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다니는길이 자취곧 날작시면

by Rudolf

| 꿈에 다니는길이 자취곧 날작시면


1


한송이는 의준이 놔두고 간 시집에서 아래 귀퉁이가 접혀 있었던 페이지의 시가 늘 마음에 걸렸다.


영원한 줄 알았다


시간이 영원한 줄 알았다

태초는 기억할 수도 없고

종말은 너무 멀어 보이지 않아

아마도 시간은 영원하리라 여겼다


공간이 영원한 줄 알았다

우주 저 너머 그곳에도 무엇인가 있을 테고

매일 하늘도 보고 땅도 보지만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

아마도 공간은 영원하리라 여겼다


생각이 영원한 줄 알았다

마음은 잠시의 시간도 지체하지 않고 우주 끝으로 날아가고

눈속임처럼 과거와 미래를 오갔기에

아마도 생각은 영원하리라 여겼다


생명이 영원한 줄 알았다

어느 때 시작된지도 모르는 생명들이

오늘도 살아가고 내일도 이어질 것 같아

아마도 생명은 영원한 줄 알았다


사랑도 영원한 줄 알았다

이별도 영원한 줄 알았다

슬픔도 영원한 줄 알았다

고통도 영원한 줄 알았다


그러나 드디어 알게 되었다

죽음만이 영원한 것을


이 시는 어딘지 무서웠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 시간도 공간도 생각도 감정도 의식도 없이 오직 영원만 존재하는 곳으로 오라고 하는 듯한 유혹.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곳. 생명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는 곳. 왜 의준은 이 시의 페이지를 접어놓았을까?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랬을 것 같진 않았다. 이 얇은 시집을 근 30분 동안 붙들고 있었다. 아마도 시집 전체를 몇 번 읽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의아한 것은 마치 누군가가 집어갈 것을 알고 탁자에 놓고 나간 느낌이었다. 게다가 시집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페이지에 그날 날짜와 함께 써놓은 문구, Weltschmerz. 컴퓨터를 통해 그 뜻은 이미 찾아보았다. 세계고. 낭만주의 시대에 세상을 고뇌하는 문학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뭐 따지고 보면 고뇌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의미를 한 단어에 간단히 압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고라는 말은 퍽 어울리는 말 같았다.

게다가 이 시 역시 세계고와 연결되는 듯이 생각되었다. 그 시집에는 이 시 말고도 삶의 고통을 나타내는 시가 여럿 있다. 아주 짧으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듯한 구절도 여러 군데 나온다. 그 시들 중에서 이 시가 특출나게 돋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의준은 이 시를 골랐다. 마치 누군가에게 읽으라는 듯이.

그 사람 의준.

누굴까?

어떤 사람이기에 그 많은 재산을 지니고도 그렇게 고뇌하는 것일까?

그는 왜 세상을 누리지 못하고 그 꼭대기 층에서 세월만 보내는 것인가?

친구도, 애인도, 심지어 만나는 사람이나 취미도 없는 듯하다.

늘 혼자.

그 길고 긴 시간, 낮이나 밤이나 무슨 생각을 하고 지내는 것일까?

한송이는 의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늘 머릿속에는 그가 맴돌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과 애틋한 감정이 가슴 한가운데를 짓누르면서. 그러나 한송이는 의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명송이를 쳐다보던 눈빛을 통해서. 의준은 한송이에게는 부드러운 얼굴로 대했다. 그러나 명송이에게는 어딘지 불편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혹 착각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명송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피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한송이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한송이는 더욱 외로워지곤 했다.

그런데 그가 죽음을 꿈꾼다. 사랑을 꿈꾸어야 할 그가. 한송이가 아니라도 좋다. 그 어느 누구든 사랑할 수 있는 나이와 환경을 지닌 그가 아닌가. 그런데 그는 죽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죽음이 아니다. 영원한 어둠을 원하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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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이가 사는 2층의 월세방 창밖에 비둘기 한 쌍이 둥지를 틀었다. 원래는 집주인이 화분을 얹어놓을 수 있게 나무판자로 창틀을 만들어놓고 창 위에는 그럴듯하게 좁다란 차양을 달아놓았었는데, 한송이는 화분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있었던 곳에 비둘기가 날아와 알을 낳은 것이다.

한송이는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창문을 살짝 열고 비둘기 집을 내다보곤 했다. 그것이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집 창틀이 비둘기 똥으로 지저분해진다고 하며 주인이 창틀에 플라스틱으로 된 가시 망을 설치해 놓았다. 물론 비둘기 집도 싹 걷어냈다.

비둘기 부부는 창틀 대신 차양 위로 날아와 앉아서 집 잃은 설움으로 구구대기도 하고 차양 위에 똥을 싸놓기도 했다. 그러자 집주인은 고무호스로 물을 뿌려서 비둘기를 쫓아냈다. 그 뒤로도 몇 번 비둘기들은 날아왔지만 그때마다 물세례를 받더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송이는 지난번 의준의 펜트하우스 파티에 갔을 때 한쪽에 쌓아놓았던 책 중에서 종이공작 책을 들춰본 적이 있었다. 영어로 된 책이었는데 종이를 이용해서 각종 장식을 간단히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의준은 외국에 많이 다니면서 주로 예술에 대한 서양 책들을 가끔 사온다고 했다. 한송이는 그 책을 들춰보다가 재미있는 곳을 보고는 의준에게 그 페이지를 사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었다. 그렇게 해서 몇몇 군데 사진 찍어둔 것 중에 비둘기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고 종이접기는 아니고 종이를 간단하게 자르고 접어서 그럴듯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우선 두툼한 켄트지나 색지로 비둘기 몸통을 비슷하게 자르고, 색연필이나 물감으로 눈을 비롯해서 작은 동그라미를 몸통 양쪽에 그려넣는다. 그런 다음 다른 색깔의 종이를 주름잡아 접은 뒤 몸통 양쪽에 대고서 호치키스를 박으면 된다. 그러면 주름 잡힌 종이가 펴지면서 날개가 되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비둘기 모양이 되는 것이다.

한송이는 이런 식으로 색깔이 다른 비둘기 두 마리를 만들어서 끈을 달아 창틀에 매달아놓았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서 방으로 들여와 창 안쪽에다 매달았다.

왜 두 마리일까?

한송이는 문득 생각했다. 한 마리면 외로워서? 창밖에 둥지를 틀었던 비둘기가 두 마리여서? 둘 다 맞다.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색이 다른 두 마리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한 마리는 차분한 듯하면서도 화려한 색이었다.

그러한 반면 다른 한 마리는……, 눈도 없고 몸에 무늬도 없는 칙칙한 색의 비둘기. 하지만 그런 몸통과는 달리 날개는 아주 화려한 색이었다.

장님 비둘기.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펴고 있으나 날아오를 수가 없다. 자신의 날개가 화려하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보지 못하니까.

한송이는 그 비둘기에게 눈을 그려줄까 하고 여러 번 생각했었으나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한송이는 서러웠다. 눈이 없는 비둘기. 어디로 날아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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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준이 의식이 돌아와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캄캄했다. 처음에는 그 어둠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복잡한 꿈을 꾸다 깬 듯 머릿속이 어수선하고 멍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자신의 상황이 떠올랐다. 부탄의 서쪽,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의 풀밭, 사방은 산안개가 옅게 퍼져 있어서 하늘이 잘 보이지 않던 곳.

의준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 부탄 원주민의 지프를 타고 왔었다. 그리고 차를 받아 마셨지. 그런 다음…….

의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차!

차를 마시고 몸이 빙그르르 도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런 다음 지금 깨어난 것이다.

의준은 암흑 속에서 손으로 바닥을 만져보았다. 딱딱한 느낌. 나무판자 같았다. 몸을 살며시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럽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단지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평평한 나무판자 침대 같은 곳에 누워 있었던 것 같았다.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침대 끝이 만져졌다. 몸을 그쪽으로 가져가서 다리를 내렸다. 바닥에 닿았다. 팔을 뻗어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의준은 바닥에 두 다리를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 손에 무엇인가가 닿는다. 살며시 만져보았다. 나무……, 나무기둥. 의준은 팔을 휘저으며 조심스럽게 여기저기 더듬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까부터 냄새가 느껴졌던 것이다. 습기를 머금은 듯한 축축한 냄새. 그리고 무엇인가 탄내 비슷한 냄새. 아니, 향을 태우는 듯한 냄새. 그러나 한국에서 맡았던 그런 익숙한 향내가 아니라 그보다는 좀 더 깊은 맛이 느껴지는 향이었다.

의준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여기저기 더듬고 발로 차고 넘어질 듯하면서 여기저기 헤매다 문고리 같은 것을 만지게 되었다. 그것을 이리저리 더듬다가 고리를 하나 벗겨내고서 앞으로 밀자 스르르 열리는 것이었다. 문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아주 습하면서도 묵직한 공기가 코로 밀려들어온다. 그러나 그곳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아, 그때 의준은 비로소 자신의 옷 주머니를 더듬기 시작했다. 지갑, 여권 등은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핸드폰!

의준은 핸드폰을 꺼내어 버튼을 눌렀다. 켜졌다.

주위가 갑자기 밝아졌다. 어두운 숲. 그리고 자기가 나온 곳을 비춰보니 나무 오두막이었다. 의준은 핸드폰 플래시를 찾아 켰다. 주변이 더욱 환해졌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어서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의준은 오두막 주위를 여기저기 비추며 살펴보았다. 아마도 산행 도중 대피소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의준이 어둠 속에서 헤맬 때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었다. 부엌으로 보이는 공간, 여기저기 긴 간이침대와 길쭉한 의자들, 방 한쪽 구석에는 화덕과 같은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무장작으로 보이는 것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간단한 취사도구도 그 옆 나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의준은 탄내 같기도 하고 향내 같기도 한 냄새가 어디에서 나는지 살펴보았다. 그 냄새는 아까보다는 많이 약해져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잔향은 여전히 코에 남아 있었다.

오두막 안의 가장 깊숙한 구석, 그곳에 빨강, 파랑, 노랑 등 갖가지 색의 천이 좁고 길게 아래로 내리뜨려져 있었다. 그 천들을 들추니 그 안에 이색적이고도 자그마한 향로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안에 이미 다 탄 듯한 이파리 모양의 재들이 그 원래의 모양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의준이 무의식적으로 천들을 살짝 들춰서 그렇지 조금만 세게 흔들었어도 그 모양이 다 흐트러졌을 것이다.

그때서야 의준은 이곳까지 지프를 타고 오는 동안 조너던에게 들었던 부탄과 히말라야의 여러 전설과 풍습들이 생각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샤왈리 향이다. 샤왈리는 부탄의 오지에서 사는 숲의 정령들인데, 여기에서 ‘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한 이유는 그들이 각각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집단을 이루어야만 의미를 지니는 복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눈에 보이거나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개념으로만 실재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사이에 항상 존재하고 있어서, 만일 샤왈리가 없다면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의사소통도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 샤왈리를 잃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서 인간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된 사람은 저 혼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떠돌면서 샤왈리를 찾아 헤매고 다니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수억 년이 지나도 샤왈리를 찾지 못한다. 단지 샤왈리와 소통이 되는 누군가가 찾아와 그들을 어루만져 주어야지만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다림에 지쳐서 스스로 포기하고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있는데, 이들을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해 수천 년 된 고목에서 나는 어린잎을 따서 태운다. 그 어린잎들을 ‘샤왈루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의준이 맡았던 향은 바로 샤왈루이를 태워서 나오는 그 냄새였던 것이다.

의준이 맡았던 향내, 그것은 결국 외로움에 지쳐서 이 생명세계를 떠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세상이 잊어버린 영혼들을 위로하는 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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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송이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눈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거울을 볼 수 있는 거지? 아니, 어떻게 세상이 다 보이는 거야? 그러나 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만 눈이 없었던 것이다. 날개는 있는데.

날개……?

날개라니? 한송이는 얼른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없었다, 날개는. 그런데 거울 속의 자신에게는 날개가 있는 것이다.

신기했다.

그러나 재미있었다.

한송이는 스스로에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내가 미쳐가는구나.

그런데 이유는 무엇일까? 왜 현실의 자신에게는 날개가 없는데, 거울 속에서는 날개가 있는 것일까? 게다가 반대로 눈은 왜 없는 거지? 아, 비둘기. 며칠 전 만든 종이 비둘기에는 눈이 없고 날개만 있었다. 그때 한송이는 그 비둘기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거울 속에서 또다시 자신을 보는 것이다. 눈 없는 자신, 날개 달린 자신.

어디로 날아갈까? 보이지도 않는데.

한송이는 거울에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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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맑은 호수가 고산지대 한가운데에서 은밀한 분위기를 풍기며 잔잔히 펼쳐져 있었다. 호수 주변의 높게 솟은 검푸른 산들이 하늘을 좁게 만들어 새파란 하늘 공간은 마치 거꾸로 매달린 채 바닥 하늘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호수에 비친 하늘은 물색이 더해져 더욱 짙푸르게 펼쳐지며 마치 억겁으로 이어지듯 정신을 몽롱케 하는 신비가 엿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 하나가 떠 있었는데, 크기는 작지만 주변 산들처럼 나무숲이 무성해서 마치 물 위에 숲이 떠오른 듯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섬 아래쪽에는 약한 물안개가 피어올라 있어 마치 신기루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부탄 서부의 국경 근처.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그 호수 한쪽 기슭에 의준은 서 있었다. 그리고 작은 나룻배 하나가 물가에서 반쯤 올라온 채 옆으로 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노 하나가 버려진 채 떨어져 있었다. 하늘은 너무 파랬고, 물은 더 파랬다.

의준은 나룻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 섬으로 향했다. 섬은 한강 한가운데 있는 밤섬 크기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 거리는 500미터 정도 될까,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다.

의준이 섬에 내려서 숲속으로 들어가자 작고 허름한 불탑 초르텐이 서 있었다. 불사리를 봉납한 사각형의 돌로 된 3단 형태의 불탑. 오래되어 퇴락하고 이끼도 잔뜩 끼어 있어서 마치 그 자체가 억겁의 세월처럼 보인다.

의준은 어쩐지 이곳이 이 여행의 종착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이 지구의 끝이다. 그와 동시에 존재의 종말이다. 이곳은 실재하는 곳이 아니라 가상의 곳, 개념만 존재할 뿐 실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와 같은 곳이다. 생각해 보라. 의준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알 것인가? 세상이 잃어버린 존재. 음부와 같은 곳. 세상과 단절된 곳.

그렇다. 의준은 지금 이면의 세계로 들어와 있었다. 그것을 지금 깨달은 것이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아주 조그만 섬이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와 보니 섬 속은 한없이 깊은 느낌이었다.

의준이 초르텐을 돌아서 뒤로 들어가자 뜻밖에도 무덤이 하나 놓여 있었다.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의준의 온몸을 휘감는다.

의준은 걸음을 멈추고 무덤 앞에 놓인 비석을 바라보았다. 아니, 비석의 이름을. 두 개의 이름.


강석민

현의준


수천 리 떨어진 낯선 나라 깊은 숲속에 한글 비석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두 이름 모두 의준 자신이다. 어이가 없었다. 마치 일제강점기 시대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떠돌다가 순국한 애국선열의 묘비 같은 느낌이었다. 하마터면 의준은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묵념할 뻔했다.

의준이 자신이 묻힐 무덤을 미리 찾고 있다는 것을 계 실장은 안 것일까? 아니면 그냥 떠보기 위함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현재의 현의준이 과거의 강석민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하긴 계 실장이 보낸 세 번째 편지에 ‘내가 묻힐 곳은 금학산’이라고 써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확신하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의심 정도는 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의준이 자신의 진료기록을 없애기 위해 옛 그 치과를 찾아달라고 했었던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똑똑한 계 실장은 여러 가지를 꿰어서 연결시켰을 수도 있다. 어쩌면 온갖 수단 동원해서 옛 석민과 의준의 사진을 구한 뒤 꼼꼼히 비교하고 추론하고 가정하고 의심하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의준 가족이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 언론이나 인터넷, 주간지, 월간지 등이 어디에서 구했는지 수많은 사진을 실으며 남의 불행을 팔아먹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계 실장은 마음만 먹는다면 의준과 석민의 중학교 앨범 등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옛 석민은 아직도 시체를 찾지 못한 실종상태다. 따라서 이렇게 부탄으로 부른 것은 혹 소설이라도 쓰듯이 가정을 세워놓고 의준을 시험하고자 하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든 묘지가 마련되었다. 묘지를 구해 달라고 한 의준의 요구는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강석민이라는 이름으로 계 실장이 보낸 편지에서 형식상으로 보면 강석민은 자신이 금학산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뒤이지만 의준은 그에 대한 답신으로 묘지를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아, 맞다!

의준이 당했다.

계 실장이 강석민 이름으로 보낸 편지에 의준이 답을 한 것이다. 의준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계 실장이 놓은 덫에 걸려들었다. 계 실장은 도피 이후 의준 가족의 불행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세워놓은 가정을 시험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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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준은 조너던이 말해 준 시간 조금 전에 오두막에서 나와 약속장소로 걸어갔다. 20분 정도 거리였다. 차 한 대가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너던이 몰고 온 지프는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낡은 일제 픽업트럭.

의준이 다가가자 운전석에서 한 사람이 나온다. 조너던이 아니다.

의준은 걸어가다 말고 멈춰섰다. 이것은 또 어떻게 된 일인가? 의준은 조너던을 만나면 지난번 이곳에 도착해서 자신에게 무슨 음료수를 준 것인지, 계 실장과 어떤 식으로 연결된 것인지, 그리고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인지 캐물으려 했었다.

아, 사실은 그보다도 의준은 두려워했었다. 조너던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생각에. 이곳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오지에 의준을 버려두고 세상이 문을 닫을까 해서. 다만 계 실장의 성격으로 보아 그렇게는 하지 않으리라 위안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의준은 자신의 눈에 트럭이 보이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하며 불안해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곳 세상의 끝에서 자신이 저지른 짓의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체념하기도 했었다. 자신의 무덤까지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떻든 최악의 가정은 벗어난 셈이다. 조너던이 아니더라고 자신을 데려갈 차가 왔으니까.

트럭 운전사는 나이 많은 부탄 원주민이었다. 고된 삶과 노동에 시달렸는지 얼굴은 검게 타고 온통 굵은 주름투성이였다. 그리고 영어는 한마디도 알아듣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온화한 미소. 세상 모든 것을 경험해서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세상 모든 어려움을 다 헤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내비치는 미소. 의준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심란한 마음이 약간 위로받기도 했다.


6


포도주색의 검붉은 승복을 입은 중년의 학승이 이층 사각형의 돌 불탑 초르텐 뒤에서 목탁을 들고 서 있었다. 고봉들이 만든 긴 그림자 속에서 슬픈 눈동자로 저 아래의 호수를 내려다보며. 학승이 걸친 낡은 승복은 짙은 녹음 사이에서 퇴색한 핏빛처럼 늘어져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태양은 가파른 고산 속의 계곡 하늘 위에 떠올라 있었으나 곧 고봉들 사이로 내려앉아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학승은 한 젊은이가 나룻배를 저어 호수를 건너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학승은 눈을 지그시 감고 목탁을 두드렸다. 목탁의 울림이 숲속으로 퍼져나간다. 학승은 자신의 귀로 파고드는 목탁 소리를 따라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어지러운 번뇌들. 그러나 이제는 많이 안정되었다. 수도 없이 되짚어본 자신의 지난날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온 자신. 아직 마음속에는 과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이제는 그것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아직도 몇몇 가지만은 살아서 움직이며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지만. 학승은 남아 있는 번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아직 모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 호수의 섬으로 들어갔다 나온 젊은이. 그가 과거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죽음보다 깊은 어둠이 있다. 이 세상에서는 해결할 수도 갚을 수도 없는 어둠. 이는 학승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학승은 자신의 어둠을 속죄하기 위해 구도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젊은이의 마음은 어떠한지 알 수 없다. 그가 가는 길을 학승은 열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이곳 세상의 끝으로 부른 것이다. 젊은이는 스스로 하나하나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 끝이 무엇인지는 학승도 모른다. 그것은 젊은이만 알게 되겠지.

학승의 목탁 소리는 숲을 떠나 호수를 넘어 섬 속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7


의준이 팀부에 도착하자 이번에도 역시 다른 부탄 원주민이 소형차를 끌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영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땡큐와 바이바이 외에는.

의준은 그 차를 타고 파로 공항으로 가서 인도의 콜카타행 비행기에 올랐다.


***

| 꿈에 다니는길이 자취곧 날작시면

| 님의집 창밖에 석로라도 닳으리라

| 꿈길이 자취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명한(李明漢, 1595-1645) | 병자호란 뒤 중국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이후

세상을 비관하고 은둔한 선비.

석로(石路)는 포장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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