巉嵒絶頂欲摩天(참암절정욕마천)

by Rudolf

제 3 부

인간의 조건

Condio Humana


‘인간이란 그 자신이 이미 이루어 놓은 일과

앞으로 할 일들을 합쳐놓은 존재’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 1933



巉嵒絶頂欲摩天(참암절정욕마천) | 높이 치솟은 산봉우리 하늘을 찌를 듯


1


“얘, 저 애 우리 학원 중등부 아니니?”

“누구?”

“저기 저 애 말이야, 남자애.”

고등학교 여학생 서너 명이 인천 송도의 한 핸드폰 액세서리용품점에서 물건을 뒤적이는 남자애 쪽으로 시선이 향한다.

“저 애 우리 학원 다녀?”

“몇 번 봤어.”

“몇 학년? 3학년 같은데?”

“그럴 거야. 그런데 수업 듣는 게 아니고, 교무실에서 일하면서 공부도 하나 봐.”

“아, 맞다. 나도 본 것 같아. 프린트 문제집 철하고 문서 정리하는 애일 거야.”

“그래……?”

깔끔하게 생긴 남자애가 분홍 꽃무늬 핸드폰 케이스를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것을 보고 모두가 흥미 있게 바라다본다.

“걸프에게 사주려나 보네.”

“이쁜 거 골랐는데.”

“나도 저런 거 하나 갖고 싶다.”

“가서 사달라고 해.”

“얼굴 이쁘장하니까 동생 삼자고 해봐.”

“그럴까…….”

여고생들은 낄낄거리며 몰려서 시식코너로 향한다.


수인이 선영의 팔을 툭툭 치면서 말을 한다.

“얘, 저 핸드폰, 저것 좀 봐.”

“뭐를?”

“저기 진희 핸드폰.”

“응……, 그런데 왜?”

“글쎄……. 어제 그것 같기는 하지만, 똑같은 게 얼마나 많을 텐데…….”

“아냐, 진희 핸드폰 케이스 저거 오늘 처음이야. 어제까지 계속 노란 케이스였어. 내가 저번에 핸드폰 잃어버렸을 때 진희 거 사용한 적 있었거든.”

“그럼 오늘 바꾼 거야?”

“그렇다니까.”

“그래……?”

여학생 몇 명이 수인과 선영 주위로 몰려든다.

“뭔 얘기?”

“저 핸드폰 케이스.”

“케이스가 뭐?”

“저기 저 진희 핸드폰 말이야.”

모두들 진희의 핸드폰으로 눈이 향한다.

“응? 케이스 바뀌었네.”

“이쁘다. 좋은 거 샀네.”

“산 거 아냐. 선물 받은 거야.”

“오, 그래? 누구한테? 보프?”

“그럼, 걸프겠니?”

“저 애도 보프 있어?”

“보프 아냐.”

“그럼 누구?”

“연하.”

“연하도 보프 맞아.”

“우와, 대박! 정말이야?”

“공부만 하고 얌전한 줄 알았는데.”

“원래 그런 애들이 더한 거야.”

“진희는 이뻐서 보프 많을 것 같은데 뭐.”

“그럼 수희는 뭐 이뻐서 보프 있는 거냐?”

“웃겨. 이쁜 거하고 보프하고 뭔 상관?”

“아니, 그런데 진짜 연하야? 봤어?”

남자애들이 대여섯이 몰려서 지나가다가 묻는다.

“누가 연하?”

“신경 꺼.”

“누구 얘기하는 거야? 연하가 누구야?”

“교무실에서 일하는 애.”

“아, 그 중딩? 그 애가 왜?”

“진희 연하래.”

“얼래? 농담 따먹기 해?”

“꺼질래, 아니면 맞을래?”

“나 맞고 싶어요. 요기, 요 입술…….”

“꿰매 줘? 촘촘촘?”

“누가 연하라고? 교무실 중딩?”

“신경 죽이시라니까.”

“우리 같은 오빠들 놔두고 웬 연하?”

“우웩.”

“니들이 웬만만 해봐라. 우리가 연하 찾나.”

“비린내 안 나니?”

“니들이 더 비린내 나. 꺼져 주실래, 비린내 씨들?”


2


송도에서 미추홀대로 쪽으로 건너가는 컨벤시아교 아래 테니스장 옆에 남학생들이 몇 명 몰려 있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보습학원에 다니는 중학생 한 명과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 여러 명이었다.

“니가 진희 연하냐?”

“건방진 새끼.”

석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주먹이 날아왔다. 뒤이어 발길질. 그리고 배를 걷어찬다. 넘어졌다. 짓밟는다. 발길질이 머리로 향했다. 또다시 발길질. 발길질. 발길질. 짓밟고 또 발길질. 짓밟고 짓밟고 짓밟고…….


석이가 병원으로 실려온 것은 새벽 1시가 넘어서였다. 송도 건너편 미추홀대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지나가던 차가 발견하고 119에 신고한 것이다. 병원에서 검사 결과 뺑소니차에 치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밖에도 몸 여러 군데에 구타당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마도 누군가 여러 사람에게 맞은 뒤 혼자서 걸어가다가 차에 치인 것 같다고 했다.

석이는 한 달 이상 깨어나지 못했다. 그동안 장 파열, 뇌출혈 등으로 수술을 세 번 받았다. 조금만 일찍 발견되었어도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의사들은 말했다.



3


“솔직히 나는 지금 우리들이 의견을 모으자는 생각은 아닙니다.”

“아니, 꼭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자신의 생각만 말하면 돼요.”

“나는 일단 우리 애를 미국에 보낼 생각입니다. 여기 놔뒀다가 자칫 전과자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내 솔직한 심정이에요, 이것은.”

“우리 애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애가 칼을 휘둘렀다고 하던데, 그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 말 우리 애는 안 하던데. 그거 정말입니까?”

“싸움 현장에 칼이 있었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거야 뭐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니까 그 애가 집어서 가지고 가다가 다른 데다 버렸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싸움 현장에 떨어져 있었더라도 혹 나중에 누가 집어갔을 수도 있지.”

“아니, 그것보다도 뺑소니 사고가 더 큰 거 아니에요?”

“맞아요.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니까.”

“아니, 그래도 칼 얘기는 좀 지나친 것…….”

“아녜요, 그랬을 수도 있어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일 우리들이 아끼는 여자애가 있는데, 어떤 나이 어린 애가 찝쩍거린다고 해봐요. 우리들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그냥 보기만 하겠어요? 그럴 경우 한번 불러다 타일러 볼 수도 있는 거 아녜요? 그런데 그 녀석이 험하게 나오고 흉기까지 들이댄다면, 여러분 같으면 어쩌겠습니까? 꼭 이번 경우처럼 되지는 않더라도, 사실 나 같으면 욱할 것 같은데…….”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것 같아요. 칼 이야기가 나오면 좀 이상해지잖아요.”

“아닙니다. 이거 막판까지 가면 정당방위까지 얻어낼 수 있어요.”

“자 자 자 자,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너무 많이 나가면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이 의미가 없어져요. 일단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할지 그것부터 생각해 보자구요.”

“나는 애 이모가 미국 샌디에이고에 사는데 거기 보낼 작정입니다. 뭐 꼭 한국에서 대학 안 나와도 상관없어요. 캘리포니아 주만 해도 좋은 대학 많아요. 동부 안 가도 돼. 스탠퍼드나 USC, 게다가 UC는 좀 많아요. 버클리, 데이비드, UCLA 등등. UCSF도 그렇고.”

“나는 스탠퍼드에서 연수받았습니다.”

“나는 동생이 런던에 있는데, 그리로 애를 데려오라 합디다. 동생이.”

“아, 그런데 좀 전에 그 애가 여자애한테 찝쩍거렸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오해한 거라고 하던데…….”

“오해든 아니든 그것은 상관없어요. 그 당시 우리 아이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아니, 생각 좀 해봐요. 우리들 같으면 가만있겠어요. 이것은 거창하게 말하면 의협심 같은 겁니다. 아이들 그 나이 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 아녜요?”

“오해했다니 무얼……?”

“그 뭐라더라……. 아, 핸드폰 케이스. 우리 아이들은 그 남자애가 핸드폰 케이스를 진희라는 여자애한테 선물로 주면서 찝쩍거린 것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애 가방에 그 케이스를 포장한 것과 생일카드가 함께 들어 있었다고 합디다. 제 누나에게 주려고 했다는 것 같아요.”

“하 참,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된다니까요. 오해든 아니든 우리 애들은 그 당시 의협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물론 오해죠. 그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가서야 안 일이에요.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우리 애들 마음이 어떠했느냐 그겁니다. 초점을 자꾸 흐리시면 안 돼요.”

“성 사장님은 여기 국제학교하고 이야기해 보셨습니까?”

“우리 애를 더는 그 학교에 보내지 못할 것 같아요. 학교에선 중징계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대는데, 아예 먼저 일반 고등학교로 옮겨놔야겠어요. 학비는 미국 대학보다 더 받으면서, 애들을 보호하려는 생각보다는 자기들 학교 평판부터 걱정하는 것 같아서 원.”

“송도에 거기 말고 정식 인가받은 국제학교가 더 들어와서 서로 경쟁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들 혼자니까 기세가 높아서 그래요.”

“하지만 아직 우리 아이들이 자기들이 구타했다고 공식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경찰에서 조사 나온 것도 아니고, 지금은 그저 소문으로만 도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소문만으로 학교에서 너무 앞서 가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 학교 문제는 여기에서 꺼낼 필요 없잖아요. 그것은 성 사장님이 알아서 하시고, 우리는 다른 문제…….”

“그럽시다. 그 말이 맞아요.”

“심 교수님이 박 검사하고 잘 아는 사이라던데, 그쪽에서는 무슨 말 없습니까?”

“공식적으로는 문제 제기된 게 하나도 없어요. 누가 고발하거나 고소한 것도 아니고, 경찰에서는 지금 뺑소니 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니까…….”

“그 애 누나 있잖아요. 그 애는 뭐라고 말 안 해요?”

“그 애가 우리 아이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어요? 자기가 본 것도 아닌데.”

“맞아요. 현재로서는 그 애가 깨어나지 못하니까 아이들하고 어떻게 싸웠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할 수가 없어요. 우리 애 말을 들어보면 그냥 타이르려 하는데 갑자기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그거 막는다고 하다가 싸움이 났다고 합디다만……. 아니, 그게 정당방위 아니면 뭐예요? 게다가 다른 목격자가 없으니까 우리 아이들 말을 누가 반박할 수도 없잖아요. 그냥 애들끼리 싸웠다는 소문만 난 거지. 우리 애들도 자신들이 어떻게 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현재까지는 모든 게 그저 소문일 뿐이에요.”

“그거야 그렇죠. 현재로서는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박 검사는 자신이 여기 못 오면 부인이라도 보내야 되는 거 아녜요?”

“음, 그건 좀 그래요. 검사 신분에 이런 데 끼어들었다가는 나중에 은폐시도니 뭐니 하며 골치 아파질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양반 지금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일 겁니다. 부인이 와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은.”

“부인은 변호사래요.”

“오, 그래요? 그럼 뭐 좀 도움이 되겠네.”

“아, 참, 그 애 치료비 말인데…….”

“사실 나도 그 문제를 이야기하려 했었는데 잘 꺼내셨습니다. 그 문제 우리가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니, 잠깐. 그거 간단한 문제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치료비를 부담한다면 나중에 그게 빌미가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것 참, 정 교수님은 왜 꼭 그렇게만 생각하십니까? 대학병원 닥터이신 분이. 치료비 문제는 피해자니 가해자니 하는 것과는 달라요. 그 애가 극빈자에다가 부모도 없는데 지역주민으로서 그저 돕는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뺑소니 사고인데 좀 도울 수도 있는 거죠.”

“아니, 그렇지 않아요. 정 교수님 생각도 일리가 있어요. 우리가 너무 표나게 하면 오히려 남들 보기에 더 이상해지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래도…….”

“내 생각에는 말입니다, 일단 그 애 사정이 어려우니까 우리도 일부 동참하는 게 모양이 좋을 것 같아요. 학교와 학원에서도 모금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학부모의 일원으로서 참여해 주는 게 좋지 않겠어요? 금액만 좀 넉넉히 해서…….”

“나도 성 사장님 생각에 동의해요. 다른 생각은 접어두고 그냥 참여합시다. 어려운 애 돕는다는 생각으로.”

“그러나저러나 뺑소니만 잡히면 다 해결되는데…….”

“그런데 저러다가 그 애 영 안 깨어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정 교수님……?”

“저쪽 신성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내가 정확한 상태는 잘 모르지만, 시간이 좀 걸릴지는 몰라도 깨어나긴 할 겁니다. 그쪽 교수 통해서 좀 들어봤는데,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해요.”

“후유, 다행이네. 안 깨어나면 사실 큰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어요. 요즘 언론에서 그런 것만 캐고 다니는 거 몰라요? 나는 차라리 그 애가 깨어나서 자기가 폭행 피해자라고 나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러면 이쪽에서도 정당방위로 맞설 수 있는 거니까.”

“아니,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칼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 같은데, 그거 좀 위험한 발상 아니에요? 나는 그런 이야기는 정말 처음이에요. 칼 문제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나왔어야지, 나중에 그런 거 꺼내면 너무 뻔하게 들리지 않겠어요?”

“그게 뭐가 뻔하다는 겁니까, 대체?”

“그렇잖아요. 아무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느닷없이 칼이 등장하면 나 같아도…….”

“아 아, 그만들 합시다. 지금 칼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아직은 모든 것이 소문일 뿐입니다. 경찰에서 지금 애들 싸움을 수사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애들이 자기들이 그랬습네 하고 떠들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그 문제는 지금은 일단 덮어둡시다. 나중에 필요하면 그때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어요? 지금으로선 뺑소니 문제가 해결되게 하는 게 더 중요해요.”

“그래요, 그럽시다.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치료비 문제나 매듭지읍시다. 나도 좀 넉넉히 내놓을 테니…….”



4


석이는 한 달 반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사실 그 전에도 가끔 의식이 돌아오긴 했지만 몇 시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았다. 다친 장기나 뇌에도 큰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소변과 대변의 배설이 구별이 안 되어 등 윗부분의 척수신경 수술을 받았는데, 대소변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수술 부작용인지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수술은 제대로 되었다고 하며. 재활훈련을 받으면 상당히 회복될 수 있다고 했다.

경찰이 병원으로 석이를 찾아왔다.

경찰은 이름과 주소, 나이, 학교 등 간단한 인적사항을 확인한 뒤 뺑소니 사고에 대해 물었다. 그 다음으로 아이들 싸움에 대해 조사하면서 첫 번째로 물은 것이 왜 칼을 휘둘렀느냐는 것이었다.

칼? 무슨 칼?

석이는 멍한 표정으로 경찰을 바라보았다.

“칼을 휘두르면 상대방이 극도로 공포심을 갖게 돼. 그러면 방어를 할 수밖에 없어.”

석이는 혼란스러웠다.

“왜 칼을 휘두른 거야? 손을 다친 애도 있다고 하던데.”

석이는 경찰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생각이 잘 안 나니? 기억이 안 나? 혼수상태에 오래 빠져서 기억이 잘 안 날 수도 있을 거야. 잘 생각해 봐.”

“…….”

석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계속 멍한 눈으로 경찰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뒤 경찰이 머리를 흔들면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기억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구나.”

“…….”

“안 되겠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갈 테니까, 건강 잘 회복해라. 다음에 또 오마.”

경찰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몇 마디 하고는 병실에서 나갔다.

석이의 누나 송이는 인권단체와 언론을 찾아다녔다. 야간실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송이는 학업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낮에 일하던 상점에서도 사정을 설명하고 당분간 쉬기로 하며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석이가 학생들에게 폭행당하지만 않았어도 밤늦게 길을 가다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폭행으로 인해 다친 것도 뺑소니 사고로 인한 부상 못지 않다는 것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언론에서나 인권단체에서는 예상외로 반응이 크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석이가 먼저 칼을 휘둘렀다는 데 있었다. 학원 선배들이 대화하자는데 막무가내로 칼을 들이대고 휘두르는 바람에 그것을 막느라 손에 상처까지 났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학생들이 방어차원에서 맞싸운 것이기 때문에 쌍방과실의 의미가 크다고 했다. 물론 학생들의 잘못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부모들이 치료비의 상당액을 감당했고, 학생들은 모두 학교를 자퇴하여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을 더 이상 확대하는 것은 오히려 학생들의 미래를 막는 지나친 처사라는 쪽으로 의견들이 흐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석이 자신이 칼을 휘두른 것에 대해서 가타부타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 의사의 소견으로는 정신적 신체적 상태가 모두 정상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석이는 폭행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부 사람들 만나는 것 자체도 극도로 기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처음에 석이를 도우려고 나섰던 일부 단체에서도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해자 학생들 부모의 직업이 사회 상류층인 검사, 의사, 교수, 사업가들이지만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이 사건을 무마시키려 하는 시도를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 부모는 치료비의 상당부분을 감당하는 모습도 보였다. 게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해자 다섯 학생을 오히려 두둔하고 동정하는 흐름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섯 학생 모두 학교성적이 최상위권이었으며 평소 생활에서도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에는 한 여학생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더 컸었다고 보려는 것 같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핸드폰 케이스로 인한 오해는 오히려 다섯 학생의 영웅담으로 변질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건의 본질은 뺑소니 사고이기에 아이들끼리 다툰 것에 대해서는 곁가지로 생각하고 더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관심은 차차 줄어들어갔다. 그 반면 병원비만 쌓여갔다. 정부가 극빈자에게 지원해 주는 혜택과 주변 여러 단체나 학교와 학원 등에서 도와주는 것만으로는 병원비가 충당되지 않았다. 게다가 후원금 액수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석이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재활치료뿐만 아니라 가끔 나타나는 통증과 정신적 불안정 증세로 인해 여전히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병원 측에서도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료의 질도 점차 낮아져 가고 있었다.

누나인 송이는 외부에 다니며 호소하던 일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학교도 다니기 힘들게 되었으며,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상점에서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송이로서도 당장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들게 된 것이다.

송이와 석이 남매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태백이었다. 태백산맥 한가운데 갇혀 있는 태백은 한때 석탄 생산지로 유명한 광산도시였으나, 탄광이 폐쇄되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다. 석이의 부모는 원래는 영월이 고향이었으나 여기저기 떠돌다 태백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노름빚 때문에 사람들에게 구타당한 것이 화근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 사망했고, 어머니는 심심산골에서 뺑소니 차량에 치여 사망했지만 가해차량은 끝내 찾지 못했다. 영월에 있는 친척들은 두 남매를 돌볼 능력도 의지도 없어 둘은 먼 친척이 있는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다행히 그 친척이 많은 도움을 주고, 또 누나인 송이가 여기저기 다니며 악착같이 돈도 벌고 학교도 다니고 하면서 동생을 돌본 덕에 석이가 사고 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살 만해졌다. 그러나 석이가 병원신세를 지면서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여기에 병원비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이를 절망케 한 것은 여러 인권단체의 외면이었다. 그들 단체는 석이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많아 그에 집중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했다. 또한 이러한 모든 과정 중에서도 석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꽉 다물고 있었던 것도 송이의 마음을 더 힘들게 했다.

송이는 자신이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한다 해도 계속 불어나기만 하는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석이가 의지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천근 바위가 되어 송이를 짓눌렀다.

어떻게,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12월 중순, 병원은 발칵 뒤집혔다. 석이가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일은 가끔 있는 것이어서 옥상에 함부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놓았고 펜스도 높이 설치해 놓은 터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석이가 그곳에 올라가서 펜스까지 타고 올라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든 사람이 죽었다.

인권단체와 언론이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송이에게 향했다.

하지만 송이는 일그러진 얼굴에 이글이글 타는 분노의 눈빛만 발할 뿐 어느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5


한송이는 야간실업고등학교를 1년 휴학한 뒤 다시 다녔다. 그리고 졸업한 뒤 조그만 회사에 임시로 들어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곧 나왔다. 그 뒤 몇몇 군데를 두세 달씩 다니면서 쫓겨나기도 하고 뛰쳐나오기도 하면서 1년을 보냈다. 그러는 도중에 우연히 고3 때 담임선생님과 연결이 되어 그분의 권유로 간호조무사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송이는 무사히 학원을 졸업했으나 봄 시험에 실패하고 가을에 다시 도전해서 아슬아슬한 점수로 합격했다. 그런 뒤 몇 개월 동안 여러 병원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다가 아는 언니의 도움으로 새빛정형외과의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송이의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이것도 빨리 취업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 병원이 1년 전 판검사 저격사건의 중심지였던 탓에 사람들이 다소 기피했었던 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병원에 출근한 첫날 선배 심부름으로 병원 근처 할인마트에서 몇몇 가지를 사오려고 나가다가 달려오는 자전거와 마주쳤다. 병원 근무 첫날에 너무 긴장한 탓에 사고를 친 것이다. 그 일로 인해 병원에서 몹시 질책을 받았다. 조심성 없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생긴 것하고는 영 달라.”

“출근 첫날부터 홈런 쳤군.”

“사회생활 쉽게 하긴 그른 애야.”

“여기 오래 붙어 있긴 어렵겠어.”

“눈치도 없는 것 같더라고.”

“왕재수…….”

이렇게 다들 한마디씩 해댔다.

이뿐만 아니라 돌 화분이 놓였던 위치 때문에 혹 병원이 불리하게 될까 봐 윗사람들이 잔뜩 긴장하는 바람에 한송이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전거에서 넘어진 환자가 병원에 크게 항의하지 않고 넘어가는 바람에 병원도 한송이도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송이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 환자가 크게 신경이 쓰였다. 병실에 들어가서 사과할 때도 그렇고, 어쩌다 화장실 부근에서 한번 마주쳤을 때도 어딘지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어서 몹시 불편했던 것이다. 그런데다 5층 계단통에서 담배 피울 때도 만나게 되어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 환자가 병원 말고도 한송이에게 치료비 문제로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해준 터라 마음이 심란했었던 것이다. 1년 전에도 근처 건축공사장에서 떨어져 병원에 오게 된 환자가 보상금 문제 때문에 병원에서 나가지 않고 행패를 부려 크게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그런 일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가뜩이나 저격장소 근처의 병원이라는 것 때문에 안 좋게 소문이 나 있었던 터라 병원에서는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 환자가 아무런 시비 없이 퇴원하자 병원 전체가 안도하게 되었다. 물론 한송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이상한 편지가 한송이게게 배달되었다.


참정루(巉頂樓)

천사에게 드립니다


이 글을 보낸 곳은 천사협회. 한송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천사협회라는 곳을 알지도 못하고 가입한 적도 없고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동화 같은 천사협회라는 말을 믿을 나이도 지났다. 더군다나 참정루(巉頂樓)라는 말은 더욱 생소했다.

중국집 이름인가? 하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한송이는 우선 컴퓨터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변에서 한자를 잘 안다는 사람을 소개받아 물어보았어도 역시 그러한 이름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다만 한자의 뜻을 보아 ‘높이 솟은 봉우리에 있는 망루나 정자’라는 의미 같다고 한다.

하지만 한송이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틈만 나면 컴퓨터를 뒤져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참(巉)이라는 한자가 들어간 한시를 알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라는 분이 지은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巉嵒絶頂欲摩天(참암절정욕마천)

높이 치솟은 산봉우리 하늘을 찌를 듯


그리고 아마도 여기에서 참(巉)과 정(頂)을 따와서 참정루(巉頂樓)라고 지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높이 솟은 어느 곳에 있는 정자라는 뜻인데, 그곳을 한송이 자신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

석봉(石峯) | 최치원(崔致遠, 통일신라, 857~?)

巉嵒絶頂欲摩天(참암절정욕마천)

높이 치솟은 산봉우리 하늘을 찌를 듯

海日初開一朶蓮(해일초개일타련)

바다에 오르는 해 한 송이 연꽃이로다

勢削不容凡樹木(세삭부용범수목)

깎아 지른 절벽 평범한 나무 거부하고

格高唯惹好雲烟(격고유야호운연)

격조 높아 오직 구름과 안개만 벗하니

點酥寒影糚新雪(점소한영장신설)

우유 뿌린 듯 새하얀 눈으로 단장하여

戛玉淸音噴細泉(알옥청음분세천)

고운 옥소리 울리며 맑게 흐르는 샘물

靜想蓬萊只如此(정상봉래지여차)

가만히 생각하니 봉래산 옮겨 놓은 듯

應當月夜會羣仙(응당월야회군선)

분명 달밤엔 신선들 모여 들어 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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