芳樹吐花紅過雨(방수토화홍과우)

by Rudolf

芳樹吐花紅過雨(방수토화홍과우) | 아름다운 나무들 붉은 꽃 토해 비처럼 내리고

1


의준은 일단 계 실장이 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틀림없이 다리는 깁스를 하고 허리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로 위장했을 텐데 어떤 식으로 그것을 풀고 나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을 해낼 수 있다. 따라서 그 부분은 계 실장에게 박수를 쳐주고, 의준은 나머지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어디로 갔는지.

고시원 아주머니는 계 실장이 시골로 갔다고 했다. 시골은 어디인가? 그냥 내뱉은 말인가?

이제 막 한 고비 넘기자마자 이번에는 더 상대하기 힘든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다.

사실 고시원 사람들이 자기 신분 제대로 밝히고 살아가진 않을 것이다. 또한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자신들 필요하면 아무 때나 훌쩍 떠나고, 그 자리는 또 다른 나그네가 채울 것이다. 계 실장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저기 떠돌면서 잠자고 일하고 그러다가 사정이 생기면 미련 없이 떠나겠지.

그런데…….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은 구석이 하나 있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머릿속에서 막연히 맴돌기만 할 뿐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답답했다.

의준은 다시 창가로 가서 섰다. 저 멀리로 보이는 놀이터. 그리고 그 옆의 정형외과.

그래, 한송이.

의준은 그 여자에게 수수께끼를 하나 주었다. 풀기 쉽지 않을 것이다. 또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한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단지 의준의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뜬구름뿐인 것을.

의준은 처음에는 송이라는 이름에 관심이 갔다. 그리고 얌전한 듯한 모습. 그러나 그 속은 얌전하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복잡한 것들이 수도 없이 엉켜 있을 것이라고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리뜬 눈가에서 비치는 날카로움. 그것은 그 마음에 있는 응어리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진 어둠. 의준 자신도 가지고 있는 그것. 종류는 다르겠지만 본질은 똑같다. 분노. 자학. 분노는 외부로 향한 것도 있지만, 의준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것도 있다. 그리고 자학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스스로를 좌절케 한다. 그리고 분노와 자학이 합쳐지면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인 세계만 꿈꾸게 된다. 의준이 꾸며놓은 상층 공간의 환상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준은 그 공간을 완성시킬 여인을 찾아야 했다. 그곳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또한 그곳을 채울 사람도 이상적인 여인상은 아니다. 단지 의준의 마음을 한때, 그리고 최초로 사로잡았던 그 여자의 대체물이어야 한다.

그래 맞다. 그 여자 송이. 하지만 이제는 명송이가 아니라 한송이가 되었다. 우선은 이름이 같아서 좋다. 그리고 명송이가 의준의 마음을 설레게 한 반면, 한송이는 의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그것이 오히려 의준의 마음을 더 강렬하게 끈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 한송이는 절대로 명송이의 단순한 대체물이 아니다. 이제 한송이는 완벽하게 독립된,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의준의 환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한송이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문제가 의준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다. 여자의 마음을 얻는 법. 어디 가서 과외라도 받아야 할까……?

떠버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의준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전화가 왔었으나 받지 않았다. 음성 메시지나 카톡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준은 마음이 허해 저도 모르게 떠버리의 전화를 받고 말았다.

“무슨 일 있었어? 전화 한번 하기 되게 힘드네.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외로운 거 너무 좋아하면 나중에 큰 병 돼.”

“왜 전화한 거야?”

“아이고, 급하신 건 여전하구먼. 왜가 어디 있어? 친구 사이에 전화도 못하나? 사실은 한 가지 알려줄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 송이가 말이야…….”

“응?”

“아이고, 송이 이름이 나오니 반응이 금방 오네. 다른 일들에는 시큰둥하더니.”

“왜? 송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

“거 봐. 득달같이 달려드네. 송이가 말이야…….”

“…….”

“왜 안 물어봐? 송이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어?”

“장난하지 마.”

“헤헤, 몸이 달았네, 달았어.”

“…….”

“어이, 화난 거야? 사람 참. 장난 좀 한 거 가지고.”

“말해 봐.”

“알았어. 송이가 말이야…….”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송이가.

볼티모어라는 도시가 흑인들이 많아 그전부터 위험하다고 소문난 곳이었는데, 최근에 송이와 같은 과의 중국인 학생이 대낮에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송이네 학교 주변은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는데도 그 중국인 학생이 학교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에 흑인들에게 습격받아 총에 맞았다는 것이다. 흑인들은 고물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차를 멈추고서 아무런 말도 없이 무조건 총을 쏜 뒤 노트북이 든 가방을 빼앗은 뒤 차를 타고서 달아났다고 한다. 이 사건 때문에 학교에서도 비상이 걸리고 절대로 노트북이 들어갈 만한 가방은 메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했단다. 특히 MICA 학생들이 사용하는 노트북은 고가인 경우가 많아서 그것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 송이는 불안에 시달리다가 다시 휴학하고 한국에 들어오기로 했단다. 그리고 미국의 다른 도시나 유럽 쪽으로 옮기는 것을 생각해 보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

그게 어때서?

내가 그런 거 시시콜콜 다 알아야 해?

“남자친구하고 헤어졌단다.”

갑자기 떠버리의 목소리가 짧고 간결하다.

“…….”

“알고나 있으라는 거야. 별거 아니겠지만. 외국 나가 공부하다 보면 외로움 많이 타는 거 당연하지. 그런데 그게 다 그래요. 유효기간 지나면 싸악 끝나는 거야. 서로가 마찬가지지. 깨끗하게 바이바이…….”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귀국파티, 어때? 현 실장 아파트에서 퍼지게 한번, 응? 다른 애들도 좀 부르고. 괜찮지? 내가 한 판 크게 만들어 볼게…….”

떠버리는 한없이 떠벌였다. 자기가 펜트하우스 주인이고, 자기가 주최자고, 자기가 파티 비용 다 내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의준에게 부르고 싶은 사람은 오라고 하라는 것이다. 의준은 그냥 손님일 뿐이다.

의준은 입씨름하기 싫어서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하고는 간신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화 도중에 떠버리가 이것저것 집요하게 캐묻는 바람에 병원에 잠시 입원했었다고 말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 말이 또 씨가 되어서 꼬치꼬치 물어대는 탓에 자전거와 그 정형외과 이야기도 하고 말았다. 통화가 끝나고 나서 의준은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좀 언짢았다. 하여간 그 떠버리한테 한번 붙들리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니까…….

그것은 그렇고, 막상 송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거 있지. 이것 참. 바다 건너 먼 나라에 가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하고서 딱 부러지게 마음먹고 돌아왔건만 이게 웬일이냐…….

의준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에스컬레이터를 가동시키고 폼나게 상층으로 올라갔다.

불을 탁 켜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아, 그곳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어딘지 생기가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밝고 화사하게. 우아하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병원에서 돌아와서 한송이를 그 공간에 넣었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생동감이었던 것이다. 힘차고, 밝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준이 늘 꿈꾸던 사치스럽고 화려한 분위기.

의준은 멍한 상태로 실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어…….



2


의준은 밖에 나가 터벅터벅 걸었다. 겨울 날씨치고 화사하고 포근해서 걷기에 좋았다. 며칠 동안 집 안에만 갇혀 있다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의준은 글자 그대로 발길 닿는 곳으로 걸었다. 대로로도 나가고 동네 길로도 들어갔다.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지난번 그 자전거대리점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그곳까지 간 것이다. 의준은 유리창 안팎에 잔뜩 진열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자전거를 무심히 바라보며 그 앞을 지나갔다. 약간 비탈져 내려가는 길. 사실 별로 비탈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지난번 자전거로 내려갈 때는 왜 그렇게 급한 비탈길로 보였는지.

피식 웃었다. 자신을 향해서.

누군가가 이야기해 준 것이 슬며시 기억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다. 그 사람도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했었다. 오래 전 어떤 신문에 한 시인이 올린 짤막한 글을 읽었다는 것이다. 그 시인이 자신의 아파트를 청소하면서 후회했다나.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넓은 아파트를 사고 나니까 청소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 아파트는, 의준의 기억이 확실한지는 모르겠는데, 듣기로는 8평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조그만 아파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아파트를 10년 전에 월세로 들어왔는데, 그 월세금도 주인한테 사정사정해서 깎고 깎아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인이 아주 싸게 줄 테니 사라고 했는데, 그 돈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친지들에게 빌리고 은행에서도 빌리고 게다가 주인이 더 싸게 준다고 해서 어렵게 어렵게 샀다나. 그런데 시인이 그 집을 사고 나니, 8평 아파트가 그렇게 넓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파트 청소하는 게 힘이 들어서 괜히 넓은 아파트 샀다고 투덜거렸다는 내용.

이 내용과 의준의 상황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의준이 직접 자전거를 타고 갈 때는 마치 미끄럼틀처럼 그렇게 경사가 급해 보였던 것이 나중에 느긋한 마음으로 와 보니 거의 평지나 마찬가지처럼 느껴진 것이다. 하, 상황에 따라 그렇게 마음이 달라지는구나. 뭐 하러 갈 때와 끝나고 나올 때 마음이 달라진다는 말처럼.

사람 마음 예나 지금이나 다 똑같은 모양이다. 그런 말이 속담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니.

아무튼 의준은 그 길을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갔다.

“얘, 너 한번 나와 봐. 집 안에만 있지 말고…….”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핸드폰에 대고 세상 사람 다 들으라는 듯이 우렁차게 말을 한다. “세상이 달라졌다, 얘. 너는 성격부터 고쳐야 해. 맨날 집구석에만 박혀 있으려 하니…….”

의준은 빙그레 웃음이 돌았다. 맞다. 겨울이라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는 일단 밖으로 나오는 거다. 그러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지지. 그러면서도 의준은 자신의 본 모습을 그 아주머니에게 들킨 것처럼 은근히 눈치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의준은 기분이 좋았다. 밝은 세상에 나와서 이렇게 당당히 걷고 있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니.

사람들아, 날 좀 보소. 친구도 없고 애인은 더더군다나 없어 오갈 데 없는 나 같은 위인도 이렇게 밖에 나와서 쏘다니고 있다오.

나오시오! 나와서 우리 함께 걸읍시다. 쨍하고 해 뜰 날 오지 않겠소?

이럴 때는 휘파람이라도 불면서 씩씩하게 걷는 겁니다. 아니, 나는 그런 거 못 부니까, 잘 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시라고. 노래도 부르면서. 나는 노래하고는 담쌓은 사람이니까, 댁들은 그런 거 저런 거 죄다들 누려보시구려…….

이렇듯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걸어가다가 의준이 우뚝 멈춰선 곳. 자신이 자전거 핸들을 갑자기 확 꺾었던 장소, 바로 그곳이었다. 거기에서 자전거가 쓰러지면서 의준은 앞으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 직전에 한 여자가 불쑥 나타났었지.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당시에 여자가 있었던 곳이 아니라 병원 정문 쪽으로. 그곳에 그 여자가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포근한 겨울날 화창한 하늘 아래에서. 햇살도 어딘지 봄날처럼 따사로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느꼈다.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을. 서로가 서로에게서. 어떤 설렘 같은 것을.

하지만 그 순간 중년의 수간호사가 병원 문을 열고 나타났다.

“여기서 뭐 하니? 일광욕해? 남들은 바빠 죽겠는데 너는 여기 피서 온 거야?”

수간호사는 의준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먼젓번에 본 그 레이저 눈빛이 한송이 대신 의준의 마음을 찌르며 파고들었다.

한송이는 몸을 돌려 수간호사에게 머리채라도 붙잡힌 듯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의준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 의준은 그 순간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망연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여자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고개를 돌려 의준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

마치 의준에게 도움을 구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 눈길.

그러나 곧 여자는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의준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의준은 서둘러서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켜지 않고 계단을 뛰어서 올라갔다. 그런 다음 문을 벌컥 열고 상층으로 들어가서 불을 있는 대로 다 켰다. 갑자기 잠자던 고대광실이 의준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의준은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했다. 눈을 다시 떴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우아한 이 공간에 어울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송이인가?

명송이? 한송이?

그런데……, 안타깝게도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명송이였다.



3


의준은 고민했다.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하면서.

의준은 한송이에게 약속한 것이다. 편지까지 보내면서. 한송이에게 참정루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참정루는 단지 펜트하우스 상층 하나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참정루로 대표되는 의준의 모든 것을 말한다. 물질뿐만 아니라 의준의 모든 인생과 심지어 생명까지도 그 속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만일 의준이 그 약속, 편지로까지 보낸 그 계약을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의준은 계 실장이 지키지 않은 계약을 징벌하고자 그를 찾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대가는? 그래, 바로 생명이다.

그렇다면 의준은 계 실장의 생명을 취하는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한송이에게 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다. 인간은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다.

이제부터 의준은 위의 두 가지 의무에 충실하자고 생각하고 그 순서를 정하기로 했다. 물론 계 실장을 찾는 것이 먼저다.

고시원.

정형외과에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 저격범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은 경찰의 일이다. 그러나 계 실장의 치밀함을 경찰이 깨뜨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해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의준은 경찰에 앞서 계 실장을 찾아내서 응징해야 한다. 어쩌면 계 실장 역시 의준이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그 규율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그 똑똑한 법대생이.


의준은 오전에 고시원으로 향했다. 범행의 모든 증거는 항상 현장에 있는 법이다. 정형외과. 의준은 그 1차 관문은 통과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현장은 어디인가?

바로 범행 모의장소. 즉, 고시원이다.

고시원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본능이 이끌어 주겠지.

의준은 지난번에 가서 본 그 방이 아직도 남아 있으면 계약할 생각이었다. 가끔 와서 자고 가주면 될 테니까. 물론 다른 방이 나와 있다면 금액을 또 깎아보고.

그러나 의준은 막상 출발할 때는 마음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옷도 더 허름하게, 모자는 큼직한 것으로 해서 푹 눌러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그리고 고시원에 들어가기 전에 남들 눈에 잘 띄지 않게 주변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시원이 저만치에서 보이고 있었다. 의준은 이곳저곳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길 옆 편의점 문이 열리더니 한 아주머니가 나온다. 밝은 모습으로.

화려하고도 두꺼운 외투를 입고 겨울에 어울리지 않게 꽃무늬 모자까지 눌러썼으나 고시원 아주머니인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어딘가로 외출하려는 모양이다.

“아이고, 심 여사, 어디 가우?”

아주 키가 작은 영감님이 지나가다 그 아주머니를 보고 묻는다.

“잠깐 바람 좀 쐬려고요.”

생글거리는 얼굴. 말투에 애교가 섞여 있다.

“날이 추운데 조심하셔. 찬바람에 감기 들지 말고. 바람 너무 좋아하면 안 돼야.”

그런데 그 영감님이 고개는 다른 곳으로 돌린 채 아주머니 쪽으로 한 손을 드는 둥 마는 둥하며 걸어가는 품이 좀 이상했다. 어딘지 마땅치 않다는 몸짓 같았던 것이다.

그러자 아주머니의 표정이 싹 바뀐다. 못마땅하다고, 웬 참견이냐는 듯한 얼굴. 핏 하는 모습.

그러자 아주머니는 몸을 홱 돌려 큰길 쪽으로 향한다.

의준은 아주머니 쪽으로 다가가려고 몇 발자국 내딛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얼른 몸을 돌려 혹 아주머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다른 가게 쪽으로 가서 진열창으로 비쳐보았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그동안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찜찜하게 남아 있었던 의문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계 실장은 저 고시원에 꽤 오래 있었다. 의준이 조사해 본 바로는 적어도 5년 이상은 되었다. 그 정도면 터줏대감이 되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 죄다 지켜보았을 것이고, 또 그쯤 되면 주인아주머니하고도 꽤 친하게 되지 않았을까……. 이런 이야기 저런 사연 나누다 보면 서로에 대한 속사정도 어느 정도 털어놓았을 것이고. 그리고……, 아까 그 영감님, 그분이 아주머니를 뭐라고 불렀지?

아, 그래, 심 여사.

여사라…….

어떤 경우에 여사라 부를까? 뭐 일반적인 호칭일 수도 있다. 딱히 이상한 느낌이 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영감님이 마땅치 않다는 듯이 했던 몸짓이나 심 여사님께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것 등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또 대화 중에 ‘바람 너무 좋아하면 안 돼야’하고 말하던 것을 감안해 볼 때 그저 여사라는 말은 평범하게 부른 호칭은 아닌 것 같았다.

혹 그 영감님이 비아냥거렸던 것은 아닐까…….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 바람이라…….

겨울바람?

아니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같은 그런 ‘바람’?

그것도 아니지.

한겨울에 화사하게 꾸미고 나서는 중년 여인에게 바람이란 것은 사실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바람’이라는 말에 심 여사께서는 핏 하고 외면했다.

뭐 이쯤 되면 생각나는 것은 딱 하나 아닐까. 어디 낭만적인 데로 살짝 떠나는 것.

그것은 그렇고, 왜 계 실장은 한 고시원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을까? 갈 데가 없어서? 40대 젊고 건강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한들 하루하루 겨우 먹고살 정도밖에 안 되고 오갈 데가 없어서 싸구려 고시원에 그렇게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었겠는가? 게다가 배운 게 없는 것도 아니고, 인물이 못나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것도 아닐 테고, 말재주가 없어서 주인아주머니와 대화 한번 해보지 않고 내외하며 지냈을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혹 여주인과 무슨 관계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의준은 살금살금 심 여사의 뒤를 쫓았다.



4


송이는 외사촌 오빠 김진구에게서 의준이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잖아도 지난번에 의준이 볼티모어로 찾아왔을 때 어딘지 서먹하게 떠난 것이 늘 마음에 걸려 있던 차였다. 그리고 외사촌 오빠가 의준의 펜트하우스에서 송이의 귀국파티를 열겠다고 한 말을 듣고는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그 파티를 열기 전에 별도로 의준을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다. 사실 송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부러 그 멀리 미국까지 찾아온 의준이 어색한 모습으로 돌아간 것은 두고두고 송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이는 의준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혹 단단히 오해한 것이라도 있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한참 망설인 끝에 펜트하우스로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겨우 출근시간대를 넘긴 시각이라 너무 이른 감이 있겠다 싶긴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이기만 하다가는 결국 포기하게 될 것 같아서 마음을 굳히고 당장에 가보기로 했다.

의준이 유럽으로 여행 가면서 외사촌 오빠와 송이에게 부탁했던 펜트하우스 인테리어를 의준이 돌아와서 다시 싹 바꾼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 볼티모어에 와서 의준이 그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그래서 기왕에 찾아가 보는 김에 새로이 바꾼 펜트하우스의 모습을 구경해 봐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어떤 식으로 디자인했을까…….

그 사람 취향은 어떤 것일까…….

자못 궁금했다.

송이는 서교동으로 가는 도중에 한 번 더 전화했다. 그러나 역시 받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일단 음성 메시지를 남겨놓고서 송이는 차를 돌리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의준의 아파트 앞에 이르렀다.

송이는 차를 세우고 또다시 전화했다. 불통. 송이는 그대로 10분 정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 뒤 포기하고서 차를 돌려 강남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 의준이 다쳐서 입원했었다고 한다. 아파트에서 가까운 무슨 정형외과라고 했던 것 같았다. 외사촌 오빠에게 전화해서 그 병원 이름을 물어보려다가 그만두고 핸드폰으로 찾아보았다.

아파트에서 제일 가까운 정형외과라……. 그래, 찾았다.

새빛정형외과의원.

정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혹 그곳에 다시 입원한 것은 아닐까……?

허탕 치는 셈치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해서 일단 그곳에 가보자고 송이는 생각했다.

송이가 정형외과 앞으로 가보니 차를 세울 만한 곳이 없었다. 주차장으로 가려고 병원 옆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서 그곳은 병원 관계자들만 세우는 곳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 병원 옆 어린이놀이터 조금 지나면 공영주차장이 나오는데, 그곳에 세우고 오면 주차비는 무료라고 설명해 준다.

송이는 후진을 해서 골목길을 나갔다. 그때 갑자기 차 지붕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가 떨어진 모양이다. 그 바람에 깜짝 놀라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콱 밟고 말았다.

그 순간 차가 뒤로 튀듯이 나가면서 또다시 차 뒤에서 무엇인가가 묵직하게 부딪치는 쿵 소리.

송이는 화들짝 놀라 얼른 브레이크를 밟았다. 가슴이 쿵탁쿵탁 뛰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밖에서는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누군가가 차창을 두드린다. 화가 난 어떤 남자의 얼굴. 그러면서 빨리 내리라고 소리친다.

송이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차 문을 열었다.

밖은 왁자하고 소란스러웠다. 여러 사람이 차 뒤에 몰려와 소리 지르고 있었다. 얼핏 보니 차 밑으로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송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옮겨 차 뒤쪽으로 갔다. 사람들이 한 여자를 차 밑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송이는 사색이 되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병원 간호사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막 병원 정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중 나이 든 한 간호사가 소리쳤다.

“송이야!”



송이는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도 떨리고 다리도 떨리고, 몸도 마음도 떨리는 채.

다친 여자는 이 병원 간호조무사 한송이라고 한다. 병원 선배의 심부름으로 밖에 나갔다가 갑자기 후진하며 달려온 차에 부딪혀 넘어졌으나 차가 그대로 더 후진하는 바람에 차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고, 또한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 들어가 치료받은 덕에 일이 크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만 넘어질 때 머리를 바닥에 부딪힌 것이 조금 걱정이라고 했다.

송이는 외사촌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서 와달라고 했다. 김진구, 즉 떠버리는 곧바로 달려와 그 사고를 수습했다. 보험회사에도 전화하고, 병원 원무과와 담당 의사에게도 가서 이것저것 확인했다. 그리고는 복도에 앉아 있는 송이에게 다가왔다.

송이가 일어났다. 아직도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마음도 진정되지 않았고.

“다 처리했어. 보험회사에서 알아서 해줄 거야. 너는 그냥 집에 가면 돼. 교통사고 때는 가해자나 피해자나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아. 나머지는 이 병원하고 보험회사에서 알아서 다 해줄 거니까. 그런데 왜 의준이 그 녀석은 전화를 안 받는 거지? 수도 없이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남겨놨는데 응답이 없어. 어떻게 된 거야?”

송이는 다시 의자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떠버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전화해 봤는데 안 받아.”

“이제 가자. 여기 더 있어 봤자 너한테 좋을 것 없어. 집에 가서 쉬어라. 많이 놀랐을 텐데. 그리고 집에 가서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마.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그 여자 안 보고 가도 될까? 여기 간호사인데.”

“너하고 이름이 똑같더라. 성만 다르고.”

송이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병원에서 다 알아서 해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때 송이는 갑자기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놀라서 표출되지 않았던 겁먹은 마음이 울음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떠버리는 옆에 앉아 송이의 등을 쓸어주며 달랬다.

“괜찮아, 괜찮아. 이런 사고는 누구나 다 내는 거야. 너는 그래도 다행이다. 이 정도밖에 안 됐으니까. 사람만 안 죽었으면 돼. 걱정하지 마. 내가 그 여자에게 다시 한번 보고 올 테니까 너는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어. 울지 말고. 알았지?”

송이의 차는 대리운전을 시켜서 마세라티 전문 수리점으로 보냈다. 차 지붕에 누군가가 얼음 뭉치를 던져서 약간 흠집이 났고, 차 뒤는 여자가 부딪히며 아래로 들어가는 바람에 범퍼 아래쪽이 약간 망가진 정도였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송이는 손이 떨려서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대리운전에게 수리점으로 보내어 점검하고 나서 고칠 것은 고치게 한 것이다.

떠버리는 어차피 모두 보험회사에서 처리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서 자신의 차에 송이를 태우고 강남으로 향했다.

“그런데 의준이가 그 병원에 입원한 건 어떻게 알았어?”

“아냐, 몰랐어. 오빠가 나한테 말해 줬잖아. 그 아파트 근처 정형외과에 입원했었다고. 그래서 핸드폰에서 제일 가까운 병원을 찾아보고, 혹시나 하고 가본 거야. 또 입원했나 해서.”

“아니, 그런데 그놈은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너도 해봤니?”

“내가 전화해도 안 받아. 그 오빠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무슨 일은……. 하지만 좀 이상하긴 하다. 하루 종일 우리 전화를 전혀 안 받으니. 전화를 꺼놓은 것도 아닌데. 자식, 어디 가서 또 입원한 건 아니겠지…….”

“정말 괜찮은 거겠지……?”

“글쎄다. 이거 오늘은 모든 게 죄다 뒤숭숭하네…….”

“참, 그 여자 괜찮대?”

“아이고, 걱정말아라. 병원 간호사인데 그 병원에서 알아서 다 해주겠지. 보험료는 좀 올라가겠구나. 워난 비싼 차니까. 그래도 상관없어. 사고는 누구나 나는 거니까…….”

떠버리는 옆좌석의 송이를 돌아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만 괜찮으면 다 괜찮은 거야. 걱정하지 마. 그 정도로 끝난 것만도 운이 좋은 거니까.”

그 뒤에 떠버리는 아무 말 없이 운전하다가 슬쩍 송이를 돌아다보며 말을 한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그 여자 이름도 송이라니. 한송이……. 한송이. 에이, 그 이름보다는 명송이가 훨씬 더 났다, 그지? 한송이가 뭐니, 한송이가. 꽃은 한 무더기 왕창 피어 있는 게 좋은 거야. 한 송이가 아니라. 보기에도 그렇고 사진 찍을 때도 그렇고……. 내 말 맞지?”

송이는 대꾸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명송이, 한송이, 명송이, 한송이……. 송이 송이 송이……. 왜 의준이 주변에는 온통 송이뿐이냐…….”

그러더니 떠버리는 슬쩍 송이를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 송이도 꽤 이쁘장하게 생겼더라……. 너만은 못하지만.”

송이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5


의준은 오류동 전철역으로 들어갔다. 시내로 가는 방향.

심 여사는 요령 좋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는다. 출근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전철 안은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의준은 심 여사와 같은 쪽의 문이 두 개 떨어진 곳에서 창밖을 보며 서 있었다. 모자는 눌러쓰고 마스크는 올려쓰고서 손잡이를 잡은 채 전동차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의준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자신이 올바로 행동하는 것인지. 혹 아무런 소득도 없이 공연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의문은 소용없었다. 무슨 일이든 해봐야 한다. 결과가 없더라도. 만일 이것이 헛짚은 것이라면 방향을 달리 잡으면 된다.

그런데도 의준은 이상하게 마음이 초조해져 가고 있었다. 마치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처럼. 무슨 이유에서 그런 것인지 곰곰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일까……?

이렇게 불안하고 안정되지 않는 이유가?

어딘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빠져나올 수 없는 곳.

게다가 이 전동차가 그 막다른 곳으로 의준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의준 자신은 심 여사를 따라서 가고 있었지만, 실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손이 의준을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의준을 위해 준비된 어떤 곳으로.

심 여사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핸드폰을 꺼내어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그러더니 전동차가 구로역에 섰을 때 처음에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서둘러 내린다. 출입문이 닫히기 바로 직전이다. 의준도 깜짝 놀라 사람들을 헤치고 아슬아슬하게 내렸다.

그러나 심 여사는 내릴 때 서둘렀던 것과는 반대로 느릿느릿 걸어서 수원 쪽 전철 바꿔타는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 플랫폼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면서 어디론가 전화도 한다. 의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사람들 틈에 섞여서 심 여사의 모습이 반쯤만 보이도록 했다.

심 여사는 전동차에 오른 뒤 무사태평한 사람처럼 전철 노선도도 쳐다보고 지나가는 바깥 풍경도 내다보며, 자리가 나자 앞서 오류동에서와는 달리 서둘러 앉으려고도 하지 않고 느릿느릿 굼뜨게 행동하며 가서 앉는다. 아주 여유로운 분위기이다.

금정역에서 심 여사는 오이도 방향으로 갈아탔다. 한대앞역을 지나자 지하철 내부가 한산해진다. 의준은 일부러 다음 칸으로 옮겨가서 유리창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여유로운 느낌의 심 여사. 아무리 생각해도 고시원에서 올 때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바람은 바람이지만 가슴 설레는 낭만의 바람이 아니라, 아주 한가로운 중년 부인의 느긋한 바람인 것이다. 그런 바람을 맞으려고 나이 드신 노인에게 핀잔까지 들어가며 나들이하신 것인가?

의준은 약간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전동차 안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4호선 종점 오이도역에서 모두들 느릿느릿 내렸다. 모두가 세상 바쁜 일 없이 시간만 남은 사람들 같은 모습이었다. 불과 20분 남짓 전 전동차 안팎의 요란스럽던 그런 분위기는 마치 헛꿈인 듯한, 현실에서 너무도 동떨어진 분위기.

심 여사는 전철역에서 2번 출구로 나가 또다시 한가로운 걸음으로 천천히 바닷바람을 음미하며 걸어간다. 의준은 심 여사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심 여사 못지않게 느릿느릿 쫓아갔다. 역전로를 지나 아파트단지로 들어가서 큰길로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 경기도검도수련원 앞으로 해서 멀찍이 떨어진 채 한가로이 걸어가는 두 사람. 심 여사는 운전학원을 지나자마자 주유소를 끼고 오른쪽 철도 방향으로 돌아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심 여사가 도착한 곳.

시흥장례원.

심 여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간다.

의준은 3층짜리 장례식장 밖에서 서성거리며 주차장에서 어슬렁거렸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잘못된 느낌. 혹 의준이 뒤를 밟는 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장례원 밖 주차장에는 차들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조문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몇몇 지나간다.

의준은 밖에서 기다리다 지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대리석으로 단정히 꾸며진 로비가 나왔다. 사람들이 제법 붐볐다. 하지만 의준은 자신의 모습이 어딘지 장례식장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머쓱해져 도로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것. 심 여사 역시 조문객들과는 동떨어진 복장이었던 것이다. 낭만과 야릇한 꿈을 찾아나섰던 그 모습. 화사하게 치장한 그 얼굴.

의준은 얼굴이 화끈했다. 그리고 얼른 돌아서서 큰길로 나갔다.

당했다.

심 여사는 의준이 뒤쫓는 것을 알아차리고 원래의 목적지가 아닌 이곳으로 이끌고 온 것이다.

의준은 참담한 마음으로 오이도역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갈까 하다가 그냥 발걸음 가는 대로 역으로 간 것이다. 그리고 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서 돌아왔다. 심 여사를 쫓던 때와 다른 점은 2호선으로 갈아타고 홍대입구역에서 내린 것이다.

의준은 맥이 빠진 채 아파트 입구까지 왔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 없이 문득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심장이 얼음장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한 여자가 얼른 사람들 틈 속으로 숨어들어간 것이다. 심 여사. 분명했다. 아주 짧은 순간 보기는 했지만 틀림없다.

이럴 수가!

의준은 넋이 빠진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의준의 머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모든 일을 용의주도하게 처리해 왔다고 자부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위험하고 끔찍한 일들을 해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던 자신이…….

의준은 머리를 흔들었다.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저번에 병원 앞에서 넘어지며 돌 화분에 머리를 부딪힌 것 때문에 그런 것인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의준은 멍한 눈으로 돌부처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몸을 돌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몸에 한기가 돌았다. 사고도 마비된 듯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펜트하우스에 들어서는 순간 전화가 울린다. 의준이 깜짝 놀라 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사실 그 순간 또 하나 자신이 멍청한 짓을 한 사실을 깨달았다. 핸드폰을 탁자에 올려둔 채 그대로 나갔다 온 것이다. 게다가 그 사실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



6


의준은 정형외과로 달려갔다. 아니, 달리다시피 간 것이다. 그러나 병원 문 앞에서 멈춰섰다.

무슨 핑계로 송이에게 가는 것일까?

사고 소식 들었다고?

그래서……?

송이가 사고가 난 것이 의준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단지 가해자가 의준의 친구 외사촌 동생이라서? 그게 이유가 돼?

아, 그것 말고 이유가 또 있지. 즉, 먼저는 한송이가 의준과 연결되었고, 나중에는 명송이가 외사촌 오빠를 통해 또 의준과 이어지니 이것이 인연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아이고…….

에잇!

의준은 무조건 유리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현의준 씨죠? 어떻게 오셨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중년의 수간호사가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아, 예……. 그냥 좀……. 실은 머리가 좀 어지러운 것 같아서…….”

“어머나! 이쪽, 이쪽으로 오세요.”

수간호사는 호들갑스럽게 의준의 팔을 붙잡고 복도 안쪽으로 이끌고 간다.

“얘, 민정아, 이 환자분 박 선생님 방으로 모셔다 드려. 원무과에는 내가 말해 둘 테니까 정선이한테 얘기해서 이 환자분 먼저 봐드리라고 해.”

수간호사는 지나가는 어린 간호사를 불러 의준을 인계한다.

“나는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니까 저 애 따라서 저번에 진찰하신 선생님한테 가보세요. 나중에 내가 들를게요.”

수간호사는 생글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간다. 골치 아픈 사람 떼어놓고 가는 가벼운 발걸음.

나이 어린 간호사가 무뚝뚝한 얼굴로 따라오라는 얼굴을 보이더니 돌아서서 앞장선다. 의준은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간호사가 한 진료실 앞으로 가서 표정만으로 빈 나무의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그 옆 의자에는 간호사복을 입은 한 여자가 앉아서 머리를 숙인 채 종이 한 장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송이야, 너 다음에 이 환자분이 진료받을 거야.”

간호사는 그 말만 하고 얼른 몸을 돌려서 가버린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의준을 올려다본다. 눈이 커진다. 의문에 찬 표정.

“아, 한송이 씨죠?”

의준은 옆 의자에 앉았다.

“다친 데는 좀 괜찮으세요?”

아차…….

한송이가 말은 없이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그러더니 손에 든 종이를 접어서 간호사복 주머니에 넣으려 한다.

“그 한시 아시는 겁니까?”

또 아차…….

“네……?”

“아니……, 눈에 좀 익은 거라서…….”

한송이는 손을 멈칫하고서 종이를 다시 펴고 바라본다. 그리고는 얼굴을 의준에게 돌렸다.

“이 한시……, 아세요?”

의준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실수했다.

“아니, 그냥 좀…….”

한송이는 멍한, 그러나 어딘지 의미 있는 눈으로 계속 의준을 바라다보았다. 그 눈이 무척 깊어 보인다.

“무슨 뜻인지 아세요?” 의준은 될 대로 되라며 이렇게 되물었다.

한송이는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고 나서 얼굴을 의준에게 돌렸다. 그리고는 종이를 의준에게 내민다.

의준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또박또박 손글씨로 쓴 한시. 칠언율시 여덟 구절.

참고로 한시에는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이 있다. 여기에서 또 절구(絶句)과 율시(律詩)로 나누어진다. 즉, 오언절구와 오언율시, 칠언절구와 칠언율시가 되는 것이다. 절구는 네 행, 율시는 여덟 행이다. 따라서 오언절구는 다섯 자 네 행, 오언율시는 다섯 자 여덟 행이고, 칠언절구는 일곱 자 네 행, 칠언율시는 일곱 자 여덟 행이 된다. 그리고 한시에서는 성조(聲調)를 중시여긴다. 한자 하나하나가 지니고 있는 평성(平聲)과 측성(仄聲)의 조합이 한시 규칙에 맞게 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측(仄)은 한쪽으로 치우친다든 뜻이다. 즉, 평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측성에는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立聲)이 있어서 한자의 성조는 모두 네 가지가 된다. 즉 ‘평성, 상성, 거성, 입성’이다. 따라서 한시를 지을 때는 위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실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지을 수도 없을 뿐더러 제대로 된 감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측성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조금 생소하게 들리지만 실은 우리말에도 많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미각(味覺)과 미래(未來)에서 미의 발음은 좀 다르다. 미각의 미(味)는 짧게 발음하고, 미래의 미(未)는 길게 소리 낸다. [미:래]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味)는 평성, 미(未)는 측성인 셈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해서 [양식(洋食)]에서 양(洋)은 평성, [양:식(養:殖)]에서 양(養)은 측성이 된다.

사실 의준은 한시에 대한 이러한 상식도 지식도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그 시의 의미가 마음에 드는 것들만 여럿 모아서 나름대로 감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송이가 넘겨준 한시도 그중 하나에 속한다. 통일신라시대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지은 석봉(石峯)이라는 칠언율시. 최치원 선생의 호에는 고운 말고도 해운(海雲)이 있다.

의준은 자신이 너무도 잘 아는 그 한시를 받아들고는 어떻게 말을 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잠시 머뭇거렸다. 게다가 의준은 이 한시의 첫 구절에서 두 자를 따와 참정루(巉頂樓)라는 고옥(高屋)한 누각을 지어 우선 글자로나마 한송이에게 선물하지 않았는가.

어떻든 의준이 남의 일에 참견한 이상 일단 매듭은 지어야 한다.

의준은 간단히 그 한시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한송이 역시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서 그 뜻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눈치는 보이지 않고 의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진지한 모습으로 듣는다.

의준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다시 고개를 들고 쳐다보는 한송이의 눈.

아, 그 눈은 너무도 깊어 보였다…….

한송이는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한 장 꺼내든다. 그것을 펴서 의준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거 아세요?”

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면서 간호사 한 사람이 나온다.

“송이야, 들어와.”

한송이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의준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리고는 종이 두 장을 겹쳐서 접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7


한송이는 명송이와 외사촌 오빠라는 남자, 그리고 의준이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명송이가 왜 이 병원에 찾아오게 되었는지도.

그와 동시에 의준이 어떤 사람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리고 의준과 명송이가 어떤 관계인지도. 그러면서 한송이는 갑자기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색다른 외로움. 깊고 가슴 아픈 외로움을.

또한 한송이는 의준에게 한시 설명을 들은 후에 한시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 뒤 한자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지만 한시가 주는 맛과 멋을 찾아 이것저것 뒤져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독특한 한시 하나를 발견하고 그중 첫 구절에 마음이 빼앗겼다.


芳樹吐花紅過雨(방수토화홍과우)

아름다운 나무들 붉은 꽃 토해 비처럼 내리고


이 시는 연산군이 지은 회문고시(回文古詩)의 첫 행이다.

회문은 앞으로 읽으나 뒤에서 거꾸로 읽으나 똑같은 것을 말한다. 숫자에서 292와 같은 것들. 또는 우리말에서 ‘인천인(仁川人), 강대강(强對强), 이날이’ 등과 말들. 영어에는 radar, civic, madam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러한 식의 회문을 이용한 글이나 시가 한때 유행이 되기도 했고, 고려시대 때 명문장가 이규보는 미인원(美人怨)이라는 회문시를 지어 재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한시에서도 회문이 종종 등장하는데, 연산군 역시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한탄하면서 회문고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한시는 칠언절구, 즉 일곱 자 네 행으로 되어 있는데 시 전체를 완전히 거꾸로 읽어도 뜻이 동일하도록 되어 있다. 연산군은 정치역사에서는 악명으로 남아 있으나, 시류에서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송이는 연산군의 이 시에서 회문의 멋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 시 자체가 지니고 있는 처량함에 빠져든 것이다. 자신이 꽃 같은 시절에 겪은 여러 서러움과 지금도 따올 수 없는 열매를 바라보며 서글픔에 잠겨야 하는 자기 처지가 쓸쓸해서. 그 열매는 보기에도 황금빛이며 그것이 토해내는 것들도 찬란하지만,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한송이에게는 자신이 토해내는 피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붉은 피.

한송이는 자신이 토해내는 붉은 피 소나기를 스스로가 맞고 있다고 생각했다.


***

회문고시(回文古詩) | 연산군(燕山君, 1476~1506)

芳樹吐花紅過雨(방수토화홍과우)

아름다운 나무들 붉은 꽃 토해 비처럼 내리고

入簾飛絮白驚風(입렴비서백경풍)

주렴에 버들개지 날고 흰 꽃은 바람에 놀라니

黃添曉色靑舒柳(황첨효색청서류)

누른빛에 새벽 빛 어려 버들잎 푸르게 퍼지고

粉落晴天雪覆松(분락청천설복송) |ㅡ

꽃가루 맑은 하늘 내려 눈처럼 소나무 덮었네

[이 시는 연산군이 폐위된 뒤 지은 것으로 여겨지기에 당시의 심정을 고려해서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화려한 왕궁 나올 때 피눈물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역신들 한떼로 몰려드니 천지일월이 혼비백산하여

곤룡포 이슬 맞아도 늘푸른 왕의 기개 변함없으나

부귀영화 비가 되고 흩뿌려 폐왕 발길 적시는구나


[다음 화로 계속]

이전 09화巉嵒絶頂欲摩天(참암절정욕마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