고독에 절어 있는 한 남자의 눈을 쳐다본 것이다. 이것을 절대 아니라고 부정할 사람이 있는가? 누가 그 여자에게 가서 물어본 것이냔 말이다.

의준은 한 가지 생각을 확고히 했다.

떠버리.

의준은 떠버리에게 한 가지 제안한 것이 있었다. 아주 위험한 일. 의준이 아니라 떠버리에게. 의준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 일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앞당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5


명균이 정해진 날짜에 물품보관함으로 가보니 이번에도 가방이 하나 들어 있었다. 가방 안에는 또 다른 물품보관함 위치 외에 엉뚱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라이플 소음기.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메모지 한 장.

명균은 소음기보다도 메모지에 마음이 더 갔다. 다른 때는 그냥 메모지였다. 작은 종이 한 조각. 그러나 어쩐지 이번에는 소음기보다도, 아니 AI-AW 라이플보다도 그 메모지가 더 무거운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섬뜩한 느낌까지. 마치 단두대 앞에서 그 시퍼런 칼날과 마주한 절망감 같은 것.

명균은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그 메모지를 잡았다. 우스웠다. 손이 떨리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했으나 정말로 손이 떨리고 있었다.

메모지를 폈다.


27


올 것이 왔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와서 명균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려 메모지를 확인해 보았다. 틀림없었다. 27.

즉, 27일.

사흘 뒤.

그리고 27 숫자 아래에 다음 물품보관함 위치가 적혀 있었다.



6


의준은 공중전화에서 떠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모르는 전화라서 그런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는다.

의준은 5분 뒤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는다.

의준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하는데 귀에서 멀어진 전화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의준은 얼른 도로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확실한 떠버리의 목소리.

의준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상대방이 깜짝 놀란다. 그리고는 호쾌하게 웃는다.

“아, 현 실장님.”

이번에는 ‘현 실장’이 아니다. 희준의 격이 높아졌다. ‘Your Majesty’까지는 아니고 ‘Sir’가 된 것이다. 하긴 겨우 한 단계 올라간 것이지.

의준은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만났을 때 떠버리를 집으로 부르겠다고 말해 두었다.

― 오우, 드디어 비밀의 문을 여시는군.

― 뭐 별것은 없지만, 구경이나 하시라고.

― 좋지. 집이 어디야?

― 응, 부를 때 알려줄게.

― 혹시 사람들을 처음 초대하는 거 아냐? 원래 비밀이 많은 양반 같은데.

― 초대가 아니라 그냥 한번 와보라는 거야. 별것도 없지만 이것저것 얘기도 좀 하고.

― 아무 때나 부르셔. 5분대기조 할 테니까. 그런데 누구 같이 가도 되는 건가?

― 아냐. 혼자 와. 아직은 좀 사람들하고 친해지지 않아서.

― OK.

이렇듯 의준이 자기 집으로 올 수 있겠느냐고 하자 떠버리는 흔쾌히 대답한다. 그러면서 뭐 필요한 것 있느냐고 묻는다.

“아냐. 그냥 와. 뭐 사와 봐야 놓을 데도 없어. 집이 휑해서.”

“정말 그냥 가도 되는 거야?”

“그럼.”

“에이, 안 되지. 내가 첫 손님 같은데 그러면 내가 섭하지.”

“괜찮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데 혹시 저…….”

“뭐? 말해 봐. 필요한 거 있어?”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고…….”

이렇게 해서 의준은 펜트하우스 주소를 알려주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지만, 하마터면 지난번 그 여자에 대해 물어볼 뻔했다.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와 입술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진땀이 날 정도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의준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의준은 늘 자신이 시계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고 냉정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허둥대고 변명하듯 머뭇거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속마음을 들키기나 한 듯이.

의준은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정확하게 돌아갔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냉정해져야 한다.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가 없다.


7


고시원으로 돌아온 명균은 소음기를 들고서 살펴보았다.

AAC M4-2000.

소음기의 종류는 많지만 현재까지 나온 것 중에서는 이것이 최고의 성능을 지닌 것 같다. 과거에는 토마호크 미사일을 생산했던 KAC(Knight’s Armament Company)사나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본사를 가지고 있는 슈어파이어(Sure Fire)사 제품을 알아주었으나 최근에는 AAC(Advanced Armament Corporation)사 제품이 호평을 받고 있다. AAC 소음기 중에서도 특히 5.56mm는 현재 미국 해군의 특수임무부대인 네이비 실(Navy SEALs)에도 정식으로 납품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소음기는 내부가 촘촘한 격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소음 능력이 탁월하며, 최근 상영되는 영화에서도 이 소음기가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사용되는 소음기에 대한 환상은 버려야 한다.

2008년에 설립된 미국의 한 소음기 제작회사인 사일런서코(SilencerCo)에 의하면 소음의 정도는 다음과 같다.

제트기가 이륙할 때 내는 소음은 150데시벨.

요란하게 달려가는 구급차 사이렌의 소음 크기는 115데시벨.

이에 반해 사람들이 조용한 실내에서 속삭이는 소리는 30데시벨에 해당한다.

그리고 22구경 라이플의 경우 소음기를 장착하지 않으면 165데시벨.

소음기를 장착하면 116데시벨.

따라서 소음기를 장착했다고 해서 영화에서처럼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물론 소음기의 성능을 이보다 높일 수는 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총탄의 사거리나 관통력이 현격히 줄어들어 실제 사용에서는 제약이 많게 된다.

또한 총알은 음속보다 빨라 소닉붐(sonic boom, 음속폭풍)을 일으키는데 이것도 꽤 큰 소리를 유발한다. 따라서 소닉붐을 제거하려면 음속을 넘지 않는 아음속탄을 사용해야 하지만 이 경우 총탄의 위력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이 밖에 조용한 장소에서는 방아쇠 격발 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여러 사실들을 생각하며, 저격용 라이플과 소음기를 군에서 직접 다뤄본 경험이 있는 명균은 갈등했다.

명균은 밖으로 나가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강원도 전방에서 군 생활을 할 때는 하늘이 제법 화려했다. 오래 전 일이지만 그때 그 기억은 늘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 바라보는 저 하늘. 군데군데 잔별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저 별들 사이에서 사라진 그 많은 별들.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명균은 한마디로 하면 잊혀진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그런데도 남들은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보자.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 밥 먹고 똥 싸고 잠자면 존재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 존재가 남들의 눈에 비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밤하늘에서 사라진 별들처럼.

학문적으로나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별들. 헌법에서만,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인간들.

명균은 존재가 아니다. 사람도 아니다. 그저 개념일 뿐이다.

만인은 평등하다느니, 인권은 동등하다느니, 선거에서 한표 한표 모두가 동일한 가치라느니…….

모두 개소리.



8


27일 밤, 명균은 모든 준비를 갖춘 채 저격장소로 숨어들었다.

명균은 그 이전에도 틈틈이 그곳에 가서 모든 지형과 은폐장소를 익히고 찾고 해서 대강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뿐만 아니다. 실제상황을 가정해서 총구를 겨누고 망원조준경으로 살펴보고 거리와 각도를 측정하고 빈총의 방아쇠를 당겨보고서, 몸을 돌이켜 도주로를 눈으로 확인하는 등 준비를 해나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의문점이 떠올랐다. 꼭 27일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전에 상황이 갖춰지면 아무 때나 저격하면 되지 않을까? 또한 명균이 이 생각을 떠올리는 만큼 저쪽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도 명균에게 날짜를 지정해 주고 또 명균이 그것에 따를 것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명균이 날짜를 어긴다면?

궁금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혹 명균의 신분을 경찰에 알릴까? 사실 그것은 지금이라도 가능하다. 이것은 저격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저들은 언제든지 명균을 신고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명균 역시 이 모든 음모를 경찰에 알릴 수 있다.

참으로 위험한 게임을 저들은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명균을 포함해서.

그런데도 명균은 저들의 지시를 처음부터 고분고분 따르고 있다. 틀림없이 저들도 명균이 그렇게 하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재미있다.

어떻게 명균을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

만일 신고는 하지 않더라도 명균이 처음부터 거절했다면?

그러나 저들은 명균이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귀신들인가?

남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지?

추측컨대 저들은 명균의 과거를 철저히 조사했을 것이다. 성격과 성향과 버릇과 생활과 심지어 마음까지도. 그 결과 지금 명균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명균이 이 저격에 성공할 것도, 또 무사히 도주할 것도 확신하는 것일 텐데……. 그래야만 저들도 안전해지니까.

명균은 스스로를 돌아다보았다. 자신이 저격에는 성공할지라도 정말로 무사히 도주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사실 이 부분은 좀 자신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데도 명균은 자신이 찾은 최적의 저격장소에 숨어서 지금 총구를 위로 향한 채 준비 중에 있는 것이었다.


9


의준은 떠버리와 함께 펜트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떠버리는 늘 커피를 달고 사는 덕에 밤에 마셔도 잠자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의준은 안 마시는 커피를 이 밤에 마셨으니 잠은 다 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실 오늘밤에는 자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차피 잘 수도 없을 것이다. 저격사건이 일어나면. 물론 의준이 저격된다면 영원한 잠이 되겠지만.

“현 실장 실력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소문을 듣긴 했지만.”

떠버리가 펜트하우스를 돌아다보며 한마디한다. 사실은 번듯한 가구 하나 없는 휑한 공간뿐이었는데도.

“실력 아냐.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 말은 겸손이 아니야. 교만보다 더한 거지.”

“참, 저번에 강남역에서 한번 본 것 같은데…….”

“응? 언제? 아, 그래, 그 근처는 자주 가. 꼭 강남역은 아니지만……. 아아아, 맞아. 저번에 한번 갔었다. 며칠 됐는데…….”

“그때 어떤 미인과 함께 가는 걸 봤어.”

“오, 그래? 보긴 제대로 봤네. 아는 척 좀 하지 그랬어? 소개시켜 줄 수도 있었는데.”

“응, 나는 그때 거기 1번 출구 옆 빌딩 2층 커피숍에 있었거든. 우연히 창밖으로 내다보게 된 거야.”

“이 서교동에서 강남역까지 자주 가나 봐?”

“그냥 가끔. 그런데 여자친구?”

“관심이 많네. 세상 초연하게 사는 것같이 보이는데 속은 아니야, 응?”

“무슨 말을……. 그냥 물어본 건데.”

“관심 있어?”

“…….”

“관심 있구만.”

“…….”

“말만 해. 너한테 줄 수도 있으니까.”

“…….”

“그 애는 내 외사촌 동생이야.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지겹다며 잠깐 들어온 거야. 내가 다니는 안과 소개해 달래서 같이 갔다가 배고프다고 해서 레스토랑 찾으러 거기에서 어슬렁거렸던 거지.”

“…….”

“그 애 이쁘지? 현 실장이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지금 전화해 볼까?”

“아냐, 아냐. 그냥 해본 소리야…….”

“헤헤, 딱 보니 아닌데 뭘 그래. 잠깐 기다려…….”

“아냐, 지금 전화하지 마.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좋아. 내가 이름하고 전화번호 알려줄 테니까 일단 알고나 있어. 그럼 되지?”

“…….”

“나중에 나한테 크게 한턱내야 돼. 현 실장 횡재한 거다. 그 애 엄청난 여자다.”

“…….”

“얼굴 빨개지긴…….”

“아닌데…….”

“뭐가 아냐. 다 보이는데.”

의준이 소파에서 일어나 떠버리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눈짓을 하고는 자신의 옷들이 걸려 있는 행거로 갔다. 그곳에서 갈색 세무재킷 두 벌을 옷걸이에 걸린 채 가지고서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상표도 떼지 않은 것들이다.

“이거 선물.”

의준은 한 벌을 떠버리에게 내밀었다.

“어, 이거 브리오니 아냐?”

떠버리가 일어나서 옷을 받으며 말을 한다. 브리오니(Brioni)는 이탈리아 3대 명문 남성복 브랜드 중 하나다.

“나하고 체격이 똑같아서 두 벌 샀어. 입어봐.”

의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떠버리는 입고 있던 검은색 콤비 윗도리를 벗고 세무재킷으로 갈아입었다.

의준도 지금 입고 있는 연푸른색 남방 위에 나머지 세무재킷을 걸쳐입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짓는다. 서로가 너무 잘 어울렸던 것이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은 상표를 떼었다.

“남들이 보면 우리를 쌍둥이로 알겠다.”

떠버리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잠깐만.”

의준은 허리를 구부려 탁자 옆에 놓여 있던 작은 상자 둘을 열었다. 그 안에는 안경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의준이 그것을 열어 안에서 고급 선글라스를 꺼냈다.

그중 하나를 건네주자 떠버리가 싱글싱글 웃으며 받는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선글라스를 꼈다.

의준은 이틀 전 나름대로 짐작해서 자신도 떠버리의 헤어스타일로 다듬었다. 떠버리도 의준처럼 머리칼은 길지 않았으나 한가운데서 가르마를 살짝 타듯이 하며 올백으로 넘긴 스타일이었다.

의준이 커피잔을 집어들자 떠버리도 따라서 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슬쩍 쳐다본 뒤 약속이나 한 듯이 창가로 걸어갔다.

초가을의 밤하늘에서 빛을 밝히는 야경을 바라보기 위해. 아니, 창밖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마치 위대한 트윈이 탄생한 것을 축하받기라도 하듯이.

그러나 의준은 입 한구석이 씁쓸했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틀어진 것이다. 처음이다. 이렇게 실수한 것이. 의준은 그 여자가 떠버리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 때문에 저격 일을 앞당긴 것이었다.

의준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절대로 일을 서두르지 않고 계획 세운 대로 진행했던 자신이 어떻게 이렇게 앞뒤 생각 없이 성급하게 진행한 것인지. 그 여자……. 그 여자 때문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던 탓이다.

혹 이것이 전조인가? 모든 일이 틀어지기 시작하는 출발점…….



10


명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별들 대신 주변 고층빌딩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들로 현란했다.

명균은 숨죽인 채 망원조준경 속으로 보이는 또 다른 현란미를 감상하고 있었다.

30층짜리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의 각 창마다 부와 권세와 사치를 자랑하며 내뿜는 눈부신 빛들.

명균은 30층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펜트하우스 전체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안쪽 어딘가에 있겠지. 그러나 죽기에 딱 좋은 이 어두운 밤하늘 아래 휘황한 불빛들 사이로 그 대상물은 죽음의 본능에 이끌리듯 창가로 다가올 것이다. 그 순간, 명균은 조금도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명균은 소음기를 장착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고요한 밤 총성은 울리게 마련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소음기를 달았다가 만의 하나 총탄의 위력이 약해지면 낭패가 된다. 게다가 소음기라는 잔재주 없이 정정당당히 승부를 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명균은 다른 층들도 둘러보았다. 아주 드물게 창가에 다가와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들이 내뿜는 빛은 볼 수 없으니 남들이 선물하는 빛들을 감상하기 위함이겠지. 22층에 한 사람, 12층에 한 사람, 9층에는 두 집에서 각각 한 사람씩, 6층에 한 사람. 그리고 5층에 한 커플.

명균은 그들도 하나하나 세밀하게 관찰했다. 망원조준경 속의 그들의 얼굴은 너무도 세밀히 보여서 마치 그들이 살아온 세월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온화한 얼굴, 탐욕의 얼굴, 거짓의 얼굴, 순수의 얼굴, 고뇌의 얼굴……. 아, 그리고 과거의 얼굴, 추억의 얼굴…….

명균은 문득 시가 하나 떠올랐다. 지난번 커피숍에서 들고 나온 시집 중 한 페이지 아래쪽이 접혀 있었던 곳.

그러나 명균은 의준이 일부러 그 페이지를 골라놓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시는 의준이 자기 자신과 명균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였던 것이다. 경종(景宗)을 배신한 연잉군에게 주는 경종(警鐘). 의준을 배신한 명균. 또한 고종사촌 가족을 배신한 의준. 이 둘의 운명이 오늘밤 어찌될 것인지 목도하라는 것이었다.

명균이 의준에게 배신의 총탄을 선물할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의준이 명균, 즉 계 실장에게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인가…….


배 신


시간이 사라져도

생명이 지나가도

사랑이 식어져도

밀어가 잊혀져도

맹세가 깨어져도

하늘의 별자리는 남는구나

운명처럼

미소처럼

배신한 여신처럼

명균은 생각했다.

그렇구나. 운명은 오늘 나에게 배신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배신한 것일까? 나인가, 저들인가……?

배신의 대가는? 배신의 끝은 무엇인가?

죽음인가, 총탄인가?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그 시 속에는 사랑도 있고 밀어도 있고 맹세도 있고 하늘의 별자리도 있었다. 그러나 명균에게는 그 어느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 명균은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별 없는 이 밤처럼. 은폐물 속에서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죽음처럼. 무덤처럼.

명균은 죽음에 대해, 무덤에 생각이 미쳤다.

의준이 서점에 남겨놓은 쪽지에 적혀 있었던 지시사항.

그것은 뜻밖에도 묘지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추모공원이나 납골당이 아니라 심심산골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찾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마음이 바빠 명균은 그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의준아.

사실 오늘밤은 죽기에 너무 좋은 밤이 아니더냐. 묘지가 있든 없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죽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는데.

하지만 그 묘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혹 이 밤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를 의준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혹 스스로의 운명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일까?

그래서 의준은 그림자처럼 속히 다가올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 묘지부터 준비하려는 것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되겠지. 이 밤이 지나면.


11


의준과 떠버리는 창가에 다가가서 나란히 선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동일한 재킷을 입고 동일한 선글라스를 쓴 채. 헤어스타일도 얼굴 모습도 비슷하게. 저 아래에서 이곳을 바라본다면 둘 다 비슷해서 구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망원조준경으로 본다 해도 직접 실물을 대면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의준은 준비해 두었던 방탄조끼를 입지 않았다. 적의 총탄은 한 발일 것이다. 떠버리와 의준 둘 중 하나를 조준한다면 물론 의준이 될 가능성이 많겠지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첫째는 계 실장의 눈과 판단력에 맡기는 것이고, 둘째로는 의준 자신도 믿지 못하는 운명에 자신의 생명을 거는 것이다.

의준은 이 운명에 자신의 모든 죄를 맡기기로 했다. 여기에서 자신이 심판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만일 살아난다면 의준 스스로는 모든 죄를 면제받았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마도 계 실장의 눈은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의준은 그것으로 모든 것을 갚게 되겠지.

그래서 의준은 라이플을 집어넣은 골프가방을 창가에 갖다두었으나 꺼내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의준이 먼저 계 실장을 발견하거나, 혹 계 실장이 실수했을 경우 공격하기로 했었던 계획을 덮은 것이다.


12


명균은 순간 숨을 멈췄다.

나타났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아, 그런데 둘이다.

누구?

너무도 닮았다. 얼굴이 아니라 그들의 표정이.

둘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망설이는 시간은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한 사람이 쓰러지는 순간 명균은 방아쇠를 또 한 번 당겼다.

타앙―!

그 옆 사람도 총소리와 동시에 뒤로 넘어갔다.


***

휘반출량(諱伴出糧) | 친구 몰래 양식을 빼돌리다.

친구를 속인다는 의미이며,

조선 중기의 학자 홍만종이 저술한

《순오지(旬五志)》에 실린 구절.


죽음의 축복

죽은 이들의 행복이여

그대 지금은 공기가 되어 날아다니며

위선과 거짓과 열망과 불안정과 기만과 변명과 온갖 기획을 꿈꾸지만

이제 곧 알게 되리라

잠자는 이의 축복을


그대의 숨도 멎고

생각도 멈추었을 때

그대에게 주어지는 평안이

그대가 누렸던 온갖 거짓보다 더 달콤하다는 것을

그대는 비로소 알리라

그대의 잠 속에서

죽은 이들의 행복이여

그대 지금은 생각이 되어 스스로 즐기며

어제를 무사히 넘기고 오늘을 계산하며 내일의 거짓을 계획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되리라

산 자의 고통을

그대의 꿈도 멎고

기만도 멈추었을 때

그대에게 주어지는 고통이

그대가 포기했던 온갖 진실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그대는 비로소 알리라

그대의 두려움 속에서

그대는 날아가리

그대는 흩어지리

그대는 사라지리

기억 저편으로 생각 저편으로

그리고 그대는 깨닫게 되리

죽은 이들의 행복을


죽은 이들의 행복이여

먼저 고통 받은 이들의 축복이여

먼저 자는 자들의 안도함이여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 자들의 다행함이여

오늘도 변명거리를 찾는 자들의 고통이여

아침에 기획하고 저녁에 음모하며

밤이면 내일을 계산하는 이들의 바쁨이여

그대에게 권하노니

먼저 죽은 이들의 축복을 꿈꾸시라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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