頹然臥榻便忘形(퇴연와탑편망형)

by Rudolf

頹然臥榻便忘形(퇴연와탑편망형)

| 무너지듯 평상에 누웠다 잠든 뒤에


1

“익 스 큐 스 미, 아 이 앰 코 리 언. 아 이 원 투 밋 코 리 언 파 더. 코 리 언 프 리 스 트. 플 리 즈.”


나이가 칠십이 다 되어가는 문태식이 종이에 쓴 영어를 더듬더듬 몇 번 읽고 나서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혹시라도 미국인을 만나면 다시 꺼내어 읽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성당이라고 하니 그 종이가 필요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문태식은 성당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누구라도 마주치길 기대하며.

마침 한 동양 여자가 성당에서 나오고 있었다.

문태식은 그리로 다가가며 눈치를 보았다. 말을 걸어볼까? 한국 사람인가?

그러나 여자가 먼저 궁금한 표정으로 문태식에게 다가왔다.


문태식은 여자의 안내를 받아 성당 옆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자는 사무실 직원에게 무어라 말을 하더니 뒤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문 하나를 열고는 고개를 돌려서 노인을 한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시 뒤 다시 문이 열리며 젊은 동양인 신부가 나온다. 그리고 그 뒤로 여자가 따라나오면서 턱 끝으로 문태식 쪽을 가리킨다. 신부는 문태식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을 돌아 성큼성큼 걸어왔다.

문태식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신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아득해지며 현기증이 일었다. 한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꽉 잡고 버틴다.

신부가 바로 앞에 올 때까지 문태식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신부가 다가와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한다.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문태식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대답을 했다. 아니, 그냥 말을 했다.

“고백성사를 하려고…….”

신부는 아무 표정 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문태식은 머릿속이 텅 빈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고백을 하고 싶어서…….”


키가 작고 가냘픈 체구에 눈까지 몹시 나쁜 문태식, 지방에서 전문대를 나오고 방위병으로 제대한 뒤 서울로 올라왔으나 취직이 되지 않았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는 취직에 필요하다며 돈을 보내달라고 하고서, 그 돈으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집에 내려온나. 서울에 가서 뭘 하는지 몰라도 그리 살지 말고 내려오레이.”

“쫌만 기다려 주소.”

집안 사정을 잘 아는 문태식은 계속 집에다 손을 벌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연탄배달, 유흥업소 주방 보조, 기원 총무, 재래시장 경비 등을 하면서 조금씩 돈을 모아나갔다.

“문군, 거 힘들면 좀 쉬지 그래.”

“괜찮습니다.”

문태식은 작은 체구에도 몸 아끼지 않고 시키는 일은 죽어라 했다.

“일도 일이지만 장가를 가야지.”

“거 말만 하지 말고 소개 좀 시켜주고 장가가라고 해야지. 저 명일빌딩 아래 양복집 딸 야간 여상 나왔잖아. 취직도 했다는데 다리 좀 놓지 그래.”

“그런데 문 군이 먼저 발 벗고 나서야지. 저렇게 여자 얘기만 나오면 슬슬 꼬리를 빼니 원…….”

문태식은 사람들 앞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말을 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리곤 했다. 사실 그 양복집 딸에 대해서는 그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생긴 것은 좀 못나 보였지만 자그마한 키에 얌전하고 길을 갈 때도 눈을 내리뜨고 있어서 저러다가 어디에 부딪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문태식은 그 여자애가 지나갈 때면 괜히 마음이 설레곤 했다. 하지만 문태식보다 근 열 살이나 아래인데다 농협에 취직까지 한 상태여서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문태식은 얼굴이 몹시 못났고 키까지 작아 여자를 만나기가 어려웠다.

“아니, 이 사람 술을 마시나 담배를 피우나, 그렇게 돈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 그래?”

“에구, 그냥 놔둬요. 벌이도 시원찮은 사람에게 뭔 술담배 얘기를 해?”

문태식은 나름대로는 악착같이 일을 해서 돈을 벌지만 남들 말처럼 수입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기껏 남들 안 하는 허드렛일만 하는데다가 시장 건달들한테도 심심찮게 뜯기고 있었던 것이다. 허름한데도 꼬박꼬박 받아가는 방세도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고.

아무리 전문대를 나왔다 하더라도 취직도 안 되는 상태에서 늘 사람들 뒷전에서만 맴돌고 있는 문태식으로서는 어디 가서 마땅한 일자리 하나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전문대 나왔다는 소리도 못하고 그저 시골에서 올라와 겨우겨우 살아가는 못난 총각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문태식은 술담배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 사이에서 거의 일상사처럼 되어 있는 노름에도 취미가 없었다. 노름이라 봤자 기껏 화투지만 그것이 때로는 판돈이 커져서 그것 때문에 시장 안에서는 종종 문제가 발생하곤 했다. 한번은 칼부림까지 났을 정도니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문태식은 고생고생 끝에 마흔 살 때 시장 근처에 다섯 평짜리 다 쓰러져 가는 가게를 하나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생선가게 아주머니의 소개로 마흔다섯 살 된 과부 정씨를 만나 동거하기 시작했다.

“나무젓가락도 다 짝이 있는 법이여.”

과부 정씨는 시장에서 경비 일을 하는 황씨의 먼 친척이라고 하는데 연변에서 온 중국교포라고 했다. 육이오 때 이북에서 내려온 황씨가 중국이 개방되면서 어찌어찌하여 알게 된 사돈의 팔촌의 조카뻘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잘 됐지, 뭐.”

“이남 땅에서 색시 못 구하면 연변 사람이라도 괜찮아. 요즘엔 이북에서 탈출해서 중국으로 갔다가 여기 오는 여자들이 꽤 있다는구먼.”

“노총각 팔자 펴지겠는데.”

그러나 정씨는 동거한 지 6개월도 안 되어 문태식이 탄 곗돈을 가지고 도망갔다.

“에구, 그럴 줄 알았어. 연변에 애새끼 줄줄이 놔두고 왔겠지 뭐. 그리로 돈을 죄다 빼돌리는 게지.”

몇 달 뒤 생선가게 아주머니가 어딘가에 가서 정씨를 찾아왔다. 하지만 정씨는 훔쳐간 돈은 한 푼도 없이 다 써버리고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1년 뒤, 정씨가 이번에는 문태식이 시장번영회 회계를 맡으면서 받은 회비와 번영회 육성기금 찾아놓은 돈을 모두 싸가지고 도망쳤다. (이때까지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원래부터 근본 없는 사람 가까이하지 말랬는데, 쯧쯧쯧…….”

“그나저나 그 문태식이 입장 곤란하게 됐구먼.”

“다 제 복이야.”

문태식은 그동안 적금해 두었던 것 모두 찾아서 변상하고, 모자라는 것은 매달 나눠서 갚아나가기로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 정씨가 스스로 다시 찾아왔다.

“아니, 뭔 낯짝이래?”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녀?”

“그런 여자를 또 그냥 받아들인 거야? 속도 좋아.”

그 뒤 정씨는 3개월 만에 또 도망쳤다.

이번에는 빈손으로 나갔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문씨도 복이 지지리도 없구먼.”

그런데 그 뒤 정씨는 근 2년 반이 지나서 백일도 안 지난 갓난아기를 안고서 돌아왔다. 딸이었다.

“아니, 문씨는 속도 없는 거야?”

“그럼 어쩌겠어? 갓난아기하고 같이 왔는데.”

“나 같으면 어림도 없다.”

문태식은 그 아기를 자신의 딸로 호적에 올렸다. 이름은 소연.

그 아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정씨는 다시 도망쳤다.

그리고 한 달 뒤 정씨는 돌아왔다가 또다시 사라졌다. 정씨는 그 이후에는 돌아오지도 않고 소식도 끊겼다.


문태식은 소연을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그러나 소연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가출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학교 다닌 날보다 가출한 날이 더 많았다. 문태식은 학교에 찾아가 사정사정하고 학교발전기금까지 내면서 간신히 소연을 졸업시키고 야간 실업고등학교에 보냈다. 그 이후에도 소연은 가출을 반복하다가 3학년 여름방학에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문태식은 사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3년 뒤 소연이 편지를 집으로 보내왔다. 지방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강원도에 있는 시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며, 조만간 서울로 올라와서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다. 사위에 대해서는 이름만 적었을 뿐, 집 주소도 전화번호도 직업도 나이도 알리지 않았다. 문태식이 편지봉투에 있는 주소로 답장을 보냈지만 주소불명으로 되돌아왔다.

문태식은 나이가 육십이 넘자 몸이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시력은 더욱 나빠져 아주 두꺼운 안경을 껴야 했다. 게다가 문태식의 가게는 재래시장 가장자리에 있어서 운영이 그리 잘 되지 않아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로부터 또다시 2년 뒤, 소연에게서 편지가 왔다. 돈을 벌러 중국에 간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중국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남편과 함께 어떻게 사는지, 자식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문태식은 이번에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6개월 뒤, 중국의 딸에게서 편지가 왔다. 봉투 안에는 300달러짜리 우체국 송금환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너무 죄송했다며 앞으로는 자신이 매달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보내겠다고 했다.

소연은 한동안 매달 돈을 부쳤다.

하지만 5개월 뒤부터는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 강원도 양양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를 보낸 이는 소연의 남편의 이모 되는 사람이었는데, 현재 자신이 소연의 네 살 된 딸을 맡아 키우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이 너무 어려워 더 이상 맡을 수 없으니 외할아버지 되는 분이 데리고 가서 기르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문태식이 햇수를 계산해 보니 소연이 결혼한다고 편지를 보냈을 때는 이미 아이를 낳은 뒤였다.

문태식은 양양으로 찾아갔다. 윤연주라는 이름의 무척 귀엽고 영리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에게서는 제 외할머니나 어머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위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해 알 수는 없지만, 혹 그쪽 모습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문태식은 연주의 이모할머니로부터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대강 들었다.

소연과 그 남편이 몇 년 전 둘이 결혼했다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자기 집에 찾아왔다…….

사위는 부모가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이모 밑에서 컸으나 동네 건달로 사고를 자주 치다가 지방 어딘가로 가버리더니 3년 만에 소연과 딸 연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런 뒤 두 부부는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하다가 남편은 또다시 집을 나갔다. 그러나 몇 달 만에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서 경찰에 잡혀, 현재는 교도소에 가 있다…….

그리고 소연은 술집 작부 등을 전전하다가 간혹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아 집에 오랫동안 드러누워 있곤 했다…….

그러다가 소연은 무슨 바람이 났는지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가겠다고 하며 사라지더니 한동안 얼마간의 달러를 부쳐주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마저 끊긴 뒤 지금까지 전혀 소식이 없는데다가……, 자신도 늙고 병들어 살기 힘들어서 생각 끝에 (그전에 소연이 주소를 알려준) 연주 외할아버지에게 연락했다…….

외할아버지가 서울에 살며 장사를 한다고 하니 자신들보다는 형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이모할머니라는 사람의 생활은 한눈에 보기에도 말이 아니었다.

문태식은 기꺼이 자신이 연주를 맡겠노라고 하며,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내밀고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사위가 들어가 있다는 교도소로 찾아갔다. 곧바로 면회가 되지 않았으나 자신의 사정을 몇 번이나 설명하고 부탁한 끝에 간신히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사위라는 사람은 문태식이 보기에 정상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생김새도 전형적인 악당 모습에다, 아무리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장인이라고 하면 다소 어려운 태도를 보여야 할 텐데 시종일관 노려보며 빈정거리듯 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딸 연주를 보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문태식은 문득 아비가 다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태식은 사위와 별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아니, 대화 자체가 되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딸의 남편을 보러 간 것이고, 상대편에서는 세상 모든 언짢은 인간 대하듯 하는 것이었으니.

문태식은 우울한 마음으로 연주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연주가 어렵게 자란 환경과는 달리 곱고 영특한 것이 보면 볼수록 기특하고 어여뻤다. 연주는 처음에는 한동안 울며 이모할머니를 찾았지만 곧 바뀐 생활에 적응했다.

연주가 집에 온 이후 문태식은 태어나서 처음인 듯 기쁨을 느꼈다. 기쁨을 넘어서 환희와 같은 가슴 벅찬 느낌. 그제야 비로소 삶에 기대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문태식은 모든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그동안 지니고 있었던 우울함과 무기력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문태식은 얼굴이 밝아지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문씨 저 양반 환갑이 넘어가면서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어.”

“손녀딸 들어오면서 얼굴이 확 달라졌다니까.”

“사실 그동안은 살맛 나지 않았지. 나 같아도 그랬을걸.”

“손녀 고 녀석 여간 귀염둥이가 아냐. 혼자 사는 것보다 손녀 있는 게 훨씬 낫지.”

“그나 저나 그 딸년은 어떻게 된 거야? 제 딸 버리고 어디를 간 거야?”

“문씨 저 양반이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에구, 쯧쯧…….”

사람들마다 한마디씩 했다. 모두가 다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기도 하며, 늘그막에 괜한 고생만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연주 고 녀석 보기만 해도 마음이 밝아진다고 하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연주가 너무 예쁘고 붙임성도 좋아 사람들에게 착착 안기는 것이었다.



문태식은 몇 달간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생선가게 아주머니에게 딸을 찾아 중국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집 친척 중에서 연변에서 온 사람이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을 소개시켜 주면 함께 딸아이가 보낸 편지의 주소로 찾아가 보겠다고 했다.

문태식이 연변 조선족과 함께 딸의 주소로 가보았으나 그곳은 1년 전에 도시계획으로 모든 집들이 철거되고 현재는 50층이 넘는 빌딩을 건축한다며 마구 파헤쳐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문태식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또다시 몇 달간 궁리 끝에 혼자서 다시 딸을 찾아보겠다며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문태식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으로 돈을 벌러 가겠다고 했다. 시장 주변에 대형마켓과 백화점이 들어서는 바람에 가게는 거의 문 닫을 지경이 되어 도리가 없다고 했다.

생선가게 아주머니와 조선족 친척이 미국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소개시켜 주었다. 그 사람을 통하면 미국에서 하다못해 막일이라도 할 수 있고, 그러면 어찌됐든 지금보다야 형편이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연주는 문태식이 돌아올 때까지 자신들이 맡겠다고 했다.

문태식은 미국에 갔으나 소개받은 사람에게는 가지 않았다. 사실 문태식은 처음부터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한 것이다. 문태식은 자신이 미국에 가면 생선가게 아주머니 일당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가게를 처분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출국하기 전에 아무도 몰래 근처 성당에 찾아가서 집문서와 유언장을 맡기고 외손녀를 맡아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미국에 도착한 문태식은 곧바로 한국인 성당을 찾아가 고백성사를 했다. 자신과 동거하던 정씨가 마지막으로 도망친 뒤 소식이 끊긴 것은 자신이 그녀를 살해했기 때문이라는 것과, 두 번째로 중국으로 갔을 때 의붓딸 소연을 만나 살해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고백했다.

문태식은 정씨가 못된 성격에 자주 가출하고 또한 바람기와 도벽을 버리지 못하자 그로 인해 딸 소연의 장래가 영향을 받을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친딸처럼 소중히 생각하는 소연을 지키기 위해서 정씨를 살해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외손녀 연주의 경우에도 영특하고 때 묻지 않은 모습을 보고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중국에서 매춘부 생활을 하고 있는) 소연과의 관계를 단절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번째 중국에 갔을 때는 일부러 틀린 주소를 가르쳐 주고 생선가게 조선족 친척이 그곳을 찾아다닐 때 자신은 (하루 동안 몸이 아프다며 여관에 남아 있겠다고 하고서) 딸이 있는 지역을 확인해 두었다. 그리고서 두 번째 중국에 혼자 갔을 때 딸을 만나 자신의 가게를 물려줄 테니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하여 데리고 오면서 산속에서 살해하고 그곳에 묻은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문태식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다만 어떻게 해서든 외손녀 연주만은 똑똑하고 어여쁜 모습으로 자라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얼마 안 되는 재산이지만 연주가 그것으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한 끝에 성당에 모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적어도 성당만은 정직할 것으로 생각하고서. 그리고 자신은 가능한 한 연주에게서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그렇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은 택하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 소식이 끊긴 것으로 하는 방법이 연주를 위해 다소나마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문태식은 신부에게 고백한 뒤 성당을 나서서 차가운 겨울비 속으로 들어갔다.


2


의준에게는 당장 해결해야 할 숙제 두 가지가 눈앞에 있었다. 하나는 심 여사에 대한 것.

혹 심 여사가 계 실장과 연결된 것인가?

그리고 다음 문제는 송이.

명송이를 택할 것인지, 한송이를 택할 것인지.

하지만 이것이 옳은 일일까? 상대방 입장은 생각지 않고 의준이 일방적으로 판단하겠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잖은가.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첫 번째 문제인 심 여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러나 의준은 생각할수록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껏 의준이 살아오면서 이렇게 당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미행할 때도 당했고, 또 거꾸로 속수무책으로 심 여사에게 미행을 당했다. 이는 의준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 원인이다. 한마디로 심 여사를 너무 어수룩하게 보았던 것이다.

이제 찬찬히 그 미행에 대해서 복기해 보자.

의준이 고시원 가까이 갔을 때 심 여사는 편의점에서 나왔다. 그리고 심 여사는 어떤 키 작은 노인하고 마주쳤지. 이 두 사람이 두어 마디 나눈 뒤 심 여사는 곧바로 전철역으로 갔다.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 모두 단 한 번도 의준 쪽으로 관심을 두거나 얼굴을 돌린 적이 없었다. 이것은 의준이 확신한다. 그리고 전철역으로 가서 전동차에 올라타고 갈아타고 할 때 심 여사는 의준 쪽으로는 신경 쓴 적도 없었다. 단 한 번 구로역에서 내릴 때 처음에는 그대로 타고 가는 듯 보였다가 떠나기 바로 직전에 급작스럽게 뛰쳐내린 것, 그 점이 유일하게 수상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 이후에 갑자기 모든 행동이 느긋해졌다. 그 이전에 무엇엔가 마음이 부푼 듯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달라졌을까? 무슨 이유지?

원래는 심 여사는 구로역을 지나 그대로 타고 갔을 것 같았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이다. 아니, 의도적으로 차가 떠나기 바로 직전에 뛰어내린 것이리라. 그때 만일 의준이 순간적으로 얼른 따라서 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심 여사는 뒤차를 타거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원래 가려고 했었던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틀림없다. 그날 외출하려던 목적, 어딘지 낭만적인 기대감에 잔뜩 젖어 바람을 타고 가려 했던 그곳으로 향했겠지. 그렇다면 심 여사는 구로역에서 의준이 자신을 따라 내린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나서 행선지를 바꾼 것이겠지. 어떻게 알았을까?

의준은 그날 자신이 고시원 쪽으로 가다가 편의점에서 나오던 심 여사를 보고 멈칫한 뒤 구로역에서 내릴 때까지의 과정을 수십 번도 더 머릿속에서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전철 안에서 심 여사가 핸드폰 만지작거린 것, 혹 그것이 특이한 행동일까? 누구나 다 핸드폰 들여다보거나 메시지 보내거나 하지 않는가. 심 여사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텐데……. 아무튼 심 여사에게서는 어느 한 순간도 부자연스러운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심 여사는 어떻게 의준을 알아차렸을까? 원래부터 눈썰미나 센스가 뛰어난 사람이라서? 글쎄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메시지로 심 여사에게 알려주었다면?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조심하라고.

흠, 이것이 가능성이 크기는 하다. 하지만 이 경우라도 문제가 또 생긴다. 도대체 누가 의준을 알아보고 지켜보고 했겠는가 말이다. 그 추운 겨울 아침 출근시간대를 조금 넘은 시각에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은 그 거리에서 누가 의준을 알아보고 뒤따라와서 심 여사를 미행하는 것을 확인하고 알려주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날 그 거리에 오가던 모든 사람을 다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이때 의준의 무의식은 어떤 장면을 자꾸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가 심 여사에게 신호를 보내주는 장면.

신호, 신호라…….

무슨 신호지……? 신호. 깃발을 흔들었나? 아니지. 그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흔드는 것이 있었는데…….

흔들었다……. 그런데 깃발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혹 손?

손이라고?

손…….

아! 바로 그 손?

어떤 키 작은 영감님이 심 여사에게 못마땅하다는 듯이 빈정거리며 손을 슬쩍 들어올리는 둥하며 돌아서서 가버렸다.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 손이 신호라면? 조심하라는 신호,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의준은 갑자기 등줄기에서 한기가 돌았다.

맞았어. 그것밖에는 다른 특이한 상황이 없었다.

의준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휑한 펜트하우스 내부를.

계 실장은 생각보다 꽤 조직적인 사람이다. 반면에 의준은 주로 혼자서 행동하는 성격이고. 누구와 상의도 하지 않고 도움을 받지도 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혹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둠 속에서 지시한다. 의준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고. 지하철 물품보관소를 통해 계 실장에게 메모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멋지게 표현하면 외로운 한 마리 늑대처럼 늘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의준이 사회활동에 서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갖지 못하고 늘 혼자서 지내는 탓이다. 반면에 계 실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필요하면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사람 같았다. 사실 그 외모만 봐도 그런 면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원래가 사람 좋았던 계 실장이었으리라. 사랑의 배신으로 분노가 불타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맞았다. 그 키 작은 노인. 다시 생각해 보니 키가 유난히 작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이 의준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보통사람들 같았으면 아예 기억도 못했을지 모른다.

물론 이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다.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렇다고 그것을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3


문태식은 미국 땅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다.

그 대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전에 살던 그 시장에는 가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막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고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문태식은 계명균을 만났다.



4


한송이는 명송이의 모습을 늘 그려보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맑은 눈, 어깨 위에 닿을 듯하며 결 고운 머리칼. 꽤 미인이었다. 그러나 겁에 질리고 창백해 보였던 그 얼굴.

한송이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보았다. 피부는 어떤가……. 고개를 흔들었다. 눈은……. 좀 크게 떠볼까……. 사납게 보인다. 아니, 멍청하게 보인다. 고개를 한쪽으로 숙이고 머리칼을 내려보았다. 어깨에 살짝 닿긴 한다. 키는 엇비슷한 것 같고.

아, 그래. 명송이는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고개는 반듯하게 들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미안한 생각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전혀 그런 느낌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런 것하고는 좀 달랐지. 뭐라고 할까……, 모든 것을 늘 초연하게 바라보는 듯한 눈과 표정. 그렇다고 달관한 느낌은 아니다. 표현하기가 참 힘들기는 하지만, 어떻든 세상 모든 것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는 듯한 그런 거……. 모든 것을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세상이 알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한송이 자신도 그러할지 모른다. 종류는 다르지만. 한송이는 세상에 들어가지 못해서 제3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관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간단히 표현하면 한송이 스스로 세상에서 빠져나왔다고 할 수 있다. 한송이는 사진이 거의 없다.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찍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얼굴이 나름대로는 보기 좋은 구석도 있다. 그러나 한송이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남겨두기 싫었다. 주민등록증이나 졸업사진, 이력서 사진 등을 찍을 때 말고는 가능한 한 사진을 피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이 세상을 훌쩍 떠날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까튼 세상…….

한송이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었다.


송이는 한송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갸름한 그 얼굴. 눈이 참 깊어 보였다. 복도에서 잠깐 보긴 했지만 어딘지 정감이 가는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다치고 긁혔을 텐데도 그러한 것 별로 티 내지 않고 입만 꼭 다문 채 송이를 쳐다보았었다. 그렇다고 당돌하거나 원망하거나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냥 한번 슬쩍 쳐다보는 정도? 그리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아무런 감정이 없었을 수도 있다고 송이는 생각했다.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듯한 것……. 아니, 세상을 피하려 하는 듯한 모습. 송이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으로만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한송이는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눈이 마주친 뒤 곧바로 한송이는 눈을 내리깔고 지나쳐 갔기 때문이다. 한송이는 피해자다. 그렇다면 가해자에게 한마디쯤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마치 제3자 보듯 그렇게 잠깐 마주 보고는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지나쳐 갔다. 송이는 미안할 틈도 없었다. 옆사람 부축을 받아가며 천천히 멀어져 가는 한송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슬픔이 느껴졌다. 미안함 대신 한송이에게서 오히려 슬픔을 느낀 것이다. 송이는 한송이에게가 아니라 그 슬픔에게 죄송하다고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송이는 집에 돌아간 뒤 몸살이 크게 나서 이틀간 누워 있었다. 집에서는 사람을 치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차가 좀 긁혔다고만 하고서 서비스센터에 보냈다고 말했다. 외사촌 오빠가 도와주었다는 말도 했다. 집에서는 걱정하는 분위기도 없었다. 그런가 보다 하는 눈치였다. 송이는 마음속으로 약간 실망감을 느꼈다.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없는 거였어……? 내가 좀 아파서 드러누워 봐야 신경을 써줄 거야?

그런데 송이는 정말로 그날 밤 몸살이 나서 이틀간 누워 있게 되었다. 그제서야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앰뷸런스까지 왔다갔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 이틀 동안 송이는 한송이 생각으로만 보냈다.

이름만 똑같았지 나머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나이는 자기보다 좀 아래일 것 같았고. 간호조무사인 것을 보니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송이 자신은 사실 나태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게다가 한송이는 예쁘장한 생김새에 호감이 가는 스타일이었다. 어딘지 어두워 보이는 것만 빼놓고는. 외사촌 오빠 말로는 교통사고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주치지 않는 게 좋다고 했지만, 송이는 한송이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어쩐지 손이라도 꼭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며칠이 지났다. 한송이는 몸에 조금 긁힌 것 약 바르고, 처방해 준 진통제 먹고 하니 다 나은 것 같았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것 때문에 병원에서 이것저것 사진 찍고 법석을 부렸지만 병원 수익 올려준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현의준. 그리고 또 한 사람 명송이. 그 두 사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현의준 그 사람은 처음에 한송이 자신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경계의 대상이었는데, 이번에 한시를 통해 만난 뒤로는 그 느낌이 달라졌다. 더군다나 그가 명송이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는 뭔지 모를 묘한 감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5


의준은 이제 고시원에 대한 생각이 확고했다. 그곳은 아직도 계 실장과 연결된다. 적어도 두 사람은. 즉, 고시원 심 여사. 그리고 그 키 작은 노인. 그리고 이제 심 여사는 의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으리라. 미행을 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계 실장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차라리 심 여사가 한겨울 가벼운 낭만의 바람을 적당히 즐겼다면 의준은 더 이상 고시원을 주목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바람도 계 실장과 관련이 없어야 하겠지만. 어떻든 이제는 고시원이 위험한 상태가 된 것이다. 만일 의준이 경찰이라면 당장 심 여사와 노인을 잡아가겠지.

그리고 고시원이 위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계 실장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 실장은 어떻게 하게 될까? 만일 의준이 계 실장이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 꼬리 자르기?

아니다. 그것은 계 실장의 성품과는 다르다.

두 번째는 폐쇄?

고시원을 문 닫고 심 여사와 노인을 피신시킨단 말이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했던 사람 둘이 사라진다……?

사실 위의 두 가지 모두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멀쩡히 무대 위에 있는 배우들이 관객들 앞에서 사라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하긴 의준 말고는 아무도 그 두 사람이 배우인지 모른다.

세 번째…….

뭐가 있을까? 평범한 일상생활? 글쎄…….

의준에게는 숙제만 쌓여가고 있었다.


귀국파티. 이 복잡한 상황에서도 결국 떠버리는 파티를 벌였다.

그러나 티파티 친구들은 부르지 않았다. 송이 친구들도 초대하지 않았고, 또한 떠버리 주위 사람들도 부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딱 세 사람, 의준, 떠버리, 송이였다. 떠버리 말로는 원래는 많은 친구들 오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송이가 그 사고 때문에 풀이 죽고 사람들 만나는 것 싫다며 아무도 부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잘됐다. 의준도 많은 사람이 자기 집에 드나드는 거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썰렁한 공간이지 않은가. 떠버리와 송이는 의준이 새로이 바꾼 실내를 기대하고 있겠지만, 실제로 와서 보면 상당히 실망할 것이다.

시간은 오후 3시로 잡았다. 그러나 떠버리가 전화를 걸어와 6시로 미루자고 한다. 송이가 갑자기 그렇게 해달라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의준으로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3시나 6시나 9시나 뭐 언제나 비어 있는 공간인데. 단지 빨리 모였다가 빨리 끝나기나 해라.

떠버리는 5시에 왔다. 휑한 실내를 보고 어이없어한다. 그러나 떠버리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성격인지 낙천적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박수를 치는 것이다.

“좋았어. 아주 확실히 바꿨군. 제대로 바꿨어. 오히려 이것이 가능성이 풍부해서 좋다. 앞으로 또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그리고 5시 반에 떠버리가 주문한 호텔에서 음식이 배달되었다. 3인분이 아니라 4인분이다. 그런데 4인분 식사가 뭐가 그렇게 요란한지 호텔에서 가져온 테이블 세 개에 온갖 요리가 가득하고, 식기 세트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는 호텔 사람들이 서빙을 한다고 했으나, 의준이 불편해하는 것을 알고 떠버리가 돌려보냈다.

그리고 음식값. 당연히 의준 몫이다.

그런데 왜 4인분?

“송이가 부탁했어. 귀한 손님을 한 분 모시고 오겠단다.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비밀이래. 오늘 모이는 네 사람 중에서 가장 중요한 VIP란다.”

“아는 사람이야?”

“모른다니까. 깜짝쇼 하고 싶은가 봐.”

누굴까? 혹 계 실장이 탁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눈빛이 왜 그래? 혹 아는 사람이야? 누군지 알고 있는 거야?”

떠버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어본다.

“천만에! 내가 어떻게 알겠어? 짐작도 못하는데.”

“아닌 것 같은데…….”

의준은 그냥 웃어주었다. 말을 한들…….

“그건 그렇고, 저 에스컬레이터 어떻게 된 거야? 저 위층에다 뭐 만들어 놓은 거야?”

“아냐. 그냥 나중을 위해서 임시로 설치한 거야.”

“그럼 저 위는……?”

“아무것도 없어.”

“…….”

떠버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냥 넘어가 준다.

정확히 6시.

엘리베이터 홀 유리창으로 엘리베이터 하나가 열리는 게 보인다.

“어?”

떠버리가 의문사를 날린다.

그러나 의준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해는 벌써 지고 겨울의 도시 야경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

떠버리가 다시 의문부호를 떠올린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

의준은 별 관심 없지만 사람이 온다고 하니 보기는 해야겠다며 몸을 돌렸다.

“…….”

송이가 얼굴을 환히 밝히며 다가온다.

“내가 강제로 이분 모시고 왔어요.”

송이는 개선장군처럼 말을 한다.



6


“또 뵙네요.”

한송이는 약간 멋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다친 데는 괜찮습니까? 얼굴은 좋아 보이는데요.”

떠버리가 나서서 맞이한다.

“네, 괜찮아요.”

“보험회사에서는 잘 해줍니까? 뭐 불편하게 하는 것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십시오. 내가 다 처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잘 해주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 없어요.”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송이가 하도 비밀에 부쳐서요.”

그 다음부터는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부산했다. 물론 떠버리가 없었다면 이러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송이와 한송이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었다. 둘은 어릴 때 헤어졌다가 극적으로 만난 언니동생처럼 다정했다. 특히 송이는 한송이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많이 배려했다. 무엇이든지 먼저 나서서 말을 해주고 음식도 담아주고 하면서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글쎄, 이 뻥 뚫린 공간 전체를 우리가 싹 다 바꿔놨었거든…….”

송이는 포크를 든 오른손으로 휑한 공간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입속에 음식물이 가득 차 우물우물 말을 하듯이.

“대한민국에 있는 좋다는 것은 죄다 갖다놓고 눈부시게 인테리어한 거야.”

송이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잇는다.

“나는 미국에 들어가 있어서 못 봤는데, 글쎄 저 오빠가 유럽에서 돌아오자마자 그걸 싹 뒤집어 엎어놨대. 들리는 말로는 궁중식으로 해놨다는 거야. 조선시대와 고대 그리스 왕궁처럼 말야.”

송이는 명송이의 접시에 맛난 음식을 잔뜩 올려준다.

“영화나 드라마 찍어도 될 정도로 리모델링해 놨다고 소문이 쫙 퍼졌었거든.”

송이는 명송이의 잔에 음료수도 조금 더 따라주었다.

“그런데 오늘 와보니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하고 똑같아졌어.”

송이는 텅 빈 공간을 휘둘러본다.

“여기에 처음 왔을 때하고 달라진 것은…….”

송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펜트하우스를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저 에스컬레이터가 그전에는 없었고…….”

송이는 한 장소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의준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잇는다.

“준이 오빠, 옥으로 만든 소펠의 조각상, 그거 어떻게 됐어요? 보이질 않네…….”


7


송이와 떠버리가 각자의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배웅한 뒤 의준과 한송이는 아파트 앞 도로에 서 있었다. 한송이는 꽤 취해 있었다. 떠버리는 운전해야 한다면서 약한 술을 조금만 마셨고, 송이는 아예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의준은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분위기상 조금만 마셔주었다. 그러나 한송이는 주는 대로 다 마신 것이다.

휘황한 불빛 가운데 선 두 사람은 다소 어색한 분위기였다.

의준은 얼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택시 앱을 켰다.

“택시 불러줄게요.”

“아녜요. 병원에 가서 잘래요.”

한송이는 흔들리려는 몸을 똑바로 세우며 발음도 일부러 또박또박하게 했다.

“택시 타고…….”

“걸어갈게요.”

한송이는 몸을 돌려 길로 나갔다. 몸의 중심이 약간 흔들린다.

의준이 뛰어가서 한송이를 잡았다.

한송이가 의준의 몸으로 쓰러진다.



8


문태식은 계명균과 일종의 계약을 맺었다. 문서상의 계약이 아니라 마음의 계약.

문태식의 손녀 연주를 계명균이 평생 보호해 주기로.

그리고 문태식은 계명균 근처에 평생 남기로.

계 실장은 성당의 수녀 숙소에서 생활하는 연주를 늘 지켜보며 공부하는 데 부족함 없이 여러 가지를 보내주고 있었다. 할아버지 문태식 이름으로.

문태식은 계명균에게 늘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심신이 급속하게 쇠약해져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9


한송이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잔 곳. 어느 여관이었나……?

비단과 같은 이불과 요. 너무도 고운 천이어서 만지기도 겁이 날 정도였다. 바로 그런 곳에서 한송이는 잠이 깬 것이다.

방은 흐릿한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송이는 몸을 반쯤 일으켜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빛이 격자무늬 창을 통해 비쳐들고 있었다. 정신을 모으고 바라보니 팔각형 문양이 들어간 한옥 창호문이었다.

그 순간 한송이는 얼른 윗몸을 일으켜 세우고 앉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옥 방 한가운데 낮은 침대의 이불 위에 한송이는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늑하게 꾸며진 방. 대갓집 안방 같은 느낌이었다. 가구들. 모두 한옥식이었다.

“내가 어디에서 잔 거지……?”

한송이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젯밤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옷 그대로였다.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맞아. 현의준. 그 사람에게 부축되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타고 올라가서 어느 방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술을 많이 마신 것만 생각났다.

한송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너무도 은은하면서도 호사스런 방이었다. 어느 한옥식 호텔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한송이는 약간 휘청이는 몸을 추스르고 방문으로 가서 살며시 열었다.

한송이 눈 앞에 펼쳐진 광경.

믿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것, 대청처럼 꾸며진 화사한 마루 한쪽 벽 위에 걸린 현판. 그곳에 한송이에게 익숙한 한자가 쓰여 있었다.


巉頂樓


병원에 출근한 한송이는 하루 종일 꿈속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의준이 한 자 한 자 손으로 짚어가며 해석해 준 최치원의 한시 석봉의 마지막 두 구절이 입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靜想蓬萊只如此(정상봉래지여차) | 가만히 생각하니 봉래산 옮겨놓은 듯

應當月夜會羣仙(응당월야회군선) | 분명 달밤엔 신선들 모여들어 놀리


한송이 자신이 하룻밤 정신없이 잔 곳, 그곳은 분명 신선들 사는 곳이다. 실제로도 꿈속에서 한송이는 어느 황홀한 동산을 거닐고 고대광실과 같은 대궐 속을 누볐었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생소하면서도 어딘지 친근한 느낌이었다. 마치 몸과 마음에 익숙한 것들을 오랫동안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듯. 그래, 바로 그랬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 실제를 보았을 때 오히려 현실에서 꿈으로 들어간 듯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꿈과 현실이 이제 또다시 바뀐 것을 한송이는 알고 있었다. 세상은 한송이를 유혹한다. 허상으로. 한송이는 지금껏 살아온 경험을 통해 그것이 현실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한낮에 피곤해서 잠깐 책상에 엎드려 낮잠 자다가 꾼 헛꿈과 같은 것.

속지 말자.


***

찻집의 낮잠(茶店晝眠) | 임춘(林椿, 고려 중기)

頹然臥榻便忘形(퇴연와탑편망형) | 무너지듯 평상에 누웠다 잠든 뒤에

午枕風來睡自醒(오침풍래수자성) | 베개 위로 바람 불어 와 잠이 깨네

夢裡此身無處著(몽리차신무처저) | 꿈속에서도 이몸 의지할 곳 없으니

乾坤都是一長亭(건곤도시일장정) | 한 세상 삶 곧 기다란 머무름일 뿐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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