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부던바람 만정도화 다지거다

by Rudolf

제 4 부

완전한 인간 | Homo Magna


‘영혼과 육체라는 불완전한 두 개의 실체가 합해져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하나의 완전한 실체가 형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


| 간밤에 부던바람 만정도화 다지거다


1


“아이고, 연주 할아버님, 여기 계셨군요. 아니, 갑자기 교통사고라뇨? 어디 많이 다치셨습니까?”

4층 복도가 쩌렁쩌렁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408호 병실 문이 열리면서 젊은 남자가 호기 좋게 떠벌이며 들어왔기 때문이다.

“연주가 할아버지 입원하신 거 알면 울고불고 난리 날 건데 큰일입니다. 할아버님 연세에 뼈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에요. 아니, 그런데 간호사는 다들 어디 간 겁니까? 할아버님 간호 안 해드리고…….”

그때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한 간호사가 병실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무슨 일인가 하여 열린 병실 문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고 안을 살펴본다.

“아, 마침 잘됐네. 이것 봐요, 간호사님, 여기 이 문태식 할아버님 이렇게 내버려둬도 괜찮은 겁니까? 연세가 엄청 많으신데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이 병원 책임자한테 항의 좀 해야겠네. 아니, 교통사고 환자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 골병드는 겁니다. 그리고 할아버님이 지금 연세가 몇인지 아세요? 이 병원 문제가 많네…….”

간호사는 대꾸도 못 하고 입만 벌린 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기만 한다.

“나도 얼마 전에 여기 입원해 봐서 아는데, 그땐 정말 친절하게 잘 해줬거든요. 그런데 나이 드신 분이 오니까 이렇게 푸대접하는 겁니까?”

문태식은 엉거주춤 서서 혼이 나간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기만 한다.

“할아버님, 몸도 안 좋으실 텐데 그냥 앉아 계세요. 제가 내려가서 난리 좀 치고 오겠습니다. 원래 병원이라는 데는 가만있으면 호구 잡히는 거예요.”

의준은 씩씩거리는 표정으로 병실 문으로 향했다.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간호사가 화들짝 놀라 몸을 비켜준다.

“아, 저기…….” 의준은 병실을 나서다 말고 고개를 돌려서 문태식을 바라보았다. “계 실장님은 잘 계시죠?” 의준은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지으며 물었다. 그런 뒤 돌아서려다가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다는 듯 다시 덧붙였다. “심 여사님 만나면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곧바로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병원에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것 같았다. 의준은 밝은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뚫고 성큼성큼 걸었다.

한 떼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반면에 텅 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의준 하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곧바로 아래로 향했다. 의준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벽에 등을 기대며 숨을 크게 쉬었다. 그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혹 연주 이름을 꺼낸 것은 좀 과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기왕 호들갑 떨려면 그 정도는 해야 돼.

의준은 일부러 연주 이름을 들먹인 것이다.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혹시라도 저들이 의준 말고 한송이라도 건드리면 연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개방송인 셈이다.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아니, 효과 정도가 아니다. 저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기습을 당한 것이겠지. 게다가 계 실장과 심 여사까지 들먹였으니 이제는 마지막 베일까지 벗겨버린 셈이다.

이렇게 되면 의준과 계 실장은 공개석상에서 서로 마주 본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 섣불리 서툰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의준과 계 실장 사이의 계산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부터가 아주 중요하고도 극히 위험한 모험으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양쪽 모두, 의준에게나 계 실장에게나.

단, 어떤 경우라도 이것은 계 실장과 의준 사이에서만 해결되어야 한다. 그 외로 일이 확대된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바로 그것을 막기 위해 오늘 공개적으로 의준이 문태식 앞으로 나선 것이다.

의준은 1층 원무과에 가서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이미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그 직원들에게 문태식 노인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혹 불편한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연락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차에 살짝 부딪힌 것뿐이기 때문에 그것만 적당히 치료받고는 물러날 테니까.

하지만 저들은 언제 어느 때 의준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도전해 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이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둘 사이가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노출되었으니 저쪽에서도 의준을 대비하게 되겠지. 서로 놀고만 있을 리는 없으니까.

어떻든 의준은 이번 일에서는 기선을 제압했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의 일이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는 것이었다.



2


의준이 어떻게 연주에 대해서까지 알게 되었는지 문태식은 의아해할 것이다. 연주는 문태준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보물 같은 존재이다. 또한 연주를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시키지 않고 계 실장에게만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의준은 계 실장에게 저격 일을 맡길 당시 미국의 친구 스티브에게 계 실장의 동선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해 달라고 말해 두었었다. 바로 그때 계 실장이 어느 성당에 자주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그 성당의 어린 소녀가 문태식의 손녀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 당시에는 문태식의 존재 자체를 몰랐으니까. 어떻든 그때 연주에 대해서 알아두었던 일이 이번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그것은 문태식뿐만 아니라 계 실장에게도 뼈아픈 약점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일을 통해서 의준이 자신들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 점으로 인해 이제 앞으로 저들은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의준은 아직 계 실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계 실장이 의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따라서 의준이나 계 실장이나 서로서로 모두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피장파장인 셈이다.

그와 동시에 양쪽에서 서로서로에게 가장 아픈 부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것은 곧 서로가 그 부분은 건들지 말자는 무언의 합의이기도 한 셈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게임은 쉬워진다. 정면대결만 남은 셈이니까.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서로 마주하게 될 것인가? 사실 의준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끝낼 수 있는지 모르고 있다. 혹 이에 대해서는 서로 마찬가지 아닐까?

산 하나를 넘었다고 생각한 의준은 또다시 자신이 산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온몸에서 맥이 빠져버렸다.


다음날 의준은 고시원으로 향했다. 변장도 변신도 하지 않은 채.

의준은 고시원으로 곧바로 들어갔다. 사무실 창문이 열린다. 심 여사. 눈에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런데도 얼굴은 무표정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 제가 저번에 이곳에 왔었는데 기억하시겠어요?”

“그, 글쎄, 기억이 잘…….”

“아뇨, 이 사무실엔 작년 가을에 왔었는데. 그때 저쪽 끝 방 보여주셨잖아요…….”

심 여사의 얼굴은 낭패스러운 기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저번 날에는 시흥장례원 구경 잘 했습니다. 오이도 공기 참 좋던데요.”

“네……?”

“그리고 그날 제가 사는 데까지 쫓아오셨던데…….”

“아…….”

심 여사는 입을 벌렸지만 신음 비슷한 말 외에는 나오지 않았다.

“참, 문태식 할아버지가 저희 집 근처 병원에 입원한 거 알고 있으시죠?”

“…….”

심 여사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저 아시죠? 저희 집도 아시고?”

심 여사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거 계 선생님에게 전해주시겠어요?”

의준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플라스틱 통을 꺼내어 심 여사에게 내밀었다. 미국에서 월그린과 같은 약국에 가면 주는 조그만 갈색 약통이다. 심 여사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약통을 받는다. 손끝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의준은 미소를 크게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시원을 나갔다.



의준은 약통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빈 메모지 한 장만 넣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여러 가지로 의미를 찾으려 하겠지. 의준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편지봉투를 받고서 온갖 생각을 다 한 것처럼.

그동안 계 실장은 의준에게 편지 네 통을 보냈다. 라틴어 둘, 묘지의 위치, 그리고 빈 봉투. 그중 앞쪽의 세 편지에 대해서는 대강 짐작하고 있지만, 마지막의 빈 봉투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한 의도를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러한 의도가 무엇이든 알고 싶지 않다. 단지 계 실장을 찾는다면 아무런 추궁 없이 계약불이행에 대한 대가만 치르도록 하면 된다. 그러나 이미 지불된 계약금은 환불받지 않기로 했다. 의준이 땀 흘리지 않고 손에 쥔 돈의 일부이니까.


의준은 벽 공간에서 감추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나 메시지 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의준은 계 실장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응답이 없다.

의준은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 잘 계시지요? 연락 주십시오.

이 메시지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받든 안 받든 전화하는 그 자체가 메모지를 전달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의준은 이 메시지를 통해 계 실장의 움직임을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만일 정상적인 경우라면 전화를 한 날 오후 또는 그 다음날에는 계 실장이 의준의 메모를 가져가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계 실장이 실제로 메모를 가져갈지 궁금했다. 또한 의준이 보낸 전화 메시지를 확인했을지도 모르겠고. 따라서 의준은 강남역 그 서점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3


한편, 의준은 얼마 전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임시직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이나 감성적인 문제로 인해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사람들이 치료와 사회적응 훈련을 병행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다. 의사가 정해 주거나 또는 의준이 선택한 곳에 가서 아주 짧게는 하루이틀, 길게는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일을 하며 그 결과를 가지고 의사와 상의하면서 정상적으로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프로그램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준을 고용한 업체에서는 환자의 개인정보나 치료 중이라는 사실이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게 해야 하고, 또 환자가 원할 경우 이름이나 성도 바꿔서 부르게 된다.

의준은 처음에는 식당에서 이틀 일했다. 이곳은 의준 스스로 선택했다. 그러나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 다음은 어떤 중학교에서 청소하고 정돈하는 일이었다. 딱 하루를 하고 그만두었다. 의사에게는 학생 때 겪었던 여러 가지로 괴로웠던 기억들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의사는 의준에게 프로그램을 바꾸겠다고 했다. 그러나 의준은 다른 곳에서 한 번 더 일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세 번째로 간 곳은 연극과 뮤지컬을 하는 서울 강남의 대형극장이었다. 의준은 그곳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그 다음으로 용인의 한 놀이체험시설이었다. 이곳은 플라이쇼를 하는 곳으로, 높고 커다란 투명 원통에 들어가 공중부양을 체험하는 시설이었는데, 의준은 한나절도 견디지 못하고 나왔다. 공중부양 장면을 본 뒤 머리가 몹시 어지러워 아이들을 안내하는 일을 감당하기가 힘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는 동안 의준은 차츰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한 업체에서 한 달 이상 별 어려움 없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치료과정에서 의준이 일을 한 업체 중에는 의사가 정해 준 곳도 있었고, 의준이 해보고 싶다고 먼저 말한 곳도 있었다.

의사는 이러한 일들을 좀 더 진행해 나가려 했으나 의준은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일을 일찍 마친 날, 의준은 슈트 차림으로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의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의준은 다시 운전면허에 도전해야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앞뒤옆 모두 사람들이 붙어 있어서 고개도 돌리지 못하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가는 누가 자신을 미행해 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번에는 이보다 훨씬 덜 붐비는 지하철에서도 심 여사에게 완벽하게 미행당했잖은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의준은 이번 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곱씹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한국에서 지내기가 힘들어 외국에 나가 오랫동안 떠돌았던 것, 결국 한국에 돌아왔으나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의 파국을 계획하다가 그 결말을 극적인 심판의 장면으로 만들기 위해 계 실장을 부추겨 자신을 저격하게 한 일, 그리고 늘 부정한 일을 꾸미면서도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떠버리를 끌어들여 자신의 마지막 길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지 시험한 것, 그 뒤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된 크고 작은 일들, 게다가 의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생긴 소소하지만 어딘지 어두운 미래를 머금고 있는 듯한 미세한 징조들…….

의준은 이 모든 일들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물론 마음의 평안도, 정신적 안식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가질 수 없었다. 마치 흘러가는 구름 사이에서 발을 헛디뎌 허청거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한 발자국만 헛디뎌도 어둠 깊숙한 곳, 끔찍한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깊고 깊은 웅덩이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 한 발 한 발 떼는 것이 조심스럽고 무섭기까지 했다.

의준은 의사에게 갔다. 정신과의사는 불안신경증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 말에 의사 자신도 확신이 없는 듯이 느껴졌다. 어떻든 의사는 몇 가지 치료방법을 제시하고 둘이 함께 극복해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어딘지 의사는 의준의 증상에 대해 의심하는 느낌이 들었다. 의준의 세 치 혀가 만들어내는 언어를 믿지 않는 듯했다. 의준이 말한 내용들이 거짓은 아니지만, 그 증상의 근원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 것 같았던 것이다.

의준은 의사가 무서워졌다. 자신의 내면을 들킨 것 같았다. 병원에 찾아갈 때와는 달리 이제는 의사에게서 빠져나갈 핑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의사의 권유에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곧 순순히 따라주기로 했다. 하지만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은 먹지 않았다. 그리고 적당한 연기를 통해 의사에게 만족을 주고 마침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자신의 증세가 나아졌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즉 의사의 의심이 해소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채.



4


플라모델 전문 판매장. 이곳은 커다란 백화점처럼 넓은 공간에 각종 플라모델 판매대와 국내외 회사의 대리점들이 자신들의 제품을 홍보도 하고 판매도 하는 대형 매장이다. 이곳에서 오늘 1년에 한번 하는 할인행사를 벌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매장 안은 사람이 들어설 자리도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최대 50% 할인. 게다가 10만 원 이상 구입하면 특별사은품도 준다. 일본 피규어인 미래소녀 라리야. 이 피규어는 개별적으로는 판매하지 않고 사은품으로만 준다고 한다. 바로 이것을 받으려고 주로 중고등학생들이 떼로 몰려온 것이다. 여자애들뿐만 아니다. 남자애들도 라리야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연주는 이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온데다 미래소녀 라리야라는 것 자체가 일본만화 주인공이어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주는 철저히 밀리터리, 즉 군사용 모형만 고집하고 있었다. 탱크나 군인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쪽 방향이 현실감이 있고 또 연주의 취향에도 맞았다. 사실 요즘은 연주처럼 철저히 밀리터리만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고, 더더군다나 플라모델을 좋아하는 여자도 별로 없지만 그중에서도 밀리터리에만 관심을 두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이곳 판매장에서 하는 말에 의하면 이 주변에서는 여자 플라모델러는 연주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연주에게 늘 묻는다. 왜 하필 여자가 플라모델을 좋아하며, 또 왜 하필 밀리터리냐고. 판타지나 캐릭터도 많은데. 그러나 연주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것이 없다. 왜냐고? 사실 그 이유는 연주도 모른다. 그냥 좋으니까 좋은 거지 뭐. 그러면 사람들이 또 이렇게 묻는다. 나중에 여군에 갈 거냐고. 그러나 연주는 군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알고 보면 연주가 얼마나 여성적인데.

그런데도 언젠가 바로 이 판매장에 우연히 들어왔다가 연주는 커다란 탱크가 진열된 것을 보고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연주는 밀리터리 플라모델에 눈이 꽂히게 된 것이다. 당시 연주가 본 것은 독일제 게파르트(Gepard, 치타)였는데, 35mm 대공기관포가 포탑 양쪽에 장착된 25분의 1 축소 모형이었다. 사실 이 모형은 너무 오래된 모델이어서 잘 전시해 놓지 않는다. 다만 어느 플라모델러가 사정이 생겼다며 자신의 작품들을 당분간 맡아달라고 부탁하며 그중 대형 모델 몇 개를 갖다놓았는데 게파르트가 바로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연주가 알기로는 스타워즈 다스베이더나 건담 시리즈 중에는 12분의 1짜리도 있지만, 밀리터리에서는 25분의 1이 가장 큰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처음 게파르트를 보았을 때는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이때부터 연주는 25분의 1 밀리터리 모델을 주로 찾았지만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32분의 1 밀리터리 쪽으로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솜씨가 많이 서툴러서 정밀하게 만들지도 못하고 칠도 엉성하게 해서 연주는 직접 만드는 쪽보다는 주로 이곳 매장에 와서 전시되어 있는 것들을 부러움에 가득 차서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모형은 조립하고 접착제로 붙이고 색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 물감이 아니라 에나멜이나 아크릴 컬러를 사용한다. 또한 밀리터리 계통은 주로 무광택을 칠해야 한다. 게다가 플라스틱 부품 조각들은 너무 작고도 많을 뿐만 아니라 부러지기 쉬워서 다루기가 어렵다. 이것뿐만 아니다. 색칠할 때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밀리터리 계통은 고증을 철저히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자료를 참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가능한 한 실제와 거의 똑같이 만들어야 하고, 또 거기에 상상력을 덧붙여 영화나 실제와 같은 상황, 즉 디오라마까지 꾸미면 더 좋다. 그러나 사실 요즘은 사람들이 밀리터리 계통보다 다른 것들을 더 좋아하고 또 점점 판타지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연주는 가능한 한 실제와 똑같은 밀리터리 모형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게파르트와 같은 탱크나 장갑차 계통에 마음을 쏟았다. 게파르트는 서독 주력전차 레오파르트(Leopard, 표범) 1형의 차체 위에 스위스 외를리콘(Örlikon)사 KDA 35mm 대공기관포를 포탑 양쪽에 하나씩 장착한 것으로서 1973년부터 실전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이 모델은 대공기관포의 전형이 되어 많은 국가에 판매도 되고 변형도 되었다.

중학생인 연주가 이 모델을 좋아해서 25분의 1짜리 모델을 늘 구경하고 부러워하자 주변에서는 연주에게 에바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히틀러와 함께 33살에 자살한 부인 에바 브라운에 빗댄 것이다. 연주가 독일제 전차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연주는 이 별명이 싫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연주의 이름을 모르는 그 사람들은 에바라는 이름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연주가 이 별명 말고도 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프라’모델이라고 말을 하는 점이었다. 플라스틱 모델(모형)의 준말이면 플라모델이지 왜 ‘프라’모델?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 플라모델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주로 일제를 불법복제해서 판매했는데, 일본어로 플라스틱을 ‘プラスティク(프라스티쿠)’라 한다고 해서 ‘플라’가 아니라 ‘프라’로 발음했다는 것이다. 일본어에는 ‘플’이라는 발음이 없기 때문이란다. 당시는 아직 일제강점기의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기여서 사회 각계 대부분의 용어들도 일본어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플라스틱이라는 말도 일본식으로 ‘프라스틱’으로 발음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프라모델 대신 플라모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제목을 붙인 책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 특히 상점에서는 주인이나 손님들이 대부분 프라모델이라고 말을 하고 플라모델러들끼리도 그렇게 부른다. 하긴 그렇게 말한다 해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고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 게다가 누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플라모델이든 프라모델이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밥이나 먹자.

하지만 연주는 밥도 먹지 못했다. 구경하는 데 빠져 있느라.



연주는 플라모델 할인행사장을 빠져나오면서 좀 우울했다. 연주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사실은 미래소녀 라리야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도 요란하게 소문이 나서 구경이나 한번 하자고 왔던 것이다. 물론 사진으로 보기는 했다. 그런데 실제 모습을 보자 너무도 탐이 났다. 아무리 자신이 일본만화풍이니 뭐니 하고 타박을 했어도 너무 예쁜 걸 어떡하냐고. 연주는 밀리터린지 프라모델인지 플라모델인지 그런 것들 싹 다 잊어버리고 화려하고도 깜찍하게 만들어놓은 그 피규어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주머니에는 10만 원이 없었다. 만 원도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 학생이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러면 저렇게 긴 줄을 서서 물건들을 잔뜩 사고는 라리야를 사은품으로 받아 승리감에 도취된 채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나오는 저 많은 아이들은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연주는 우울한 마음으로 행사장을 나섰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더 이상 이곳에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깟 피규어는 없어도 된다. 하지만 자기가 사고 싶을 때 사지 못하고 남들 사는 것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 마음이 상해 있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게 있었다면 밀리터리 코너 옆에서 늘 말없이 일만 하던 미남 아저씨가 오늘은 살짝 웃어주었다는 사실이다. 미남이라고 말은 했지만 흔히들 말하는 그런 꽃미남 쪽은 아니고, 어딘지 순수형 아니면 고독형 같은 타입이었다. 사람들하고 눈도 잘 안 마주치고 자기 일만 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그런 모습 말이다. 사실 연주가 이곳에 오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그 아저씨다. 한 달 전 이곳에 들렀을 때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생김새는 깔끔한 것 같은데도 한눈에는 들어오지 않고 몇 번 마주쳐야 의식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있잖은가.

그런데 문제는 연주가 그 아저씨를 처음 쳐다보던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는 사실에 있다. 마치 동화 같은 데 나오는 듯한 순수한 이미지. 아니, 동화보다는 순정소설이 더 맞겠다. 아, 순정만화. 그래, 맞아. 그쪽이 더 어울린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게 예쁘게만 그려놓은 순정만화 속 남자.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그 이미지가 딱 어울렸다. 사람들은 그 아저씨를 선우 선생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도 어딘지 만화 주인공적인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남자가 내 앞에 딱 나타난 거지……?

이렇게 해서 연주는 그 아저씨만 보면 가슴이 울렁거리게 되었다.

웃긴다. 이제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이십대 후반은 된 듯한 남자에게 눈이 가다니. 게다가 며칠 전에 왔을 때는 정말 정신없이 선우 아저씨를 바라보았었다. 그날 그 넓은 매장 저쪽에서 한 점원이 어떤 미국인 가족을 데리고 선우 아저씨에게 왔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유창한 영어 대화. 그 미국인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에게 무엇을 사주면 좋을지 상의하는 것 같았다. 미국인 가족이 물건을 잔뜩 사고서 떠나자 선우 아저씨는 눈을 내리깔고 다시 자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연주가 그 옆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데 오늘 선우 아저씨가 처음으로 연주를 보고 웃어주었다. 게다가 다른 때는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짙은 색 슈트에 노타이였다. 매장의 특별행사 날이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직원들은 평상시와 똑같은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연주의 눈은 선우 아저씨 쪽으로 더 자주 갔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자기 일만 할 뿐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 그런데 연주가 다른 아저씨들과 대화를 좀 나누려다가 다들 바빠서 정신없는 것을 보고 김이 새서 그냥 돌아서서 가려는데 선우 아저씨가 고개를 들고 연주를 바라보더니 웃어준 것이다.

그 미소.

연주는 가슴이 설렜다.

그 미소를 가슴에 안고 연주는 터벅터벅 지하철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꽤 붐볐다. 연주는 플랫폼에 서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눈을 들어 무심코 옆을 보았다.

그런데……, 아, 저만치에 그 선우 아저씨가 있었다. 앞만 똑바로 보고 선 채로.

연주의 가슴이 쿵 떨어졌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그 순간 전동차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많은 사람이 밀려나오고 또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갔다.

전동차에 오르자 연주는 빽빽한 사람들 사이로 눈을 돌려 훑어보았다. 약간 멀찍이 선우 아저씨의 뒷모습 반이 보였다. 가만히 선 채로 왼손으로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연주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누르고 선우 씨의 모습을 곁눈으로 슬쩍슬쩍 확인해 가며 사람들 틈에 숨듯이 서 있었다.

몇 정거장이 지나도록 선우 씨는 내리지 않았다. 연주는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환승역이 다가왔다. 얼굴을 돌려 다시 선우 씨를 바라보았으나 아까 그 자세에서 변함이 없다. 전동차가 섰다. 연주는 선우 씨가 내리면 따라 내려야 하나 하고 갈등했다. 그러나 선우 씨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연주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이 밀려들어온다. 연주는 선우 씨와 반대편 쪽으로 밀려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돌려 선우 씨를 찾았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안 돼…….

그 순간 연주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퍼뜩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연주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선우 씨가 보이지 않는 게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엉뚱한 마음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다행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또다시 선우 씨의 뒷모습이 저쪽 편에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방금 전에 자신을 나무라던 그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무엇인지 모를 스릴감과 기대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연주는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조금 비집고 들어가서 선우 씨의 옆모습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 또다시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전동차는 덜컹덜컹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려가고 있었다. 연주는 자신의 심장박동 속도를 늦추려고 애쓰면서 옆 사람들 눈치 채지 않게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노인이 몸을 돌려 움직이는 바람에 연주의 시야를 가리고 말았다. 그래서 옆 사람 쪽으로 살짝 몸을 돌린다는 것이 그만 몸이 갑자기 기우뚱하며 쏠린 탓에 어떤 사람을 살짝 밀치고 말았다. 예쁘장하면서도 얌전한 젊은 여자였다. 그러나 어딘지 그 눈가에 남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할 날카로움이 있는 것을 연주는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바람에 연주는 겁도 나고 크게 당황스러워서 급히 여자에게 낮게 말했다.

“어머, 죄송해요. 갑자기 전동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사실 그런 면도 좀 있었다. 전동차가 갑자기 덜컹하면서 크게 회전하고 있었기에 연주의 몸이 한쪽으로 쏠리며 기우뚱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주는 잔뜩 긴장한 상황에서 갑자기 발생한 일이라 몹시 놀랐던 탓인지 사과하는 말이 사실은 입에서는 나오지 않고 입술로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것을 알아차리자 또다시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그냥 고개만 크게 꾸벅 숙이고 말았다.

여자는 연주에게 갑자기 밀쳐진 것을 상당히 언짢아하는 것 같았다.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뒤로 움칫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불쾌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냥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아…….

연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죄송하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여자가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연주는 숨을 길게 내쉬며 안도를 했다.

그 뒤 연주는 달리는 전동차에 잠시 몸을 맡기고 있다가 문득 이상한 점이 생각났다.

그 여자가 사람들 틈에 꼭 끼어 있으면서도 가끔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연주는 일부러 그런 것을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도 은밀히 살펴보는 사람이 있었기에 얼굴과 시선을 너무 오랫동안 한 곳에 고정할 수는 없어서 간간이 시선을 돌리다가 그런 장면을 목격한 것이 의식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얌전해 보이는 여자가 만원 전동차 안에서 자꾸 몸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좀 이상하게 여겨져서 그런 장면이 눈의 잔상 속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로부터 숨기는 듯한 여자의 모습. 그와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어떤 상황을 계속 살피려 하는 듯한 여자. 그런 탓에 연주가 살짝 밀쳤을 때, 그 주변이 다소 어지러워지면 그로 인해 사람들의 주의가 쏠려 자신이 모습이 들킬 것 같아 당황해했었던 것 같은 그런 낭패스러운 얼굴.

갑자기 연주의 머릿속에서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가에 남은 잔상이 영화장면처럼 연주의 눈앞에 활짝 펼쳐졌다.

여자가 눈이 커지면서 고개를 얼른 돌리는 순간 무엇엔가 당황해하며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급히 눈뿐만 아니라 얼굴과 몸을 돌려, 아니 무엇인가로부터 피하며 자신을 들키지 않게 하려고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려 하는 모습. 바로 이러한 장면이 클로즈업되어 허공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맞았다. ‘무엇인가로부터 피하고……, 들키지 않게 하려는……’ 이 두 상황이 뚜렷이 나타나는 그 모습.

왜 그랬을까……?

연주는 궁금하기도 하고 또한 무엇인가 운명적인 직관에 이끌려, 그 여자가 바라보았을 법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혼잡스럽게 뒤엉켜 있는 모습 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연주는 아차 싶어서 선우 씨를 찾았다. 그 사람 모습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좀 전에 전동차가 덜컹거렸던 탓에 사람들이 살짝 뒤엉켜 버린 것 같았다.

연주는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을 정도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목을 길게 빼서 선우 씨가 있었던 곳 근처를 살폈다. 그랬더니 사람들 틈새로 어렴풋이 짙은 색 재킷이 보였다. 그곳을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이에 사람들이 다시 조금 흐트러지며 선우 씨의 뒷머리가 나타났다.

후―!

연주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연주는 마음이 편해지자 슬쩍 아까 그 여자를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여자는 어느 샌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리고 새치름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어느 한 곳을 계속해서 슬며시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연주는 호기심이 생겨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뒤엉켜 있는 것 외에 특이한 점은 없었다.

이상하네. 특별한 사람도 없는데…….

그러나 이러한 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동차는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몇 역을 지나는 동안에도 짙은 색 슈트에 노타이 그 순정만화 선우 아저씨는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두어 정거장 더 갔을 때……, 아, 선우 씨가 내리려는 것 같았다. 강남역이었다.

연주는 급히 여자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수백만 년 지루하게 날아오다가 드디어 희망의 별에 이른 우주 여행객들처럼 부산하게 움직거리며 내릴 준비를 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는지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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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송이는 의준이 그 노인의 병실에 가서 크게 떠벌였다는 말을 들었다. 한송이가 차로 친 그 문태식 노인. 게다가 의준은 그 노인에게 몇몇 사람의 이름을 들먹이며 안부까지 묻더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원무과에도 찾아가 잘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아마도 꽤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병원 주차장 앞에서 차에 치이는 사람들은 모두 그 현의준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의준이라는 사람은 지난번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입 꼭 다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노인이 입원하니 느닷없이 병실에 나타나 큰소리로 떠벌였다고 하니 그 두 사람은 서로 알아도 보통 아는 사이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야릇한 점은, 처음에 의준이 이 병원 앞에서 넘어져 입원한 뒤로 왜 그 사람과 관련된 사람들만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고가 계속 일어나는 것일까? 게다가 여기에 한송이 자신도 한몫 끼게 되었으니 어떻게 된 일이지? 이 모든 것이 지독한 우연의 연속일 뿐이란 말인가?

한송이는 의준을 만나서 문태식 노인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그 노인이 왜 이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 아니, 이 모든 것이 왜 의준과 연결되는지.

그렇다고 이런 것을 대놓고 묻기는 좀 이상했다. 어떤 수상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가벼운 교통사고일 뿐인데, 거기에 무슨 큰 음모라도 있는 듯이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한송이 자신을 포함한 의준 주위 사람들이 모두가 공모해서 교통사고 보험사기라도 친 듯이 말이다.

의준이나 명송이는 모두 부잣집이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보험사기란 말인가?

게다가 한송이 자신은 보험사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또한 문태식 노인도 그렇게 가벼운 교통사고로 어떻게 보험사기를 칠 수 있겠어? 그리고 그 노인은 입원해서 얼마 안 되어 퇴원했잖아.

그럼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지?

지독한 우연의 일치?

자,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현의준이 자전거를 타고 오다 한송이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바람에 넘어졌다.

두 번째는 후진하던 명송이의 차에 한송이가 치어서 넘어졌고.

세 번째는 현관에 갖다놓으려고 한송이가 운전하던 차에 문태식 노인이 살짝 치었다.

여기에서 의심스러운 점은?

모두 다 살짝 치인 것? 아니면 모두가 다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는 공통점?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살펴보자.

한송이와 현의준.

명송이와 한송이.

한송이와 문태식.

여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은? 그리고 세 사고의 공통분모는?

한송이!

말도 안 돼.

“한송이, 내가 중심인물이야. 바로 내가. 그리고 나를 뺀 세 사람은 처음부터 모두 현의준과 관련이 있어. 어떻게 된 거야? 그 세 사람이 나에게 무슨 공모라도 하고 있는 거야?”

어? 공모? 그, 그게 정말일까……?

“그리고 한송이와 명송이는 왜 하필 이름이 같은 거야? 그것도 이 음모와 관련이 있나?”

명송이 그 착하고 선하게 보이던 언니까지 나한테……?

한송이는 기분이 아주 묘해졌다. 자신은 지금까지는 늘 남들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아니, 된 듯한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묘하고 기분 나쁜 일에.

기분 나쁜 일? 무슨 일인데?

글쎄…….

한송이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한송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현의준을 만나야겠어.”

한송이는 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갑자기 망설여졌다.

아니야, 직접 찾아가 보자. 그 사람은 대개 집에 있다. 미리 전화하지 말고 아파트 앞에 가서 전화하자. 그러면 거절하지 못하겠지.



마침 병원근무가 없는 휴일 오전 아침 일찍, 한송이는 긴 시간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홍대입구역에서 많은 사람과 섞인 채 플랫폼으로 밀려나왔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중, 반대편 계단을 통해 천천히 내려가고 있는 의준이 눈에 띄었다.

“아, 안 돼!”

한송이는 낭패감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전화하는 건데.

한송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계단으로 가서 뛰다시피 내려갔다. 의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넓은 플랫폼이 나타났다. 휴일 오전인데도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다행히 아직 전동차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송이는 이 기다랗고 넓은 플랫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때 막 전동차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송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사람들을 헤치며 의준을 찾았다. 전동차가 섰다.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뒤이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준은 아직 찾지 못했다.

한송이가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사람들은 거의 다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한송이는 사람들 끝에서 전동차에 올라탔다.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간신히 비집고 들어서야 할 정도였다.

한송이는 차에 타기는 했으나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찾을 수도 없고.

전화를 해볼까?

그러나 사람으로 빽빽한 전철 안에서 전화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슨 천지가 변할 급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래서 미리 전화하지 않은 것이 더욱 절절이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자신을 탓하며 몇 정거장 지나면서, 다음에 전화하거나 만나거나 해보자 하고 포기하고 있는데 전동차가 또 다음 역으로 들어섰다. 그때 갑자기 기적처럼 의준이 나타났다. 사람들을 헤치며 불쑥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송이 바로 옆 사람의 옆으로. 아래위 싱글 슈트를 단정히 입고서.

한송이는 하마터면 의준을 부를 뻔했다. 그러나 의준이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어서 한송이는 순간 멈칫했다. 아마도 내리려는 모양이다. 그래서 한송이는 의준이 내린 다음 쫓아가서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좁은 전동차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받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전동차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나간다. 한송이는 뒤로 밀쳐지는 바람에 의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전화를 하려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데 저만치에서 걸어가는 의준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송이는 뛰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섰다.

혼자서는 어디에도 잘 가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휴일 오전에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송이는 묘한 생각이 일었다. 그리고는 약간 죄책감도 드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저도 모르게 슬며시 고개를 드는, 몰래 뒤쫓아가 보고 싶은 악동적인 호기심. 밖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이 이 아침에 저렇게 성큼성큼 어디를 가는 것이지? 좀 의외 같지 않니? 궁금한 생각 안 들어……?

지하도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는 의준의 뒷모습을 보며 한송이는 문득 자신의 마음 한켠이 아파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송이에게 참정루을 주겠다고 뜬금없이 편지를 보낸 사람. 그리고 엉뚱한 기회이긴 했지만 자신에게 그 참정루에서 잠을 자게 한 사람. 그때 한송이는 자신과 의준의 환경을 비교하고 나서 고개를 흔들었었다. 물론 거기에는 명송이의 존재도 개입되어 있었다. 한송이와 명송이는 이름만 같을 뿐 어느 것 하나 비교될 수 없는 상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송이는 여자의 본능으로 의준의 마음이 명송이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의준 주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려 했다.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송이는 스스로의 처지와 한계를 넘고 싶지 않았다. 그 너머에는 어떠한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의준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걸어가고 있는 한송이는 가슴이 너무 아렸다. 서글펐다. 원망스러웠다. 좀 전에 느꼈던 죄책감 같은 것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한송이가 그렇게 울적한 마음으로 뒤쫓아가는 중에 의준은 어떤 커다란 상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무엇을 사려는 것일까……?

한송이는 그 상점 근처까지만 가서 발걸음을 멈췄다.

특별할인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대형 상점. 요란한 문구가 쓰여 있는 여러 플래카드가 건물 곳곳에 걸려 있었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이제는 시간이 제법 지나 바쁜 오전의 일상이 펼쳐지고 있는 즈음이었던 것이다.

한송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혹여나 의준과 마주칠까 조심하며 매장들을 살폈다.

아, 저쪽 한켠 어떤 매장에 의준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무엇을 사려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 즉 판매하는 사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한송이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의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의준은 물건을 사려고 두리번거리거나 흥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장 한쪽에서 점원을 도와 무엇인가를 정리하며 잔일을 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한송이는 조심스럽게 상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길 건너편으로 갔다.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끝까지 의준을 지켜볼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특별한 이유를 댄다면……, 아마 의준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현의준은 어떤 사람인가……?

그래서 어떠한 외적인 선입견도 개입시키지 않고 순수한 상태에서 의준을 보고 싶었다. 한송이가 모르는 평상시의 그의 본 모습을. 물론 상점 안에서 이미 그가 손님이기보다 점원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실 이 점에 더 의구심을 가져야 옳겠는데도 불구하고 아직은 전체 그림 중 극히 일부만 본 것 같아, 모든 판단을 보류하고서 더 큰 그림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한송이는 건너편 한 커피숍에서 눈치받지 않을 만큼 적당한 시간 간격에 맞춰 새로운 것을 주문하며 오전을 보냈다. 건너편 상점에는 많은 사람이 들락거렸다. 특별행사라 그러할 것이다.

한송이는 옆집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간단한 식사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러는 중에도 계속 편의점 유리창으로 건너편을 지켜보고 있었다. 혹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의준이 밖으로 나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끝없이 한송이를 들볶았으나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잘 버텨나갔다. 그러나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한송이는 갑자기 조그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건너편 매장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편의점을 나와 건너편으로 가서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저만치에서 많은 사람들 사이로 의준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한송이는 황급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다시 뛰듯이 편의점으로 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 의준이 상점 밖으로 나와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한송이는 가슴을 억누르고 편의점에서 살며시 나가 길 건너편에서 걸어가는 의준을 바라보았다.

의준은 짙은 남청색 슈트가 잘 어울렸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도 하고, 어쩌면 인생이라는 거대한 명제 앞에서 힘에 겨워 스스로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삶에서 잠시 빗겨나가 있으려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 의준의 뒷모습.

갑자기 의준이 길을 건너려 한다. 한송이는 얼른 액세서리 가게 문 쪽으로 갔다. 문이 저절로 열린다. 안으로 한 발자국 들여놓는 순간 의준이 길을 다 건너고 또다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한송이는 상점 안에서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얼른 뒤돌아서 나왔다.

의준은 곧장 지하철역을 들어갔다. 그리고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그리고는 잠시 뒤 도착한 전동차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선다.

휴일인데도 전동차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송이는 사람들 속에 낀 채 일부의 모습만 보이는 의준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전동차의 약한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저 사람은 어디에서 내릴까?

한송이는 이러저러한 생각에 잠기며 의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듬어 보았다.

사실 의준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그동안 그가 보인 행동은 모두 예상 밖의 것들이었다. 더구나 오늘 본 그의 모습은 다른 어떤 때보다 특이했다. 점원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가 지니고 있는 그 엄청난 펜트하우스. 떠버리라는 별명을 지닌 그 김진구나 명송이의 말에 의하면 의준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오늘 한송이는 특별행사를 하는 커다란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는 의준의 모습을 보았다. 누가 저 사람한테서 그런 장면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두 눈으로 확실하게 목격한 한송이도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전해 주면 누가 믿어줄까? 그런데 누구한테 그 말을 한단 말이지……?

한송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약하게 흔들었다.

그 순간 열차가 살짝 흔들리며 크게 돌고 있었다. 그 바람에 한송이는 균형을 잃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우려는 순간,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어떤 여자아이, 중학교에 막 들어갔을 법해 보이는 아이가 한송이에게 몸이 기울어지면서 부딪쳤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빽빽이 서 있어서 옆으로 쓰러질 리는 없지만 그 애가 갑자기 자신에게 와서 부딪치는 바람에 한송이는 몸의 균형을 잠시 잃고 다른 사람 쪽으로 몸이 쏠렸다. 그러나 간신히 다시 균형을 잡아 몸이 쓰러지지 않게 한쪽 다리로 잘 버텨냈다. 웬 아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몸의 균형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와서 부딪치나 하면서 슬쩍 바라보니 그 아이는 무안한지 고개를 까딱하며 죄송하다는 뜻을 보낸다. 무척 미안하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한송이는 의준이 혹 이쪽의 소소한 혼란스러움을 의식하고 뒤돌아보면 어쩌나 하고 신경이 쓰여 얼른 그쪽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는 제발 제발 하면서 빌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의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미세하게 심장이 툭 떨어지는 느낌.

혹시 아까 그 작은 소동 때 이쪽을 바라보았다가 한송이를 알아보고는 얼른 사람들 사이로 숨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사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한송이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 일에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살며시 넘어간 일이니까.

한송이는 다시 그쪽을 살폈다. 그러나 옆 사람, 특히 그 여자아이가 신경 쓰여 몸의 움직임을 아주 작게 했다.

그러자 전동차의 흔들림 때문인지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이 흔들리며 위치가 조금 바뀌는 바람에 그 틈바구니에서 의준을 찾을 수 있었다. 짙은 남청색 재킷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근처에서는 그런 색 옷을 입은 다른 사람이 없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 다행이다.

한송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세를 바로하면서 남들은 의식하지 못할 범위 내에서 살며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뒤 옆에 있던 여학생이 자신을 의식하며 바라보는 것 같았으나 한송이는 모른 척하며 사람들 틈으로 일부만 보이는 의준에게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전동차 안에서 일어난 불안한 파동이 그 중학생 여자아이와 한송이 자신에게만 미약하게 영향을 미치고는 더 이상 퍼져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혹 그 파장이 조금 더 퍼져나갔으면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게 되었으리라. 그렇게 되면 의준이 한송이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니 한송이의 바람대로 그 파장은 찻잔 위의 파도로 끝나고 만 것 같았다.

휴우.

다행이다.

전동차는 그대로 계속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의준의 몸이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강남역이었다.


***

| 간밤에 부던바람 만정도화 다지거다

| 아희는 비를들고 쓸으려 하는괴야

| 낙환들 꽃이아니랴 쓸어무삼 하리오

(이 시조를 지은이로는 다음 세 사람이 거론되지만 확실치 않다.)

선우협(鮮于浹, 1588~1653)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인조 때 학자.

정민교(鄭敏僑, 1697~1731) 《청구영언》의 서문을 쓴 정래교의 동생.

강지재당(姜只在堂, 1863~1907) 이름은 담운(澹雲)이며 기녀 출신.

만정도화(滿廷桃花)’는 정원에 한가득 핀 복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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