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준은 펜트하우스를 다시 철거했다. 원래대로 황량하게. 그리고 이젤에 놓여 있던 ‘무도회’를 치우고 그 자리에 ‘Quid est Veritas’를 올려놓았다. 앞면으로.
그런 뒤에 상층은 펜트하우스에 있던 한옥식 인테리어를 옮겨서 꾸며놓았다. 그 공간을 차지할 미래의 여인을 위해서. 그리고 펜트하우스에서 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에스컬레이터로 바꾸어 놓았다. 이 역시 그 여인을 위한 것이었다.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 의준이 찾지 못한 사람. 어쩌면 영원히 찾지 못할 수도 있는 그 사람에게 바치기 위해서.
그런 다음 의준은 한밤중에 종종 서쪽 창가에 가서 섰다. 검사와 판사 부부가 저격당한 그 방향으로. 경찰이 저격장소로 특정한 곳, 탄피 2개가 발견된 그 높은 대형 복합 미끄럼틀이 바라보이는 쪽. 의준이 떠버리와 함께 새무 재킷을 입고 나란히 서서 창밖을 내다보던 그 자리에.
그리고 만일 계 실장이 계속 자기 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의준이 응징하기로 했다. 계약을 위반한 책임을 물어서. 여기에 더해 두 사람의 생명을 취한 대가까지 포함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속히 계 실장을 찾아내서 계약을 이행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계약금을 비롯한 일체의 비용과 위약금을 청구할 뿐만 아니라, 어둠의 세계에서 합의된 합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
고시원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계 실장은 시골로 내려갔다.
계 실장에게 시골이 있는가?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 살다가 군에 갔고, 부모형제는 없고 누나 한 사람만 괌으로 이민 갔을 뿐이다. 미국을 시골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지방 어느 깊숙한 곳으로 숨어든 것일까? 그것이야 어떻든 계 실장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어느 누구도 자신을 뒤쫓지 못하게 해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장 계 실장의 행방을 찾아나서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의준은 창가에 서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창밖의 화려한 조명과 불빛이 아니라 그 아래의 배경을. 특히 어린이놀이터의 대형 미끄럼틀. 저 멀리 아래로 잘 보이고 있었다. 그 주변의 보안등이 환히 밝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준은 쌍안경으로 그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동네 한복판의 그리 크지 않은 놀이터. 그 주변에는 단독주택과 3~5층 정도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상가, 학원, 고시원, 병원 등등이. 건물 옥상들은 대체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경찰에서는 그 주변 모든 곳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게다가 모든 가정과 건물도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들어가서 꼼꼼히 살핀 것으로 알고 있다. 저격범은 미끄럼틀 꼭대기에 있는, 원통형 슬라이드 입구의 약간 높은 통 속에 들어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미끄럼틀 근처의 보안등은 그날 밤 깨져 있었으며, 보안카메라 역시 무엇엔가 맞아 많이 찌그러지고 그로 인해 내부장치도 망가져 있었다. 당연히 저격범 짓이겠지만. 그날 밤 보안등이 깨졌다고 신고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시각은 저격이 일어나기 10분 전쯤 된다. 따라서 놀이터 주변에서 좀 떨어진 곳의 보안카메라에 잡힌 영상은 아주 어두워서 흐릿한 사람의 윤곽이 이동한 것밖에 구분할 수 없었다. 단지 몸이 아주 건장한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경찰에서는 고배율로 확대하고 선명도도 최대한 올렸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저격범의 특징이나 얼굴을 구분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얼굴은 가렸겠지만. 어떻든 그 사진을 인쇄해서 언론에 알리고 전국에 배포했다. 그러나 별 영양가 없는 제보만 수없이 들어오고 실질적으로 수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의준이 쌍안경으로 내려다본다고 한들 전문가들이 1년 이상 수사한 것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 근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그 사건 이후 창문에서 놀이터 주변을 샅샅이 훑었을 것이다. 의준만 빼놓고서. 사실 의준은 놀이터를 내려다보기는 했어도 의도적으로 그 이상은 살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계 실장을 찾아야 한다.
일단 어린이놀이터로 가보자.
단서는 항상 현장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날부터 열흘 동안 의준은 밤낮없이 놀이터와 그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그 당시 저격이 일어나기 전에 의준이 최적의 저격장소라고 생각했었던 곳이 생각났다. 그중 하나는 공원, 또 하나는 학교 운동장, 마지막 하나는 상가건물 건축현장.
바로 그 건축현장!
그곳은 놀이터에서 좀 떨어져 있다. 계 실장의 저격장소인 놀이터는 의준이 생각한 직각삼각형 아래쪽 꼭짓점의 35~60도 범위 중 35도에서도 훨씬 벗어난 지점이었다. 의준의 아파트에서 400미터도 더 떨어진 곳, 아파트촌에서 옆으로 비껴간 장소였다. 게다가 의준의 아파트와 놀이터 사이에는 고만고만한 건물들과 단독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7~8층 건물들도 간혹 있기는 했으나, 놀이터까지 직선거리에는 거의 단독주택만 들어서 있어서 아파트 저층을 저격하는 데는 사실상 그 놀이터가 유일한 지점이 되는 셈이었다. 즉, 계 실장은 기막히게 좋은 장소를 택한 것이다. 게다가 특등사수 출신이니 그 정도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의준이 골랐던 건축현장은 직각삼각형 아래쪽 꼭짓점 각도가 거의 35도쯤 되는 곳에 있었다. 따라서 그곳과 놀이터는 2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셈이다. 사실 그 정도는 걸어서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건물은 그 사건 이후 자금난 때문에 공사가 상당히 지연된 데다 지금은 주변의 민원까지 겹쳐져서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사건 당시에는 5층 정도까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현재는10층 정도 올라간 상태이며 전체 높이는 15층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 계 실장은 그 건물에서 일하다 다친 것은 아닐까? 아니, 다쳤다고 한 것이겠지.
이 가정이 사실이라 하고, 계 실장은 다친 즉시 어디로 갔을까? 물론 병원이겠지. 가장 가까운 곳. 정형외과.
아, 바로 거기다.
2
의준은 자전거 대리점으로 갔다. 그리고 중간 가격보다 약간 싼 것을 하나 샀다. 어차피 망가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의준은 자전거를 전혀 타지 못한다. 축구는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야구에서 던지고 치는 것은 꽤 잘 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운동신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 텐데도 이상하게 자전거는 타지 못한다. 몇 번 배우려 했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처박고 넘어지고 해서 자전거도 망가뜨리고 몸도 다치고 한 뒤였다. 그 다음부터는 자전거를 보면 겁이 나고 괜한 콤플렉스도 느꼈다. 그래도 이번에는 용감하게 도전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최장 10분 정도만 버티면 된다. 그런 뒤에 자전거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다. 말이 너무 거창해졌다. ‘장렬’도 아니고 ‘전사’도 아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그런 표현을 썼다. 하긴 비록 장렬한 전사는 아니더라도 그와 버금가는 사태를 만들어야 한다. 겁은 나지만 두 눈 꼭 감고 꽈당탕 넘어지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사실은 무지 겁이 나는 일이다. 일부러 그 짓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약간 비탈길. 왜 하필 비탈길일까? 평범한 길도 많은데. 하긴, 생각해 보면 평지보다 비탈길에서 넘어져야 더 극적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그냥 좋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자. 그리고 또 한 가지,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그 병원 의사나 간호사 등이 나타났을 때 넘어지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그 짓을 할 수도 없어서 일단 그 조건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냥 넘어지는 것이다.
제발 너무 아프지는 말아야 하는데…….
의준은 대리점에서 자전거를 끌고 뒤뚱거리며 나왔다. 그곳 직원에게 멋지게 미소까지 지어 보이고서.
약간 비탈길. 대략 다섯 블록쯤 떨어진 곳 오른쪽에 병원이 있다. 의준은 자전거를 살짝 밀면서 가볍게 올라탔다. 휘청휘청. 출발부터 좀 위태했다. 이리저리 갈지자로 조금 내려가다 보니 그런대로 균형이 좀 잡히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전봇대 지나 어떤 식당 앞에서 입간판이 나타났다. 방향을 돌리려는데 제대로 되지 않는다. 아차, 몸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쓰러지려 한다. 의준은 한쪽 발을 내려 미끄러지듯이 해서 자전거를 멈춰세웠다.
휴우! 하마터면 입간판을 들이받을 뻔했다.
자전거에서 내려 숨을 고르다가 생각해 보니 브레이크를 잡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마음이 급해 발부터 내려서 땅을 짚은 것이다. 초보 중의 왕초보.
어떻든 의준은 반쯤 쓰러진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잠시 그냥 끌고 갔다. 타지도 않고 끌고 가는데도 자전거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게다가 왜 또 그렇게 무겁긴 한지. 한 아주머니가 지나가다가 쳐다본다. 의준은 그 눈길을 무시하고 그냥 앞으로 갔다.
다시 시도.
엇차! 의준은 자전거 위로 올라탔다. 비탈길이라 저절로 내려간다. 약간 위태하긴 했지만 그래도 좀 나아졌다. 속도가 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브레이크를 조금 잡으면서 길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 그렇게 조심조심. 아, 자전거 탈 때는 코앞을 보면 안 된다고 했지. 멀리 보라고 했다. 그 말이 생각나서 고개를 들고 저 앞을 바라보는데, 아니 언제 벌써 병원 근처까지 온 거야?
어랏! 꼬마 하나가 길 반대편에서 막 달려온다. 약간 떨어져 있어서 상관없겠다 싶었는데 왜 자전거가 자꾸 그쪽으로만 향하는 거지?
안 돼……. 핸들을 급하게 오른쪽으로 꺾었다. 어? 그런데 병원 바로 옆 주차장 입구에서 한 여자가 불쑥 튀어나온다. 여자가 깜짝 놀란다. 아차차! 핸들을 왼쪽으로 확 꺾었다. 그 바람에 자전거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꽈당탕탕!
의준은 자전거와 함께 콘크리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면서 몸은 자전거에서 튀어나가 병원 계단 입구의 커다란 돌 화분에 부딪혔다.
쿵!
그러는 순간에도 의준의 눈은 여자에게 가 있었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여자와 부딪히지 않은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머리가 화분에 부딪히면서 화분은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그 안의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길바닥으로 쏟아졌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의준은 그런 데다 신경 쓸 수 없었다. 아니, 신경 자체를 쓰지 못했다. 머리를 돌 화분에 강하게 부딪히는 순간 의식을 잃고 말았으니까.
이 사고에 대해 병원과 의준의 책임이 좀 애매했다. 돌 화분이 계단 아래에 놓여 있기는 했지만 병원 땅과 일반도로에 반반씩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준은 그런 것은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일단 환자로 병원에 입원한 것만으로도 의준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새빛정형외과의원.
바로 이 병원이 저격장소가 된 어린이놀이터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다.
의준은 뼈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돌 화분에 부딪힌 머리와 오른쪽 어깨,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고 쓸리고 하면서 다친 다리와 팔, 손바닥 등등이 무지 아팠다. 그 덕에 머리 CT, MRI 등 검사란 검사는 다 받았다.
의준이 머리와 어깨, 팔 등을 붕대와 압박보호대로 칭칭 동여맨 채 병실에 누워 있는데 중년의 수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따라 어린 간호조무사 한 명이 들어온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수간호사가 뒤를 돌아다보며 말을 했다.
“얘, 너 송이 데리고 와.”
“…….”
아직 멍한 상태로 있던 의준은 더욱 멍해졌다.
송이……?
수간호사가 침대 주변을 돌며 이것저것 둘러보고 의준에게도 다가와서 여기저기 살펴본다.
“괜찮으세요?”
괜찮겠냐, 지금 이 꼴이?
“괜찮습니다.”
“아프신 데는 없어요?”
원래대로라면 머리어깨무릎팔 무릎팔 안 아픈 데 없어야겠지만 진통제를 잔뜩 놔줬는지 지금 당장은 멀쩡했다. 머릿속만 어수선할 뿐. 게다가 바깥 날씨가 아주 추운 탓에 실내온도를 많이 올려놔서 그런지 공기가 답답한 느낌이었다.
에이, 모르겠다.
“여기저기 다 아파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게 대답할 걸 왜 물어봤니?
“보호자 분하고는 연락이 되셨어요?”
내가 보호자야. 환자 겸.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때 문이 열리고 좀 전에 나갔던 간호조무사가 다시 얼굴을 내밀고 들어온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다본다. 그 뒤를 따라 한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너 이리 와.”
수간호사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조금 전 나긋나긋하던 목소리하고는 완전 딴판이다.
“여기 와서 환자분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고맙다는 말도.”
의준은 자리에서 윗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현기증이 약간 일고 오른쪽 어깨가 묵지근하며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도 함께 올라왔다.
“아…….”
의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 괜찮으세요?”
수간호사가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로 의준을 돌아다보며 붙잡는다.
의준은 얼굴에는 인상을 쓰면서도 고개는 끄덕였다.
“가만히 누워서 안정해야 돼요.”
어머니나 큰누나 같은 목소리.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한다. 톤이 약간 높다.
“이리 오라니까!”
그런데 저 사람이 뭘 잘못한 거지?
여자가 쭈뼛쭈뼛 다가와서 의준 옆에 선다.
“죄송해요…….”
아니, 뭘 잘못했는데……? 의준은 다소 어리둥절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얘가 오늘이 근무 첫날이에요. 아직 병원생활이 서툴러서 그만…….”
알고 보니 의준과 부딪칠 뻔했던 여자란다. 그 여자가 이 병원 간호조무사였다. 게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간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고 시험치고 합격하고 여러 군데 이력서 내고 해서 간신히 이 병원에 근무하게 된 첫날 선배 심부름으로 잠깐 밖에 나갔다가 의준과 부딪칠 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송이였다. 성까지 합하면 한송이.
그러잖아도 여자는 겁 많게 생긴 눈에 분위기가 험해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생김새는 곱상하면서도 무척 여려 보였다.
한송이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웅얼거리듯 죄송하다고 띄엄띄엄 말을 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아직도 의준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준은 자신이 자전거를 잘못 운전해서 균형을 잃고 넘어진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핸들을 확 꺾은 것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사실 자전거를 제대로 타는 사람 같았으면 브레이크를 건다든지 재빨리 비껴간다든지 했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준이 자전거를 제대로 타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의준이 여자를 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리하게 방향을 틀다 넘어진 것으로 추측하는 것 같았다. 크게 말하면 남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의준이 자청해서 희생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것 참…….
오히려 의준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난감하게 되었다.
한송이는 부주의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의준 앞에서 한바탕 꾸지람까지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수간호사의 눈짓에 따라 방을 나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에 의하면, 병원에서는 혹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의준이 넘어져서 부딪친 화분이 놓여 있던 장소는 병원 부지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의준을 의인으로 만들면서까지 화분으로 초점이 모아지지 않게 한 것이었다. 이런 부분이 어떠하든 한송이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겠지. 고생 끝에 간신히 들어온 직장이니까.
어떻든 의준은 병원에서 극진히 치료해 주고 있었으니 큰 불만은 없었다. 사실 일부러 병원 앞에서 넘어져 엄살 부리며 들어오려고 했었지 않은가. 한송이라는 여자에 대해 찜찜하고 미안하긴 했지만 일단 병원에 들어온 것에 만족하고 다음 작전을 제대로 진행하는 것에 몰두하자고 의준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병원이 저격장소인 미끄럼틀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다. 그 미끄럼틀은 어린이놀이터의 가장 구석진 곳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병원의 뒷담과 아주 가까웠다. 병원은 5층짜리 자체 건물이었으며, 건물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돌아 들어가면 뒤쪽에 자그마한 주차장이 나온다. 바로 이 주차장 입구로 한송이가 나오다가 의준과 갑자기 마주친 것이다. 주차장은 주로 병원 의사들이 사용하며, 그 한쪽 구석에 커다란 쓰레기통이 두 개 세워져 있었고, 그 뒤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쓰지 않는 쪽문이 하나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쪽문에서 미끄럼틀까지는 불과 10미터도 안 된다.
계 실장은 이 사실을 미리 조사해 둔 뒤 병원 근처에 있는 상가건물 건축현장에서 일부러 떨어져 다쳤을 것이다. 물론 많이 다치지는 않았겠지. 의도적으로 떨어졌으니까. 그러나 엄청 많이 다친 것으로 꾸며서 이 정형외과에 입원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한밤중 병원 주차장 쪽문으로 빠져나가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미끄럼틀 꼭대기로 올라갔다가 다시 감쪽같이 돌아올 수 있었을 테니까. 게다가 계 실장은 고무줄 새총과 돌팔매질 솜씨가 탁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어린이놀이터 주변의 보안등이나 보안카메라도 망가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병원의 창이나 높은 곳에 숨어서 고무줄 총을 당기거나 돌멩이 같은 것을 집어던지면 되니까. 게다가 경찰에서는 놀이터에서 멀리 떨어진 보안카메라에 잡힌 흐릿한 영상을 공개하면서 몸집이 아주 건장했다고 발표했다. 신문이나 TV, 현상 포스터 등에 실린 사진을 보더라도 그렇게 여겨졌다. 그러나 계 실장의 몸은 그 정도로 좋은 체격이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일부러 옷을 두껍게 몇 벌씩 껴입어서 그렇게 보이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계 실장은 아마도 병원에서는 침대에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중한 환자 흉내를 냈을 것이다. 깁스를 했다든지 붕대를 칭칭 감아맸다든지 해서. 그렇게 하면 경찰이 미끄럼틀 주변 주민과 환자들을 조사할 때 감쪽같이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뒤 적당한 때에 퇴원해서 고시원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 뒤에도 한동안 환자 흉내를 내면서 주변을 속였을 테고.
의준은 자신이 세운 가설이 맞는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이 병원에 계 실장이 입원한 사실만 알아내면 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병원에 가서 그것을 물어봤다간 혹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일단 이곳에 입원한 뒤 어떤 방법으로든 확인해 보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어떻든 이제 병원에 들어오는 데는 성공했다. 너무 요란을 떨어서 의준 자신도 피해가 막심하긴 했지만.
의준이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다친 곳은 거의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를 돌 화분에 부딪혀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이 의준 자신은 물론 병원에서도 찜찜하게 여겨서 좀 더 두고 보자고 했다.
그러는 동안에 의준은 자연스럽게 계 실장에 대해 알아낼 방법을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환자기록이 컴퓨터에 들어가 있거나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보관되어 있을 텐데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준으로서는 상세한 내용은 알 필요 없다. 단지 계 실장이 입원했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이것은 계 실장이 일했으리라 여겨지는 공사장에 가서 물어볼 수도 있겠으나, 그곳은 현재 여러 문제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라서 그것도 쉽지 않았다.
기다려 보자. 방법이 생기겠지.
의준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한송이.
그동안 두어 번 멀찌감치 떨어져서 얼핏 보기는 했지만 그쪽에서 의준을 알아보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의준이 다가가서 말을 붙여보기도 어려웠고. 그러나 의준은 한송이를 볼 때마다 어딘지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보아하니 말도 별로 없이 시키는 일들을 부지런히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의준은 생각해 보았다. 혹 한송이를 잘 구슬려 보면 어떤 수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의준은 한송이의 근무시간, 동선, 자주 만나는 사람 등을 자세히 살폈다.
어느 날 의준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한송이가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무슨 서류인가를 들여다보며 걸어오고 있어서 의준을 알아차리지는 못한 것 같았다.
의준이 잘 됐다 싶어서 그쪽으로 다가가며 살짝 불렀다.
“아, 저기…….”
한송이가 발걸음을 멈칫하고 고개를 든다.
“뭣 좀 물어볼 게…….”
“얘, 송이야, 거기서 뭐해?”
의준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누군지 짐작이 가는 날카로운 말투.
“그거 빨리 가져와. 왜 그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중년의 그 수간호사다.
의준이 돌아다보았다. 수간호사가 미소 지으며 의준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다시 한송이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날카로운 표정으로.
“뭐 물어볼 거 있어요?” 수간호사는 다시 의준을 향해 말한다. “나한테 얘기하세요. 급한 건가요?”
“아, 아닙니다.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요.”
수간호사는 환한 얼굴로 대답한다. “원무과에 가서 물어보면 잘 알려줄 거예요.”
수간호사는 다시 한송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서 눈짓으로 빨리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서둘러 걸어갔다.
의준은 자기 앞을 지나가는 한송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송이는 의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는 눈을 내리깔고 그냥 지나쳐 갔다. 의준은 다소 머쓱해졌다. 그러나 어딘지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어쩐지 의준이 한송이에게 크게 잘못한 게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3
의준은 더 이상 병원에 있기가 갑갑했다. 한번 잠깐 의식을 잃었던 것 외엔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머리와 어깨를 심하게 부딪쳤다고는 해도 심각한 부상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그마저도 이제는 거의 나은 것 같았다. 팔다리 아팠던 것도 괜찮아졌다. 퇴원해도 상관없는 상태였고, 병원에서도 더 이상은 별 다른 치료 없이 그저 가끔 병실에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진통제나 주는 정도였다. 쉽게 말해서 의준은 나이롱 환자가 된 것이다.
이제는 병원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의준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계획했던 일을 서둘러야 했는데, 도무지 좋은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경솔하게 행동해서 자칫 의심이라도 받는 날엔 의준은 물론 계 실장까지 정체가 탄로 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들썩이게 할 초대형 뉴스가 되는 것이다. 단 한번의 털끝만 한 의심이라도 사면 그대로 끝이다. 아직도 저격범이 잡히지 않아 실오라기 같은 단서라도 찾아내려 놀이터 근처에는 경찰 관련 사람들이 늘 돌아다니고 있었다. 특히 놀이터에서 제일 가까운 이 병원은 주 타깃이 되어 있어서 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병원으로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여기저기 둘러보고 거리를 재보고 가상적인 상황을 만들어 연출도 해보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준은 지금까지 몸 사리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의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복도로 나가서 서성거렸다. 화장실 가는 척, 복도에서 걷기 운동하는 척, 답답하다며 병원 밖으로 나가는 척하며, 한송이에게는 눈길이 날카롭지만 의준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눈길을 보내는 중년의 그 수간호사와 우연히 만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멀리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본 것 외엔 그리 크지도 않은 병원에서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여기저기에 가서 서성이다가 의준은 답답한 마음에 옥상에나 올라가 보기로 했다. 의준이 계단통으로 나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살짝 담배냄새가 나며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져 멈춰섰다. 의준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그 냄새에 예민하다. 아마도 누군가가 5층 계단참의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그 틈으로 담배연기를 밖으로 내뿜고 있는 듯했다. 그렇더라도 연기의 극히 일부가 바람에 밀려서 안으로 들어오고 계단을 통해서 내려와 의준의 코에까지 자극을 준 것이다.
의준이 인상을 찡그리며 올려다보니 위쪽에서도 아래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살며시 창문 닫는 소리가 들린다. 병원 내에서는 금연이다. 그러나 겨울이라 밖에 나가기 귀찮았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발을 조심해서 내디디며 내려오는 느낌. 몰래 담배를 피우다 들켰다고 생각해서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의준은 가만히 있기가 좀 무안해서 옷을 약간 풀썩거리며 기척을 내면서 계단 위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몇 단을 올라가는데 계단참을 돌면서 모습을 나타낸 사람,
한송이.
담배를 피워……?
정말 뜻밖이었다.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무안해하는 그 표정.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송이는 눈을 내리뜨고 그림자처럼 내려와 의준을 지나쳐서 더 아래로 돌아서 내려갔다. 그리고는 뒤돌아 내려다보는 의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의준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는 한송이가 열었다 닫은 창문으로 가서 무의식적으로 창밖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건물 옆으로 난, 주차장으로 가는 골목길 쪽이다. 맞은편으로 3층짜리 건물 옥상이 보인다. 지저분하게 변한 눈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잡다한 것이 쌓여 있었다. 불붙은 담배를 끄지도 않고 급히 창밖으로 던졌을 텐데, 그러다가 불이라도 내면 어쩌려고 하면서 의준은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혹 연기가 나는 곳은 없는지 한동안 서서 창밖 아래쪽을 살폈다.
그리고 한송이가 옆으로 지나갈 때 담배 냄새 대신 소독약 냄새가 났던 것이 기억났다. 또한 그 냄새 속에 어딘지 애잔함이 들어 있었던 것도.
의준은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머릿속의 기억을. 그러나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가공의 기억들이었다.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된 기억들이었다. 복수의 기억들. 영화와 소설과 흘러가는 이야기들과, 그를 통해서 만물의 영장이 지닌 특권으로 변형시키고 왜곡하고 창작한 기억들. 의준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 의준이 기억하지 못하는 대한제국 말. 아니야, 그보다 더 옛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다산 선생이 살던 시대로. 그 당시의 그러나 역시 가공된 어느 소녀. 보금이. 동화에서 읽었다. 아니, 동화라기보다 아동소설 또는 소년소녀소설이라고 해야 옳겠다. 어린이들의 맑고 밝은 심성을 그린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닌 어둡고 처절한 한 아이의 삶. 가렴주구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리다 결국 민란을 일으킨 부모 세대들의 손에 이끌려 미래가 없는 산으로 도주하는 어린 보금이. 그 글은 의준이 어린이 때가 지난 청소년 시절 읽은 것이지만 어떤 동화나 어떤 레미제라블보다도 슬펐다. 참담하고 먹먹했었다. 그리고 오늘 담배 냄새와 소독약 냄새 속에서 의준은 그 보금이가 문득 생각난 것이다.
스무 살은 넘었겠지……. 한송이 말이다. 간호조무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고 어느 교육기관인가를 다니고 국가시험을 치르고 했을 것이다.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살아가려고 그런 길을 택했을 테지. 그리고 이 병원이 첫 직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출근 첫날 의준을 만났다. 아니, 마주쳤다. 사실 만나긴 만났지. 병실에서. 그리고 사과하고 야단맞고 하는 것을 의준은 보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의준은 그 첫날부터 한송이에게서 애잔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분노 같은 것도.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던 그 모습, 사과한답시고 더듬더듬 말을 하던 그 단어나 문장 속에서 억제된 항거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런 장면이 만들어질 뻔하다가 수간호사가 등장하는 바람에 날아갔지. 그때도 한송이는 눈을 내리뜨고 의준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 눈 끝이 생각나는 것일까? 사실은 얌전한 눈이다. 수간호사에게 야단맞고 지시받고 할 때도 그 눈은 크게 다른 느낌을 주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왜 의준의 기억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일까?
의준은 옥상으로 나가지 않고 그냥 계단 위쪽에 걸터앉았다. 계단통이 그다지 춥지 않고 오히려 병원 내부보다는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곳에 앉아 의준의 한 가지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 다른 먼 옛길로까지 옮겨가고 있었다.
“아니, 저 애는 왜 늘 저래?”
저 아래쪽, 아마 2층일 것이다. 계단통 문이 열리면서 투박한 여자 음성이 들려온다. 그 뒤를 이어 두어 명이 따라들어오는 듯 약간 어수선하다.
“도대체 말을 안 하잖아. 뭐가 불만이야?”
“놔둬. 저도 힘들어서 그렇겠지.”
“뭐가 힘들어. 우린 그런 시절 안 겪었어?”
“너 같으면 안 그렇겠니? 출근 첫날부터 시달리고 있는데…….”
“그런데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니? 그 애 잘못도 아니잖아.”
“그냥 모른 척해. 괜히 우리가 나대면 일이 복잡해져…….”
“그 남자도 좀 너무하는 것 같아.”
“그러게 말야. 이젠 좀 퇴원해 줘도 되잖아.”
“일부러 질질 끄는 거 아냐?”
“뻔하잖아. 보상금 뜯어내려는 거지.”
“송이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래. 아니면 병원에서 뜯어내려는 건가?”
“작년에 들어왔었던 그 인간 있잖아. 이번에도 또 그렇게 되는 거 아니니?”
“계명균? 아이고, 정말 그 인간…….”
“얘, 이번에 그 남자, 지난번 그 인간하고 똑같이 굴면 어떡하니……?”
“저 공사장에서도 엄청 뜯어냈겠지?”
“그렇진 않은 모양이야. 그 사람 잘못도 많았대. 괜히 위험한 데로만 골라서 다녔다나 봐.”
“일부러 그런 거지. 다 계획적으로 그런 거야.”
“뻔해.”
“그렇게 오래 꾀병 부리며 행패란 행패 다 부리다가 저번 봄에 왜 그렇게 갑자기 나간 거야, 그 인간?”
“모르지. 보험회사에서 뜯어낼 대로 다 뜯어낸 모양이지.”
“보험 없었다는데…….”
“얘, 관둬. 그 인간 얘기만 나와도 지긋지긋하다.”
“이번 남자도 그러면 어떡하니?”
“글쎄 말이야. 생긴 건 멀끔하더만…….”
“송이만 힘들어지는 거지 뭐…….”
의준은 계단에서 살그머니 빠져나가 곧바로 원무과로 가서 퇴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로 가서 미리 사온 조그만 봉투에 메모지 한 장을 집어넣었다. 그 다음 발송인 주소는 없이 이름만 ‘천사협회’로 적어서 새빛정형외과의원으로 보냈다. 수신인은 한송이.
봉투 속 메모지에는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참정루(巉頂樓)
천사에게 드립니다
그 봉투를 보내고서 의준은 가슴이 설렜다.
의준은 상층으로 올라가 고풍스럽고도 우아하게 꾸며진 한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여주인을 찾아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terra incognita | 미지의 영역.
콜럼버스 시대의 지도 가장자리에는
‘terra incognita’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곳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미개척지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환상의 땅이기도 했다.
[다음 화로 계속]