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주는 강남역에서 내려 저만치에서 걸어가는 선우 씨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강남역에 사람이 너무 많아 잠깐 그 사람을 놓쳤다가 간신히 다시 찾았다. 그제야 지하철에서 부딪친 여자가 생각나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다.
연주는 선우 씨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개찰구를 나가서 복잡한 강남역 상가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확인했으나 그 다음에는 보이지 않았다. 연주는 갑자기 싱거워졌다.
사실 선우 씨 덕분에 잠시 꿈결 같은 감미로운 시간을 맛보았다. 한참 연상의 아저씨이지만 자기 혼자 만드는 공상인데 아무려면 어떠랴. 이 세상에는 전혀 상상치 못한 별별 일이 많다. 20대 후반 청년과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사랑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데 갑자기 김 새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그 아저씨는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쇠고랑 차겠지 뭐.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아청법. 더군다나 연주는 생일이 빨라서 일찍 학교에 들어가 중1이지만 아직 만으로 13살이 넘지 않았다. 아차, 법이 바뀌어 지금은 만 16세로 바뀐 것 같다. 이제는 영화 같은 달짝지근한 러브스토리는 끝났어. 나쁜 늑대들이 하도 많아서 그렇게 된 거지 뭐.
…….
연주는 허접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탁탁 털어내며 강남역 빽빽한 인파 사이를 뚫고 번쩍번쩍한 상점들 쪽으로 가서 이것저것 감상했다.
의준은 강남역을 빠져나가 강남대로로 올라갔다. 남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글소리서점이 나온다. 고층빌딩의 지하에 있는 대형서점. 사실 오전에 그곳에 가야 했다. 그러나 심리치료의 하나로 매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있어서 그곳에 들렀다 오느라 늦은 것이다. 그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의준은 자신이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원인을 알기에 그동안 치료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혹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병원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아 오늘 오전까지만 일을 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의준은 어제 저녁 계 실장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따라서 오늘 오전까지는 메모를 약속해 놓은 곳에 갖다놓아야 하는데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서점으로 가느라 다른 때보다 늦은 것이다. 설마 계 실장이 벌써 서점에 왔다 간 것은 아니겠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사실 이번의 전화지시는 꼭 필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테스트였다. 계 실장과 아직도 연결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의준은 서둘러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선물코너로 가서 남성용 고급 가죽지갑을 골랐다. 그리고 그 안에 가지고 온 메모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의준은 지갑을 포장한 다음 겉봉에 ‘계인하우징’이라고 써넣었다. 그것을 카운터에 맡겨놓으며, 누군가가 오늘내일 중으로 찾으러 올 것이라 말해 놓았다.
의준은 사흘 뒤에 다시 이곳에 와서 확인할 것이다. 누군가가 찾아갔는지…….
한송이는 의준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다. 늘 혼자 떨어져 사는 의준이 서울에서 가장 복잡하다는 강남역에 오다니 뜻밖이었다.
혹 송이 언니나 그 떠버리라는 사람을 만나려는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한송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의준은 서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한송이는 서점 한쪽에 몸을 숨기듯 하여 의준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의준은 무엇인가를 사서 카운터에 갔다가 또다시 책 한 권을 사서 다시 카운터로 간다. 그리고는 손에 책을 들고 서점을 나섰다. 서점에 올 때 서두르던 걸음걸이와는 달리 무척 느긋한 모습이다.
의준은 강남역 지하도를 지나 어느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누구를 만나려나?
그러나 의준은 근 30분 동안 한 테이블에 앉아 서점에서 사온 책에 빠져 있었다. 한송이는 한쪽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의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종이 커피잔을 들고 나간다.
한송이는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의준이 저 멀리 통로를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한송이가 몸을 일으켜 의준이 앉았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아, 책을 놓고 나갔네…….
한송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스러웠다. 의준이 나간 입구 쪽을 돌아다보았다가 얼른 의준이 앉았던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집어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의준을 찾으러.
한송이는 건물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의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연주는 천천히 강남역 지하도를 빠져나가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한남대교 방향으로 걸어갔다. 곧바로 유명한 대형서점이 나타난다. 연주는 지하로 내려가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가지 예쁜 액세서리 코너, 핸드폰 코너, 제과점 등등을 지나며 눈을 호강시킨 뒤 연주는 카운터로 갔다.
“저, 혹시 ‘계인하우징’ 이름으로 보관된 물건 없나요. 그거 받아오라는 심부름 왔는데…….”
2
의준은 커피숍 입구로 나가자마자 몸을 돌려 자신이 시집을 놓고 온 탁자를 지켜보았다. 누군가가 가져가는지, 아니면 그대로 있을지. 그런데 뜻밖에도 한송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시집을 집어드는 것이 아닌가.
의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번처럼 놀란 경우는 없었다.
의준은 황급히 서점으로 갔다. 자신이 맡긴 물건을 찾아갔는지 확인해 봐야 했다.
서점에 들어간 의준은 곧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 앞은 여러 사람이 계산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카운터 여직원은 손님들의 책을 받아 바코드를 찍고 카드를 받거나 현금을 받고 하면서 꽤 분주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밝은 얼굴로 손님들을 응대한다.
의준이 성큼성큼 카운터 가까이 다가가지 그 여직원이 고개를 들고 바라본다.
그러더니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한다.
“맡기신 물건 좀 전에 찾아가셨어요. 어떤 여자분이…….”
여직원은 손님이 맡겨준 임무를 차질 없이 완수했다는 자부심이 담긴 눈빛으로 의준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보낸다.
그 순간 의준은 머리를 살짝 끄덕이며 약한 미소로 답해 주면서도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3
연주는 화장실에 들어가 카운터에서 찾아온 물건의 포장을 풀었다. 조그만 종이상자가 나온다. 연주는 주머니에서 투명고무장갑을 꺼내어 끼고서 종이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고급 가죽지갑이 들어 있었다.
연주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가죽지갑을 들췄다. 조그만 메모지 한 장이 나온다. 펼쳐보았다.
묘지 구입해 주십시오
연주는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른쪽 어깨에서 반대편 허리 쪽으로 좁다란 가죽 끈으로 비스듬히 가로질러 메고 온 조그만 가방에서 반으로 접힌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리고는 메모지를 다시 접어서 그 봉투에 넣었다.
연주는 지갑 상자를 가방에 집어넣고서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혼자서 낮게 중얼거렸다.
“이 지갑은 순정 선우 아저씨에게 잘 어울리겠어…….”
한송이는 혼란스러웠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 의준이 보인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서점 카운터에 두 번이나 왔다갔다한 뒤에 결국 이 시집을 한 권 샀다. 그리고는 커피숍에 가서 읽다가 그냥 놔두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잊어버리고 나온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의식적으로 버리고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별 가치 없는 잡지 한 권을 읽다가 재미없어서 그냥 내려놓고 나온 것처럼.
한송이는 시집을 보았다. 어딘지 엉성한 느낌. 제목 글자나 표지 그림도 그렇고. 그리 두껍지 않아서 앉은 자리에서 잠깐이면 다 읽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의준이 그 시집을 읽을 때는 아주 진지하고 골몰한 모습이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내용은 아주 좋았던 모양이네.
한송이는 시집을 후루루 넘기며 대강 살펴보니 아래 귀퉁이가 접힌 곳이 있었다. 그곳을 펼쳤다.
두 페이지에 걸친 긴 시.
한송이는 눈으로 슬쩍 훑었다.
그리고는 다시 시집을 닫았다.
이제 이 책은 의준에게 돌려줄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한다……?
그냥 버릴까……?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송이는 시집을 가방에 넣고 있었다.
의준은 마치 누군가의 최면에 걸려 있는 듯 사고가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었다.
의준은 펜트하우스에서 정형외과를 내려다보며 한송이를 만났던 처음 순간부터 더듬어 보았다. 의준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병원 앞에서 쓰러졌을 때부터 최근에 문태식 노인 때문에 소란스러웠었던 일까지 모두. 그러나 그 어느 순간도 한송이가 계 실장과 연결되었을 법한 구석은 없었다. 물론 의준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감쪽같이 행동해서 그렇겠지만.
하! 정말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이런 배신이 어디 있지?
한송이의 그 얼굴이나 모습 어디에서 계 실장의 그림자를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한송이가 저 정형외과에 온 것도, 의준하고 부딪칠 뻔한 것도 모두 의도적인 접근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한송이가 문태식을 자동차로 친 것도 그 노인을 병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 짓이고?
아니, 그런데 그 노인을 병원에 끌어들여서 뭘 하겠다는 것이지? 옆에 가까이 두고 이것저것 상의하기 위해서?
고시원 심 여사, 문태식 노인, 한송이, 그 다음 또 어떤 인간이 계 실장에게 붙은 거야? 그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거지? 그렇게 하는 목적은……?
혹시 저들은 내가 가진 재산을 노리는 것일까? 그래서 한송이를 나한테 접근시킨 것인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참정루를 주겠다고 편지까지 써서 보냈단 말이지?
한송이 연기 끝내주는데……. 청순한 척 가장을 하고서…….
의준은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위산이 마구 분비되는 것 같았다. 분노가 치솟았다.
그동안 지니고 있었던 한송이에 대한 환상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저들은 지금 내가 한송이의 정체를 알아낸 사실을 모른다. 그렇게 놔두자. 나 역시 저들에게 당하는 척해 주는 것이다.
4
의준이 답장을 받은 것은 편지를 보낸 지 20여 일이 지난 뒤였다. 발신인은 없었다. 의준은 편지봉투를 뜯고 안에 들어 있는 메모지를 꺼냈다.
단 한 줄.
묘지 구입 완료
이 한 줄 외에 또 하나 아주 특이한 것이 들어 있었다. 왕복 비행기 표. 행선지는 부탄의 수도 팀부. 그리고 탑승객은 현의준.
의준은 비행기 표와 편지를 탁자 위로 던지듯 올려놓았다.
이건 또 뭐지?
묘지가 부탄에 있다는 거야?
요즈음 의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뒤죽박죽. 지금까지는 의준이 모든 일을 주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의준 주변에서는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의준으로서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조종해서 어딘가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누구냐, 너는?
계 실장?
그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란 말이지? 그리고 여러 사람이 계 실장의 지시에 따라 자동인형처럼 움직여 의준 주변에서 빙빙 돌고 있고?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전지전능한 계 실장?
의준은 먼저 한송이와 계 실장의 관계부터 명확히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송이는 자신의 정체를 의준이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기습을 하자. 고시원으로 심 여사를 찾아갔었던 것처럼 단도직입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뒤에서 꾸물거리는 것보다 이것이 효과적이다. 이 일은 빨리 매듭지을수록 좋다. 그렇게 하면 계 실장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의준은 정형외과로 찾아갔다. 원무과로 곧장 가서 문태식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 노인은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고 한다. 골절과 같은 큰 부상은 없었고 심지어 타박상도 없었다고 한다. 단지 심적으로 몹시 놀랐던 것뿐이어서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듯 지낸 다음에 별 말썽 없이 나갔다는 것이다. 의준은 자신이 문태식에게 경고를 보낸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앞으로는 더 이상 의준 근처에서 어물거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 한송이.
그녀를 뒤쫓자.
하지만 의준은 자신이 남들 뒤쫓은 데는 소질이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미행당하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지 않았는가. 심 여사에게도 당했고, 한송이에게도 당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밤새도록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뒤척인 의준은 오전 일찍 정형외과로 찾아갔다. 한송이를 직접 만나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시원 심 여사에게 했었던 것처럼.
의준은 병원 복도에서 한송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바삐 걸어가는 한송이를 뒤쫓아가서 헛기침을 했다. 그녀가 뒤돌아본다. 눈이 커진다.
“어머, 언제 오셨어요?”
순진무구한 모습.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 아니면 한송이의 완벽한 연기 솜씨?
“3층 로비에 앉아 있을 테니 시간 되시면 오시죠.”
의준은 그 말만 하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뒤통수로 한송이의 표정이 느껴졌다.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을 그 모습. 약간은 통쾌하지만 그러나 어딘지 찝찝하기도 한 의준의 마음.
의준은 3층 로비의 한 의자에 앉아서 한송이를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어젯밤에 별의별 것들을 죄다 공상했지만 막상 현장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그 모든 것들이 죄다 현실성이 없이 느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옳은가? 다짜고짜 계 실장에 대해 물어볼까? 그러면서 그 놀라는 얼굴을 감상하면…….
눈앞에 무엇인가가 날아다닌다. 윙윙 소리를 내면서. 벌. 꿀벌 한 마리.
어떻게 병원 안까지 들어온 거지? 의준은 벌을 좇아 눈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가 잠깐 벌을 놓치기도 했다. 하지만 벌은 병원 대기실 공간을 마구 휘젓고 다니며 윙윙대는 바람에 곧 다시 의준의 눈에 들어왔다. 몇몇 사람도 벌에 눈길을 주는 것 같았으나 곧 시들해졌는지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의준은 계속 벌을 쫓았다. 다른 이들처럼 간호사가 이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몸 불편한 데 신경을 쏟느라 다른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는 처지도 아니다.
의준의 눈은 벌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한 가지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관식 예복의 나폴레옹(Napoléon ler en costume de sacre).’ 552×760cm. 프랑스 화가 로베르 르페브르(Robert Jacques François Faust Lefèvre, 1755~1830)의 초대형 작품이며, 프랑스 국립훈장박물관(Musé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et des ordres de chevalerie) 소장.
그 인물화의 나폴레옹은 화려한 예복을 걸치고 있다. 자주색 바탕에 황금색 벌 문양이 들어간 길고 두툼한 로브. 나폴레옹 시대에는 그 이전부터 프랑스 왕가의 상징으로 쓰인 백합 문양 대신 새로운 시대를 뜻하듯 벌 모양의 문양을 사용했다. 벌은 이집트에서 고대로부터 영원성과 부활을 뜻한다. 여기에는 아마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된 듯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그 영광도 결국 한때로 끝나고 말았다.
화려한 나폴레옹의 황금 벌. 나폴레옹의 퇴장과 함께 황금 벌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 벌이 지금 의준의 눈앞에서 맴돈다. 꿀에 목마른 것일까? 아니면 나폴레옹의 영광을 가져다주기 위함인가? 하지만 지금 의준은 영광을 찾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오히려 몰락이 점차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지 아니한가. 점점 옥죄어 오는 현실. 의준의 펜트하우스. 의준의 머릿속으로 상상한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꾸민 한옥 장식.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의준에게 기쁨이나 안위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화려함에서 도피하여 아무런 장식도 없는 휑한 공간 속에서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 않는가.
의준은 서글픈 마음으로 계속 벌을 좇았다. 이 어두운 현실에서 저 벌은 어디까지 날아다닐 것인가……. 보이지 않는 날갯짓. 그러나 약하게 윙하는 소리가 공간을 가른다. 의준의 눈은 벌을 따라 함께 날고 있다. 벌이 날아가는 곳으로.
그리고 결국 의준의 눈은 한송이의 얼굴에 가서 머물렀다. 그 순간 벌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걱정에 잔뜩 싸인 한송이의 모습. 어느샌가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의준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한송이도 마주 보고서 머뭇거린다.
의준은 몸을 돌려 천천히 커피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한송이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의준은 커피자판기를 지나 복도 끝으로 갔다. 그리고 계단통 가까이로 다가갔다. 의준이 계단통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돌아서자 천천히 따라오는 한송이의 모습이 보였다. 서류봉투 같은 것을 하나 들고 있었다.
한송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의준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의준은 순간 당황스러워졌다. 그리고는 잠시 어찌할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없이 조그만 상자 하나를 내밀고 말았다.
어제 오후에 강남역 그 대형서점에 가서 사온 것. 포장하지 않은 상자.
한송이는 깜짝 놀라며 얼떨결인 듯 상자를 받아든다. 그리고는 의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깊은 눈동자. 그 눈 속에서 어떤 황홀감 같은 것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의준은 혼란스러워졌다.
한송이는 상자를 열었다. 검은색 고급 가죽지갑.
그것을 바라보는 한송이는 그러나 표정이 좀 묘해진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같았다. 남성용 지갑이었던 것이다. 한송이는 고개를 들고 의준을 바라보았다.
그 눈…….
의준은 그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한송이가 지갑 상자를 닫고 도로 내민다. 이번에는 의준이 얼떨결에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나서 한송이는 봉투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그리고는 의준에게 내밀었다.
시집. 의준이 강남역 커피숍에 놔두고 나왔던 그 시집. 이번에도 의준은 저도 모르게 시집을 받고 말았다.
한송이의 눈이 슬픔으로 변했다. 좀 전의 약간 들뜨듯 보였던 기대감이 아니라.
한송이는 아무런 말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는 걸어간다. 멀어져 간다. 천천히…….
그 뒷모습.
의준은 장승처럼 멀뚱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황망한 마음으로.
의준은 꿈을 꾸었다. 늘 꾸는 꿈. 어지러운 꿈.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가슴 아픈 꿈이었다. 아니, 가슴이 아렸다. 꿈이. 꿈속에서 본 한송이의 모습이.
한밤중 꿈에서 깨어 일어난 의준은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저 멀리 정형외과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병원의 간판.
의준은 병원 옥상에서 자신을 마주 바라보는 한송이를 보았다. 어둠 속 멀리 떨어진 곳에 외롭게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 그 눈.
그래, 바로 그 눈이다. 며칠 전 병원에서 자신을 올려다보았던 눈. 두 가지 눈. 처음에는 황홀감이 스치는 것 같았던, 그래서 의준의 마음이 순간 멈칫했었던 눈. 그 다음에는 슬픔으로 어렸던 눈. 어떤 기대감이 무너지고 잠시 누렸던 행복감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의 그 허망한 마음이 가득했던 눈.
지금 병원 옥상에 서 있는 저 한송이는 어떻게 그 두 가지 눈을 동시에 의준에게 보낼 수 있는 것일까?
의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의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한송이는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가지 눈은 더욱 깊게 의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5
의준은 한송이에게서 받은 시집을 다시 병원으로 보냈다. 택배로. 어차피 그 시집은 의준의 것이 아니다. 커피숍에서 누군가가 집어가면 그 사람 것이 된다. 의준은 그것을 돌려받을 권리도 의향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시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다른 사람은 좋아하게 될지. 그리고 그 사람이 한송이일지.
그날 의준은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일단은 방콕으로. 그 다음엔 인도를 거쳐 부탄으로 향하게 된다. 그동안 많은 여행을 하고 비행기도 수도 없이 타고 다녔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특별한 것이었다. 의준의 마음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의준은 계 실장이 묘지를 구입했다며 부탄행 비행기 표를 보내준 것에 대해 며칠 동안 생각하다가 가보자고 판단했다. 이것이 저들의 덫일 수도 있겠지만, 비행기 표까지 수고로이 보내왔으니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 실장과 부탄이 어딘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회에서 고립되어 살아온 계 실장과 세상의 끝과도 같이 여겨지는 오지 중의 오지인 부탄. 그래서 그런지 부탄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고 계 실장의 고향과도 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지난번 저격사건 이후 적당한 기회를 보아 계 실장은 한국을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곳으로 갔겠지. 하지만 한국의 누군가와는 계속 연락이 될 것이다. 그 누군가는 이미 여럿 등장했다. 문태식 노인과 심 여사. 그리고 한송이. 그러나 한송이는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 어수선한 세상이 만들어낸 오류일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 문제는 나중으로 돌리자고 의준은 생각했다. 지금은 부탄 일만으로도 머릿속이 어지럽다. 당분간은 계 실장에게만 초점을 맞추자.
계 실장은 사람을 둘이나 죽였다. 그것도 의도치 않은 순간에. 우연이긴 하겠지만 그 충격은 엄청났을 것이다. 아주 동일하지는 않지만 의준 자신 역시 그러한 입장이지 않은가.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의준과 계 실장은 동변상련의 처지에 있는 셈이다. 의준의 괴로움이 계 실장의 괴로움이며, 계 실장의 고뇌가 의준의 고뇌일 터이다.
의준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계 실장은 아직 확실히 알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지 않을까? 비상하게 머리 좋은 계 실장이 지난 1년 여의 시간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나름대로는 이곳저곳 확인하고 다녔을 테니까.
그래서 계 실장은 의준을 위한 최선의 무덤을 마련하고 연락했을 것이다. 그러니 의준은 기꺼이 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의준의 도리다. 계 실장의 자상하고도 배려 깊은 마음에 감사하면서 따라야 하겠지.
부탄은 충청도와 전라도를 합친 것보다 조금 큰 국토에 인구는 80만 명에도 미치지 않는다. 북부지역이 히말라야산맥과 연결되어 있고 국토의 대부분이 삼림지대이다. 대개의 산들이 6천~7천 미터 넘기 때문에 한국의 산들은 언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의준은 방콕을 거쳐 2001년 콜카타(Kolkata)로 이름이 바뀐 인도의 캘커타(Calcutta)에서 내린 뒤, 부탄에서 4대밖에 없는 국영항공사 드루크(Druk) 에어라인 A-319를 갈아타고 새벽에 수도인 팀부 남서쪽의 파로 공항에 도착했다. 그 여객기에는 부탄 유일의 여기장이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의준은 울렁이는 가슴과 마치 향수와 같은 아릿한 기대감에 젖은 채 공항에서 내렸다. 가파른 산 밑 아름다운 계곡 사이에 세워진 동화 속 같은 공항이었다. 의준이 외국 여러 공항을 다녀보았지만 그동안 자신이 본 모든 공항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3층 높이를 넘지 않는 부탄 전통식의 청사 건물에 그리 넓지도 길지도 않은 공항 활주로 전체는 마치 만화영화 속 장면처럼 환상적이었다. 드높은 새파란 하늘 밑에서 싸아한 맑고 깨끗한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어 폐 속 깊숙한 곳까지 채워졌다.
의준은 부탄행 비행기 표를 받고 무조건 가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자를 1년에 5천 명밖에 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문제는 여행사를 통해 해결했다. 그리고 부탄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를 만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비행기 표를 보내준 이상 그쪽에서 알아서 해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청사를 나왔다. 공항 직원을 통해 환전도 했다.
그 다음은?
의준은 배낭과 트렁크 하나에 가벼운 멜가방 하나를 어깨에 걸친 채 아늑한 청사 한복판에 우뚝 섰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분주한 모습으로 오간다. 부탄 전통양식으로 꾸며진 청사 내부는 마치 히말라야 전설과 현대가 어우러진 느낌이다.
“Hello, excuse me…….”
의준 바로 뒤에서 나는 소리.
의준이 돌아보자 언제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양복을 입은 부탄 원주민 같은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악센트가 강한 투박한 영어.
의준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바라다보자 서울에서 온 현 선생이 아니냐고 묻는다. 매끄러운 발음은 아니지만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성격 좋게 생긴 40대 정도의 남자. 몽골계 인종으로 50년대 한국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시골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원주민은 손을 내밀며 반갑다고 한다. 의준은 엉겁결에 그 손을 잡았다.
원주민은 자기 이름은 톱가라고 하며 현재 총리와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발음하기 어려우면 ‘토가’라고 부르라고 붙임성 좋게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은 의준을 수도인 팀부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이 의준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한 시간 반 걸려 팀부에 도착했다. 가는 길은 비포장에 좁고 험했지만 톱가가 부탄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주어 지루하지는 않았다. 도로에는 가끔 소도 나타나고 고장 난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고치는 광경도 보였다. 톱가는 한국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특히 농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한국인이 맡고 있어서 한국에 대해서는 친근한 느낌이라고 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부탄에 와서 도를 닦은 사람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어서 그때부터 부탄에서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아졌다고 한다.
오후 2시 반경 택시가 팀부 시내로 들어가서 정부청사 앞에 섰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치마처럼 보이는 부탄 전통복장을 입고서 검고 긴 스타킹을 신은 젊은 남자가 다가온다. 안경을 끼고 있었다. 나이는 의준과 비슷한 정도.
톱가는 그 청년과 의준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아마도 부탄어로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의준에게 와서 말을 한다.
“앞으로는 이 사람이 모든 것을 안내할 겁니다. 나하고는 일주일 뒤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공항으로 모셔다드리지요. 내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의준이 팀부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안내 일을 하게 됐느냐고 물었으나, 톱가는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받은 것이고 단순한 여행가이드라서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했었다. 아마 지금 만난 안경 쓴 젊은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가 뒤에서 이들을 동원해서 의준을 어디론가 이끌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준은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이 이런 식으로 되어가리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최종목적지는 계 실장이 자신을 위해서 마련한 곳일 테고, 어쩌면 그곳에서 계 실장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계 실장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준은 계 실장이 이 먼 곳까지 자신을 끌어들여 위험한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 일을 하려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었을 테니까. 그보다는 의준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계 실장이 꾸미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설사 위험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의준은 손해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는 철저히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금 계 실장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의준은 영국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조너던이라고 불러달라는 젊은 부탄 청년을 따라 호텔에 들어갔다. 작지만 깨끗한 부탄 전통식 호텔이었다.
다음날 아침 9시에 호텔 로비로 조너던이 낡은 지프를 가지고 왔다. 너무 오래된 차 같아서 타고 가다가 고장 나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너던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의준에게 차에 타라고 한다.
날씨는 화창했던 어제와 달리 잔뜩 흐리고 산안개가 곳곳에 끼어 있었다. 고산지대여서 기후변화가 심하다고 한다. 굽이굽이 도는 비포장도로를 타고 차는 서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조너던은 톱가와는 달리 말이 별로 없어서 물어보는 것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의준도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기에 마음이 착찹한 탓에 별로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단지 미리 사둔 지도를 꺼내어 흘끗흘끗 보기만 할 뿐 바깥 광경만 내다보고 있었다. 조너던은 가끔 차를 멈추고 밖에 나가 주변을 살핀 뒤 다시 돌아와 의준에게 지도를 달라고 하고서 현재 위치를 짚어주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저녁 무렵 어느 산골동네에 도착했다. 부탄은 전국이 현(縣)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곳은 수도 팀부에서 5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하현(縣)의 키이추라는 마을이었다. 그날 밤은 그곳에서 민박을 한 뒤 다음날 새벽 또다시 서쪽을 향해 산길을 달렸다. 중간에 갑작스런 폭우도 만나고 안개가 너무 짙은 지역으로 들어가 방향을 알 수 없어서 잠시 쉬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달리다 정오가 되어 국경 가까운 곳에서 차는 멈췄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시킴이 나온다고 했다. 시킴은 티베트 사람들이 곡물의 땅이라는 뜻의 ‘렌지옹’이라 부르는 곳으로, 1890년에 영국령 인도로 들어가 1947년 인도가 독립한 뒤 인도의 속국이 되었다가 1950년에 인도의 보호령이 된 뒤 1975년 인도의 한 주가 되었다. 또한 그 지역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8,598미터 높이의 칸첸중가 산이 있는 등 시킴 전체가 7,000미터 이상의 고봉들로 둘러싸여 있다.
의준이 도착한 곳에서 국경을 넘어 서북쪽으로 가면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이기도 한 유명한 나탕 계곡이 나타난다. 그곳은 사계절 경관이 아름답고 웅장하여 휴양지로도 잘 알려진 지역이다.
조너던은 차를 멈추었다.
“내가 지시받은 곳은 여기까지입니다. 저쪽에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조그만 오두막이 나타나는데, 그곳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된다고 합니다. 나는 이틀 뒤 아침 10시에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조너던은 의준의 얼굴은 보지 않고 앞창으로 바깥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말을 했다. 내리라는 뜻 같았다. 그러면서 보온병과 알루미늄 잔을 가방에서 꺼낸다.
조너던은 고개를 돌려 의준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면서 보온병에서 차를 한 잔 따라준다.
의준은 조너던을 마주 바라보고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잔을 받았다. 차를 조금 맛보았다. 녹차 비슷한 맛이지만 그것보다는 산 비린내 같은 것이 약간 감도는 느낌이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이 차를 하루에 몇 잔씩 마십니다. 여기에서는 시고니라고 부르는데, 고산지대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담겨 있다는 뜻이지요. 이 차를 마시면 아무리 깊은 산 속에 들어가더라도 길을 잃지 않는다고 합니다. 맛이 좀 특이할 겁니다. 이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껍질을 말린 다음 그것을 넣고 달인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조너던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한다.
의준도 따라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맛을 음미하며 차를 마셨다. 의준이 차를 다 마시고 잔을 돌려주자 조너던은 말없이 받고서 차에서 내린다.
의준도 차에서 내렸다.
조너던이 뒷좌석에 실은 가방을 꺼내준다. 의준은 고맙다고 인사했다. 조너던은 말은 없이 씨익 웃어주며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곧바로 차를 돌려 천천히 달려간다.
의준은 지프가 멀어져 가다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프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산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의준은 몸을 돌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바라보았다. 높은 산들 속에 둘러싸인 채 좁은 분지처럼 패어 있는 평평한 풀밭 한가운데로 좁다랗게 난 길 위에 서자 의준은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와 동시에 마치 세상의 끝에 와서 선 듯, 또는 이제 곧 세상의 끝을 마주해야 할 운명이 주어진 듯 비장함마저 드는 것이었다.
흐릿한 산안개가 지면에 깔려 있고, 습기 많은 구름이 낮게 내려와 있어서 하늘은 보이지 않고 마치 3차원 세상과 동떨어진 다른 차원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곳이 한국에서 수만km 떨어진 지구의 오지가 아니라 의준이 AI-AW 라이플 사격연습을 하던 강원도 산골짝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곳이 세상의 끝이어서 더는 갈 곳 없는 막다른 곳, 또는 실체의 세상이 아닌 허구 속 가상의 세계와 같은 묘한 신비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의준은 한 발을 내디뎌 보았다. 이상했다. 땅을 밟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발밑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허공이었다. 그와 동시에 의준은 자신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중력상태에 들어간 것처럼 몸의 균형이 없어지면서 의식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
| 매암이 맵다울고 쓰르라미 쓰다우네
| 산채를 맵다더냐 박주를 쓰다더냐
| 우리도 초야에무쳐시니 맵고쓴줄 몰래라
이정진(李廷藎, ?~?) | 영조 때 현감을 지낸 가인.
박주(薄酒)는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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